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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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1948년, 영국 햄프셔주 올더숏에서 부친인 데이비드 매큐언과 모친인 로즈 릴리언 바이올렛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드물게도 군에서 소령까지 올라간 군인이었습니다. 이언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싱가포르, 독일,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보냈는데, 아마도 그의 부친의 잦은 근무지 변경으로 인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결국 그가 12살이 되던 해가 되어서야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언은 서퍽의 기숙학교인 울브스톤 홀 스쿨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하고, 1970년에는 서섹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그리고 노리치에 위치한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일종의 자신의 창작물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의 첫 출판 작품은 1975년에 출간한 '첫 사랑 그리고 마지막 의식 First Love, Last Rites'로 1976년에 이 작품으로 '서머셋 몸'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초기에 작품 활동이 주로 어두운 인간의 내면과 그런 의식의 작용 등을 주제로 어둡고 불안정한 글을 쓰기도 했는데요. 이후 그는 좀 더 폭넓은 독자층에 다가가기 위해, 보편적인 작품 쪽으로 방향을 틀기에 이르는데요. 결국 1998년에 '암스테르담 Amsterdam'으로 부커상을 수상하고, 2005년에는 '새터데이 Saturday'로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합니다. 그는 평생의 작품 활동 가운데, 6번이나 부커 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는데요. 이런 문학에 대한 기여로 그는 2000년에 "대영 제국 최고 훈장"을 수여 받습니다. 또한 문학 활동과는 다른 정치적 활동 차원에서 2011년에 그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예루살렘 상"을 수상하고, 2012년에는 서섹스 대학이 수여하는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바탕으로 50주년 기념 메달을 수여합니다. 특히 이언은 스스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서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견해"로 말미암아 이슬람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기에 이르는데요. 이와 관련해, 여러 오해와 억측을 불러일으키도 하였습니다. 또한 2016년 6월 영국의 유럽 연합 (EU) 탈퇴 여부를 붇는 국민 투표에 관련해서도 가디언지에 상당히 비판적인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그는 총 17편에 이르는 장편과 몇 가지 단편 작품을 출간했고, 이에 지금도 열성적인 집필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서평을 쓸 이 장편은 원제, "The Innocent"로 지난 199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먼저 고백하자면, 이언 매큐언의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제 예측을 벗어난 전개로 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는데요. 이 장편의 주인공인 레너드 마넘과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여주인공이자 이혼녀인 마리아 에크도르프와의 관계 설정 전반과 그로인한 서사적 전개가 제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결말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에서 2차 대전 전후, 혼란스런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파견되었던 레너드와 그가 앞으로 미국 정보 당국과 관련된 중대한 일을 맡게 됨으로써, 익히 예견할 수 있는 소위 존 르 카레식의 '스파이 물'로 여겨졌지만 이런 저의 예측은 놀랍게도 완벽히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저널리스트인 하랄트 얘너가 언급했듯, 2차 대전 종전 직후의 베를린은 그야말로 비극과 야만의 도시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에 매큐언도 여주인공인 마리아를 내세워, 베를린의 일반 여성들을 향해 소련군이 자행한 그야말로 참혹한 강간의 증거를 마찬가지로 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먼저 러시아로 진군한 나치 독일의 군대가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는 철저한 군사 작전으로, 당시 러시아인들이 겪은 가혹한 전쟁 참상에 따른 분노와 복수가 바로 소련군에 의해, 다른 장소인 바로 이곳 베를린에서 자행된 것이기도 한 데요. 물론 저는 이것을 독일인들의 마땅한 '죄과'라고 가볍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앞선 얘너의 언급대로, 200만의 독일 여성들 가운데 이를 반쯤 체념하며 받아들였다는 실증된 사료는 상당히 중격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역시 이러한 '죄의 메커니즘'은 쉽사리 화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종전 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발빠른 대응과 유사하게 이 작품에서도 미국이 주도하여, 동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과 이를 뒷받침하는 동독 당국의 민감한 정보를 탈취하고자 일련의 비밀 작전이 수행됩니다. 마침 버밍엄 대학에서 전자 공학을 전공한 레너드가 이런 연유로 극비리에 건설된 시설에서 '도청 작전'에 임하게 되는데요. 이런 과정에서 얽히게 되는 미국 측 정부 요원인 밥 글래스와의 후에 드러나게 될 지독하게 얽힌 인연은 이 극을 이끄는 주요 복선이자, 대치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점은 여러 복선 가운데, 비로소 극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레너드는 마치 사회 초년생처럼, 인생 전반의 미흡한 경험을 안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어리숙한 인물의 전형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만의 세계, 비좁은 인간 관계와 더불어 연애 경험까지 전무한, 우리가 20대 초반에 많은 시행착오로 '청춘의 시기'를 힘겹게 이어나간 것과 비견될 정도로 이 작품의 구조적인 면에서는 평범함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특한 성격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여주인공인 마리아는 과거 대전의 한복판에서 여성이 홀로 베를린에서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한 결혼을 시작해, 남편과 끊임없는 불화를 겪게 되는데요. 