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란 무엇인가 - 반프랑스 혁명에서 현대 일본까지
우노 시게키 지음, 류애림 옮김 / 연암서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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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대 사화과학연구소 교수이자 도쿄대에서 정치사상사와 정치철학을 전공한 학자인데요. 특히 그는 우리나라에는 지난 2014년 번역 출간된 ‘서양 정치사상 산책’으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이 책은 많은 학자들과 독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소개해 드릴 이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는 서양의 근간을 이루는 보수주의에 대한 해석이 동아시아 학자에 의해 쓰여진 경우라 꽤 흥미로운 점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래서 약간 기대를 갖고 책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우노 시게키 선생은 글의 초입에서 보수주의의 버크를 언급하는 보수주의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제도와 관습이며, 이러한 양자는 역사속에서 다듬어져 온 것이고, 자유를 유지하고 민주화를 전제하는 질서있고 점진적은 개혁을 지향하는 근거로 해야 한다고 정의하며, 반대로 무늬만 보수주의자들은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과거의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현실의 역사적 연속성을 무시하며, 자유를 위한 제도를 파괴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한다면 그것은 결코 보수주의라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에드번크가 중요하게 생각해 온 과거의 역사는 단절되어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산이며 그것의 축적된 이야기를 지키는 것이 보수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것도 보수주의의 가치라면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참으로 너무나 부끄러운 자칭 보수주의자들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에드먼드 버크는 이와 관련하여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강하게 부정했는데요. 서로 교류가 있었던 토마스 페인과의 격렬한 논쟁도 바로 프랑스 혁명에 대한 관점이 매우 달랐기 때문인데요. 저자인 우노 시게키 선생에 따르면 버크는 그야말로 과거 역사의 단절이라는 거대한 집합체인 이 프랑스 혁명을 매우 불행한 것으로 본 모양입니다. 자신의 영국은 왕권을 제한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과거의 체제를 부정하지 않았고 자신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과 그의 보수주의는 맞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실 프랑스 혁명으로 공화와 민주주의의 길이 넓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버크가 보기에 이러한 류의 급격한 진보는 결국에는 국가와 사회를 붕괴시키게 만든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는데요. 권리장전을 포함한 영국의 정치 변화 자체가 점진적이고 부작용이 없는 개혁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아마도 이러한 사고의 과정이 자신의 보수주의가 어떤 틀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어 18세기 후반, 버크에 의헤 그 기초가 확립된 보수주의는 그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른 역할을 부여받는데요. 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대척점으로서의 보수주의입니다. 물론 나치 독일 이전의 히틀러의 괴상한 민주주의가 독일의 사회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벌였던 술수의 모습과 같아선 안되지만 사실상 극적으로 이념의 분화가 벌어지고 있던 당시의 유럽에서 영국의 보수주의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문화적인 입장의 전통주의를 중요하게 여겼던 T.S 엘리엇을 저자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엘리엇은 각각의 계급에는 상존하는 문화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을 상위와 하위 개념으로 분류할 수 없고, “한 나라의 문화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국민은 지나치게 통일 되어서도 지나치게 분열되어서도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을 실으며 엘리엇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보수주의의 기반에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공통감각이고 전통 관념이며 나아가서는 유머 감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사회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그 문화적 굴절성에 비교하면 명백하게 다른 것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오해와 오독이 되고 있는 하이에크와 관련해 그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어쩌면 보수주의의 탈을 쓴 자유주의자 혹은 리버럴로 해석되어야 할텐데요. 법의 지배라든지 개인의 자유, 선택의 자유를 중요시 여긴 하이에크는 전체적으로 보수주의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노예의 길은 당시의 암울한 이념의 대결 분위기에서 국가에 귀속되는 ‘개인의 자유’를 위한 반사회주의적인 태도를 지녔던 것은 분명합니다. 뒤이어 합리주의 자체를 비판했던 마이클 오크숏의 사례 또한 법에 따른 통치를 20세기 사회에 복권 시키고자 했던 것 또한 그 역시 보수주의의 틀로 이해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전체에서 저자의 두 가지 통찰을 발견했는데요. 미국의 보수주의가 기독교와 결합해 반지성주의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과 조지 W. 시절의 네오콘이 국제법과 유엔을 불신하고, 반대로 규칙을 지키게 하고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패권이 중요하다고 여겼다는 평가와 이는 곧 과거 미국의 고립주의 전통에서 비이성적으로 변화된 미국의 신보수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라고 여겨집니다. 다만 어빙 크리스톨만 짧게 언급되고 네오콘의 시조인 레오 스트라우스가 언급되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쉬운 점입니다.

