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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폭풍 ㅣ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2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6월
평점 :
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키에프에서 부유한 은행가이자 유대인이었던 레온 보리소비피 네미롭스키의 딸로 태어납니다. 그녀의 가족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자 러시아 제국을 떠나 핀란드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요. 이후 네미롭스키는 소르본 대학에 진학하고 바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26년에 은행가인 미셸 엡스타인과 결혼하게 되는데요. 이로부터 3년 뒤인, 1929년에 그녀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준 '데이비드 골더'의 출판이 이뤄집니다. 이런 그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 최종적으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는데 실패합니다. 결국 프랑스에서 유대인이자 무국적자라는 굴레는 1942년에 비시 프랑스 정부에 고용된 경찰에 의해, "유대인 무국적자"라는 미명하에 체포되었고, 그 와중에 그녀는 자신의 딸들에게,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네미롭스키는 오를레앙에서 북동쪽으로 37km 떨어진, 비시 프랑스 정부의 강제 수용소였던 '피티비에 집합 수용소'로 끌려갔고, 1942년 7월 17일,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당시 폴란드의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에 이릅니다. 결국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지 한 달 후에, 그녀는 발진티푸스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인 미셸 엡스타인 역시, 1942년 11월 6일에 아우슈비츠에 보내졌고, 즉시 가스실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Suite Française' 시리즈의 작품으로 원제, "Tempete en juin"으로 지난 200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에 초도 번역되었습니다. 제가 읽은 이 책은 전면 개정판으로 2023년 6월, 번역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녀의 이 작품은 시리즈 미완성 논고로 작가 사후 최초로 프랑스 '르노도상'을 수상하게 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을 쓴 이렌 네미롭스키는 후에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만약 제가 당시 아우슈비츠에 있던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스스로 미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해 보지만 막상 떠오르는 생각은 한결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을 겁니다. 이런 그녀가 '프랑스 조곡'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이 장편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는데요. 작가 역시 당대를 살아가던 지식인이었던 만큼 나치 독일에 점령된 파리와 그 시대에 대한 나름의 고찰과 분석이 있었을 겁니다. 즉, 자신의 딸들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묻혀있던 이 원고에도 작가인 그녀의 통찰과 더불어, 여실히 그 시대의 자화상을 담고 있었는데요. 다만 이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 제가 읽었던 다른 작품들 가운데, 니콜 크라우스의 '그레이트 하우스'와 묘하게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로 여러 인물들이 특별한 상황과 맞물려, 그 와중에 겪게 되는 사회적 분절과 그들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과의 갈등과 대립은 여기에 등장하는 전쟁을 그저, '정치적 행위'라고 믿는 자들에게 큰 경종이 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이 히틀러가 집권 하기 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정치적 혼돈과 1940년 당시, 파리를 독일군에게 내준 '공화국 정부'의 무능이 뭔가 절묘히 매치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인 그녀도 당시 공화국 정부의 무능과 그로인한 여러 한심한 작태를 이 작품 여러 곳에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파리지앵'과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파리지앵'은 어떠한 의미 차이가 있는지 다소 불명확합니다만 폴란드가 히틀러에 의해 불법적으로 점령 당하는 것을 보고도 이 때의 프랑스 엘리트와 파리 시민들은 아마도 별다른 경각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과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 가족이 폴란드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가 나치 독일군의 수도 바르샤바 진군에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들리자마자 피난을 접게 되는 장면은 지금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프랑스조차 수도 파리가 독일군에 의해 점령 당했으니 앞선 영화에서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바르샤바와는 어떤 면에서는 꽤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미롭스키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몇몇 가족들은 영화 피아니스트의 슈필만 가족과는 달리,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즉시 피난 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인간 군상의 민낯이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작가인 네미롭스키도 일전에 읽었던 이디스 워튼 만큼이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해 거의 직접적인 냉소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 대해서도 '군중'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야만적인 자연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오로지 생존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을 그저 비이성적인 모습이라 에둘러 비난해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무능한 프랑스 정부에 대해 먼저 비판의 화살을 돌려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이처럼 개략적인 극 서사는 파리 점령 며칠 전을 시작점으로 이 유구한 도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쟁을 피해 무작정 피난 길에 오르고 난 며칠 뒤, 독일과 프랑스 간의 빠른 휴전이 성립되자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여정과 이 과정에서 이들이 '점령된 파리'에서 겪게 되는 일부 충격적 사건들이 다른 여러 인물들과 겹치면서 최종적으로 서사는 그렇게 마무리 됩니다.