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 혁신
뤼크 페리 지음, 김보희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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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프랑스 생시몽 재단에 몸담고 2002년에서 2004년까지 프랑스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던 뤼크 페리의 이 ‘파괴적 혁신’이라는 글은 자본주의에 강요된 끊임없는 혁신에 대한 저자 자신의 철학적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프랑스 학계에서는 뤼크 페리에 대해 자크 데리다를 잇는 사상가로 평가하는 듯 한데요. 다른것 보다도 자본주의가 이제는 성찰이 필요하고 소비 만능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데리다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의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오히려 슘페터의 의견과 유사하지 않나 여겨지는군요.

뤼크 페리의 자본주의에 대한 입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끊임없이 강요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에 이르러 인간들의 삶이 풍족해졌고, 자본주의 경제는 대중을 비극속으로 몰아넣지 않았다”고 평가하고 앞선 혁신의 본질은 “생활 수준, 고통, 심지어는 자유 같은 부분에까지 미치게 될 잠재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측면의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본주의에서 베버가 말한 것처럼 ‘개인들의 합리적인 이익추구’가 자본주의의 원동력이라면, 개인들이 모인 대중이나 혹은 조직이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이익추구’ 내지는 ‘합목적적인 이익화’를 매번 답보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대량소비를 포함한 기업의 이익획득이 항상 건전하게 끝나지 않는 것은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페리도 “자본주의는 무도덕”이라고 전제하며, 오늘날 사회문제를 비롯한 시급한 성찰의 원인이 되고 있는 ‘자본주의적 혁신’에 대해서도 “국가 정책은 정부의 수단을 점점 더 무효화시키는 세계화에 또다른 혁신을 위한 혁신”으로 왜곡될 가능성에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 광적인 미디어”에 의해 이러한 현상이 과속화 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다만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과 유권자들은 언론이 쉽게 주무를 수 있다는 페리의 단언은 조금 논란의 여지 보다는 좀 더 숙고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통찰력인 “민주주의야 말로 궁극적으로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노조 운동, 정치 운동 등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적극적으로 권하는 유일무이한 정치 체제”라는 말대로 우리는 이제 민주주의를 다소 병들게 하는 이 자본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성찰의 시기를 시습하게 진행해야 하며, 사회 전체를 움직여 ‘고도 대중 소비’에 몰입하게 만들고 소비와 중독이 동일시되는 사회를 만연하게 하는 것을 개선시켜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에 대해 대중들이 다시 열정을 키워보자는 함의로 권유하고 있습니다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역시 시민의 역할이 지대하게 필요하다는 것과 사실상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리 시민들의 당연한 임무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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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2
칼 슈미트 지음, 김항 옮김 / 그린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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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정치적 격변기에 공법학자로서 때론 관제학자로서 이름을 떨친 칼 슈미트는 세계2차대전 이후 전범 혐의를 받고 1947년 뉘른베르크 감옥에 수감되고 후에 미국에 의해 ‘혐의없음’으로 풀려난 것은 그의 개인 편력에서 정치적으로 꽤 민감한 일이었습니다. 역자 역시 이 점을 감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문에서 ‘슈미트로부터 대안을 이끌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임을 그의 편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언급하는데요. 이 슈미트의 유명한 논저인 ‘정치신학’은 1933년 이후 나치와 관련된 자신의 입장에 대한 ‘변명’이라는 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설에 대해 논박되어 왔는데요. 며칠전에 읽은 아감벤에 의해서도 이점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이론에 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법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들이어야 한다는 역자의 주장은 뭔가 사리에 맞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저에게는 묘한 논점을 불러일으킵니다. 적극적으로 논박하고 싶은 욕구 말이죠.

