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것의 개념 - 서문과 세 개의 계론을 수록한 1932년 판
카를 슈미트 지음, 김효전 외 옮김 / 살림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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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공법학자로서 나치스의 법학 초기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오늘날에는 여러 의미로 주목을 받고 있는 카를 슈미트의 논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일독했습니다. 슈미트는 지젝과 바우만을 비롯한 여러 진보와 좌파 학자들에게 널리 인용되고 있는데요. 슈미트는 다소 위험한 국가주의자 및 결단주의자로 해석될 수 있을 만큼 근래 민주주의에서는 꽤 불안한 인식적 요소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많은 학자 및 사상가들의 입에 오르 내리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레오 스트라우스와 조르주 아감벤의 기여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레오 스트라우스는 조지 W. 부시의 임기 당시 백악관과 공화당의 주요 정치 세력이었던 ‘네오콘’의 대부로 그가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하자 동시에 카를 슈미트 역시 미국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근래 조명받고 있는 ‘21세기 백과전서’의 아감벤 역시 그의 ‘예외상태’ 개념에 대한 독창적인 카를 슈미트의 독해는 학계에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 저는 최근까지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련된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카를 슈미트가 심심찮게 어록으로 등장하는 것을 목격했는데요. 이 점은 확실히 민주주의 이론에 있어서 상당히 복잡미묘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국내에는 2012년 번역 출간이 되었는습니다. 물론 국내 최초 출간은 아닙니다. 서문은 1963년 판의 서문이 실려 있고, 1932년 판의 원전을 기반으로 새롭게 출판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3개의 계론과, 레오 스트라우스의 주해를 실어 기획으로는 정중한 모양새를 갖춘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다룬 총 8장의 소주제와 뒤이어 중립화와 탈정치화의 시대를 다룬 1929년 바르셀로나에서의 연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단 슈미트의 이 논저의 주제는 ‘강력한 국가 내지는 국가주의를 위한 일종의 정치 이론서’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극명한 이분법론적 이해 수단인 동지와 적을 그가 정치학 기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조와 그렇지 않은 이념과 사조를 적절하게 비판하고 사실상 1932년 이후의 어떤 자유주의의 퇴색과 더불어 기술의 진보에 따른 현대 국가의 개념성에 부정적 시각과 비판을 강력한 국가 체제에 대한 반대 인식으로 논리적인 범주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매우 애매하게도 부르크하르트의 입을 빌어 “민주주의에서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권력은 너무나 커서 국가와 사회 간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끊임없이 논의 가능하고 변경 가능한 것으로서 유보하려고”라는 등의 뒤에 나오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관과 민주주의의 다양성, 더 나아가 정치적 다원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앞서 설명했던 ‘강력한 국가체제 내지는 국가주의’에 대한 당위를 슈미트는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의 암울하고 부정적인 역사관이 한 몫 거들고 있는데요. 프랑스 혁명 이후의 나폴레옹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점,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부분에서도 일종의 이상주의나 독일의 초기 법학자 푸펜도르프의 세속화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하는 등의 예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국가적인 개념과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 일치했던’ 시기가 있었고, 본인이 독실한 가톨릭 신도여서 계몽시대 이전의 신앙과 복음이 주된 개인의 관심사였던 시기에는 도덕적 및 윤리적 관점에 대한 이견이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919년 이후 유럽에도 민족을 바탕으로 ‘국민국가’가 속속 나타난 것과 비슷하게 이 국민국가를 있게 하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과연 전쟁과 평화 양 극단의 해결책이 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5장에서 그가 중요하게 주장하는 “법의 지배라든가, 나아가 법의 주권성 같은 표현법에 대해 언제나 약간의 상세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정치적 사유의 측면에서는 당연한 것이며, 법의 지배란 즉 특정한 현 상태의 정당화에 불과하며”라고 일축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루소에 의해 고안된 주권에 의한 정부, 법에 의한 지배를 명확히 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의 출현을 막고자 했던 이 초기 민주주의 이론에 대한 거의 전면적인 부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4장에서도 “국가는 그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는 다른 이익사회들과 동위이자 동렬에 있는 하나의 이익사회가 된다”고 명시하며, 이것은 국가이론의 ‘다원론’이며, 그 이론의 예리한 의미는 전부 국가에 대한 예전의 과대평가”라고 언급하고, 이러한 이익 사회에 대한 정치적 통일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불문명하다고 밝히는데, 이것은 일찌기 토크빌이 개인과 정부의 무분별한 이익화에 대한 경고와 그 궤가 비슷해 보이지만, 이 이익사회의 출현이 다원론의 입장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익사회와 다원론을 연계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대략 보여집니다. 