6월의 폭풍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2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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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키에프에서 부유한 은행가이자 유대인이었던 레온 보리소비피 네미롭스키의 딸로 태어납니다. 그녀의 가족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자 러시아 제국을 떠나 핀란드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요. 이후 네미롭스키는 소르본 대학에 진학하고 바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26년에 은행가인 미셸 엡스타인과 결혼하게 되는데요. 이로부터 3년 뒤인, 1929년에 그녀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준 '데이비드 골더'의 출판이 이뤄집니다. 이런 그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 최종적으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는데 실패합니다. 결국 프랑스에서 유대인이자 무국적자라는 굴레는 1942년에 비시 프랑스 정부에 고용된 경찰에 의해, "유대인 무국적자"라는 미명하에 체포되었고, 그 와중에 그녀는 자신의 딸들에게,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네미롭스키는 오를레앙에서 북동쪽으로 37km 떨어진, 비시 프랑스 정부의 강제 수용소였던 '피티비에 집합 수용소'로 끌려갔고, 1942년 7월 17일,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당시 폴란드의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에 이릅니다. 결국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지 한 달 후에, 그녀는 발진티푸스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인 미셸 엡스타인 역시, 1942년 11월 6일에 아우슈비츠에 보내졌고, 즉시 가스실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Suite Française' 시리즈의 작품으로 원제, "Tempete en juin"으로 지난 200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에 초도 번역되었습니다. 제가 읽은 이 책은 전면 개정판으로 2023년 6월, 번역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녀의 이 작품은 시리즈 미완성 논고로 작가 사후 최초로 프랑스 '르노도상'을 수상하게 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을 쓴 이렌 네미롭스키는 후에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만약 제가 당시 아우슈비츠에 있던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스스로 미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해 보지만 막상 떠오르는 생각은 한결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을 겁니다. 이런 그녀가 '프랑스 조곡'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이 장편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는데요. 작가 역시 당대를 살아가던 지식인이었던 만큼 나치 독일에 점령된 파리와 그 시대에 대한 나름의 고찰과 분석이 있었을 겁니다. 즉, 자신의 딸들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묻혀있던 이 원고에도 작가인 그녀의 통찰과 더불어, 여실히 그 시대의 자화상을 담고 있었는데요. 다만 이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 제가 읽었던 다른 작품들 가운데, 니콜 크라우스의 '그레이트 하우스'와 묘하게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로 여러 인물들이 특별한 상황과 맞물려, 그 와중에 겪게 되는 사회적 분절과 그들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과의 갈등과 대립은 여기에 등장하는 전쟁을 그저, '정치적 행위'라고 믿는 자들에게 큰 경종이 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이 히틀러가 집권 하기 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정치적 혼돈과 1940년 당시, 파리를 독일군에게 내준 '공화국 정부'의 무능이 뭔가 절묘히 매치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인 그녀도 당시 공화국 정부의 무능과 그로인한 여러 한심한 작태를 이 작품 여러 곳에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파리지앵'과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파리지앵'은 어떠한 의미 차이가 있는지 다소 불명확합니다만 폴란드가 히틀러에 의해 불법적으로 점령 당하는 것을 보고도 이 때의 프랑스 엘리트와 파리 시민들은 아마도 별다른 경각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과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 가족이 폴란드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가 나치 독일군의 수도 바르샤바 진군에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들리자마자 피난을 접게 되는 장면은 지금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프랑스조차 수도 파리가 독일군에 의해 점령 당했으니 앞선 영화에서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바르샤바와는 어떤 면에서는 꽤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미롭스키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몇몇 가족들은 영화 피아니스트의 슈필만 가족과는 달리,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즉시 피난 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인간 군상의 민낯이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작가인 네미롭스키도 일전에 읽었던 이디스 워튼 만큼이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해 거의 직접적인 냉소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 대해서도 '군중'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야만적인 자연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오로지 생존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을 그저 비이성적인 모습이라 에둘러 비난해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무능한 프랑스 정부에 대해 먼저 비판의 화살을 돌려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이처럼 개략적인 극 서사는 파리 점령 며칠 전을 시작점으로 이 유구한 도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쟁을 피해 무작정 피난 길에 오르고 난 며칠 뒤, 독일과 프랑스 간의 빠른 휴전이 성립되자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여정과 이 과정에서 이들이 '점령된 파리'에서 겪게 되는 일부 충격적 사건들이 다른 여러 인물들과 겹치면서 최종적으로 서사는 그렇게 마무리 됩니다.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여러 인물들은 여러 사용인들을 거느리며 파리에서 상당히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 도시의 유서 깊은 가문이기도 한 '페리캉' 가(家)를 꼽을 수 있겠는데요. 또한, 노골적인 배금주의자인 가브리엘 코르타와 샤를 랑줄레는 재산과 교양이 전무한 일반 계층을 극명하게 경멸하고 이런 지독한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피난 도중 스스로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내는데요. 앞선 이들과는 대비되는 인물들로, 이 전쟁에 참전했던 장마리가 예기치 않은 부상을 입고 경험하게 되는 평화적 일상과 후반부에 그를 둘러싼 다소 난감한 결말, 이와는 달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인물인 사제 필리프 페리캉은 작가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몇몇 전형적인 인물들과 절묘하게 대비되어 나타나는 서사의 한 틀이기도 합니다. 특히 종교와 그것을 일체의 삶으로 여기고 신의 목소리를 갈구했던 필리프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비참한 최후는 어쩌면 타인을 실질적으로 이해해 보려 하지 않았던 그의 운명을 나락으로 이끌게 된 것인데요. 이는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신의 부름이 우선 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읽힙니다. 이외에도 전쟁이라는 전무후무한 사태에 이르러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저 휩쓸려 나갈 수밖에 없는 그런 비참한 처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조국의 붕괴와 피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운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위베르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다 똑같은 개돼지라면 한결 이해하기 편할 것"이라는 독백은 이 전쟁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추락시키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가늠하게 만듭니다. 이런 가운데 작중의 도시인 크레상주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이름 모를 마을에 등장한 독일군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과 피난민들의 순진한 태도 역시, 전쟁의 진면목과 앞으로 프랑스에 드리울 운명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한 미래를 한편으론 예측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여기에 여러 화자들의 이야기 소재로 언급되는 1870년 보불전쟁과 1914년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은 그 성격과 양상이 완벽히 다른 전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작가가 사실상 복선을 두고 다룬 두 전쟁과 소설 속 인물들이 몸소 겪게 되는 이 인간성 상실의 2차 대전이 그 궤가 확연히 다른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는 작가가 지난 날 프랑스가 겪었던 과거 전쟁들이 여기에 등장하는 화자들을 통해, 이에 비하면 마치 그저 순진한 전쟁이었다 해석하는 것으로도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감상일 수도 있지만 결말에서 일부 인물들에게 보이는 '충격적인 귀결'과 평화의 시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이 사람들의 인식 자체의 흡사 비틀림과 냉소는 충분히 극의 중요한 맥락이기도 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맨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인 네미롭스키가 자신의 사랑하는 딸들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끝내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니, 제 마음 한구석이 저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럼에도 현재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저지른 '600만에 이르는 유대인 절멸'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저 유대인들의 거대한 음모로 치부하는 이자들의 민낯은 인간이 과연 이성적인 존재인가에 대해 스스로 끊임없이 자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작금의 세계에서 단순히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 정도로 국한시킬 수 없는 소위 '이성의 마비'와 다름없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의미를 드러내는 간접적인 나레이션을 통해, 드러나는 '개인의 자유', '내일의 정신'과 같은 본질적인 화두들은 작가의 진지한 고찰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그녀가 사실상 프랑스 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고, 끝내 유대인에 덧씌운 중상모략과 같은 역사적 폭력에 '개인의 삶'이 그야말로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내일의 정신'이 더 나아가 다음 세대에도 의미가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이에 대한 의구심을 저버릴 수가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우리의 정치가 과연 이때보다 진정으로 진보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때문에 부부는 공화국 정부를 불신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난 그게 좋아. 여자란 자고로 크림처럼 하얀 몸이 부드럽고 풍만하고 순진한 암송아지 같아야 해. 자주 마사지를 받아서 유연하고, 연지와 분 냄새가 밴 나이든 여배우의 피부, 자네들도 알지?"