이 4편의 논문이 실려 있는 ‘정치 신학’은 전세계의 법학자들은 물론 사법 관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책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실증법주의적인 사법체계를 갖고 있던 국가들을 묘하게 비웃은 것으로 느껴지는 칼 슈미트의 서문의 끝자락을 보더라도 뭔가 매치가 안되는 상황으로 느껴집니다. 1장은 (본질적으로) 예외 상태를 규정하기 위한 주권에 대한 정의를 2장은 법의 결단주의적 입장에서의 주권 문제에 대한 볍형식에 대한 설명을 3장은 군주제와 신학개념으로 해석한 정치신학에 대한 문제를 4장은 반혁명 국가철학이란 주제로 무정부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전에 아감벤의 ‘예외 상태’를 읽기 전에 먼저 이 책을 일독해야만 했으나 조금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 흔히 주권에 대한 논의로 잘 알려져 있는 1장은 “주권자는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정의하며 이러한 측면에서 “헌법을 완전히 효력정지시킬 것인지 어떤지를 결정하는 것이 주권자의 고유 권한”이라고 슈미트는 파악하는 듯 보였습니다. 이것은 바이마르 독일 시기에 점차 범람하고 있던 사회주의적 싹과 관련된 법과 국가의 예외조항을 삽입하기 위해 힘썼던 칼 슈미트 본인의 과거 행적과 연관되어 있는데요. 그는 노골적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식선과 예외적인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취급하며, 사실상 2장까지도 이 예외 상태를 보충하기 위한 부분이라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예외 사례를 무시하는 자유주의 법치국가의 원리를 비판하고, 일전에 토크빌이 말한 “민주주의적 사유에서는 인민이 모든 국가적 삶 위에 군림한다”는 명제를 뒤집는 듯한 느낌을 극명하게 받았습니다. 주권이 누구에게 부여되냐는 측면에서 슈미트의 모호성과 국가를 인격으로 자세히 설명하면서 ‘국가는 법을 만들어 내는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도 결국 이 ‘예외상태’를 일반 상식선에서 설명하려는 것보다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제시하는 동일한 것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된 것은 2장이 되겠고요. 법에 있어서 ‘결단주의적 입장’을 대체로 옹호하는데 글을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슈미트는 국가와 법의 권력이 대등하다는 규정은 불분명하다고 마찬가지로 언급하며, 애초에 법과 권력은 합치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사후적으로 국민 투표와 같은 것으로 법적 근거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해석은 어쩌면 이상주의적으로 보이는데요. 현실적으로 많은 국가에서 사법 권력이 선출이 아니라 사실상 획득되는 권력으로서의 문제점을 애초에 피하려는 건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인지는 파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막스 베버의 인식대로 ‘대다수의 사법 관료들이 정치 권력에 대한 우월성을 유지한다’는 측면은 많은 국가들의 사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 체제하에 삼권 분립은 마땅히 중요한 부분이지만 많은 사법부들이 매우 특수한 환경과 특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실증주의적인 사법체계의 확립이 무조건적으로 기피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집니다. 슈미트는 법의 특수한 위치와 체계로서의 가치를 내내 강조하고 있는데요. 오늘날 주권자들에 의해 성립되고 그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이 민주주의적 삼권 분립이 강조하는 바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증주의적인 사법제도하에 예외상태를 두거나 마련하고 해석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긍정적으로 작용할지에 대해서는 꽤 의문을 갖게 됩니다. 아감벤도 예외 상태에 대해 슈미트가 독재 상황을 지지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데요. 현실적으로 사회주의가 소멸된 상황에서 민주주의 체제 하에 예외 상태란 현실적으로 극히 받아들이기 힘든 무정부의적인 상태와 독재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회주의가 이렇게 붕괴된 상황은 슈미트 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3장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정치적 상대주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포함한 정치적 법치주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 극단주의는 다소 완곡한 표현으로 거부하고 있는데요. 