이 부분은 홉스를 사실상 비판하고, 스펜서의 역사관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경제적인 권력적 지위의 개념이 생길 수 있다는 것”과 “오늘날 기술적 발명은 엄청난 대중지배의 수단이 된다는 점” 무정부주의에 대한 견고한 비판과 “인도적, 도덕적 진보는 누군가의 관심을 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진보의 부산물처럼 보인다”는 평가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직면한 자본주의적 엉킨 실타래에 대한 묘한 상황과 언술적으로 일치가 되어 보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사회와 정치적 진보에 대해 그가 일정 부분 회의의의 시각으로 그린 것은 아마도 앞선 다원주의화 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불편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요. 여기에는 “오늘날 기술적 발명은 엄청난 대중지배의 수단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자유냐 예속이냐의 측면을 인정하고 오히려 앞으로 우리의 자유를 어떤 식으로 지켜나가야 할지에 대한 ‘전반적인 기술의 진보’를 독특하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술의 정신은 무시무시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종의 ‘자연적 한계’에 도전”으로 여기는 점도 이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꽤 현재 상황에 대한 해석으로 설득력이 높은 경제적 계급에 대한 인식과 기술의 진보가 ‘자연 상태’의 한계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대중 지배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은 슈미트의 비범한 통찰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감안한다면 일견 단순한 해석상의 경제적 계급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 대두의 가능성일지라도 몇가지 논리의 일관성이 부족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역자가 후기에서 이러한 슈미트의 사상이 무분별하게 여러 경로의 해석상 차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이러한 해석의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뒤에 레오스트라우스의 주해에서도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종종 슈미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그가 자주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 종사하여 온 것” 등의 해석은 슈미트가 이것을 위해 글을 여러 정치적, 역사적, 철학적 관점에서 논의해 온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물론 스트라우스 개인의 해석일 수도 있지만, 홉스를 비판한 것이나, 루소를 다소 평가절하하고, 진보에 대한 점진적 비관과 특히, 적과 동지라는 개념을 맨처음 도입하고 이것을 정상적인 사회구성론의 한 방편으로 보았던 것은 즉 자유주의 내지는 인간 자유의 진보를 대척점으로 여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며칠에 걸쳐서 이 책을 독해하면서도 뭔가 불편한 기분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런 요인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슈미트는 나치스와의 관련 내지는 전쟁 책임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소련과 미국에 의해 체포되지만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게 되는 이력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최근에 서평을 썼던 ‘정치 신학’과 이 책 역시 그의 학문적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저버릴 수 없는 개인적인 복잡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내에 그의 이 글을 한 번 더 정독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저의 자기 고백은 이 서평이 너무 부족한 것임을 자임하는 꼴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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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의지 2.0 - 루소, 프로이트, 구글
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 / 현실문화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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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공업대학 세계문명센터 특임 교수이자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로 재직 중인 그리고 동시에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뭔가 민주주의 2.0 이 떠오르는 제목의 글 ‘일반의지 2.0’을 일독했습니다. 저자인 아즈마 히로키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으로 일본과 해외에 관심을 이끈바 있습니다. 국내에도 그의 몇 권의 책이 번역되어 판매되고 있는데요. 일본에서는 특히나 주목받는 젊은 논객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듯 보입니다. 국내 출간 당시 어느 평론가가 이 책을 ‘히키코모리 민주주의’의 가능성이라고 소개했던 것은 글의 내용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한 한줄 평가로 여겨지는데요. 