돈 많고 유명한 사람들이 판단력은 짐승들만도 못하다니까! 짐승들도 위험은 바로 알아차리는데!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결단력 없는 사람들과 정신 나간 사람들이 아직 파리에 남아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불안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투지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슬픔이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짐승, 그물에 갖혀 어부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걸 바라보는 물고기의 눈에 깃든 것과 같은.

교회 안에서는 이중적인 삶이, 하루하루 반복되는 평온한 일상과 묘하게 열에 들뜬 또 다른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화장을 짙게 하고는 장교들로 가득한 트럭을 얻어 타고 시시덕거리던 여자들, 너무나 만연한 이기주의, 비겁함, 야만적이고 아무 의미도 없는 잔인함이 위베르를 구역질 나게 했다.

겨우 닷새 만에 프랑스의 절반을 삼켜버린 독일군 기계화 부대는 내일이면 틀림없이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의 국경에 도달할 것이다.

샤를 랑줄레는 자신을 끌어들여서 공감을 얻으며 즐거워하려 했던 피란민의 의도를 꺾어놓은 것에서 변태적인 쾌감을 느꼈다. 더럽고 상스러운 종자들은 자신들이 인간적인 연민을 느낀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것은 멜로드라마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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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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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1948년, 영국 햄프셔주 올더숏에서 부친인 데이비드 매큐언과 모친인 로즈 릴리언 바이올렛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드물게도 군에서 소령까지 올라간 군인이었습니다. 이언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싱가포르, 독일,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보냈는데, 아마도 그의 부친의 잦은 근무지 변경으로 인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결국 그가 12살이 되던 해가 되어서야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언은 서퍽의 기숙학교인 울브스톤 홀 스쿨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하고, 1970년에는 서섹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그리고 노리치에 위치한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일종의 자신의 창작물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의 첫 출판 작품은 1975년에 출간한 '첫 사랑 그리고 마지막 의식 First Love, Last Rites'로 1976년에 이 작품으로 '서머셋 몸'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초기에 작품 활동이 주로 어두운 인간의 내면과 그런 의식의 작용 등을 주제로 어둡고 불안정한 글을 쓰기도 했는데요. 이후 그는 좀 더 폭넓은 독자층에 다가가기 위해, 보편적인 작품 쪽으로 방향을 틀기에 이르는데요. 결국 1998년에 '암스테르담 Amsterdam'으로 부커상을 수상하고, 2005년에는 '새터데이 Saturday'로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합니다. 그는 평생의 작품 활동 가운데, 6번이나 부커 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는데요. 이런 문학에 대한 기여로 그는 2000년에 "대영 제국 최고 훈장"을 수여 받습니다. 또한 문학 활동과는 다른 정치적 활동 차원에서 2011년에 그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예루살렘 상"을 수상하고, 2012년에는 서섹스 대학이 수여하는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바탕으로 50주년 기념 메달을 수여합니다. 특히 이언은 스스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서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견해"로 말미암아 이슬람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기에 이르는데요. 이와 관련해, 여러 오해와 억측을 불러일으키도 하였습니다. 또한 2016년 6월 영국의 유럽 연합 (EU) 탈퇴 여부를 붇는 국민 투표에 관련해서도 가디언지에 상당히 비판적인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그는 총 17편에 이르는 장편과 몇 가지 단편 작품을 출간했고, 이에 지금도 열성적인 집필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서평을 쓸 이 장편은 원제, "The Innocent"로 지난 199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먼저 고백하자면, 이언 매큐언의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제 예측을 벗어난 전개로 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는데요. 이 장편의 주인공인 레너드 마넘과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여주인공이자 이혼녀인 마리아 에크도르프와의 관계 설정 전반과 그로인한 서사적 전개가 제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결말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에서 2차 대전 전후, 혼란스런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파견되었던 레너드와 그가 앞으로 미국 정보 당국과 관련된 중대한 일을 맡게 됨으로써, 익히 예견할 수 있는 소위 존 르 카레식의 '스파이 물'로 여겨졌지만 이런 저의 예측은 놀랍게도 완벽히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저널리스트인 하랄트 얘너가 언급했듯, 2차 대전 종전 직후의 베를린은 그야말로 비극과 야만의 도시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에 매큐언도 여주인공인 마리아를 내세워, 베를린의 일반 여성들을 향해 소련군이 자행한 그야말로 참혹한 강간의 증거를 마찬가지로 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먼저 러시아로 진군한 나치 독일의 군대가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는 철저한 군사 작전으로, 당시 러시아인들이 겪은 가혹한 전쟁 참상에 따른 분노와 복수가 바로 소련군에 의해, 다른 장소인 바로 이곳 베를린에서 자행된 것이기도 한 데요. 물론 저는 이것을 독일인들의 마땅한 '죄과'라고 가볍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앞선 얘너의 언급대로, 200만의 독일 여성들 가운데 이를 반쯤 체념하며 받아들였다는 실증된 사료는 상당히 중격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역시 이러한 '죄의 메커니즘'은 쉽사리 화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종전 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발빠른 대응과 유사하게 이 작품에서도 미국이 주도하여, 동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과 이를 뒷받침하는 동독 당국의 민감한 정보를 탈취하고자 일련의 비밀 작전이 수행됩니다. 마침 버밍엄 대학에서 전자 공학을 전공한 레너드가 이런 연유로 극비리에 건설된 시설에서 '도청 작전'에 임하게 되는데요. 이런 과정에서 얽히게 되는 미국 측 정부 요원인 밥 글래스와의 후에 드러나게 될 지독하게 얽힌 인연은 이 극을 이끄는 주요 복선이자, 대치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점은 여러 복선 가운데, 비로소 극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레너드는 마치 사회 초년생처럼, 인생 전반의 미흡한 경험을 안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어리숙한 인물의 전형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만의 세계, 비좁은 인간 관계와 더불어 연애 경험까지 전무한, 우리가 20대 초반에 많은 시행착오로 '청춘의 시기'를 힘겹게 이어나간 것과 비견될 정도로 이 작품의 구조적인 면에서는 평범함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특한 성격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여주인공인 마리아는 과거 대전의 한복판에서 여성이 홀로 베를린에서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한 결혼을 시작해, 남편과 끊임없는 불화를 겪게 되는데요. 더욱이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주하게 되는 그 시점에서 아주 광범위하고 철저한 '강간'의 폭력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무정부의 상황, 인간이라면 마땅히 보장 받아야 하는 스스로의 안위와 안전을 이런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 자신의 힘 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기에, 이 시점에서 아무런 권력도 주어지지 않은 독일인 남성이 아닌 과거 연합국의 일원이자, 자유 세계의 구성원인 레너드와 그녀는 극적인 조우를 겪게 됩니다. 물론 승전국 남성과 패전국 여성이라는 이분법 뿐만 아니라, 레너드는 마리아가 겪은 그 지옥과도 같은 기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합니다. 여자의 본성과 관계 전반에 대해 미숙한 레너드가 그저 본능적인 정복욕과 비틀린 감정에 휩싸여 그녀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긴장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매큐언은 우리에게 사랑은 쟁취하는 것, 혹은 마땅히 자신의 것은 스스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마리아의 입을 통해, 이를 우리에게 여실히 알리고 있기도 한 데요. 이는 참혹한 전쟁을 몸소 경험하지 못한 극적인 고통의 사람과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과 그런 나날의 더해짐이 단순히 어긋나고 부서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어쩌면 그렇게 미루어 짐작해 볼 수도 있겠는데요. 이는 억지로 주어진 평화로운 시대의 여느 평범한 관계가 완벽히 상반된 거침없는 왜곡과 잔인한 자기 합리화에 따른 본능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어쩌면 매큐언은 우리에게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인간으로서 겪을 필요가 없는 잔인한 전쟁의 본성을 체험한 한 인간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지난할 지는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한 인간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본성으로 철저히 변질될 수도 있겠습니다. 즉 이제 나를 지켜내기 위해 무엇이든 이용하겠다는 이기적 다짐과 더불어 한편으론 모든 걸 체념하게 되는 자포자기하는 마음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마리아가 극 후반부에 레너드를 향해, "런던에 가서 다 말하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다."는 자기 고백은 사건의 이면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진실을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레너드에게 있어 전쟁의 기억 만큼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스스로 인생의 방향을 틀게 만드는 본질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 되지 못한 자기 충족적인 숨겨진 관계에 의해서 말이죠. 저는 마리아의 끔찍한 자기 변명과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일종의 합리화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다시 한 번, 이 작품을 곱씹고 나서, 진정한 위안처를 찾고자 하는 일전의 전쟁의 상흔을 몸소 겪은 여인의 이 같은 간절한 바람이 어쩌면 최근에 전쟁을 겪은 시리아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평범한 여인들의 이뤄질 수 없는 희망과도 맞닿아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작품 증간에 반전의 설정으로 등장하는 레너드와 마리아의 간략한 약혼과 거기에 등장한 밥 글래스의 행동 자체는 정말 이중적이고 역겨울 정도였는데요. (밥 글래스에 대한 내용 전반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을 자제하겠습니다.) 이것을 영국인인 작가가 바라보는 미국인의 본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마리아에게는 뒤이어 이어지는 인생의 평온한 안식처가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면서 작가가 마리아가 결코 짓밟힌 적이 없는 여성이었다는 서사는 그만큼 의미심장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디데이 즉,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한 레너드의 부친이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자, 독일을 누구보다 증오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나레이션은 어쩌면 레너드와 마리아의 결말을 이미 예견한 것과 다름없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는 전쟁을 거친 그 시기의 본질을 진실로 유념하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레너드는 모욕에 대처할 마땅한 방법을 미처 준비해두지 못했다. 성인이 된 후로 모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45년에 이리 진군해 들어왔을 때 짐승처럼 굴었나봐요. 진짜 짐승이요. 이 여자들은 그러니까, 자기네 언니와 엄마나 심지어 망할 할멈까지 강간당하고 찔려 죽었으니까. 아니면 건너건너라도 그런 사람을 아니까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거죠."

