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과 신자유주의 - 새로운 정치 질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Philos 시리즈 28
게리 거스틀 지음, 홍기빈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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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거스틀은 미국의 역사학자로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폴 멜론 미국사 교수입니다. 그는 1976년에 브라운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1982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거스틀은 미국 내에 손꼽히는 '뉴딜 체제' 연구가로, 여기에 인종과 이민 및 시민권의 역사적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2017년에 학자로서는 영예로운 자리인 영국의 인문학 및 사회 과학 분야의 국립 아카데미 회원 (FBA)에 입회하였고, 그 이전인 2005년에는 미국 역사가 협회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20세기 미국 역사에 탁월한 연구 성과를 달성한 그는 캐나다, 영국, 벨기에, 독일, 네덜란드, 브라질, 일본, 한국 등지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2007년 5월에는 미국 의회의 하원 이미 소위원회에 출석하여 미국의 이민 문제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이외에 그의 저술 활동 중, 2001년에 출간한, '미국의 시련 American Crucible'은 미국 이민과 민족 역사에 뛰어난 성과를 거둔 논저로, 2001년 테오도르 살루토스 기념 도서상을 수상했고, 동시에 NPR 라디오 프로그램의 문학평론가이자 서평가인 모린 코리건이 선정한 '2008년 변혁의 새해를 위한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Rise and Fall of the Neoliberal Order"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거스틀의 이 논저는 지난 1989년에 공저자로 참여한, "뉴딜 질서의 부상과 종말 The Rise and Fall of the New Deal Order"의 후속글로 볼 수 있을 텐데요. 지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뉴딜 체제의 사실상 종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대로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체제'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대략적인 흐름에서 저자는 같은 시기의 미국 정치와 각 선거로 등장한 행정부와 신자유주의와의 관계를 살펴보고, 이것이 미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구조적으로 어떠한 양상의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아주 면밀하게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그 자체는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며, 그저 좌파들이 어떤 허상에 집요하게 달려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그동안 일관된 주장이었는데요. 이를테면 신자유주의는 실체가 없다는 식의 논법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이 논저는 현실적인 증거와 명백한 역사적 반론을 꾹꾹 눌러 담은 역작 그 자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 저자인 거스틀이 글 서두에서 언급하는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18세기에 비롯된 전통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1920년대 세계 대공황 이후, 당시 미 연방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국가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뉴딜 체제의 자유주의'와 대립되는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신자유주의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만들었지만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아마도 '반루스벨트주의'가 그 배경에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저 역시, 데이빗 코츠와 리민치의 논저를 접하기 전까지는 신자유주의를 그저 금융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습일 뿐이라고 이해했는데요. (특히 역자인 홍기빈씨가 설명한 신유주의의 대한 유튜브 영상도 개인적으로 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거스틀은 신자유주의를 매개로, 미국 현대사를 시대순의 비판적 방식으로 조망하며, 초기 신자유주의의 폭발적인 이행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충격과 더불어 파편화 된 시민들의 삶, 더 나아가 헌법에서 보장된 시민권을 부정하는 듯한 같은 시민들인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적 차별과 그런 인식까지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일반적인 미국인이라면 결코 표면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회의 음울한 측면일 텐데요. 특히 신자유주의가 기존의 기득권 계층과 엘리트 지배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미국 사회에 백인 사회와 흑인 공동체를 분리하는 노골적인 인종주의에도 관여했다 볼 수 있습니다. 