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여러 인물들은 여러 사용인들을 거느리며 파리에서 상당히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 도시의 유서 깊은 가문이기도 한 '페리캉' 가(家)를 꼽을 수 있겠는데요. 또한, 노골적인 배금주의자인 가브리엘 코르타와 샤를 랑줄레는 재산과 교양이 전무한 일반 계층을 극명하게 경멸하고 이런 지독한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피난 도중 스스로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내는데요. 앞선 이들과는 대비되는 인물들로, 이 전쟁에 참전했던 장마리가 예기치 않은 부상을 입고 경험하게 되는 평화적 일상과 후반부에 그를 둘러싼 다소 난감한 결말, 이와는 달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인물인 사제 필리프 페리캉은 작가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몇몇 전형적인 인물들과 절묘하게 대비되어 나타나는 서사의 한 틀이기도 합니다. 특히 종교와 그것을 일체의 삶으로 여기고 신의 목소리를 갈구했던 필리프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비참한 최후는 어쩌면 타인을 실질적으로 이해해 보려 하지 않았던 그의 운명을 나락으로 이끌게 된 것인데요. 이는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신의 부름이 우선 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읽힙니다. 이외에도 전쟁이라는 전무후무한 사태에 이르러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저 휩쓸려 나갈 수밖에 없는 그런 비참한 처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조국의 붕괴와 피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운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위베르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다 똑같은 개돼지라면 한결 이해하기 편할 것"이라는 독백은 이 전쟁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추락시키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가늠하게 만듭니다. 이런 가운데 작중의 도시인 크레상주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이름 모를 마을에 등장한 독일군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과 피난민들의 순진한 태도 역시, 전쟁의 진면목과 앞으로 프랑스에 드리울 운명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한 미래를 한편으론 예측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여기에 여러 화자들의 이야기 소재로 언급되는 1870년 보불전쟁과 1914년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은 그 성격과 양상이 완벽히 다른 전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작가가 사실상 복선을 두고 다룬 두 전쟁과 소설 속 인물들이 몸소 겪게 되는 이 인간성 상실의 2차 대전이 그 궤가 확연히 다른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는 작가가 지난 날 프랑스가 겪었던 과거 전쟁들이 여기에 등장하는 화자들을 통해, 이에 비하면 마치 그저 순진한 전쟁이었다 해석하는 것으로도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감상일 수도 있지만 결말에서 일부 인물들에게 보이는 '충격적인 귀결'과 평화의 시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이 사람들의 인식 자체의 흡사 비틀림과 냉소는 충분히 극의 중요한 맥락이기도 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맨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인 네미롭스키가 자신의 사랑하는 딸들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끝내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니, 제 마음 한구석이 저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럼에도 현재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저지른 '600만에 이르는 유대인 절멸'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저 유대인들의 거대한 음모로 치부하는 이자들의 민낯은 인간이 과연 이성적인 존재인가에 대해 스스로 끊임없이 자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작금의 세계에서 단순히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 정도로 국한시킬 수 없는 소위 '이성의 마비'와 다름없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의미를 드러내는 간접적인 나레이션을 통해, 드러나는 '개인의 자유', '내일의 정신'과 같은 본질적인 화두들은 작가의 진지한 고찰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그녀가 사실상 프랑스 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고, 끝내 유대인에 덧씌운 중상모략과 같은 역사적 폭력에 '개인의 삶'이 그야말로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내일의 정신'이 더 나아가 다음 세대에도 의미가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이에 대한 의구심을 저버릴 수가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우리의 정치가 과연 이때보다 진정으로 진보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때문에 부부는 공화국 정부를 불신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난 그게 좋아. 여자란 자고로 크림처럼 하얀 몸이 부드럽고 풍만하고 순진한 암송아지 같아야 해. 자주 마사지를 받아서 유연하고, 연지와 분 냄새가 밴 나이든 여배우의 피부, 자네들도 알지?"
돈 많고 유명한 사람들이 판단력은 짐승들만도 못하다니까! 짐승들도 위험은 바로 알아차리는데!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결단력 없는 사람들과 정신 나간 사람들이 아직 파리에 남아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불안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투지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슬픔이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짐승, 그물에 갖혀 어부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걸 바라보는 물고기의 눈에 깃든 것과 같은.
교회 안에서는 이중적인 삶이, 하루하루 반복되는 평온한 일상과 묘하게 열에 들뜬 또 다른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화장을 짙게 하고는 장교들로 가득한 트럭을 얻어 타고 시시덕거리던 여자들, 너무나 만연한 이기주의, 비겁함, 야만적이고 아무 의미도 없는 잔인함이 위베르를 구역질 나게 했다.
겨우 닷새 만에 프랑스의 절반을 삼켜버린 독일군 기계화 부대는 내일이면 틀림없이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의 국경에 도달할 것이다.
샤를 랑줄레는 자신을 끌어들여서 공감을 얻으며 즐거워하려 했던 피란민의 의도를 꺾어놓은 것에서 변태적인 쾌감을 느꼈다. 더럽고 상스러운 종자들은 자신들이 인간적인 연민을 느낀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것은 멜로드라마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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