"낮에 한번 와보세요.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폭격을 당하지 않은 성한 나무들은 공수작전 동안 베를린 주민들이 난방용으로 다 태워버렸지요. 히틀러는 한때 이곳을 동서의 축이라고 불렀습니다."

파괴된 도시를 보며 느꼈던 처음의 우쭐함은 돌이켜 생각하니 유치하고 혐오스럽기만 했다.

1955년에 레너드 같은 배경과 품성의 남자가 스물여섯이 다 되어가도록 성 경험이 없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애정을 가장해 자기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이 두려움은. 아니면 성적 친밀감의 외피 아래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악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아버지가 다니는 동네 술집 단골 중 바르샤바조약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를린에서는 바르샤바조약 비준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는데 말이다.

편안한 그리움과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바로 이 시기에 그는 마리아에게 꼭 청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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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코 카쿠타니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1995년 1월 9일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습니다. 특히 그녀는 예일 대학의 저명한 수학자인 시즈오 카쿠타니의 무남독녀이기도 합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녀의 부친은 일본에서 태어났고 모친은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자란 일본계 미국인인 2세대입니다. 그녀는 1976년에 예일대에서 영문학 학사를 마침과 동시에 워싱턴 포스트에 기자로 입사하게 됩니다. 이후 1979년부터는 뉴욕 타임즈로 자리를 옮겨, 2017년까지 언론계의 경력을 쌓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치코 카쿠타니는 1983년부터 뉴욕 타임즈 도서 평론으로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되고, 1998년에는 이러한 공로로 퓰리처 상을 수상합니다. 그녀는 대중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은 평론가로 유명한 작가의 책에도 날카로운 평론으로 본의 아니게 악명을 얻기도 하는데요. 2017년 뉴욕 타임즈의 수석 평론가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이듬해인 2018년에 출간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비판하는 책인, "진실의 죽음 : 트럼프 시대의 거짓에 대한 노트 The Death of Truth: Notes on Falsehood in the Age of Trump"로 평단의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서평을 쓰게 될 그녀의 새로운 글 역시,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데요. 연말의 미국 대선을 앞둔 시점에 그녀의 이 시론집은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경종을 우리에게 일목요연하게 전해줄 것으로 판단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The Great Wave : The Era of Radical Discruption and the Rise of the Outsider"로 올해인 202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미치코 카쿠타니는 2019년 이후의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분열과 충격의 시대를 이른바 VUCA로 정의되는 단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이는 변동성 volatility, 불확실성 uncertainty, 복잡성 complexity, 모호성 ambiguity의 영문 앞자로 만든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러한 시대가 초래된 근본적 원인을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그로인한 정치 전반의 변질과 추락으로 해석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논증되는 대부분의 사례와 실질적 내용들은 극단적 포퓰리스트인 트럼프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반이민주의, 반민주주의에 따른 정치적 붕괴에 초점을 맞추고, 그렇다면 우리 왜 이러한 시대를 직면하게 되었는지를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다만, 구조적인 측면에서 이 글의 문제점은 저자가 큰 명성을 얻은 서평가 답게 작가, 정치가, 사회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등 여러 지식인들의 고유한 주장과 사상 등을 너무 많이 언급하고 있어, 글을 읽는 내내 다소 장황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3장은 앞선 측면에서 글 전개에 따라 인용 구절이 많아 그만큼 산만해 보였는데요. 따라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된 문장들이 조금 과도한 측면이 있어, 독자들에 따라 일독 전반에 다소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서두인 1장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도널드 트럼프라는 아웃사이더가 미국 정치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더 나아가 워싱턴의 주인이 된 그 시점부터, 이미 미국은 저자의 말마따나 "상식이 실종된 사회"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극명한 현상에 대한 저자의 여러 비판적 분석에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미국의 주요 정치인들, 특히 공화당 정치인들 대부분이 민주주의의 대한 헌신을 사실상 헌신짝 버리듯 내버렸다는 여러 증거였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공화당의 자진 투항에 있어, 전무후무한 폭거(2021년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국 의회 난입을 포함한)에 대해 공화당 정치인들 누구도 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점은 실로 미국 민주주의에 있어서 너무나 굴욕적이고 참담한 사건이라 여겨집니다. 이렇게 연이어 4장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에 의한 앞선 의회 점거 폭거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낸 공화당 의원들이 거의 전무했으며, 그나마 이 사건에 목소리를 낸 리즈 체니 의원이 어이가 없게도 빠르게 공화당 지도부에서 쫓겨났으며, 2022년 고향인 와이오밍주에서 열린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저자는 특별히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공화당 다수 의원들이 이에 대해 침묵했으며,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인의 의무와 책임을 내던진 것과 다름 아닌 것인데요. 이와 관련된 상반된 사례로 저자는 4장에서, 과거 닉슨 대통령의 워터 게이트 사건을 예로 들고 있었습니다. "1974년 워터 게이트 사건이 터졌을 때, 당시 상원 의원이었던 베리 골드워터는 공화당 상원의원 대표단을 이끌고 백악관으로 가서 리처드 닉슨에게 자신들이 더 이상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닉슨은 다음 날 사임했다"고 언급합니다. 과거의 공화당 의원들은 최소한의 금도와 견식이 있었으나, 지금의 공화당 의원들은 여러 정치학자들의 비판대로 사실상 자신들의 간판을 극우로 덧칠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참고로 이 리즈 체니 의원은 바로 딕 체니 전 부통령의 딸이기도 합니다.