성찰적 근대화를 앞서서 부르짖었던 앤소니 기든스의 주장을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과거 세계 제2차대전 이후의 복지와 안정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경제적 주의가 급격하게 보수와 신자유주의로 돌아서게 된 것은 건전하고 도덕적인 진보주의가 부재했기 때문이 아닌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저자인 우노 시게키 선생도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로 영향력이 있는 진보가 전무했기 때문에 보수주의가 사회의 대척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해 봐도 진보와 보수의 건전하고 균형적인 무게추가 사회 안정에 좀 더 기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보수가 존재하는에 대해서도 여기 이 글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21세기의 보수주의는 가급적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야만 하고, 과거 사회주의에 맞서려고 했던 보수주의의 정신대로 법과 사회를 파멸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는 비정치적이고 관념적인 이데올로기들을 견제하는데 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제도와 사회를 신봉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보수의 역할이라면 당연하고 마땅하게 그 앞길에 서야만 하겠죠.


리뷰는 기존의 걸 지우고 다시 재업하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댓글란은 잠시 막아놓겠습니다. 북플 회원만 댓글 가능하게 만들어주시면 좋은텐데 아쉽네요. 익명으로 분탕질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댓글은 막게 되었습니다. 이 점 너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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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피터 자이한 지음, 홍지수.정훈 옮김 / 김앤김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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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켄터기 주립대학 출신의 피터 자이한은 현지 언론의 입을 빌어 표현하자면 ‘떠오르는 전문가’라고 볼 수 있는데요. 미국에서 발간한 2권의 저서가 좋은 평가를 받았고, 지정학과 인구통계학 및 자원학에서 특히 셰일 가스에 대해 연구하는 등 그는 다방면에 걸쳐 연구를 하고 있는데요. 또한 주로 에너지 기업과 금융기관, 미군 등에 세계 정세 분석과 지정학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 등을 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 ‘Accidental Superpower’의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한 글을 올해 7월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3월에 서평을 썼던 조지 프리드먼의 ‘21세기 지정학과 미국의 패권전략’이라는 글과 제법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자이한의 이 책이 좀 더 내용이 두텁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국내에 (다소 공격적)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로 유명한 이춘근 교수의 추천의 글이 있어서 저로서는 조금 기대반 두려움 반이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분류해 본다면, 1장부터 5장까지는 지리경제학의 수단으로 과거 셰계에 영향을 끼쳤던 국가들과 배경 등을 담고 있고요. 이후 나머지 15장까지는 인구통계학과 더불어 미국의 패권을 중심으로 각 지역의 분석과 앞으로의 전망 등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자이한이 말하고 있는 바는 미국의 패권이 결코 끝난것이 아니며, 이제서야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중이고, 앞으로 미국의 그것에 도전하는 여러 국가들과 협력할 만한 상대국, 돌출 행동을 보일 국가들에 대해 인구통계학과 지리경제학 및 다른 제반 수단 등을 동원해 꽤 세밀하게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자의 주장에 수긍하지 못할 부분도 제법 있었는데요. 