다만 형이상학에 대한 입장은 슈미트에게 있어서 비판당하며, 특히 비합리주의적인 것을 배격하는 형이상학적인 태도를 고려해 봤을 때, 이러한 ‘자의’를 봉쇄하는 형이상학이 마찬가지로 ‘예외상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장은 17세기 예스파냐 외교관이자 정치적 극단주의의 일인이었던 도노소 코르테스를 언급하면서 무정부주의를 비판하고 코르테스가 ‘자유주의자’를 경멿했던 것과 이에 무신론적이고 무정부의적인 사회주의를 불구대천의 적으로 여긴 것을 뭔가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계몽주의 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장 자크 루소가 말했다는 ‘인간의 악함’에 대해서는 저 개인적으로는 루소가 ‘인간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는 입장이 더 정확하고 그런 측면에서 루소의 인민주권론에 계몽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밝혀지고 있습니다. 바쿠닌을 비롯한 당대의 무정부의자들은 인간을 선하다고 봤으며 아마도 슈미트의 이러한 해석은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코르테스로 비롯되는 무정부주의적인 모든 것에 대한 비판과 혐오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미 사자인 칼 슈미트는 이 얇은 책이 과거 바이마르 시대의 예외 조항을 만들었던 행적과 얼마간에 관련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레오 스트라우스와 가까웠고 후세에 많은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에게 하이데거와는 다른 입장에 처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상 그의 일관된 태도를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었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가택에 칩거하여 사색을 했는지는 본인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는 한줄을 마음에 품고 살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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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가능한가 - 새로운 정치 토론을 위한 원칙 현대의 지성 146
로널드 드워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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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와 옥스포드에서 수학하고 뒤이어 로스쿨을 졸업한 후에 세계적인 로펌에서 일하다가 런던 대학, 뉴욕 대학 등에서 강의한 로널드 드워킨은 CBS를 비롯한 방송에도 출연해 미국에서의 법과 제도에 대한 여러 유명한 강연을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비교적 대중과도 친숙한 지식인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측면에서 미국의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 거대한 정치적 양극화와 극심한 빈부 격차, 인간 기본권의 경시 풍조에 대한 건전한 입장을 담은 책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를 읽었습니다.

이 글은 크게 5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장은 이 책을 쓰게 된 저자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가 있고 2장은 테러리즘의 시대의 미국 시민의 인권 3장은 종교와 존엄, 4장은 부시 행정부 시기의 과세주의와 과세 전반에 대한 분석으로 5장은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와 이에 다수결주의에 대한 이성적인 불용인과 미국 헌법에 대해 짧게 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도입부에서 현재의 미국 민주주의에서 붉은 문화와 파란 문화의 두 부류가 있는데 이 들 두 부류간의 이성적이지 않은 논쟁이 오늘날 극단적 정치적 양극화를 가져왔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이에 ‘인간에 대한 심오한 가치’를 전제하고 헌법이 규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으며 이러한 기본권을 먼저 전제하고 나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양편에 있는 이들이 생산성 있는 토론에 나서야 한다는 원칙을 더불어 제시합니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란 ‘권력자들로부터 개인의 삶에 본질적 중요성이 있고 삶에서 그 가치를 실현할 개인적 책임이 있다는 인정에 따라 취급 받을 권리’라고 저자는 규정하는데요. 과거와는 달리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선출한 시민들을 위해 더이상 일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오늘날 만연된 미국의 금권정치가 더욱 이러한 시민의 기본권이 더이상 중요시 하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의 양측이 정치적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수준의 이념 논쟁에 돌입하여 결국 당면한 시민들의 현실 문제 해결과는 동떨어진 파급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이러한 논의에 대한 것을 1장에서 전제하고 2장부터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들을 하나하나 짚어가고 있는데요