저자의 일관된 논증 뿐만 아니라 저 역시도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에 대해 큰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를 향해 분명하게,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로 규정하고, 이런 정치의 후퇴를 과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던 구시대적 중앙 집권적 폭력을 거부했던 오래된 미국의 유산을 뿌리 채 흔드는 '반동'으로 지목하고 있었는데요. 굳이 정치학을 여기서 언급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민주주의적 개방성과 다원주의적 맥락 그리고 이를 헌법이 수호하는 일련의 견고한 체계에서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데, 트럼프와 같은 자기 이익에 밝은, 극단적 포퓰리스트가 과연 이러한 대의에 화답할 지는 모두가 알다시피 지극히 회의적이라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3장과 4장의 논증으로 거듭 밝혀지는, 미국 문화의 저항의식, 개방성, 그리고 다른 의미로서 시민들간의 유대가 나날이 예전만도 못한 상황으로 추락하고 있다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과거에 대한 회귀가 무조건적인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보다 못한 현실에 대한 무감각과 체념이 어쩌면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시점에서 현재 미국 정치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지식인들이 많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결국, 트럼프가 미국내 '증오와 혐오의 정치'를 이끄는, 마치 성서의 요한묵시록에서 그려지는 '지옥의 기수'라고도 여겨지는데요. 특히 우경화 된 공화당과 그 맨 앞에 있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반영웅(저자의 수사를 흉내낸다면 말이죠)과 그를 따르는 맹목적인 지지자들, 여기에 티파티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상대 진영을 지지하는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격멸'이라는 단어까지 언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저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많은 극단적 시민들이 오히려 종교보다도 더 진실되고 신뢰의 말을 건넨다고 확신하는 가히 믿겨지지 않은 일례들을 폭로하고 있는데요. 이런 현상의 본질적인 맥락은 분명합니다. 또한 저자인 카쿠타니의 말마따나, 미국내 극단적 인종주의자들인 KKK와 같은 자들이 자신들의 상징으로 나치의 '하켄 크로이츠'를 미디어와 다수 시민들에게 아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는 점도 심각한 문제로 보여집니다. 이런 극단주의자들의 범람이 과연 미국 민주주의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 거의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인문주의자이기도 한 저자가 독서와 자기 성찰이 더욱 멀어지고 있는 세태와, 그와 동시에 인간의 저열한 측면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부채질하는 극단적 인터넷 매체를 포함한 왜곡된 커뮤니티 문화에 대해 지극히 경고의 시각을 본내고 있는 점 역시, 충분히 공감이 가는 대목입니다. 즉. 앞선 내용을 보충하는 측면에서 저자는 2장의 전반적 진술을 통해, "혁신적인 디지털 기술들이 새로운 기술로 사람들을 연결했지만 또한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정파 간 혐오의 매개체가 되었던 점"을 분명히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의 역사처럼, 이들의 민주주의 자체는 세월에 따라 켜켜이 쌓아올린, 그 유산이 엘리트들을 포함한 미국인들 전반의 귀한 정치적 공감대가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4장 이후의 논증과 더불어, 이런 민주주의의 역사 전반을 부정하는 도널드 트럼프와 그의 모체가 된 공화당, 그리고 극단적인 그의 지지자들이 한 몸과 같이 움직이는 실정에서, 트럼프가 "민주주의 제도와 법치주의를 무시하고 선동적인 수사법을 사용하자, 진보주의자뿐 아니라 많은 중도파, 무당층, 그리고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들도 여실히 동요"했고, 지난 선거에서 트럼프가 스스로 결연하게 '부정 선거'임을 밝히자마자 공화당 정치인들 대부분이 이에 동조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요. 만약 건전한 사회라면 그곳의 시민들 대부분이 반민주적인 정치인을 향해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선연한 이익과 사실을 대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다수의 왜곡된 정보들에 따라 현실은 그런 정치적 이상과 상당히 멀어진 것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그동안 끊임없이 언급했던 '정치적 변별력의 결여'를 언급하기에 앞서, 마치 건강한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와도 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증오와 혐오의 정치라는 병증에 한껏 몸을 맡기고 있는 상황은 저자가 지극히 우려하는 정치적 미래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고학력의 사회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결국 미국내의 문화적 흐름과 기술 수용에 관한 방향성, 이러한 맥락에서 더욱 변질되고 있는 미국 정치 전반은 글에서 경고하는 바대로, 그 위험 수치가 마냥 목도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미국 대선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견실한 정치력을 발휘해, 큰 파란을 일으켜 줄 기대와 희망의 끈을 아직은 놓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비관적으로 논증해 왔던 저자의 글과는 확연하게 상반된 기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처럼 저자의 신랄한 발언과 그 증거 자료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국이라는 나라가 역사로서 쌓아올린 민주적 이상과 체제의 견고함. 더불어 문화와 시민의 선명성을 통해, 위대한 나라가 되었던 점을 그들 스스로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물론 타고난 시대의 암울함은 여전하지만 후반부에 인용되는 나오미 클라인의 희망과 마찬가지로 저자가 바라는 '정치의 올바른 회귀 가능성'의 모멘텀이 다시금 미국 정치에서 발현되기를 오직 바랄 뿐입니다. 끝으로 미국의 위대함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데에 있다는 토크빌의 명철한 분석과 함께, 저 역시, 극단주의와 인종주의의 망령이 하루 빨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적지않은 정보들 가운데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지난 2012년에 스티브 배넌이 브라이트바트 뉴스 Breitbart News를 인수했다는 점이었는데요. 누구보다 신자유주의의 기수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헨리 키신저라면, 이 스티브 배넌은 허무적 극단주의의 기수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인터넷의 민주화 효과는 기후 활동가부터 백인 민족주의자,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가 되려는 이들까지 온갖 부류의 아웃사이더가 전통적인 게이트키퍼를 우회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남부 주들은 재건 수정헌법 (1865년과 1870년 사이에 채택되어 비준된 제13조, 제14조, 제15조 수정헌법)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보장된 권리를 철회했다. 이들 주는 연방군이 떠나자 짐 크로 법을 통과시켜 인두세와 다른 유권자 탄압 전략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분리하고 선거권을 빼앗았다.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자유시장 근본주의 및 관련 시상들을 장려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동되고 있던 뉴딜 정책의 보호무역주의 및 케인스의 경제 정책을 되돌리면서 시작되었다.

추산에 따르면 트럼프는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30,583건의 거짓 주장 또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을 했으나, 공화당에 투표한 사람들은 트럼프가 종교 지도자나 자기 가족보다 더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줄 것이라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두 주요 정당 가운데 하나가 가장 극단적인 일원들의 견해를 수용하고 전 대통령인 트럼프가 평화로운 권력 이양이라는 민주 통치의 초석을 뒤엎으려 하는데도 그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기 전의 일이었다.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한 반대, 지나치게 권한을 부여받은 여성과 남성다움이 부족한 남성에 대한 반대, 이민자에 대한 반대, 사회 정의 운동에 대한 반대, 세계화에 대한 반대, 진보에 대한 반대, 어떤 사람들은 현재 미국의 모든 문제가 진보주의자 탓이라고 본다.