이를테면 그리스와 관련된 분석에서 “그리스 정부는 유로를 담보로 복지 국가를 만드는 데 돈을 흥청망청 썼다”는 것은 꽤 공격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와 비슷하게 글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주도적인 미국의 패권과 영향력 대 다른 변수, 다른 부상하는 국가,돌출 행동의 여지를 갖고 있는 국가, 협력 가능성이 있는 국가 등으로 일종의 양자분석으로 약간의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분명 글의 한계라고 봐야할지, 스스로 국제 정치에서 어떤 변수가 어떻게 작용하고 그 파급효과가 어떤식으로 나타날지 충분히 알고 있는 학자임에도 뭔가 과한 해석이랄까요. 꽤 훌륭한 자료들과 인구 분석에 따른 국가간의 양태에 대한 현명한 통찰력은 분명 있어보이지만 과한 분석들도 있어서 좀 아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가지 더 예를들면 캐나다의 앨버타 주가 미국에 편입될 것인가와 같은 분석 그리고 그 결과로 캐나다의 분열 이런 측면의 해석은 좀 과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저자는 미국의 오늘날 미국의 패권이 기틀을 잡게 된 역사적 사건으로 2차대전 이후 세계 질서와 경제 문제 등 제반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브레튼우즈 회의’를 꼽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달러로 연동되는 금본위 체제인 바로 ‘브레튼우즈 체제’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전후 미국의 시장을 각국에게 개방하고 막대한 재정적 원조 그리고 각 자원로에 미국의 해군을 파견하여 수송로를 안정시키는 등의 여러 차원에서의 세계적 임무를 미국이 자임했고,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 밖에 없었으며 이 시기 전의 영국은 이미 미국의 도움으로 전쟁을 종결지어 과거의 영국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없음은 자명했고 마찬가지로 프랑스나 소련 또한 그러했다고 분석합니다. 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이 책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큰 골격이 되고 이런 상황에 저자는 미국의 이익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함구하고 있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사실상 양날의 검이라 볼 수 있는데요. 기축 통화국 주도의 금본위제도는 일장일단이라고 봐야하는 막대한 통화발행과 다소간의 무역적자를 잉태했습니다. 결국 미국이 주도적으로 전후 질서를 만드는데 이 브레튼우즈 체제가 기여한 측면은 있지만 세계 경제의 활성화 및 그로 인한 산업 발전 단계의 자원 배분과 수송로의 안전 확보 등에 미국의 해군력이 크게 기여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 아닌가 또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를 중동의 맹주로 만들고 이스라엘을 정착시킨 것은 오로지 미국의 의도였다고 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영국과 프랑스의 수에즈 개입을 무산 시키고 중동을 대체로 안정시키려고 했던 것은 자국의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팍스 아메리카나’의 도덕적 사명감을 갖고 행한 일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이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찬성해야 했던 이유는 싸우고 싶어서도 아니고, 지역 전략을 고려할 때 전쟁할 가치가 있어서도 아니다. 참전하지 않으면 미국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그러면 동맹체제 전체가 와해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저자는 밝히는대요. 베트남 전쟁과 한국전쟁을 동일하게 미국에 대한 신뢰문제로 주장하는 것에는 전부 수긍하기는 어려웠지만 일종의 미국의 딜레마가 엿보였습니다. 이익이 존재하지만 어찌됐든 댓가를 치뤄야하만 그런 주고 받는 입장 말이죠.