저자 본인은 이 책이 온전한 정치사상서라기 보다는 한 편의 에세이 정도로 봐달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는 충분히 가치있는 글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부제로는 루소, 프로이트, 구글이라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선 저는 이전의 몇편의 서평을 통해 오늘날 ‘집단지성’에 대한 관심을 밝혀 꾸준히 밝혀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즈마 히로키의 이 책도 그런 측면에서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이 글을 요약해본다면, 루소가 그의 세기의 저서 ‘사회계약론’과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밝힌 일반의지에 대한 저자 고유의 해석이 먼저겠는데요. 루소의 이 ‘일반의지’는 개인 의지의 집합체로서, 주권은 일반의지에게 있으며, 정부는 그의 종복이라는 설명과 루소가 이 일반의지를 애매하게 설정해 놓은 것은 시민들이 그들의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즉, 기존의 독자들이 루소에게 보이는 공화주의적 대부의 인식을 흔들어 놓고 있는데요. 앞서 글에서는 이 점과 관련하여 루소가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분명한데, 경우에 따라서는 일종의 극단주의를 긍정한 듯한 일면도 보인다고 해석합니다. 예를들면,“국가가 죽음을 명할 경우 시민은 그 법적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단언한 것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일반의지’에 대한 약간의 오독으로 비롯된 결과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루소의 일반의지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숙의 민주주의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집단지성-총표현사회-총기록사회로 인식의 연계를 통해 집단지성과 관련된 공공성의 성립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인 한나 아렌트의 세계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규범, 숙의 민주주의의 선호의 변화를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정치란 어쩌면 아즈마 히로키의 표현대로 인간의 이성적 측면을 물음표로 놔두고 오늘날 구글의 사례와 같은 대중들의 수많은 파편화 된 데이터를 무의식으로 규정하고 옹립해 ‘온전한 숙의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이론적 근거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렌트와 하버마스는 시민 사이의 충분한 토의가 정치에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인용하고 있지만, 루소가 정당 민주주의, 의회제 민주주의에 회의를 보인 것과 같이 “무의식과 관련하여 정치의 원천을 이성적인 의사 소통에서만 찾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저자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글에서 가장 난해한 개념이 이 ‘무의식’이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인간 이성의 견고한 측면까지 칸트와 스피노자를 통해 학습한 우리가 ‘대중 욕망의 무의식’, ‘대중 선호의 무의식’ 등과 같은 관념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글 후반부에 의원들이 어떤 안건에 대해 의회의 표결을 앞두고 스크린에 큼지막하게 일반 대중의 선호도에 따른 여러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그래프로 표시하게 만들면 어느 정치인이라도 민심의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해석에서 이렇게 행동에 나서게 되는 시민의 마음가짐이 일종의 무의식에 기인한 것으로 밝히는 점에서 어느 정도 적게나마 그 개념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상 집단지성과 관련 깊은 이 무의식은 구글의 검색어 자동 생성 기능과 마찬가지로 이성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수집되는 데이터의 측면으로서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집단지성이라는 단어보다 ‘총기록사회’라는 개념을 많은 부분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치적 선량주의’를 피력하고 있는데요. 선량한 정치인들이 대중의 무분별한 욕망을 제어시키고 정치적 이상의 기여한다는 점, 이들 선량주의자들이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은 포퓰리즘으로 이어진다”는 측면의 해석, 이러한 총기록사회에 대중의 의지가 효과적으로 투영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선량한 정치인, 선량주의가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이 더 숙제로 여겨집니다. 더군다나 정치 참여 목적으로 투입되는 ‘프로 시민’의 여부도 오늘날 “한가지로 조망하기 어려운 현대사회와 개인적 관심에 몰두하는 시민들의 상태로 봤을 때” 더욱더 존재 여부를 규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처럼 위의 이론에 기반한 이 ‘무의식 민주주의’가 포퓰리즘과 유사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사상이라고 밝히는 점은 그 형식의 난해함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결국 이를 통해서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숙의를 인민의 무의식에 노출하라”는 제일의 명제입니다. 구글의 출현과 집단지성의 이론은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를 불러 일으킬 수 있고 이것에 기반한 총기록사회가 모든 숙의를 시민의 무의식으로 투입되는 일종의 민주주의 2.0 시대의 정치적 내면화로 최종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13장의 리차드 로티를 통한 특정한 정치적 신념의 배제에 관한 꽤 광범위한 해석은 조금 부족해 보이고, 오늘날 만연된 시민들의 사생활과 즐길거리에 노출된 상황에 대한 개선이 만약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또 지나친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루소는 전반적인 인간 자유의 보장을 주장했고 스스로 고독하게 사색하는 것에 인생의 가치를 두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회의를 갖고 살았던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소극적 사색 인간’의 전형일 것입니다. 