사실 지난 10년 동안 가장 변함없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가 여전히 취약하면서 귀중하고 한 번의 선거나 투표로 확보될 수 없으며 지칠줄 모르고 계속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2025년에 재임할 경우 그의 측근들은 행정권을 확대해 연방통신위원회와 연방거래위원회 같은 독립된 기관을 대통령 통제 아래에 두고 자금 압류 관행(즉 의회가 책정한 자금의 지출을 거부하는 것이다)을 부활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요컨대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견제와 균형을 위한 시스템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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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과 신자유주의 - 새로운 정치 질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Philos 시리즈 28
게리 거스틀 지음, 홍기빈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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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거스틀은 미국의 역사학자로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폴 멜론 미국사 교수입니다. 그는 1976년에 브라운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1982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거스틀은 미국 내에 손꼽히는 '뉴딜 체제' 연구가로, 여기에 인종과 이민 및 시민권의 역사적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2017년에 학자로서는 영예로운 자리인 영국의 인문학 및 사회 과학 분야의 국립 아카데미 회원 (FBA)에 입회하였고, 그 이전인 2005년에는 미국 역사가 협회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20세기 미국 역사에 탁월한 연구 성과를 달성한 그는 캐나다, 영국, 벨기에, 독일, 네덜란드, 브라질, 일본, 한국 등지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2007년 5월에는 미국 의회의 하원 이미 소위원회에 출석하여 미국의 이민 문제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이외에 그의 저술 활동 중, 2001년에 출간한, '미국의 시련 American Crucible'은 미국 이민과 민족 역사에 뛰어난 성과를 거둔 논저로, 2001년 테오도르 살루토스 기념 도서상을 수상했고, 동시에 NPR 라디오 프로그램의 문학평론가이자 서평가인 모린 코리건이 선정한 '2008년 변혁의 새해를 위한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Rise and Fall of the Neoliberal Order"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거스틀의 이 논저는 지난 1989년에 공저자로 참여한, "뉴딜 질서의 부상과 종말 The Rise and Fall of the New Deal Order"의 후속글로 볼 수 있을 텐데요. 지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뉴딜 체제의 사실상 종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대로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체제'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대략적인 흐름에서 저자는 같은 시기의 미국 정치와 각 선거로 등장한 행정부와 신자유주의와의 관계를 살펴보고, 이것이 미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구조적으로 어떠한 양상의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아주 면밀하게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그 자체는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며, 그저 좌파들이 어떤 허상에 집요하게 달려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그동안 일관된 주장이었는데요. 이를테면 신자유주의는 실체가 없다는 식의 논법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이 논저는 현실적인 증거와 명백한 역사적 반론을 꾹꾹 눌러 담은 역작 그 자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 저자인 거스틀이 글 서두에서 언급하는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18세기에 비롯된 전통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1920년대 세계 대공황 이후, 당시 미 연방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국가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뉴딜 체제의 자유주의'와 대립되는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신자유주의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만들었지만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아마도 '반루스벨트주의'가 그 배경에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저 역시, 데이빗 코츠와 리민치의 논저를 접하기 전까지는 신자유주의를 그저 금융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습일 뿐이라고 이해했는데요. (특히 역자인 홍기빈씨가 설명한 신유주의의 대한 유튜브 영상도 개인적으로 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거스틀은 신자유주의를 매개로, 미국 현대사를 시대순의 비판적 방식으로 조망하며, 초기 신자유주의의 폭발적인 이행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충격과 더불어 파편화 된 시민들의 삶, 더 나아가 헌법에서 보장된 시민권을 부정하는 듯한 같은 시민들인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적 차별과 그런 인식까지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일반적인 미국인이라면 결코 표면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회의 음울한 측면일 텐데요. 특히 신자유주의가 기존의 기득권 계층과 엘리트 지배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미국 사회에 백인 사회와 흑인 공동체를 분리하는 노골적인 인종주의에도 관여했다 볼 수 있습니다. 이 당시 미국 사회는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이념적으로 따로 놓고 보기에는 서로 간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했고, 특히 사회의 보수화는 개인 스스로의 삶의 통제, 그리고 더이상 제한이 없는 자유에 대한 맹종이 우습게도 정치적인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의 '시장 자유'와도 맞물려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이 점은 무엇보다 공화당의 기본적인 민주주의의 인식을 거의 내부에서 분절시켜 버리는 극단화된 측면의 인종 혐오의 현상으로 점철되어 나타났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실패로 인해, 그동안 투입되었던 막대한 전비가 미국 사회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물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결국 기존의 사회 보장을 근간으로 하였던 뉴딜 체제의 전반적인 재검토를 내부에서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여기에 본질적 변화에 따른 새로운 아이디어(신자유주의)의 구축에 있어, 무엇보다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의 이름 만큼은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저자인 거스틀은 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설계한 것은 분명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점을 먼저 밝히고 있었는데요.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이 로널드 레이건을 마음 깊은 곳에서 흠모하고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레이건 집권 말기에 '이란-콘트라 사건'의 관련자들에게 대통령이 직접 사면을 내렸던 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특히 미 CIA의 소위 '미국의 앞마당'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대한 불법적인 작전과 임의적으로 자행된 정치 공작이 기승을 부렸던 소위 '냉전 투쟁의 시대'였는데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극단적인 대결 구도는 고도화 된 핵무기 각축 만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레이건 정부 시기에, 정부의 요직이나 '작은 정부'에 몰두한 인물들이 거의 '신빅토리아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이었다는 점은 저에게는 생소한 부분이었는데요. 이들은 전통적 복음주의와 연계하여, 시민들이 도덕적으로 규율을 갖출 필요가 있으며, 이는 '자기 기율과 자기통제'가 핵심인 일종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아마도 앵글로 색슨의 후손인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기원한 왕국의 주요한 도덕적 가르침을 숭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측면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아마도 제 생각으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각자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의 책임이며, 여기에 사회가 끼어들 틈은 없다"는 측면의 유명한 구절이 바로 이 철지난 도덕주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강력하게 상승하게 된 원인은 미 공화당 내의 신빅토리아주의로 대변되는 일종의 도덕 규율이자 철저한 사적 책임론이 당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익히 알다시피. 원래 로널드 레이건은 한때 진보적인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지성적으로 탁월한 견해를 바탕으로 남을 설득하는 이성적 달변가는 결코 아니었는데요. 이 글 4장에서 여실히 분석되는 바와 같이, 레이건은 누구보다 "반정부적,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밀어붙이는 대에 보수적인 인종적, 종교적 분노를 끌어오는 방법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저자는 이를 언급하며, 특별히, "대단한 위업"이라고 첨언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단순히 국가 차원의 검증이 필요한 일종의 사회 지배적 신념 체계를 그저 자기 확신에 빠진 본능적 인물이 이를 뒷받침 했던 것으로도 읽힙니다. 더욱이 미국 사회에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을 더욱 고착화 시키게 되었던 주된 원인인, "대통령과 여당이 노동자들의 힘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는 단순한 진술 자체는 공화당과 더 나아가 현재의 티파티의 극단주의자들이 레이건의 크나큰 정치적 업적을 누구보다 칭송하기에 이릅니다. 다수 시민들의 평범한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자본의 영향력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게 만든 이러한 비상 조치들을 그저 그리스 시대의 우상에 대한 전유물적인 사고가 아니라, 이미 현실적으로 역사가 면밀히 고려하고 분석해 봤는데도 불구하고 레이건의 실책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정치 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현실은 분명 암울한 장면으로 여겨집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소위 '아메리칸 드림'이 지금에 있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보기도 하는데요. 뿐만 아니라, 뉴딜 체제를 거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연방 대법원의 노골적인 기득권화, 그리고 헌법의 자본주의적 활동 보장에 대한 일정 부분의 인식을 넘어, 시민의 기본 권리에 대한 법률 시스템이 헌법 원전주의라는 큰 변화를 맞아, 리처드 엡스타인의 분석대로, 이러한 사회적 변질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크나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의 정치적 양분화는 물론이거니와 여성과 소수 인종의 권리를 사실상 제한하기에 이르렀다고 진술되는데요. 즉,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사회를 헌법적인 맥락 차원에서 아주 다른 양상으로 변질시킨 것(다수의 이익이라는 측면에 가히 위배되는)이 오로지 신자유주의 때문인지 아니면 레이건 행정부 자체의 태생적인 문제인지는 불확실해 보이는데요. 다만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이러한 이행이 사회를 더 한층 혼란과 심각한 갈등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입니다.