이 당시 미국 사회는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이념적으로 따로 놓고 보기에는 서로 간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했고, 특히 사회의 보수화는 개인 스스로의 삶의 통제, 그리고 더이상 제한이 없는 자유에 대한 맹종이 우습게도 정치적인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의 '시장 자유'와도 맞물려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이 점은 무엇보다 공화당의 기본적인 민주주의의 인식을 거의 내부에서 분절시켜 버리는 극단화된 측면의 인종 혐오의 현상으로 점철되어 나타났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실패로 인해, 그동안 투입되었던 막대한 전비가 미국 사회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물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결국 기존의 사회 보장을 근간으로 하였던 뉴딜 체제의 전반적인 재검토를 내부에서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여기에 본질적 변화에 따른 새로운 아이디어(신자유주의)의 구축에 있어, 무엇보다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의 이름 만큼은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저자인 거스틀은 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설계한 것은 분명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점을 먼저 밝히고 있었는데요.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이 로널드 레이건을 마음 깊은 곳에서 흠모하고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레이건 집권 말기에 '이란-콘트라 사건'의 관련자들에게 대통령이 직접 사면을 내렸던 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특히 미 CIA의 소위 '미국의 앞마당'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대한 불법적인 작전과 임의적으로 자행된 정치 공작이 기승을 부렸던 소위 '냉전 투쟁의 시대'였는데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극단적인 대결 구도는 고도화 된 핵무기 각축 만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레이건 정부 시기에, 정부의 요직이나 '작은 정부'에 몰두한 인물들이 거의 '신빅토리아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이었다는 점은 저에게는 생소한 부분이었는데요. 이들은 전통적 복음주의와 연계하여, 시민들이 도덕적으로 규율을 갖출 필요가 있으며, 이는 '자기 기율과 자기통제'가 핵심인 일종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아마도 앵글로 색슨의 후손인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기원한 왕국의 주요한 도덕적 가르침을 숭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측면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아마도 제 생각으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각자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의 책임이며, 여기에 사회가 끼어들 틈은 없다"는 측면의 유명한 구절이 바로 이 철지난 도덕주의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강력하게 상승하게 된 원인은 미 공화당 내의 신빅토리아주의로 대변되는 일종의 도덕 규율이자 철저한 사적 책임론이 당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익히 알다시피. 원래 로널드 레이건은 한때 진보적인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지성적으로 탁월한 견해를 바탕으로 남을 설득하는 이성적 달변가는 결코 아니었는데요. 이 글 4장에서 여실히 분석되는 바와 같이, 레이건은 누구보다 "반정부적,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밀어붙이는 대에 보수적인 인종적, 종교적 분노를 끌어오는 방법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저자는 이를 언급하며, 특별히, "대단한 위업"이라고 첨언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단순히 국가 차원의 검증이 필요한 일종의 사회 지배적 신념 체계를 그저 자기 확신에 빠진 본능적 인물이 이를 뒷받침 했던 것으로도 읽힙니다. 더욱이 미국 사회에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을 더욱 고착화 시키게 되었던 주된 원인인, "대통령과 여당이 노동자들의 힘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는 단순한 진술 자체는 공화당과 더 나아가 현재의 티파티의 극단주의자들이 레이건의 크나큰 정치적 업적을 누구보다 칭송하기에 이릅니다. 다수 시민들의 평범한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자본의 영향력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게 만든 이러한 비상 조치들을 그저 그리스 시대의 우상에 대한 전유물적인 사고가 아니라, 이미 현실적으로 역사가 면밀히 고려하고 분석해 봤는데도 불구하고 레이건의 실책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정치 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현실은 분명 암울한 장면으로 여겨집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소위 '아메리칸 드림'이 지금에 있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보기도 하는데요. 뿐만 아니라, 뉴딜 체제를 거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연방 대법원의 노골적인 기득권화, 그리고 헌법의 자본주의적 활동 보장에 대한 일정 부분의 인식을 넘어, 시민의 기본 권리에 대한 법률 시스템이 헌법 원전주의라는 큰 변화를 맞아, 리처드 엡스타인의 분석대로, 이러한 사회적 변질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크나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의 정치적 양분화는 물론이거니와 여성과 소수 인종의 권리를 사실상 제한하기에 이르렀다고 진술되는데요. 즉,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사회를 헌법적인 맥락 차원에서 아주 다른 양상으로 변질시킨 것(다수의 이익이라는 측면에 가히 위배되는)이 오로지 신자유주의 때문인지 아니면 레이건 행정부 자체의 태생적인 문제인지는 불확실해 보이는데요. 다만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이러한 이행이 사회를 더 한층 혼란과 심각한 갈등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입니다.