즉, 2001년 뉴욕 발 테러로 인해 시민의 기본권과 국가 안보의 상충되는 부분을 어떤식으로 해결해야 되는지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이 이어졌고 이것은 미국의 정치 뿐만 아니라 입법기관과 사법기관에도 영향을 끼쳐 ‘심지어 개인의 동의 없이 도서관에서의 대출 이력까지 정부 기관에 제공’하는 등의 심각한 기본권 침해들이 발생했는데요. 이것이 고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정부 기관의 편의만을 위한 이러한 정책들이 오늘날 미국 시민의 심각한 인권 위협이 되고 있는데 이것을 정치권들은 너무나 편의적으로만 해결하려고만 한다며 미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에 대해 저자는 다시금 강조하고 이를 원칙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9.11 테러에 가담한 테러리스트들의 국적이 이라크라고 알고 있거나, 나토에 러시아가 포함되냐 포함되지 않냐는 등의 기본적 인식이 부족한 시민들의 무지도 이러한 상황을 방조했다는 생각이 저는 문득 들었습니다. 테러리즘과 인권이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는 문제에 대해 이라크 전쟁에서의 포로들을 제네바 조약에서 보장하는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불법적인 고문과 제한없는 구금 상태에 있는 이라크인 포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는데요. 사실상 이러한 부분들은 국가 안보를 무엇보다 우선하고 이를 배타적으로 받아들임에 따라 다른 중요한 것들을 주변부로 취급하는 경우입니다. 민주주의적인 정부가 이러한 행태를 보이는 것은 선출된 권력의 매우 비헌법적이고 불법적인 행위인데 이것을 시정하지 않고 작위적으로 판단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포로 고문을 포함한 행정 명령은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어 3장은 일찍이 리차드 호프스태터가 ‘미국은 거대한 종교주의 국가와 다름없다’고 언급한 부분과 일맥상통하는 교육계의 진화론에 대한 마찬가지로 소모적인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를 비롯한 많은 종교인들이 이미 과학적으로 충분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 진화론을 창조주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고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중요한 헌법적 가치를 가진 국가가 기본적인 과학에 불과한 진화론을 두고 이런 양상을 보인다는 것은 사실상 금권정치와 맞먹는 폐해라고 생각합니다. 정교분리는 매우 엄밀히 지켜져야 하는 가치이고 존 롤스가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신조를 번성시키지 못하고 심지어 위축시킬 수도 있는 헌법 제도를 지지할 수 있는가’와 마찬가지로 무분별한 종교의 세속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충분해 보입니다.

또한 과세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서는 전통적인 두 정치적 부류의 입장과는 달리 ‘정부는 시민들을 그냥 내버려둬서는 안되며, 통치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시장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작은정부론’이 기본적으로 평등을 중요시하는 민주주의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더욱이 앞서 저자는 ‘자유와 평등’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양자의 가치가 발전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후적 펻등’이라는 논의에서 평등이 기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사후의 보다 탄력있는 제도 등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처럼 그동안 너무나 이 ‘자유와 평등’을 대립적으로 고착화시켜 온 학계와 정치인들이 있었으며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 교수 역시 이와 같은 측면의 ‘자유와 평등’에 대해 논한 바가 있습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 세금을 통해 실현하는 복지 프로그램을 축소하거나 폐지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세금을 낮추고 싶어한다”고 저자는 이에 덧붙이는데요. 이 부분도 역시 언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토마스 프랭크도 동의하는 것입니다. 결국 과세와 평등에 대한 부분은 보수주의자들의 무차별적인 왜곡 논리에 맞서 이것을 정상적인 궤도로 돌리기 위한 다른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로널드 드위킨 교수는 글 서두에서 자신이 자유주의나 보수주의 어느 한쪽 편을 들지는 않겠다고 전제는 했으나 결국 누구의 편이나 누구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좀 더 건강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를 위해 제대로 된 토론과 활발하고 생산성있는 논의를 위한 양측의 태도가 우선되고 시민들 스스로도 올바른 정치에 대한 인식 개조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를 여러 사례들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음울한 지배적인 금권정치 영향력 하에 계속되는 소모적인 이념 논쟁은 양쪽의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인식하에선 앞으로 이 국면이 건전하게 타개가 될지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일찍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민주주의의 맏형으로써 그만한 노력과 전세계에 대한 민주주의 확대의 책임이 있다고 매번 밝혀왔는데요. 