이후 소련의 몰락과 그 궤를 같이한 조지 H. W. 정부는 국제 사회에 미국의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행정부였습니다. 물론 군사적 신자유주의라는 측면에서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고 막대한 연방 정부 예산을 국방과 관련된 기업들에게 크나큰 수혜로 안기기도 했습닏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일부 요소가 비대해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국방부를 통해 지급되는 막대한 이익 자체에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시기 전반을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5장에서 '승리의 개가'라는 단어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이 시기는 고르바초프의 과감한 결단과 그 다운 퇴장, 그리고 그로 인한 체제의 균열로 소련의 붕괴가 마무리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런 과정 자체를 자유 세계의 승리로 규정했고, 이 시기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등한시 하기에 이르렀는데요. 더욱이 여기에 등장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공산주의의 몰락은 일상 생활에 실천하고 이식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대안들을 현실 공간에서 제거했다"는 해석으로 이 거대한 승리의 본질을 우리는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지 H.W. 부시는 이라크 전쟁과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하는 듯, 재선에 실패했고 그 후임으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빌 클린턴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논의된 빌 클린턴과 그의 행정부에 대한 저자의 여러 분석 가운데, 무엇보다 동의할 수 있었던 부분은, 제가 이미 인지하고 있던 딘 베이커의 주장대로, 클린턴이 미국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리버럴'가운데, 누구보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한 정치인이었다는 진술이었습니다. 특히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유산을 기억하고 이를 인정하는 민주당 정치인 가운데, 누구보다 껍데기만 남은 뉴딜 체제의 해체를 불러 일으킨 정치인이 바로 클린턴이었습니다. 민주당에게 있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정치적 유산'은 실로 중요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반대의 공화당 정치인들이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언급하면 쉽게 이를 갈 듯, 빌 클린턴 역시 이후 등장한 조지 W. 부시와 그의 지지자들 및 인사들에게 있어 소위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로널드 레이건이 구축한 신자유주의를 민주당 인사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인냥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를 향한 적대감은 그저 문란한 사생활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물론 로널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와 빌 클린턴의 신자유주의는 상당히 다른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클린턴은 신자유주의를 통해 세계의 모든 시민들이 서로를 협력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점이 레이건과는 다른 일면인데요. 이는 일종의 세계시민주의적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공화당은 이런 인식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빌 클린터은 로버트 루빈을 필두로 월 스트리트와 소위 한 몸이 되어, 신자유주의를 새롭게 건설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의 8년 동안의 집권 시기에 미국 경제가 호황이었다는 점은 따로 강조하지 않겠습니다만 '글래스-스티걸 법'의 해체로 대표되는 금융계의 규제 완화와 양적 완화, 그리고 FRB의 지속적인 협력 등을 통해 내수 경제를 부양한 점은 대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실리콘 벨리로 대표되는 IT 산업의 토대를 쌓은 정부가 바로 클린턴 행정부였다는 사실은 그가 기존의 월 스트리트의 금융인들과 미 서부 캘리포니아의 'IT 가이들'의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는 반쯤 농담쯤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월스트리트와 민주당의 도가 넘는 결합은 후에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정책과 관련된 운신의 폭에 있어 크나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분명한데요. 이는 마찬가지로 도널드 트럼프와 대결한 힐러리 클린턴의 실패와도 마찬가지로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클린턴은 젊은 시절 스스로 의뭉스러운 가운데 자신이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뛰어 넘는 업적의 민주당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야망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야망의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스스로 영악하게 우군을 월 스트리트에서 찾은 것이죠. 하지만 내각에 참여했던 랠프 네이더가 빌 클린턴과 엘 고어가 더욱 강고하게 구축한 신자유주의 질서에 크게 실망했다는 사실은 이 시기 신자유주의에 대한 리버럴의 항복이라는 메타포를 거듭 떠올리게 만듭니다. 특히 앞서 진술했던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 사회의 많은 흑인들이, 사회 안전망의 외주화와 더불어 민영화라는 거대한 교도 행정 산업의 대두로 말미암아 무엇보다 사법 시스템에 의해 이들이 감옥에 투옥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사회의 신자유주의화의 맥락으로 언급하고 싶은데요. 저는 무엇보다 미국의 사법 체계가 범죄자들을 처벌 후에 갱생 시켜, 다시금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이들을 사회에서 철저한 분리시켜 고립에 이르게 만든다는 저자의 분석이 쉬이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즉,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을 일소시키겠다는 그 저변에 깔려 있는 폭력적인 인식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는데요. 맨 앞에서 언급한 그 신빅토리아주의적 맥락이 다시금 생각되는 이유가 바로 역설적으로 이러한 노골적인 영리 행위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8년 간의 클린턴 집권기를 거치고 나서, 그의 후임인 엘 고어를 연방 대법원의 '결단'으로 물리쳐 백악관의 주인이 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는 소위 귀하게 자란 엘리트 가문 출신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의 방황을 딛고 일어선 행적은 당시 세인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는데요. 전임 정부가 남겨준 경제적 호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번 부시 정권은 2001년 9월의 참혹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미국 전체가 의도치 않은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물론 주변인로부터 선량하다는 평가를 받는 콜린 파월 전 국방장관을 압박해, 그로 하여금 거짓 진술을 하게 만들고 기어코 동맹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이라크의 후세인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미군이 개입하게 되는데요. 당시 부시 대통령을 넘어서는 실세라고 여겨졌던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를 비롯한 네오콘 일당들은 이라크에 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하게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이 나라를 수렁으로 빠트립니다. 전쟁 이후에 대대적인 군정과 함께, 이라크 내부를 개혁시키고자 했으나, 결국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여기에 2004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뉴올리언즈의 제방 붕괴로 인한 환경 재앙과 도시 붕괴는 조지 W. 부시의 정실 인사로 말미암아 이 정권의 무능이 드러나게 되는데요. 저자는 이 시기에 딕 체니의 과도한 행정부 개입을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과연 조지 W. 부시가 제대로 된 통치를 하였는지는 개인적으로 큰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난맥상 자체에 그치지 않고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의 신자유주의가 그저 붕괴하는 것을 넘는 전세계 경제의 대폭락이 조지 W. 부시 임기 말에 핵폭탄처럼 터트려지게 됩니다.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등장한 2009년의 오바마 행정부, 즉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달변과 명쾌함, 그리고 누구보다 이성적인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2008년 월스트리트 대폭락의 조짐을 가볍게 여기고 또한 임기 말기에 레임덕에 빠진 부시 행정부의 사실상 비협조로 오바마 행정부 초기 이 거대한 위기 상황의 대처가 직간접적으로 미흡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과 AIG의 유동성 위기로 시장이 이 위기를 통제할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나자, 의회에 막대한 구제 금융 법안을 요청하게 됩니다. 다만 이때에도 신자유주의적 신념으로 강고한 공화당 의원들이 시장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발상 자체를 여전히 거부하기에 이르는데요. 결국 의회에서 수락한 총 700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 금융으로 시장을 정부가 구제하게 됩니다. 이는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언급대로 이때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후쿠야마의 저 유명한 표현대로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종언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는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익숙한 저자의 논법처럼, '인종 민족주의 포퓰리즘'에 강제적인 종언을 당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 위기의 봉합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이 상황을 초래한 금융인들을 기소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심지어 이 금융인들이 공적 자금으로 보너스 파티를 연 것은, 그야말로 '도덕적 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이미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초기 신자유주의자들이 시장의 온전한 기능과 그 지속성에 있어 정부의 역할, 즉 법의 보장이 제일 중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이 그렸던 그림은 사회의 진보 세력을 무력화 시키고,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구축되는 것이 중요한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인지해, 소위 시장 자유를 위한 규제 완화와 사회 부조를 철저히 퇴출시키는 등의 작은 정부 등을 신자유주의 이행의 선결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자체의 이념적 이행과 이를 구축하기 위한 사회 제도적 고안들이 완성이 된 상황에서, 이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가 결과적으로 시민들이 요구하는 개선이 아니라, 아예 판을 뒤엎어 버리는 상황이 초래했는데 그것이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입니다. 과거 오바마 정권이 월스트리트와의 밀착으로 말미암아 2008년 대위기의 화해와 법적 책임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면, 트럼프는 바로 이 월스트리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즉,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를 불신하고 스스로 권력 무대에 나타나 거의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선동으로 다수의 표를 획득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정치인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제가 앞선 맥락에서 왜 도널드 트럼프가 신자유주의의 판을 뒤엎은 인물이라고 칭했냐 하면, 그가 공화당을 이미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의 공화당은 신자유주의 유산을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정당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저자도 글 말미에서 분석하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를 정점으로 단순히 티파티나 대안 우파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지지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공화당 정치가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모양새인데요. 일전에 후베르트 자이펠이 고안한 '푸틴 치하의 러시아'처럼,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공화당은 트럼프의 치하에 놓여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 맥락에서 글 후반부에 거의 절반쯤은 신자유주의가 과거의 유산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자포자기식의 서사가 간혹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만한 어떤 아이디어나 생각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언급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6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적인 일관된 경제사회적 체제가 100년 이상은 지속할 줄 알았으나, 엄밀히 말하면 체제의 변용이 이미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신자유주의로 인한 기득권의 존재는 여전히 무시 못할 정도이고, 반이민과 반이슬람과 맞물려, 껍데기 뿐이었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여러 곳에서 심각한 저항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신자유주의적 요체 자체가 금융 자본주의에 여전히 남아 있어, 아주 완벽하게 신자유주의 체제가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 그리고 유럽과 특히 우리 나라는 완전한 신자유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양상이 도널드 트럼프 개인으로 말미암아 체제가 급속하게 변질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는데요. 다만 도널드 트럼프가 획득하려는 국가 자체가 세계 패권 지위를 갖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트럼프 집권 제2기가 과연 어떤 식으로 세계를 '판의 재편'으로 몰고 갈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상황이라고 여겨집니다.