우리의 현대 생활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회적 관계가 매우 중요시 되고 있는데 구글과 sns를 통한 개인들의 데이터 축적이 온전한 개인의 사생활적인 요소로 보고 이를 ‘총기록사회’의 원천으로 봐야할지에 그 개념화가 적확한 것인지는 우리 독자들이 한번 숙고해봐야 할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인 특유의 세밀함과 친절한 글쓰기는 아즈마 히로키의 이 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번역도 꽤 신중하고 수월한 일독이었는데요. 그의 정치적 상상력에 대해 충분히 기대할 만한 부분이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이성적 측면의 재고를 해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독서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 미래의 정치와 민주주의는 과연 어떻게 될지 참으로 궁금하게 생각되는데요. 결국 앞으로의 대안도 ‘고도화 된 숙의 민주주의’이며 이것을 어떤식으로 실행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시민들의 고민이 새삼 필요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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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잉크
이택광 지음 / yeondoo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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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의 이택광 교수는 저에게는 비록 공저였지만 ‘우파의 불만’ 과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및 슬라보예 지젝과 관련한 인터뷰, 연구 등으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택광 교수의 글과 번역을 좋아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바쁜 일상 때문에 구입한지 몇 주가 지나서야 서평을 쓰게 되었습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고백일 수도 있겠군요.

이 교수의 이 글은 일종의 광범위한 시론 내지는 현상의 요약본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논의된 여러 주제들을 아우르는 문구를 발견했는데요. 그것은 ‘삶은 있되 삶의 의미는 없는 상태’라는 부분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공사의 구분이 사라진 근대로서의 규정’으로부터 차용한 위의 인식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액체성’이라는 오늘날 우리를 포함한 전세계의 많은 노동자들을 고통에 담가 버리는 액상 물질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깊은 통찰력이기도 한 이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차용하고 인용하기도 했기에 이 해석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저자는 글의 앞선 ‘인간 지성과 이성을 격멸하려는 시도를 벌이고 또한 지성의 하향 평등을 부르짖는’ 반지성주의는 이면에 쾌락의 평등주의를 내포하고, 이것의 정치적 작용으로 포퓰리즘이 탄생하고 궁극에는 민주주의의 붕괴를 불러일으키는 극단주의가 비롯된다는 점은 시민이 자신의 사적 이익에만 치중하고 그 의무를 저버린다면 어떠한 일이 발생하는지 오늘날 정치와 경제 양대 관점의 왜곡과 불안 상태에 대해 철학적으로 또는 사회학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 및 파시즘이 민주주의의 위협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반지성주의가 종교적 극단주의와 만나 포퓰리즘으로 변질되어가는 사회학적 법칙에 대해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의 관계가 동시 다발적인 측면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해 왔는데요. 이 점은 차치하더라도 역시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은 아주 밀접한 관계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글의 후반부에서는 한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페미니즘과 여성혐오 및 남성혐오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택광 교수가 우리나라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한국의 자본주의가 기형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한국이 덜 자본주의적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 너무나 순수하게 자본주의 본연의 모습이라서 그렇다고 봐야 한다.” 는 관점과 관련해서 일전에 헨리 키신저가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 충분히 시장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한 언급과 일맥 상통해 보입니다. 다만, 전세계적으로 불평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고, 엘리트 기득권 정치에 대한 분노와 비판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내부에서는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고 분단 이데올로기에 따라 색깔론으로 몰아가는 역사가 민주주의 시작과 함께 단기간 집중적으로 고착해 왔습니다. 모든 정치경제적 이념과 사조는 완벽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이 사회 이념화가 되었을 경우에는 끊임없는 비판과 개선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뭔가 종교 개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어려운 부분이죠.