물론 이 책의 큰 장점은 꽤 훌륭한 기법으로 전세계를 독자들이 조망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기사에 나온 ‘카스피해를 호수로 볼 것이냐, 바다로 볼 것이냐’에 대한 일종의 일차적 정보와 같은 부분이 이 책에 담겨져 있습니다. 각 지역의 해당국들에 대한 언급도 잘 나와 있고요. 특히 우리나라에 대한 분석은 “앞으로 한국이 미국의 동맹체제에 뚜렷한 기여를 할 수 있는 협력국이 될 것이냐 아니냐는 한국에게 달려있다.”라는 분석으로 나옵니다. 한미 동맹이 오로지 한국에게 달려있다 라는 식의 해석은 아닐 겁니다. 동맹의 주도권이 우리나라에게 있을 순 없겠죠. 한국이 오스트레일리이와 뉴질랜드와 더 협력을 기울이고 이 지역의 미국 주도 바퀴살 동맹 체제에 기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모양인데요. 중국이 체제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명확히 하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주도의 동맹 외교는 다른 쪽으로 봐야된다고 자이한은 여기는 모양입니다. 전체적으로는 국제 정치를 보는 시각이 미국 위주의 보수적인 입장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래 국제정치학이 지정학과 인구문제와 만나 또 새로운 국면을 보이고 있는데요. 국제정치학 자체가 수많은 변수로 이루어진 권력 관계인 만큼 힘을 가진 국가가 주도권을 갖으려고 하는 태생적인 부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하는 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여기에다 지정학이 어떤 해석을 더 보여줄지는 앞으로 계속 출간되는 관련 책들을 통해 집어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거의 5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의 글이었는데요. 번역은 크게 나무랄데가 없었습니다. 동아시아 지역에 관련된 지도에서 동해를 ‘sea of japan’ 그대로 나와 있는 것을 복사 붙여넣기 해서 살짝 기분 나쁘긴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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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고쳐쓰기 -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괜찮은 자본주의로
세바스티안 둘리엔 외 지음, 홍기빈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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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뿐만 아니라 세계 사민주의의 입장에서 많은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프리드리히에버트 재단의 기획으로 세바스티안 둘리엔, 한스외르그 헤어, 크리스티안 켈러만 이 세 명의 저자가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위기와 이를 넘어서 ‘괜찮은 자본주의라’는 모토로 꽤 놀랄만한 저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번역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인 홍기빈 소장이 맡았고, 한겨레출판에서 책의 출판을 책임졌습니다.

전체적으로 여기 글의 중점적인 주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사회 통제의 철저한 우위”라고 저자들은 밝히고 있는데요. 이미 케인스가 상세한 자료와 입증할 만한 데이터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확성을 담보할 수는 없고, 단지 우리는 모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특히 시장 경제에 있어서 도사리고 있는 많은 리스크들과 예측 불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더이상 시장이 우리에게 인간의 불합리성을 대체해 주리라는 것은 이미 허구임에 밝혀졌는데요. 즉, 공공의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는 시장이 되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각 국가의 주권의 권리라 여겨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는 시장의 점진적인 실패로 말미암아 벌어지고 있는 유럽의 민족주의의 재현이 얼마나 위험한 단초인지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주의깊게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1부는 2차대전 이후 1970년대를 거쳐 시장 자유주의가 다시 발흥되면서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로 비롯된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에 대해 평가하고 그것의 주된 기반이 되었던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주로 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스베르너 진의 ‘카지노 자본주의’가 훌륭한 참고 자료가 될텐데요. 금융 시장에서 금융인들의 정보 제한과 시장 참여자의 합리성을 무기삼아 이에 언론인들과 정치인, 사상가들이 여기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해, ‘부채의 무분별한 증권화’로 비롯되는 수많은 금융 기법 등이 시장을 어떠한 식으로 붕괴시켰는가는 지난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로 익히 알려진 바가 있습니다. 미국과 같은 경우에도 글래스-스티걸 법이 무력화 되면서 금융계에 대한 규제가 철폐되고 2001년 이후 금융 시장이 자본주의에 있어서 새로운 성장 원동력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자 이러한 파급이 더욱 가중된 것인데요. 이는 자유 시장 논리에 입각한 무분별한 규제 완화가 어떠한 결과를 일으켰는지 보여준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지난 2007년 이후 서브 프라임 모기지와 관련된 미국의 손실이 IMF 추산 5000억~6000억달러로 집계된 바 있습니다. 거의 대규모 카지노적인 도덕적 해이이며, 시장이 만능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 결과입니다.