-지난 미국 30여년 정치에서 민주당과 월 스트리트의 밀착 관계로 인한 당사자들의 오판은 결국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을 초래했습니다. 높은 학력과 돈, 그리고 권력을 가진 소위 진보 정치인들은 자신의 가진 것 때문에 의도치 않은 정치적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는데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우선으로 여기는 논리를 사람에 따라 이중적으로 받아들이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에 선동이 의도하는 맥락이 이런 틈에 여실히 파고드는 이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도 이미 언급했듯이,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은 자신들을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줄곧 거부해 왔습니다. 이는 보수주의자들이 하이에크나 프리드먼을 보수주의자로 여기는 것 만큼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로 확신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그 이데올로기를 설계한 것은 로널드 레이건이었으며, 핵심적인 촉매자의 역할을 한 것은 빌 클린턴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내가 "자유주의"앞에 "신(neo)"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면서 구별하고자 하는 대상은 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손에서 변모하여 생겨난 현대 자유주의다.

레이건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해방적 언어를 20세기 말의 청중에게 먹히도록 부활시켰으며, 이렇게 자유주의를 부활 시킨 것은 그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 된 원인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를 엘리트의 지배를 확장하는 전략으로 보는 이들과 그것을 개인의 해방으로 가는 길로 보는 이들 사이에 존재했던 모순이다.

신자유주의의 설계자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자유방임 자유주의가 얼마나 주변적인 신세로 밀려났는지를 간파했다.

원래 모든 사람의 인격과 개성이 완전히 피어나도록 한다는 것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오랜 전통의 핵심 의제였다.

뉴딜주의자들은 좋은 삶이라는 것을 시민들이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재의 양과 다양성으로 정의하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1989년 당시 우리가 (그리고 믾은 이가) 보수주의를 명이 다한 이데올로기로 다루었던 것은 잘못이었음을 지금은 잘 알고 있다.

공화당이 비록 1940년대에 의회를 되찾고 1950년대에는 백악관도 되찾았지만 그럼에도 뉴딜의 해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주 현실적인 의미에서 공산주의의 위협 때문이었다.

트루먼 정부의 공직자들은 전체주의로 인해 서유럽에 또다시 세계의 종말이 무르익게 될까 봐 근심했다.

아이젠하워가 이러한 고율의 조세 체제를 유지하겠다고 결정하게 된 동인은 무엇보다도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공산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지상 과제 때문이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구타하는 영상, 그리고 남부의 보안관들이 고압 소방 호스를 동원하고 또 맹견까지 풀어 평화로운 흑인 시위대를 공격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 등이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전역에 퍼져 나갔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가 조속히 회복을 이루는 것이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고 역전시키는 데에 결정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이 기간동안 엄청난 몫의 자원을 군사 예산으로 돌려야만 했고,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에는 그중 큰 부분이 외국에 지출되어 미국의 국제 수지를 악화시켰다.

역사적 단계로 보면 이것이 "새로운 자유주의"의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반란과 폭동의 물결이 늘고 있었으니 유럽과 미국의 엘리트 및 중산층 집단은 크게 겁을 먹게 된다. 우파들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도 똑같이 좌파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게 됐으며, 국가를 무정부상태로 빠뜨리려는 자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권리보다 자기의 이윤이 더 먼저라는 그릇된 주장을 내놓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의사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도덕적 틀을 마련하여 거기에 질서자유주의까지 포함되게 만드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약국 체인인 다트 인더스트리의 소유주 저스틴 다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가 오랫동안 미국 정치에 남긴 영향력을 40년 동안이나 혐오했다.

레이건이 배우 (그것도 B급의 이류 배우)였다는 것 때문에 그가 높은 공직에 오르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레이건의 천재성은 바로 연방정부의 목에다가 거대한 주홍글씨를 걸어 놓은 것이었다.

1970년대에 미국 경제가 쇠퇴하면서 전국적으로 산업 도심의 공장지대가 공동화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로 인해 생겨난 흐름들이 레이건 임기 동안 내내 미국을 악몽처럼 괴롭혔다.

앞으로 보겠지만 다문화주의와 세계시민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조건 아래에서 자본가 및 그 지지자에게 노동자와 타협해야 한다는 압력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번창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번창했다.

3억 명이 넘는 미국인이 단 한 기업, 그것도 규제를 받지 않는 미디어 대기업으로부터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거의 아무런 질문도 제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때 뉴딜 질서를 떠받치는 필수불가결의 기둥으로 여겼던 것이 또 하나, 그것도 민주당 정권의 대통령 손에서 뽑혀 나간 것이다.

클린터은 자기가 만들어 낸 버전의 다문화주의 신념이라면 국경 없는 세계라는 신자유주의의 비전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것이라는 점을 파악했다.

그러자 부시 정부는 전쟁 계획을 살려 내기 위해 오랫동안 정직한 인격으로 존경 받아 온 국무부 장관 콜린 파월에게 2003년 초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짓증언을 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그런데 부시의 세계시민주의는 "신앙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프리드먼 및 클린턴과는 달랐다.

부시라는 인물은 지나친 특권을 물려받은 상속자라는 느낌이 강한 사람이었고, 무언가를 정말로 책임지는 위치에 있어 본 적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한 선동가 중 하나인 앤드루 브라이트바트는 2005년 브라이트바트닷컴이라는 사이트를 연다. 이는 (백인)서민들 편에 서서, 자기주장에 의하면 기득권 진보 엘리트들과 동맹 관계에 있는 미국의 흑인 및 라틴계 빈민 집단을 공격 대상으로 삼아 신나게 막말을 퍼붓는 우파 디지털 뉴스 서비스 였다.

골드만삭스에서 연설한 강연료로 30만 달러를 받았던 것을 두고 왜들 그렇게 난리를 친단 말인가? 월 스트리트에 애정을 표시하고 그 대가로 두둑한 보상을 받는 것은 20년 이상 민주당 정치의 특산품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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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07-18 22: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상세한 리뷰라니 존경스럽습니다!