요즘 온라인-오프라인을 포함한 여론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해 “촛불 이후 정치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페미니즘이다”라고 밝히고 있는데요. 미투 사례에 대해서도 단순한 가해자-피해자 논법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이데올로기화 되어 있는 견고한 남성 권력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전세계적으로 많은 여성들이 아주 극심한 불평등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아마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산업 개발 시기에 가부장제에 의한 남성 소득의 집중과 이를 통한 가정 경제 유지의 측면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계실겁니다. 남녀 소득 불균형 뿐만 아니라 가장 역할을 하는 남성에게 사회경제적 인세티브가 있었던 것도 분명한데, 이택광 교수는 이 점을 들어 “이제 이런 과거의 인식이 인권과 남녀 평등 가치에 준하는 사회적 정상 상태”로 올라서고 있는 과정인데, 아마도 이 점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고 봐야 하겠죠. 다만, 한 가지 쉽게 수긍히가 어려운 부분은 “오히려 일베는 보통의 한국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극단적으로 희화화해 보여주는 사례에 불과하다”는 언급이었습니다. 일베가 규범을 넘어서는 파격성을 통해 집단적 쾌락을 즐기는 ‘사디즘적 주체’라고 뒤의 행간으로 첨언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다만, “일베가 토로하는 상대적 박탈감은 여성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런 가부장제를 중심 이데올로기로 구축했던 근대적 경제 모델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는 점을 든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만 사실 일베를 ‘한국 사회의 개념화 된 정치사회적 현상’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오늘날 노인들의 ‘태극기 부대’와 비슷한 이해와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일베가 한국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이택광 교수는 서문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농담과도 같은 책의 제목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적확하게 보여준다는 생각”이라고 밝혔습니다. 진보와 좌파가 지리멸렬한 미국과 유럽의 상황을 보노라면 보수의 치명적 대안이 극우가 될 수도 있는 암울한 상황을 우리는 지난 유럽에서 목도할 뻔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미국의 트럼프를 제외한다면 말이죠. 일찍이 존 듀이가 “시민들이 시민의 의무와 역할이 현대 사회의 즐길거리와 오락거리들 때문에 어려운 처지”라고 밝힌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단순한 먹고사니즘의 문제 뿐만 아니라 가면 갈수록 우리가 민주주의 체제를 더 건강하고 개선시키는 데 힘써야 되는 의무로부터 스스로가 벗어나려고 하는 건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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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 미국 민주당의 실패에서 배우기
토마스 프랭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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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 출신으로 시카고 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역사학자로서가 아니라 미국 주류 정치학과 관련된 활발한 의견 개진으로 더 명성을 얻고 있는 토머스 프랭크의 최근 번역된 글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을 일독했습니다. 원제는 Listen, Liberal : Or What Ever Happened to The Party of The People 로 지난 2016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8년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토머스 프랭크의 글은 가장 최근에 서평을 썼던 ‘정치를 비즈니스로 만든 우파의 탄생’ 등에 이어 4번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크게 만연한 불평등 문제와 원자화 된 노동자 그리고 미국 민주당의 변질과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실패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위의 주제를 기본 토대로 삼고 후기 산업 사회에 이르러 계급 사회적 측면에서 ‘소위 전문가들의 등장’과 이들을 광범위하게 포함하여 ‘엘리트 지배 정치’에 대한 사실상 이런 패착에 대해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1장 2장은 따로 분리해 다른 주제로 만들어도 될 만큼 근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지배 계급이라고 일컫는 ‘전문가 집단’과 이들이 바라보는 광범위한 불평등 문제에 대한 저자 자신의 상세한 이해와 분석을 담아 놓고 있습니다. “이들 소위 전문가들의 전문성이라는 것이 후기 산업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왔다”는 점은 단순히 부와 명예를 손에 넣은 유산자 계급에 대한 협소한 평가가 아니라 대중들의 인식과 특히 지식인들이 이들 전문가들에 대한 정상적인 견제와 비판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토머스 프랭크 자신의 자기 고백으로까지 저는 느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후기 산업시대에 이르러 더욱 ‘노동자들의 원자화’를 가혹화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전문가 집단이 ‘개인의 능력이 부족하고 학업의 기회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그 결과로 불평등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 전문가 집단들 자체가 이런 시민의 삶과 사회의 일면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불평등 문제 전반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 내지는 무시가 바로 이런 인식에 기반하는 것으로 여겨도 지나치지 않아 보였습니다.