뿐만 아니라, 레이건 시대 이후 “주요 보수파 정치인들에게 노동 조합의 세력화와 노동자의 권익 보호 따위는 이들에게 눈엣가시였다”는 설명과 나날이 그 격차가 심각해지는 소득 불평등이 미국의 큰 사회 문제가 되었고, 복지를 시장경제의 크나큰 해악이라는 날조를 유포시킨 이들 보수층의 행동이 오늘날의 사회 안정망의 붕괴와 빈부 격차를 크게 악화시킨 일종의 이념적 프로파간다의 폐해라는 분석이 옳은 이유인데요. 저는 이러한 미국의 사례로 그렇게 막대한 사회이념적이고 정치권의 백지 수표 지원을 받은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미국 국민들의 기대를 산산이 저버리고 막대한 쌍둥이 적자국이로 전락시켰는지 명확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의 저자들도 앞으로 통제권을 사회로 갖고 오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있으며, 이 점과 관련하여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3국의 사례와 금융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한 지난 중국 정부의 정책을 비교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만 미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가 바탕이 된 독일과 중국, 일본 등의 막대한 흑자국들의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분명하고, 이렇게 미국의 만연된 적자 기조에 기대어 다른 국가들이 번영을 누리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세계 경제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겁니다.

이에 2부에서는 앞으로 우리가 좀 더 괜찮은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해서 공공 부분의 정부나 시민들이 인지해야만 하는 사항들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뉴질랜드나 미국 등을 통해 공공 부문의 시장화의 실패에 대해 다시 공공부문을 세우고, “만사를 시장에 맡겨놓기만 한다면 공공재의 공급은 불출분해진다”고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소득 불균형에 대해서는 특히 최저 임금은 평균 임금의 상승에 맞추어 조정되어야 하며, 더 싼 노동력을 위해 이동하는 대규모 자본들과 그것을 수단으로 삼아 평균 이하의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일종의 노동에 대한 시장주의적 관점이라 볼 수 있지만 이것을 개선하기 위한 임금 부조와 같은 장치들을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최저 임금제에 대한 것은 전적으로 정치적인 일이 되어야 하고 그것을 시장의 문제로만 여기는 것은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전 지구적 금융 자본에 대해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며 새판을 다시 짜는 것과 마찬가지의 여러 방책을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데요. 이미 금융권에 대한 자기 자본 비율에 대한 사항과 여러 개선 사항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 자본 잠식과 같은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고 금융 시장에서 도덕적 해이가 벌어지게 되는 무차별적인 이익 추구에 대한 한계 설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데요. 국제적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가 과연 실효성이 있을지는 좀 더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고 자본을 가짐으로써 자본 이익을 얻고 있는 소수의 부유층들에 대한 실질적인 과세를 부여하는 것이 좀 더 중요하지 않나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일전에 미국 당국은 스위스의 UBS에 압력을 넣어 미국인들에 대한 계좌 정보를 건네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수단들이 좀 더 면밀하게 고안된다면 그것이 좀 더 효과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아직도 산업 발전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많은 국가들과 탄소 배출권과 관련된 이견, 앞으로 녹색 성장과 같은 환경친화적인 수단의 마련은 시급하고 중국으로 뒤이어 인도와 같은 거대 인구 국가들의 역할이 중요할 텐데요.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있는 국가들과 후발국 들 간의 전반적인 조정과 타협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경제학자들도 환경과 상생 발전 가능한 이론을 고안해 내는데 노력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겠죠.