이후 소련의 몰락과 그 궤를 같이한 조지 H. W. 정부는 국제 사회에 미국의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행정부였습니다. 물론 군사적 신자유주의라는 측면에서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고 막대한 연방 정부 예산을 국방과 관련된 기업들에게 크나큰 수혜로 안기기도 했습닏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일부 요소가 비대해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국방부를 통해 지급되는 막대한 이익 자체에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시기 전반을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5장에서 '승리의 개가'라는 단어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이 시기는 고르바초프의 과감한 결단과 그 다운 퇴장, 그리고 그로 인한 체제의 균열로 소련의 붕괴가 마무리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런 과정 자체를 자유 세계의 승리로 규정했고, 이 시기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등한시 하기에 이르렀는데요. 더욱이 여기에 등장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공산주의의 몰락은 일상 생활에 실천하고 이식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대안들을 현실 공간에서 제거했다"는 해석으로 이 거대한 승리의 본질을 우리는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지 H.W. 부시는 이라크 전쟁과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하는 듯, 재선에 실패했고 그 후임으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빌 클린턴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논의된 빌 클린턴과 그의 행정부에 대한 저자의 여러 분석 가운데, 무엇보다 동의할 수 있었던 부분은, 제가 이미 인지하고 있던 딘 베이커의 주장대로, 클린턴이 미국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리버럴'가운데, 누구보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한 정치인이었다는 진술이었습니다. 특히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유산을 기억하고 이를 인정하는 민주당 정치인 가운데, 누구보다 껍데기만 남은 뉴딜 체제의 해체를 불러 일으킨 정치인이 바로 클린턴이었습니다. 민주당에게 있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정치적 유산'은 실로 중요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반대의 공화당 정치인들이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언급하면 쉽게 이를 갈 듯, 빌 클린턴 역시 이후 등장한 조지 W. 부시와 그의 지지자들 및 인사들에게 있어 소위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로널드 레이건이 구축한 신자유주의를 민주당 인사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인냥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를 향한 적대감은 그저 문란한 사생활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물론 로널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와 빌 클린턴의 신자유주의는 상당히 다른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클린턴은 신자유주의를 통해 세계의 모든 시민들이 서로를 협력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점이 레이건과는 다른 일면인데요. 이는 일종의 세계시민주의적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공화당은 이런 인식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빌 클린터은 로버트 루빈을 필두로 월 스트리트와 소위 한 몸이 되어, 신자유주의를 새롭게 건설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의 8년 동안의 집권 시기에 미국 경제가 호황이었다는 점은 따로 강조하지 않겠습니다만 '글래스-스티걸 법'의 해체로 대표되는 금융계의 규제 완화와 양적 완화, 그리고 FRB의 지속적인 협력 등을 통해 내수 경제를 부양한 점은 대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실리콘 벨리로 대표되는 IT 산업의 토대를 쌓은 정부가 바로 클린턴 행정부였다는 사실은 그가 기존의 월 스트리트의 금융인들과 미 서부 캘리포니아의 'IT 가이들'의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는 반쯤 농담쯤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월스트리트와 민주당의 도가 넘는 결합은 후에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정책과 관련된 운신의 폭에 있어 크나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분명한데요. 이는 마찬가지로 도널드 트럼프와 대결한 힐러리 클린턴의 실패와도 마찬가지로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클린턴은 젊은 시절 스스로 의뭉스러운 가운데 자신이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뛰어 넘는 업적의 민주당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야망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야망의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스스로 영악하게 우군을 월 스트리트에서 찾은 것이죠. 하지만 내각에 참여했던 랠프 네이더가 빌 클린턴과 엘 고어가 더욱 강고하게 구축한 신자유주의 질서에 크게 실망했다는 사실은 이 시기 신자유주의에 대한 리버럴의 항복이라는 메타포를 거듭 떠올리게 만듭니다. 특히 앞서 진술했던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 사회의 많은 흑인들이, 사회 안전망의 외주화와 더불어 민영화라는 거대한 교도 행정 산업의 대두로 말미암아 무엇보다 사법 시스템에 의해 이들이 감옥에 투옥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사회의 신자유주의화의 맥락으로 언급하고 싶은데요. 저는 무엇보다 미국의 사법 체계가 범죄자들을 처벌 후에 갱생 시켜, 다시금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이들을 사회에서 철저한 분리시켜 고립에 이르게 만든다는 저자의 분석이 쉬이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즉,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을 일소시키겠다는 그 저변에 깔려 있는 폭력적인 인식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는데요. 맨 앞에서 언급한 그 신빅토리아주의적 맥락이 다시금 생각되는 이유가 바로 역설적으로 이러한 노골적인 영리 행위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8년 간의 클린턴 집권기를 거치고 나서, 그의 후임인 엘 고어를 연방 대법원의 '결단'으로 물리쳐 백악관의 주인이 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는 소위 귀하게 자란 엘리트 가문 출신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의 방황을 딛고 일어선 행적은 당시 세인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는데요. 전임 정부가 남겨준 경제적 호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번 부시 정권은 2001년 9월의 참혹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미국 전체가 의도치 않은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물론 주변인로부터 선량하다는 평가를 받는 콜린 파월 전 국방장관을 압박해, 그로 하여금 거짓 진술을 하게 만들고 기어코 동맹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이라크의 후세인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미군이 개입하게 되는데요. 