선언적이고 현실을 도외시한 정치인의 주장은 귀담아 듣기가 어렵지만 부시의 말대로 이것이 미국의 대의적인 가치와 목표라면 우선 미국 정치 내에서 불필요한 논쟁을 삼가하고 시민을 위한 정치에 대해 더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체질 개선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데요. 우리는 거대한 정치적 불신과 정치 혐오가 내재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우리 정치권도 오래전부터 시민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더불어 이념 논쟁은 미국보다 더 심각했기에 로널드 드워킨 교수의 글은 일독하면서도 시사하는 부분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미국 정치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 지식을 갖고 있어야 이 책의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고 보는데요. 복지에 대한 미국인들에 기본 인식과 미국의 종교주의와 미국 헌법에서의 기본권 보장과 같은 이해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은 충분히 주변에서 습득하실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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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으로부터의 해방 - 탈성장 사회로 가는 길
니코 페히 지음, 고정희 옮김 / 나무도시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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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북부 니더작센 주의 공립대학인 올덴부르크 대학의 생산과 환경학과 교수이자 독일 생태경제학회 회장 및 국제금융관세연대의 자문을 맡고 있는 니코 페히의 중점적인 탈성장 경제론을 담은 글을 일독했습니다. 원제는 ‘Befreiung vom Uberfluss’ 이며, 2012년 독일에서 출간된 것입니다. 번역은 고정희씨가 맡았습니다.

이 글의 전체적인 요점은 무분별한 소비에 대한 개인들의 절제와 성장 지상주의와 같은 대량의 에너지 투입과 환경파괴가 필연적으로 비롯되는 비타협적인 경제 논리에 대한 재검토라고 볼 수 있는데요. 에너지 집약적 라이프스타일을 재고하고 ‘지루하거나 힘겨운 삶의 대안’으로 소비와 여행 등과 같은 환경 파괴가 초래되는 일종의 위안 대체제를 멀리하고 자기 스스로의 내면에 행복을 먼저 찾는 것 등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여행은 항공 수송이 이산화탄소의 배출과 석유 자원의 소모를 동반하고 비행기와 같은 항공 운송 수단의 기술 발전이 ‘지구촌’이라는 글로벌화를 가져 왔지만 반대로 지구 환경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고 의미 확장이 되고 있는데요. 물론 대체로 저자의 논리가 옳습니다.

다만 약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신자유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발전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사람의 노동으로 창출해 낸 소득의 공평한 분배에 대해서만 싸우고 있다”라고 언급한 것이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화를 일단 차치하고, 인간이 자본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노동의 원칙과 이를통해사회의 재구성이 이뤄졌습니다. 개인들의 노동력 제공이 자신들의 삶과 가족 구성원을 부양하는 시스템으로 따로 대안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진행되어 와서 기본적인 민주주의 사회에 항상 이 개인들이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한 본질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어왔습니다. 자본과 금융이 날로 고도화되어 그만큼 빈부의 격차가 심각해졌고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각국의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평등의 요건에서 소득의 문제는 쉽게 넘어갈 것은 아닙니다. ‘공평한 분배’에 힘쓰는 것이 불편하다면 어떤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소득의 격차가 계급의 격차와 다를바 없는 상황에서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는 것은 학자의 양심과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요. 저자도 자기 입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만, “독일과 같은 부강한 나라가 부채와 부채 국가를 모른척 하는 것은 반사회적이다’ 라고 글에 인용한 것처럼 말이죠.