노동자들의 원자화와 이런 불평등의 문제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해결해야 되는 부분으로 조지 H. W. 부시에 이어 집권한 민주당의 신민주당원인 빌 클린턴의 “세계가 단일 시장으로 변모하고 집단 행동이나 정치, 경제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아닌 개별적인 자기 계발 노력만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은 최소한의 문제 해결에 대한 인식을 자의적으로 결여시키고 그것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자연현상에 빗대어 어떠한 논의를 봉쇄하고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세운 어느 변절한 리버럴한 정치인의 모습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미국의 빌 클린턴 지지자들의 비난이 이어지겠죠. 여기에서 토머스 프랭크는 클린턴이 집권 시기에 놀랄만한 경제적 호황과 높은 고용률로 인해 커다란 면죄부를 부여 받았지만 실상 조금만 파헤쳐 보면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게 과도한 것인지 알 수 있다고 증명합니다. 앞서 불평등 문제는 “사람들의 직업을 단순히 업그레이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로 과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집중된 경제 권력이 모든 면에서 민주주의나 평등 같은 요소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많은 시민의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정치 활동에 나서는 정치인들이 오늘날 미국에서는 이른바 공화당 의회가 ‘금권 정치’에 물들어 이것을 민주당 즉, 리버럴이 해소시킬 수 있느냐는 오바마의 시대에 원천적으로 잘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수많은 이민자들의 이익을 대변할 만하고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를 초래한 조지 W. 부시의 실패 보다도 한발 나아갈 수 있는 정치적, 법적 근거를 갖고 있었음에도 오바마는 민주당 뿐만 아니라 미국 진보층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국가 감시 체계에 대한 그 애매한 태도와 함께 2008년의 ‘채권 휴지화’의 주역들을 오히려 인센티브를 받고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다들 호사스런 개인 별장으로 은퇴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은 이들의 중요한 인권을 위한 것인지, 민주당 역사상 가장 많은 은행 및 금융권의 기부금을 받은 이력 때문인지는 불확실합니다. 여기에 저자인 토머스 프랭크는 높은 학벌과 학위를 받은 소위 엘리트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며, 1930년대 플랭클린 루스벨트의 민주당 정부가 뉴딜 정책을 통해 저학력자나 기반이 없는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사회가 붕괴되지 않도록 비 엘리트 출신의 각료들이 아주 슬기롭게 위기를 헤쳐나간 것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진보주의가 소수의 전문가들과 엘리트들에게 달려 있다는 점은 이것을 ‘반동’이라고 해석해야 될지 아니면 포퓰리즘 시기에 제일 먼저 지리멸렬한 진보 세력의 운명이라고 해야할지 이것 자체를 ‘신의 운명’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더욱더 우리가 원자화되는 길로 스스로 나서야 할지는 어느것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불평등 문제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날씨처럼 저항할 수 없는 자연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 수많은 기득원 우파들의 논리였다면 그것을 견제하고 복지를 걷어찬 클린턴 행정부에 대한 비판을 해야만 했던 진보의 의무였으나 민주당 일각에서도 도널드 트럼프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워싱턴에서 공화당의 광신적인 티파티는 여전함에도 미국의 진보가 왜 이렇게 지리멸렬했는지는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으로 망하게 되는 연장서상의 한 장면일 뿐인지는 앞으로 더 고심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책에서는 저의 암울한 결론에 토머스 프랭크는 실리콘 밸리와 같은 혁신 계급이 진보 계급을 대변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혁신은 그야말로 평등과 관련된 문제로 전방위적인 기술 혁신이나 기술 지식 노동이 과연 불평등 문제에 있어서 어떤 해결책을 손에 쥐어줄 수 있을지는 이 부분도 앞으로 많은 논의가 있어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을 통해 한가지 통찰력에 이를 수 있었는데요.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월한 시기에 강력한 근거를 갖고 출범한 오바마 대통령의 참담한 실패가 아마도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을 초래한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입니다. 정말 행간에 떠도는 강력한 군산복합체의 로비에 오바마가 굴복한 것인지 (음모론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휴지 조각에 불과한 오바마 케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금융 및 경제 기득권들에게 항복한 것인지는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그의 실패가 수많은 미국 노동자들의 좌절을 불러 일으켜 트럼프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시 진보성을 회복하는 민주당의 정체성의 개조와 혁신을 통한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는 다소 비관적이지만 미국 정치와 시민들의 내면화된 확고한 민주주의적 태도를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맏형이 이대로 쓰러지는 것은 우리에게도 매우 불행한 일이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죠.