당시 부시 대통령을 넘어서는 실세라고 여겨졌던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를 비롯한 네오콘 일당들은 이라크에 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하게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이 나라를 수렁으로 빠트립니다. 전쟁 이후에 대대적인 군정과 함께, 이라크 내부를 개혁시키고자 했으나, 결국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여기에 2004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뉴올리언즈의 제방 붕괴로 인한 환경 재앙과 도시 붕괴는 조지 W. 부시의 정실 인사로 말미암아 이 정권의 무능이 드러나게 되는데요. 저자는 이 시기에 딕 체니의 과도한 행정부 개입을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과연 조지 W. 부시가 제대로 된 통치를 하였는지는 개인적으로 큰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난맥상 자체에 그치지 않고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의 신자유주의가 그저 붕괴하는 것을 넘는 전세계 경제의 대폭락이 조지 W. 부시 임기 말에 핵폭탄처럼 터트려지게 됩니다.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등장한 2009년의 오바마 행정부, 즉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달변과 명쾌함, 그리고 누구보다 이성적인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2008년 월스트리트 대폭락의 조짐을 가볍게 여기고 또한 임기 말기에 레임덕에 빠진 부시 행정부의 사실상 비협조로 오바마 행정부 초기 이 거대한 위기 상황의 대처가 직간접적으로 미흡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과 AIG의 유동성 위기로 시장이 이 위기를 통제할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나자, 의회에 막대한 구제 금융 법안을 요청하게 됩니다. 다만 이때에도 신자유주의적 신념으로 강고한 공화당 의원들이 시장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발상 자체를 여전히 거부하기에 이르는데요. 결국 의회에서 수락한 총 700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 금융으로 시장을 정부가 구제하게 됩니다. 이는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언급대로 이때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후쿠야마의 저 유명한 표현대로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종언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는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익숙한 저자의 논법처럼, '인종 민족주의 포퓰리즘'에 강제적인 종언을 당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 위기의 봉합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이 상황을 초래한 금융인들을 기소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심지어 이 금융인들이 공적 자금으로 보너스 파티를 연 것은, 그야말로 '도덕적 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이미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초기 신자유주의자들이 시장의 온전한 기능과 그 지속성에 있어 정부의 역할, 즉 법의 보장이 제일 중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이 그렸던 그림은 사회의 진보 세력을 무력화 시키고,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구축되는 것이 중요한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인지해, 소위 시장 자유를 위한 규제 완화와 사회 부조를 철저히 퇴출시키는 등의 작은 정부 등을 신자유주의 이행의 선결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자체의 이념적 이행과 이를 구축하기 위한 사회 제도적 고안들이 완성이 된 상황에서, 이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가 결과적으로 시민들이 요구하는 개선이 아니라, 아예 판을 뒤엎어 버리는 상황이 초래했는데 그것이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입니다. 과거 오바마 정권이 월스트리트와의 밀착으로 말미암아 2008년 대위기의 화해와 법적 책임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면, 트럼프는 바로 이 월스트리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즉,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를 불신하고 스스로 권력 무대에 나타나 거의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선동으로 다수의 표를 획득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정치인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제가 앞선 맥락에서 왜 도널드 트럼프가 신자유주의의 판을 뒤엎은 인물이라고 칭했냐 하면, 그가 공화당을 이미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의 공화당은 신자유주의 유산을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정당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저자도 글 말미에서 분석하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를 정점으로 단순히 티파티나 대안 우파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지지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공화당 정치가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모양새인데요. 일전에 후베르트 자이펠이 고안한 '푸틴 치하의 러시아'처럼,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공화당은 트럼프의 치하에 놓여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 맥락에서 글 후반부에 거의 절반쯤은 신자유주의가 과거의 유산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자포자기식의 서사가 간혹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만한 어떤 아이디어나 생각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언급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6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적인 일관된 경제사회적 체제가 100년 이상은 지속할 줄 알았으나, 엄밀히 말하면 체제의 변용이 이미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신자유주의로 인한 기득권의 존재는 여전히 무시 못할 정도이고, 반이민과 반이슬람과 맞물려, 껍데기 뿐이었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여러 곳에서 심각한 저항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신자유주의적 요체 자체가 금융 자본주의에 여전히 남아 있어, 아주 완벽하게 신자유주의 체제가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 그리고 유럽과 특히 우리 나라는 완전한 신자유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양상이 도널드 트럼프 개인으로 말미암아 체제가 급속하게 변질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는데요. 다만 도널드 트럼프가 획득하려는 국가 자체가 세계 패권 지위를 갖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트럼프 집권 제2기가 과연 어떤 식으로 세계를 '판의 재편'으로 몰고 갈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상황이라고 여겨집니다.