물론 동의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지구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이산화탄소 배출과 관련해 이미 대기중의 농도가 400 ppm을 넘어선 이 시기에 이 부분은 신속하게 해결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이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데요. 결국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매커니즘은 지속적인 환경 파괴와 에너지 소모를 동반했고 자본주의의 전체적인 체제에서 앞으로 후세와 현재의 세대를 위해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에너지 노예’와 같은 언급이 이런 취지일 것입니다. 다만, 글에서는 따로 나오지는 않지만, 앞으로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이 자국의 경제 발전과 더불어 북미와 유럽 수준의 소비 생활에 더욱더 가까워지고 있어 앞으로 이 지구가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지는 매우 불확실합니다. 이대로 쭉 계속 간다면 말이죠.

그리고 개인들의 삶의 만족감이란 “인간관계 및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소속감, 능력을 인정 받는 것, 자기 구현, 건강, 안전 및 온전한 환경 등에 근거한다”고 저자가 인정했듯이 이제 유일한 사회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가 이식된 오늘날의 현대 사회에서 기존의 것을 백안시 하고는 달성하기 힘든 것이 각자의 삶에서의 만족입니다. 기본적인 절제만으로는 복잡한 인간의 욕구를 제한하는 등의 가능성을 온전히 설명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개인의 노력 뿐만 아니라 사회의 재구성도 필요한 것인데 해결해야 되는 부분은 한두가지가 아닌 실정이죠.

최소한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좀 더 성장이 요구되는 국가들도 아직 산재해 있고, 다시 자연친화적이고 탈에너지주의의 성장의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또 얼마간의 조정 기간과 타협의 시간 등이 아주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과도한 소비를 위한 과대 생산에 이미 물들어여 있는 우리가 극복해야 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만 지구 환경이 날로 악화되고 있는 상화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될 것들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처럼 선택의 중요도가 먼저 동반되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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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상태 What's Up 6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항 옮김 / 새물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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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국내에도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철학자인 조르지오 아감벤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미학이론의 선구자였던 발터 벤야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유명한데요. 이탈리어판 벤야민 전집 편집자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고, 자크 데리다 등과 사상적 교류를 통해 철학자로서의 사유를 깊이 한 바가 있습니다. 바로 그의 이 책은 이탈리아어 판을 토대로 번역한 글인데요. 역자인 김항씨는 이탈리어에 대한 어려움이 있어서 여러 언어 판본을 대조하여 참고했다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도서출판 새물결의 What’s up 기획물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크게 6장으로 되어 있는데요. 1장은 법률적 차원의 의미인 예외 상태와 이것을 개념화한 카를 슈미트의 해석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고, 2장은 카를 슈미트의 ‘정치 신학’에 대한 진정한 논의와 자크 데리다의 ‘법률의 힘’과 관련된 해석과 3장은 로마 시대의 유스티티움 (법의 정지)에 대한 논의를 4장은 발터 벤야민이 친히 ‘파시스트 공법학자’로 지징한 카를 슈미트의 예외 상태 개념과 독재, 폭력 및 비폭력에 대한 논쟁과 이견, 해석차이 등을 담고 있고, 5장은 최고 권력과 주권자 및 주권 관계에 대한 해석과 논의, 6장은 권위와 권한에 대한 분석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감벤의 글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는데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간략한 메시지에 심오한 자신의 개념들을 풀어내고 있는데요. 흔히 자신을 사전적인 철학자라고 여기는 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의 본질은 그 하나만으로 사유해서는 통찰에 이르기 어렵다는 버틀란드 러셀의 말대로 정말 다방면의 지식과 숙고를 통해야만 우리 세계와 인간의 삶의 진실을 맞닥뜨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감벤의 사유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의 글은 아마도 ‘파시스트 공법학자’ 카를 슈미트의 ‘예외 상태’에 대한 아감벤의 고유한 해석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일단 저는 자신의 입으로 ‘반유대주의자’라고 말했던 카를 슈미트의 저작들을 평가절하하지 않고 그 법철학 분야의 성과만으로 판단해야 될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슈미트는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의 법학자들로부터 수없이 인용되고 있고 1933년의 나치 독일을 주권 독재 상황에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일종의 예외 상태로 규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어떠한 기준을 갖고 있던 간에 히틀러와 관련된 과거 나치 독일에 대한 이와 같은 슈미트의 판단은 ‘인간적인 반감’을 저절로 일으키게 됩니다. 제가 이 정도의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 싶군요.