더욱이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주하게 되는 그 시점에서 아주 광범위하고 철저한 '강간'의 폭력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무정부의 상황, 인간이라면 마땅히 보장 받아야 하는 스스로의 안위와 안전을 이런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 자신의 힘 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기에, 이 시점에서 아무런 권력도 주어지지 않은 독일인 남성이 아닌 과거 연합국의 일원이자, 자유 세계의 구성원인 레너드와 그녀는 극적인 조우를 겪게 됩니다. 물론 승전국 남성과 패전국 여성이라는 이분법 뿐만 아니라, 레너드는 마리아가 겪은 그 지옥과도 같은 기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합니다. 여자의 본성과 관계 전반에 대해 미숙한 레너드가 그저 본능적인 정복욕과 비틀린 감정에 휩싸여 그녀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긴장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매큐언은 우리에게 사랑은 쟁취하는 것, 혹은 마땅히 자신의 것은 스스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마리아의 입을 통해, 이를 우리에게 여실히 알리고 있기도 한 데요. 이는 참혹한 전쟁을 몸소 경험하지 못한 극적인 고통의 사람과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과 그런 나날의 더해짐이 단순히 어긋나고 부서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어쩌면 그렇게 미루어 짐작해 볼 수도 있겠는데요. 이는 억지로 주어진 평화로운 시대의 여느 평범한 관계가 완벽히 상반된 거침없는 왜곡과 잔인한 자기 합리화에 따른 본능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어쩌면 매큐언은 우리에게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인간으로서 겪을 필요가 없는 잔인한 전쟁의 본성을 체험한 한 인간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지난할 지는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한 인간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본성으로 철저히 변질될 수도 있겠습니다. 즉 이제 나를 지켜내기 위해 무엇이든 이용하겠다는 이기적 다짐과 더불어 한편으론 모든 걸 체념하게 되는 자포자기하는 마음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마리아가 극 후반부에 레너드를 향해, "런던에 가서 다 말하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다."는 자기 고백은 사건의 이면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진실을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레너드에게 있어 전쟁의 기억 만큼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스스로 인생의 방향을 틀게 만드는 본질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 되지 못한 자기 충족적인 숨겨진 관계에 의해서 말이죠. 저는 마리아의 끔찍한 자기 변명과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일종의 합리화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다시 한 번, 이 작품을 곱씹고 나서, 진정한 위안처를 찾고자 하는 일전의 전쟁의 상흔을 몸소 겪은 여인의 이 같은 간절한 바람이 어쩌면 최근에 전쟁을 겪은 시리아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평범한 여인들의 이뤄질 수 없는 희망과도 맞닿아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작품 증간에 반전의 설정으로 등장하는 레너드와 마리아의 간략한 약혼과 거기에 등장한 밥 글래스의 행동 자체는 정말 이중적이고 역겨울 정도였는데요. (밥 글래스에 대한 내용 전반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을 자제하겠습니다.) 이것을 영국인인 작가가 바라보는 미국인의 본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마리아에게는 뒤이어 이어지는 인생의 평온한 안식처가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면서 작가가 마리아가 결코 짓밟힌 적이 없는 여성이었다는 서사는 그만큼 의미심장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디데이 즉,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한 레너드의 부친이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자, 독일을 누구보다 증오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나레이션은 어쩌면 레너드와 마리아의 결말을 이미 예견한 것과 다름없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는 전쟁을 거친 그 시기의 본질을 진실로 유념하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레너드는 모욕에 대처할 마땅한 방법을 미처 준비해두지 못했다. 성인이 된 후로 모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45년에 이리 진군해 들어왔을 때 짐승처럼 굴었나봐요. 진짜 짐승이요. 이 여자들은 그러니까, 자기네 언니와 엄마나 심지어 망할 할멈까지 강간당하고 찔려 죽었으니까. 아니면 건너건너라도 그런 사람을 아니까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거죠."

"낮에 한번 와보세요.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폭격을 당하지 않은 성한 나무들은 공수작전 동안 베를린 주민들이 난방용으로 다 태워버렸지요. 히틀러는 한때 이곳을 동서의 축이라고 불렀습니다."

파괴된 도시를 보며 느꼈던 처음의 우쭐함은 돌이켜 생각하니 유치하고 혐오스럽기만 했다.

1955년에 레너드 같은 배경과 품성의 남자가 스물여섯이 다 되어가도록 성 경험이 없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애정을 가장해 자기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이 두려움은. 아니면 성적 친밀감의 외피 아래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악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아버지가 다니는 동네 술집 단골 중 바르샤바조약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를린에서는 바르샤바조약 비준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는데 말이다.

편안한 그리움과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바로 이 시기에 그는 마리아에게 꼭 청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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