-지난 미국 30여년 정치에서 민주당과 월 스트리트의 밀착 관계로 인한 당사자들의 오판은 결국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을 초래했습니다. 높은 학력과 돈, 그리고 권력을 가진 소위 진보 정치인들은 자신의 가진 것 때문에 의도치 않은 정치적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는데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우선으로 여기는 논리를 사람에 따라 이중적으로 받아들이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에 선동이 의도하는 맥락이 이런 틈에 여실히 파고드는 이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도 이미 언급했듯이,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은 자신들을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줄곧 거부해 왔습니다. 이는 보수주의자들이 하이에크나 프리드먼을 보수주의자로 여기는 것 만큼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로 확신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그 이데올로기를 설계한 것은 로널드 레이건이었으며, 핵심적인 촉매자의 역할을 한 것은 빌 클린턴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내가 "자유주의"앞에 "신(neo)"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면서 구별하고자 하는 대상은 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손에서 변모하여 생겨난 현대 자유주의다.

레이건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해방적 언어를 20세기 말의 청중에게 먹히도록 부활시켰으며, 이렇게 자유주의를 부활 시킨 것은 그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 된 원인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를 엘리트의 지배를 확장하는 전략으로 보는 이들과 그것을 개인의 해방으로 가는 길로 보는 이들 사이에 존재했던 모순이다.