끝으로 우리의 경제학은 여전히 스미스의 그늘하에 있다고 무방한데요. 신고전파로 불리우는 주류 경제학이 아직도 인간의 이기심과 사적 이익 추구에 많은 손을 들어주고 있고 정부의 역할에 대해 회의를 품은 학자들이 더 많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낙수 이론은 이미 허구임에 드러났고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개선하는 것만이 파국을 막는 길임을 인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의 저자들도 인정한 우리의 자본주의를 좀 더 인간적으로 만들어 다시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아마 많은 독자들이 수긍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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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당연한 권리, 시민배당 - 기본소득으로 위기의 중산층을 구하다
피터 반스 지음, 하승수 해제, 위대선 옮김 / 갈마바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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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와 뉴 리퍼블릭 등에 활발한 경제관련 기고를 해 온 저술가이자 지난 수십년간 사회적 기업을 운영한 기업가로서 미국 내에 적지 않은 명성을 쌓은 피터 반스의 이 책은 지난 2014년 출간된 ‘With Liberty and Dividends for All’을 국내에 번역 출간한 것입니다. 특이점은 따로 녹색당의 하승수 공동운영위원장이 해제에 참여했는데요. 그만큼 시민들의 소득에 관련된 이슈와 관련하여 국내에서도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 글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피터 반스는 오늘날 만연된 소득 불평등과 관련하여 창의적인 2가지 의견을 갖고 있는데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소득은 필요하다는 것과 공유재 개념을 이용해 국민 배당을 실시하자는 주장입니다. 자신이 밝히는 기본 소득과 관련하여 현재 일정부분 소득을 올리고 있는 시민들에게 공유재를 비롯한 차후 소득을 지원하는 것이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전제하고, 이와 관련하여 “일을 하지 않는데 돈을 주면 사람이 게을러진다”는 반대 의견에는 위의 주장을 선동으로 판단하고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제시된 모든 방안에 적용되므로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며 불평등에 대한 많은 시민들의 근본적인 의식 변화 필요성에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소득 불평등과 관련된 각 사회의 갈등에는 자본주의 내의 시장 우선적 관점과 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기득권층의 배타적 의견이 전제되어 있어 이것을 시민적 공감대로 확대하여 시민들의 기본권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요한 사항임을 인식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싶은데요. 이미 사회 갈등이 어느 정도 진행된 사회에서는 각 계층간의 견제와 홀대가 만연되어 있어 이를 먼저 극복하는 것도 우선되어야 할 사항일겁니다.

1880년에 고안된 세계 최초의 사회 보장 보험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주도된 사업입니다. 이는 당시에 나날이 확장 일로에 서있던 사회주의적 조류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는데요. 저는 이런 피터 반스의 언급을 ‘오늘날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해야만 하는 그리고 이것이 사회주의적 접근이 아니라는 의미로서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정하고 그것을 개선하는데 노력하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여겨지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피터 반스가 제시하는 시민들의 기본 소득과 관련된 다른 수단의 언급은 자본주의와 그 시장이 다하지 못하는 것을 일종의 보조적 방법으로 보완하는 것이겠죠. 반스도 시장을 타파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개선하자는 입장을 명백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4장과 6장은 매우 중요한데요. 4장의 초과 이윤과 관련된 자본과 노동에 대한 고찰과 “초과 이윤은 전체에 초과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서 가져온 것으로 구성된다”고 언급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초과 이윤을 바탕으로 6장에서는 미국 알래스카 주에서 현재까지 행하고 있는 ‘공유재인 석유 생산의 이익’을 공공 펀드화 같은 방식으로 알래스카 주의 주민이 각 1주를 부여받아 배당금을 분배하는 것인데요. “지금까지 매년 모든 알래스카 주민에게 1000달러(4인 가족이라면 4000달러)가 넘는 배당금을 지급했으며, 2008년에는 1인당 3269달러를 지급해 최고 기록을 세웠다”고 그는 소개하는데요.