이런 예외상태에 대해 아감벤은 “공법과 정치적 사실의 불균형점”이라 시사하고 이것과 비슷한 긴급 사태 등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해 “정치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라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해보고자 이 글을 내보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의 헌법 등에 보장된 기본적인 자유를 누릴 권리가 시민에게 있다고 전통적인 헌법의 시민의 권리에 대한 보장을 열거하고 이 특수한 예외상태가 계엄, 전시상태, 혁명 등에 법의 공백과 같은 성격으로 사실상 많은 민주주의 국가가 이 예외상태를 언급하고 받아들이면서 일정 부분 시민의 주권적 권한까지 침해하는 문제 상태로 여겨집니다. 여기에 한술 더떠서 아감벤은 민주주의 제도하에 전통적인 삼권분립이 행정부의 과도한 예외상태 부여로 입법부의 본질이 퇴색되었고, 미국의 링컨 대통령과 윌슨의 사례를 예로들며,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자 하는 유럽과 미국의 정치권이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이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예외상태가 법질서 바깥에 있는 것도 안에 있는 것도 아닌’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은 긴급 사태에도 법률을 갖지 않는 것과 동일시되며, 이러한 해석 불가의 예외상태를 어떻게 견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필요성이 요구된다고 느낍니다. 여기에 소개된 이탈리아 헌법은 “공권력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와 기본적인 자유를 누릴 권리를 침해할 경우 억압에 저항하는 것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라고 명시하는데요. 독일 연방 공화국 헌법 또한 “자유 민주 헌정 질서를 파괴하려고 하는 모든 이에 맞서 모든 독일 국민은 다른 시정 수단이 없을 경우 저항권을 갖는다”라고 나옵니다. 예외 상태와 비슷한 혁명은 ‘규정상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반법률적이다’라는 주의도 특히 우리에게는 매우 의미심장한데요. 최근의 전직 대통령의 이 ‘예외 상태’ 권한 실행 여부가 미디어에 온갖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죠.

그리고 벤야민과 슈미트의 예외 상태 뿐만 아니라 폭력의 전반적인 의미에 대한 지면 논쟁과 데리다의 법률의 힘에 대한 의미. 법의 적용에 대한 해석, 법이 힘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의미 등 법 자체에 대한 저자의 다층적인 해석을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이 일찍이 뒤르켐이 밝힌 아노미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에 대한 분석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로마 시대부터 법과 아노미 사이에는 은밀한 제휴가 있었다는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고, 규범과 아노미, 법률과 예외 상태를 묶어 법과 생명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때가 왔다고 일종의 ‘의미 전개의 확장’에 도달하면서 법과 인간사회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여기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카를 슈미트의 ‘독재론’과 ‘정치 신학’ 과 벤야민의 몇가지 시론,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여러 법학자들의 글도 필요한데요. 특히 카를 슈미트의 ‘독재론’은 절판이 된 상태라 아쉽습니다. 좀 더 기회가 된다면 아감벤의 다른 글도 찾아 읽어보고 싶은데요. 어떻게 될지는 정확히 모르겠군요. 결국 이 책의 의의는 권력과 정치인들이 시민의 권한을 다소 제한하고 법을 일종의 ‘조정적인 상태’에 두려는 예외상태에 대한 개념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법철학적인 해석도 다분하게 들어 있어서 이해의 폭이 어려울 수는 있으나 적당한 배경지식과 정독으로 해결하실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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