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정치적 격변기에 공법학자로서 때론 관제학자로서 이름을 떨친 칼 슈미트는 세계2차대전 이후 전범 혐의를 받고 1947년 뉘른베르크 감옥에 수감되고 후에 미국에 의해 ‘혐의없음’으로 풀려난 것은 그의 개인 편력에서 정치적으로 꽤 민감한 일이었습니다. 역자 역시 이 점을 감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문에서 ‘슈미트로부터 대안을 이끌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임을 그의 편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언급하는데요. 이 슈미트의 유명한 논저인 ‘정치신학’은 1933년 이후 나치와 관련된 자신의 입장에 대한 ‘변명’이라는 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설에 대해 논박되어 왔는데요. 며칠전에 읽은 아감벤에 의해서도 이점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이론에 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법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들이어야 한다는 역자의 주장은 뭔가 사리에 맞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저에게는 묘한 논점을 불러일으킵니다. 적극적으로 논박하고 싶은 욕구 말이죠.이 4편의 논문이 실려 있는 ‘정치 신학’은 전세계의 법학자들은 물론 사법 관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책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실증법주의적인 사법체계를 갖고 있던 국가들을 묘하게 비웃은 것으로 느껴지는 칼 슈미트의 서문의 끝자락을 보더라도 뭔가 매치가 안되는 상황으로 느껴집니다. 1장은 (본질적으로) 예외 상태를 규정하기 위한 주권에 대한 정의를 2장은 법의 결단주의적 입장에서의 주권 문제에 대한 볍형식에 대한 설명을 3장은 군주제와 신학개념으로 해석한 정치신학에 대한 문제를 4장은 반혁명 국가철학이란 주제로 무정부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전에 아감벤의 ‘예외 상태’를 읽기 전에 먼저 이 책을 일독해야만 했으나 조금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 흔히 주권에 대한 논의로 잘 알려져 있는 1장은 “주권자는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정의하며 이러한 측면에서 “헌법을 완전히 효력정지시킬 것인지 어떤지를 결정하는 것이 주권자의 고유 권한”이라고 슈미트는 파악하는 듯 보였습니다. 이것은 바이마르 독일 시기에 점차 범람하고 있던 사회주의적 싹과 관련된 법과 국가의 예외조항을 삽입하기 위해 힘썼던 칼 슈미트 본인의 과거 행적과 연관되어 있는데요. 그는 노골적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식선과 예외적인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취급하며, 사실상 2장까지도 이 예외 상태를 보충하기 위한 부분이라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예외 사례를 무시하는 자유주의 법치국가의 원리를 비판하고, 일전에 토크빌이 말한 “민주주의적 사유에서는 인민이 모든 국가적 삶 위에 군림한다”는 명제를 뒤집는 듯한 느낌을 극명하게 받았습니다. 주권이 누구에게 부여되냐는 측면에서 슈미트의 모호성과 국가를 인격으로 자세히 설명하면서 ‘국가는 법을 만들어 내는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도 결국 이 ‘예외상태’를 일반 상식선에서 설명하려는 것보다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제시하는 동일한 것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된 것은 2장이 되겠고요. 법에 있어서 ‘결단주의적 입장’을 대체로 옹호하는데 글을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슈미트는 국가와 법의 권력이 대등하다는 규정은 불분명하다고 마찬가지로 언급하며, 애초에 법과 권력은 합치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사후적으로 국민 투표와 같은 것으로 법적 근거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해석은 어쩌면 이상주의적으로 보이는데요. 현실적으로 많은 국가에서 사법 권력이 선출이 아니라 사실상 획득되는 권력으로서의 문제점을 애초에 피하려는 건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인지는 파악하기는 어려웠습니다.막스 베버의 인식대로 ‘대다수의 사법 관료들이 정치 권력에 대한 우월성을 유지한다’는 측면은 많은 국가들의 사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 체제하에 삼권 분립은 마땅히 중요한 부분이지만 많은 사법부들이 매우 특수한 환경과 특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실증주의적인 사법체계의 확립이 무조건적으로 기피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집니다. 슈미트는 법의 특수한 위치와 체계로서의 가치를 내내 강조하고 있는데요. 오늘날 주권자들에 의해 성립되고 그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이 민주주의적 삼권 분립이 강조하는 바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증주의적인 사법제도하에 예외상태를 두거나 마련하고 해석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긍정적으로 작용할지에 대해서는 꽤 의문을 갖게 됩니다. 아감벤도 예외 상태에 대해 슈미트가 독재 상황을 지지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데요. 현실적으로 사회주의가 소멸된 상황에서 민주주의 체제 하에 예외 상태란 현실적으로 극히 받아들이기 힘든 무정부의적인 상태와 독재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회주의가 이렇게 붕괴된 상황은 슈미트 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3장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정치적 상대주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포함한 정치적 법치주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 극단주의는 다소 완곡한 표현으로 거부하고 있는데요. 다만 형이상학에 대한 입장은 슈미트에게 있어서 비판당하며, 특히 비합리주의적인 것을 배격하는 형이상학적인 태도를 고려해 봤을 때, 이러한 ‘자의’를 봉쇄하는 형이상학이 마찬가지로 ‘예외상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장은 17세기 예스파냐 외교관이자 정치적 극단주의의 일인이었던 도노소 코르테스를 언급하면서 무정부주의를 비판하고 코르테스가 ‘자유주의자’를 경멿했던 것과 이에 무신론적이고 무정부의적인 사회주의를 불구대천의 적으로 여긴 것을 뭔가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계몽주의 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장 자크 루소가 말했다는 ‘인간의 악함’에 대해서는 저 개인적으로는 루소가 ‘인간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는 입장이 더 정확하고 그런 측면에서 루소의 인민주권론에 계몽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밝혀지고 있습니다. 바쿠닌을 비롯한 당대의 무정부의자들은 인간을 선하다고 봤으며 아마도 슈미트의 이러한 해석은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코르테스로 비롯되는 무정부주의적인 모든 것에 대한 비판과 혐오는 분명해 보입니다.이미 사자인 칼 슈미트는 이 얇은 책이 과거 바이마르 시대의 예외 조항을 만들었던 행적과 얼마간에 관련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레오 스트라우스와 가까웠고 후세에 많은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에게 하이데거와는 다른 입장에 처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상 그의 일관된 태도를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었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가택에 칩거하여 사색을 했는지는 본인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는 한줄을 마음에 품고 살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