베터라이프 2024-07-19 01:50   좋아요 3 | URL
너무나 장황한 글에 좋은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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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영국 햄프셔주 올더숏에서 스코틀랜드인이자 전직 군인이었던 부친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부친은 싱가포르. 독일, 리비아에서 군생활을 지속했는데 그런 연유로 그의 가족은 매큐언이 12살이 되어서야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그는 서퍽의 울버스톤 홀 스쿨에서 교육을 받고, 1970년에는 서섹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위를 취득했으며, 노리치의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인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1975년에 첫 단편소설집을 출간한 이래로 꽤 다작한 영국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에 주류 문학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는 1997년작, '견딜 수 없는 사랑 Enduring Love"와 이듬해에 출간한 '암스테르담 Amsterdam'이 부커상을 수상함으로써, 전세계로부터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또한 2001년에 출간된 '속죄 Atonement'역시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큰 방향을 불러 일으켰는데요. 이로써 그는 2008년에 타임즈가 선정한,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의 목록에 오르게 됩니다. 다만 그의 종교적 및 정치적 견해와 관련해,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탄압이라는 이슬람교의 교리에 그는 지속적으로 반대하였고,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가감없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긜고 2016년 6월 영국의 유럽연합 (EU) 탈퇴와 관련된, 소위 브렉시트 캠페인과 이어지는 국민 투표에 대해, 그는 영국 정치권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Cockroach"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21년 11월에 이뤄졌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일독이 이번이 두 번째이기도 한데요. 제가 접한 그의 첫 작품은 2008년에 번역된 "체실 비치에서"였습니다. 지금도 이 작품을 눈에 잘 들어오는 서가에 놓고 지난날 읽었던 흔적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다시 이 작품으로 돌아와, 처음에 일독 후에 들었던 생각은 작가가 강조했던 것처럼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지성과 반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게 벌인다"는 일관된 논점에 대한 이해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감상이었습니다. 어떤 인간을 그 자신의 지성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는 허버트 스펜서 류의 사고 방식에 물론 동의하지 않지만,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노인들의 인지적 한계"에 이르러 현실 정치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결정에 다수의 시민들이 자신의 판단을 너무도 과신하거나 혹은 그렇지도 않은 불확실성의 인질로 미래를 비합리적인 위기로 몰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물론 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큐언이 말하고자 하는 최근의 EU 체제에 대한 영국의 놀랄만한 '브렉시트'는 단순하지 않은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작품에 등장하는 것처럼 미국 연방 대통령이 영국의 브렉시트를 은근 부채질 하거나, 혹은 브렉시트를 통해 EU를 손 봐줄 수 있는 기회를 작당하는 것 같이 무슨 음모처럼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해 보입니다만 이 브렉시트 자체가 당시 정치인들이 국민의 반EU 정서를 교묘히 부채질하여 이것이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포퓰리즘적 선동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좀 더 의미심장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1940년대에 프랑스가 무너지고 독일 나치의 공포과 유럽을 집어삼킬때도 홀로 서 있었다."는 영국인들의 소위 유럽 대륙에 대한 본질적 정서 말입니다.

그런 연유로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고귀한 총리를 '바퀴벌레'로 종(복합적인 측면에서)을 바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위기에 무엇보다 바퀴벌레처럼 '페로몬'이 인도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본능을 마냥 실소로 치부해서는 안될 겁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이 페로몬이 이끄는 본능을 정치인의 노골적인 정치적 셈법에 대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비상 시국이라는 상황에서 등장한 영국 총리가 과연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능히 짐작이 가능한데요. 정권을 위해 다소 간의 불편한 브렉시트는 국민에게 그 책임을 떠안길 수 있다는 손쉬운 정치적 편의주의 말이죠. 설사 국가를 비이성적인 내분 상태로 만든다 해도 말입니다. 더욱이 카를 마르크스와 애덤 스미스를 구분조차 못하는 일국의 총리라는 작가의 신랄한 비꼼은 이들 엘리트 지도층이 실질적으로 어떠한 인물들인지 새삼 깨닫게 하는데요. 과거 마거릿 대처의 시대를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적지 않은 시민들과 이러한 역사 분열의 조건을 정치적으로 쉽게 이용하고자 하는 '권력의 무지성'은 익히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신자유주의와 포퓰리즘 그리고 위대한 결단 등의 이해타산으로 이해되는 '역방향 주의'는 "노동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고, 부자들에게는 더 적은 세금을 배분하여, 실로 풍요로운 세상"을 만드려고 하는 일련의 정치적 과업 등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이웃 혈맹인 프랑스와의 전통적인 관계조차도 큰 고려나 숙고 없이, 때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이런 작위적인 맥락을 포함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체제나 이웃과의 관계 혹은 동맹과 같은 일련의 맺고 합쳐지는 과정들이 소수의 고위 계층이 원하는 이익과 그런 편취적 태도에 국익이나 모두의 이익으로 때론 쉽게 변질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하게 뒤집혀 버리는 정론, 그것을 둘러싼 영국 의회와 그곳에 모인 정치인들 역시 냉소의 대상이기도 한데요. 그리고 그들 주변을 맴도는 가벼운 인사들을 작가는 인정사정 없이 비꼬고 있습니다. 특히 커트 보네거트 식의 풍자로도 읽히는 극중, "교도소 만 곳을 지으면 25억이 들어온다"는 가히 휘황찬란한 논지는 오늘날 미국이 교도 행정을 민간에게 개방하게 소수의 인사들이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는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 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바퀴벌레의 페로몬적 본능, 인간이 지성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행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오류는 서로 종이 한장 정도 차이의 구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평범한 모두가 원하는 정의와 이에 동의하지 않는 소수의 엘리트 지배층의 이해 관계로 양분되는 것처럼, 단순히 신자유주의나 그것을 걸고 넘어지는 포퓰리즘 등으로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근본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는 영국의 사회 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가들의 실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다수의 시민들이 스스로 합리적인 사고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짚기 전에, 이러한 점을 절묘하게 미리 인지하여 이들을 선동과 왜곡으로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 정치인들이 태반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흄으로 비롯된 영국의 계몽주의가 이런 수준에 이르렀다는 작가인 매큐언의 한탄과 동시에 양심이 결여된, '정치의 비도덕적 측면'은 과연 우리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자임하기에는 매우 위선적인 것이 아닌가 다시금 떠올려 보게 됩니다.


-작품의 서두에, 매큐언이 남긴 얼마간의 주의 사항(?)이 절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소설은 허구다. 이름과 인물들은 작가가 상상해낸 것이며, 현존하거나 세상을 떠난 실제 바퀴벌레와 유사점이 있다면 전적으로 우연이다."



이제야 웨일스 사투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웨일스? 먼 서쪽에 위치한 구릉과 비가 많은, 신뢰할 수 없는 작은 지방. 짐은 자신에게 예전과 다른 지식이 있음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국가가 지긋지긋한 예속에서 해방되려는 참이었다.

부와 기회의 불평등, 북과 남의 분열, 임정 정체 등 국가의 문제점은 모두 재정 흐름의 방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가와 국민을 사랑한다면 기존 질서를 뒤집어야 했다. 기존의 흐름은 오만한 지배 엘리트의 이익에만 봉사했다.

우리는 과거에도, 1940년대에 프랑스가 무너지고 독일 나치의 공포가 유럽을 집어삼킬 때도 홀로 서 있었다.

총리와 그의 동료들은 죽음이 일상인 환경에서 자랐고 위생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온당한 일이기도 하여 시체를 먹는 걸 관례로 삼았다.

그렇잖아도 영국의 역행으로 포도주와 치즈 수출에 위협을 받게 되면서 당혹감과 분노를 느끼던 라루스 대통령은 대변인을 통해 영국이 "아주 좋은 친구의 말을 의심하다니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국가는 확실한 적을 필요로 했다. 애국적인 언론인들은 프랑스에게 당당히 맞서 "우리가 잃어버린 청년들"을 위해 항변한 총리를 칭찬했다.

"세상을 흔들어놓는 건 좋은 일이지요. EU를 흔들어주세요."

하지만 공적은 삶은 굵은 윤곽으로만 그려질 뿐이다.

모든 건 법으로 금지하기 전에는 합법이라는 게 개방사회를 규정하는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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