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자원을 공유재로 만들어 그것의 이익 시민들에게 소득이라는 혜택을 보장한 신선한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 나라에 이와 같은 것을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관점을 바꿔서 국민 연금이나, 국부 펀드에서 발생되는 이익을 전환해 시민에게 돌려준다거나 직접노동세를 감면해 실질적으로 소득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고민해 볼 여러 조건들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국부를 여러 인프라나 공공 지원에 할애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금 발상을 전환해 여러 방안을 고민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책의 반스도 8장에서 탄소 배출권과 관련된 사항에서도 상쇄권을 이용해 시민들에게 혜택을 돌릴 수 있다는 의견을 또한 개진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이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소득 불평등과 관련된 문제를 복지 제도의 개선과 같은 일방향적인 수단으로 바라봤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우리 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충분한 대체 자원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래서 반스의 제안은 꽤 창의적인 의견과 해석이 뒷받침되는 진지하게 고민해 볼만한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나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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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오류 - 던컨 폴리의 경제학사 강의
던컨 폴리 지음, 김덕민.김민수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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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예일대학에서 수학하고 MIT. 프린스턴대학, 컬럼비아 대학원 등지에서 강의했던 던컨 폴리는 특히 ‘자본의 이해’라는 글로 경제학에서 큰 명성을 얻었는데요. 그의 책 ‘아담의 오류’를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온전히 주류경제학을 따르는 학자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보수적 이론을 추종하지는 않고 이를테면, 정부의 역할이나 개인의 이기심에 대한 재해석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실상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경제학이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기심의 확대가 인간 사회를 진보시킬 수 있다는 관점은 그것의 맹점이 어떠한지는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폴리의 이 책은 유사한 방식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얼마전에 작고한 조반니 아리기에 의해 우리가 통념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던 애덤 스미스의 실체를 알 수 있었는데요. 이 글의 서두에서도 폴리는 애초에 도덕철학자에 가까웠다는 평가부터 후에 명성을 얻게 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표현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요소들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특히 스미스와 관련해서는 그가 ‘사적인 부의 축적이 공적인 이익으로 생각했는지’에 대한 해석으로 ‘현대의 개인주의적 후생 경제학에서는 개인의 후생이 아닌 전체 사회의 후생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관된 논지인데요. 이것은 대표저인 아담 스미스의 오류로 즉, ‘이기적인 행위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어떻게 해서든 공적인 기여로 전환될 것’이라는 주장에 이르게 됩니다. 개인의 이기심 추구를 기본적인 측면에서 선으로 여기고 그것이 결과론적으로 사회에 복이 될 것이라는 점은 그의 ‘자유방임주의’와 더불어 오늘날의 상황에는 복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폴리도 이와 관련하여 자유 방임이 아니라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과 같은 아시아의 호랑이들은 관세 부과, 수출 보조금, 저금리 대출을 통해 성공적으로 유치산업을 육성해 왔다’고 언급하며 경제 개발 초기에 있어서 이들 국가들처럼 정부의 개입과 보조금의 활약이 있었고 이것을 스미스의 해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중국도 그러했고 인도 또한 그 길을 밟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어 우리에게도 유명한 데이비드 리카도와 긴밀한 교류를 해온 전업 정치경제학자이자 인구론의 저자인 토머스 로버트 멜서스의 대해 나아가고 있는데요. 그는 당시 인류는 비참함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수학적 필연의 결과로 이어지는 높은 사망률, 특히 높은 영아 사망률로 인해 당시 여성의 피임을 통한 성교가 자연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악’이라는 영국 국교회의 입장을 따랐습니다. 전체적으로 멜서스의 학문적 성향은 음울했다고 봐야하며 인구학적 균형과 빈곤율 문제에 대해 연구를 벌였는데요. 특히 “복지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멜서스의 정치경제학적인 접근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폴리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멜서스는 선구자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며, 리카도를 비롯한 당대의 경제학자과 때론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엄격한 비판으로 알려져 있는 칼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이른바 ‘혁명의 공포’로 인한 그에 대한 배외적 분위기가 있어왔지만, 과거 냉전 구도 시기에서 학문적 목적에서 조차도 마르크스는 금서가 되어 왔는데요. 