신자유주의의 설계자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자유방임 자유주의가 얼마나 주변적인 신세로 밀려났는지를 간파했다.

원래 모든 사람의 인격과 개성이 완전히 피어나도록 한다는 것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오랜 전통의 핵심 의제였다.

뉴딜주의자들은 좋은 삶이라는 것을 시민들이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재의 양과 다양성으로 정의하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1989년 당시 우리가 (그리고 믾은 이가) 보수주의를 명이 다한 이데올로기로 다루었던 것은 잘못이었음을 지금은 잘 알고 있다.

공화당이 비록 1940년대에 의회를 되찾고 1950년대에는 백악관도 되찾았지만 그럼에도 뉴딜의 해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주 현실적인 의미에서 공산주의의 위협 때문이었다.

트루먼 정부의 공직자들은 전체주의로 인해 서유럽에 또다시 세계의 종말이 무르익게 될까 봐 근심했다.

아이젠하워가 이러한 고율의 조세 체제를 유지하겠다고 결정하게 된 동인은 무엇보다도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공산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지상 과제 때문이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구타하는 영상, 그리고 남부의 보안관들이 고압 소방 호스를 동원하고 또 맹견까지 풀어 평화로운 흑인 시위대를 공격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 등이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전역에 퍼져 나갔다.

지정학적으로 보면,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가 조속히 회복을 이루는 것이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고 역전시키는 데에 결정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이 기간동안 엄청난 몫의 자원을 군사 예산으로 돌려야만 했고,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에는 그중 큰 부분이 외국에 지출되어 미국의 국제 수지를 악화시켰다.

역사적 단계로 보면 이것이 "새로운 자유주의"의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반란과 폭동의 물결이 늘고 있었으니 유럽과 미국의 엘리트 및 중산층 집단은 크게 겁을 먹게 된다. 우파들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도 똑같이 좌파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게 됐으며, 국가를 무정부상태로 빠뜨리려는 자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권리보다 자기의 이윤이 더 먼저라는 그릇된 주장을 내놓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의사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도덕적 틀을 마련하여 거기에 질서자유주의까지 포함되게 만드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약국 체인인 다트 인더스트리의 소유주 저스틴 다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가 오랫동안 미국 정치에 남긴 영향력을 40년 동안이나 혐오했다.

레이건이 배우 (그것도 B급의 이류 배우)였다는 것 때문에 그가 높은 공직에 오르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레이건의 천재성은 바로 연방정부의 목에다가 거대한 주홍글씨를 걸어 놓은 것이었다.

1970년대에 미국 경제가 쇠퇴하면서 전국적으로 산업 도심의 공장지대가 공동화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로 인해 생겨난 흐름들이 레이건 임기 동안 내내 미국을 악몽처럼 괴롭혔다.

앞으로 보겠지만 다문화주의와 세계시민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조건 아래에서 자본가 및 그 지지자에게 노동자와 타협해야 한다는 압력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번창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번창했다.

3억 명이 넘는 미국인이 단 한 기업, 그것도 규제를 받지 않는 미디어 대기업으로부터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거의 아무런 질문도 제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때 뉴딜 질서를 떠받치는 필수불가결의 기둥으로 여겼던 것이 또 하나, 그것도 민주당 정권의 대통령 손에서 뽑혀 나간 것이다.

클린터은 자기가 만들어 낸 버전의 다문화주의 신념이라면 국경 없는 세계라는 신자유주의의 비전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것이라는 점을 파악했다.

그러자 부시 정부는 전쟁 계획을 살려 내기 위해 오랫동안 정직한 인격으로 존경 받아 온 국무부 장관 콜린 파월에게 2003년 초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짓증언을 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그런데 부시의 세계시민주의는 "신앙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프리드먼 및 클린턴과는 달랐다.

부시라는 인물은 지나친 특권을 물려받은 상속자라는 느낌이 강한 사람이었고, 무언가를 정말로 책임지는 위치에 있어 본 적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한 선동가 중 하나인 앤드루 브라이트바트는 2005년 브라이트바트닷컴이라는 사이트를 연다. 이는 (백인)서민들 편에 서서, 자기주장에 의하면 기득권 진보 엘리트들과 동맹 관계에 있는 미국의 흑인 및 라틴계 빈민 집단을 공격 대상으로 삼아 신나게 막말을 퍼붓는 우파 디지털 뉴스 서비스 였다.

골드만삭스에서 연설한 강연료로 30만 달러를 받았던 것을 두고 왜들 그렇게 난리를 친단 말인가? 월 스트리트에 애정을 표시하고 그 대가로 두둑한 보상을 받는 것은 20년 이상 민주당 정치의 특산품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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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07-18 22: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상세한 리뷰라니 존경스럽습니다!

베터라이프 2024-07-19 01:50   좋아요 3 | URL
너무나 장황한 글에 좋은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