여기에서 폴리는 그의 유명한 저작 ‘자본론’을 통해 자본을 만들게 되는 상품과 이윤 그외 토대들에 대해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알려진 일반적인 내용들이라 새로운 것은 거의 없지만, 특히 기독교에 대한 비판인 “기독교는 죄와 사후의 삶에 대한 심리적 강박을 주입하면서 사람들을 직접적인 현실적 삶으로부터 괴리시켰다”고 여기는 것은 과거 냉전 시기 사회주의 국가들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작은 실마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시민들에게 일정부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명백하며 물론 개선할 부분도 분명 있지만 종교의 자유는 개인의 선택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념으로 봤을 때 충분히 보장해야 될 부분이라고 봐야겠죠. 다만, 이윤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명백한 그의 분석인 ‘자본이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아니면 노동이 만들어내는 것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더욱이 폴리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임금은 노동자들이 이런 상품들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만 한다” 소개에서 실질소득이 물가상승률 등을 반영해야 한다는 오늘날 많은 학자들의 이론적 토대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는데요. 전체적으로 경제학에 있어서 자본의 구성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오늘날의 상황에 비교해 봐도 크게 떨어지지 않은 이론은 얼마간의 비판에도 써먹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효율성 개념과 관련하여 한계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한계주의적 접근의 시각은 심각한 가상적 비약에 기초하고 있고, 한계주의자들은 개인이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함으로써 균등화되는 한계효용의 비율과 현실 경제의 실제 시장가격을 매우 유사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측면에서 폴리는 비판하고 이러한 한계주의적 관점이 부딪힌 한가지 난점은 “경제가 효용을 극대화하면서 서로 경쟁하는 수많은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명백하게 분석합니다. 저는 이를 개인의 이기심은 각자가 최대를 누리려고 하며, 이들은 경쟁상태에 있다는 측면에서 이것이 한계 상태에 있는 자원과 관련하여 이를 원활하게 충족시키기란 더없이 어렵다고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초에 이런 한계주의자들의 평면이론적 접근은 적절한 모델이 없다고 봐야하겠죠.

결국 존 레이너드 케인스가 활동하던 시기 이후 고전적인 경제학의 관점이 개선되어졌고, 적절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여긴 그의 주장에 대해 많은 전통 경제학자들이 비판을 가했지만, 거대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사조에도 불구하고 케인스에 대한 많은 연구와 분석이 이뤄졌고 현실에서도 적극 그의 이론이 고려되었습니다. 폴리는 그의 여러가지 입장 중에서도 “화폐임금과 화폐 물가의 연속적 하락은 상당한 수준의 실업을 겪고 있는 경제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해결책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개념적으로는 이를 물가론과 결합시켜 화폐 발행에 대한 선택이 필요하고 이러한 매커니즘은 잘 작동할 수 있어야만 올바른 것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경기 순환과 관련하여 사회의 실업 문제는 어디서나 심각한 문제일텐데요.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자본주의적 기조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시장의 가격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다소 무리해 보인다 하더라도 기업에 제공하는 노동력의 가치를 오로지 시장에 일임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을 너무 과신 하는 것이며 공급과 수요에 대한 일차론적인 입장에 급급해서는 오늘날 복잡한 사회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 경제 논리에 입각한 수단들은 엄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책의 전체적인 입장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마찬가지로 폴리는 한때 자유주의의 부활과 융성을 부르짖었던 하이에크와 같은 입장은 단지 다른 방식으로 아담 스미스의 오류를 표현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결국엔 이 아담 스미스의 오류를 벗어나는 것에 경제학의 운명이 있지 않은가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거의 결론에서 폴리는 다루고 있는데요. 종내에는 인간이 경제학을 탄력적으로 수용하여 사회에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균형적 발전에 힘을 쏟음으로써 그 역할을 경제학이 해야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반니 아리기는 “경제학이 사회에 개입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는데요. 어느 학문이나 사상에서 마찬가지겠지만 맹신을 하지 않는 것을 제일 가치로 삼아야 하며, 끊임없이 탐구하고 개선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결론지어 봅니다.

끝으로 이 책은 저의 짧은 경제학 지식으로 일독이 오래 걸린 책중에 하나가 되었는데요. 여간 집중하기 어려워서 후에도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경제적 역사와 그 논리에 대해 꽤 명쾌하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를 내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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