“진짜 문제는 노동자의 불충분한 지성이 아니라 불충분한 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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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 세계 질서의 붕괴와 다가올 3개의 전쟁
피터 자이한 지음, 홍지수 옮김 / 김앤김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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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켄터키 대학의 패터슨 스쿨 출신으로 근래 전세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지경학을 소개하고 그 관련 정보로 사기업 및 공적 기관 등에 소위 컨설턴트를 하고 있는 유명한 안보 전문가인 피터 자이한의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The Absent Superpower 이며, 지난 201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김앤김북스에서 번역 출판을 맡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1세기 미국 패권과 지정학’에 이어 자이한의 두번째 서평인데요.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춘근 교수의 추천사와 특별히 이번 번역판에는 저자의 한국어 서문이 실려 있기도 합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와 브레튼우즈 체제를 바탕으로 1945년부터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국제 정치 전략이 다소 수정되는 1949년 이후를 넘어 구소련의 붕괴 이후 냉전 종식 이후까지 자유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서방 진영과 최근에는 중국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보고 말하는 중요한 관점인 세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결과론적으로는 세계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대전 이후, 영국이 갖고 있던 대략적인 세계 패권을 미국이 그동안의 고립주의적 외교에서 탈피해 안보 동맹과 자국의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서유럽과 일본을 재건시키고, 타이완과 한국과 같은 동맹국들의 경제의 외적 성장 뿐만 아니라 정치적 안정까지 보장해 온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개입은 우선적으로 중동을 비롯한 에너지 수출국에 의한 석유와 천연가스 수송의 지속적인 안전망을 미국 해군이 제공해 왔고 이 점은 분명 1972년의 석유 파동의 시기를 거쳐왔어도 경제 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 안보에 충분히 이익이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이한은 여기에서 이러한 미국의 개입이 앞으로는 어려울 것이며, 심지어는 “미국이 분명히 세계에서 손을 떼게 된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상황의 가장 큰 요인이 미국 내에서 소위 셰일 혁명이 일어나고 있어 앞으로 미국이 해외의 에너지 수입의 의존도가 가면 갈 수록 축소될 것이고 그에 따라 전세계의 석유 운송로를 지키기 위한 미 해군의 역할이 도전을 받게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미국 셰일 생산 산업 단체의 홍보이사로 보일 정도로 이 분야의 애착이 있는 자이한의 이 책 1부는 앞으로 미국이 세계에 발을 빼게 되는 이유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2부는 이러한 세계에 대한 미국 탈개입의 시기에서 필연적으로 초래될 3개의 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럽 대 러시아, 이란-사우디아라비아, 중국-일본 등 각 국가 및 세력의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꽤 상세한 국제 정치와 지리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자이한의 글을 읽으면서도 약간 이해가 안 되는 점은 냉전 시기 이후 나날이 축소되는 미국의 국방비 지출에서 2001년 9. 11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게 됨으로써 당시 여건이 좋지 않았던 미국 경제에 적지않은 타격이 됨과 동시에 한동안 이 국방비를 미국 전체가 지탱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조지 W. 부시가 전격적으로 중동에 개입함으로써 집권 시기에 대규모 국방비 지출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인 시기로 보면 국제 외교와 정치 무대에서 미국의 ‘거대한 악의 대항마’를 만들어 다시 군사 강국을 유지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입니다. 물론 지금도 미국의 군사력은 미국 밑의 순위에 있는 국가들을 합치더라도 비할바가 없습니다만 저는 ‘셰일 혁명’에 의한 에너지 수급 문제의 패러다임 전환보다는 이미 미국은 군사력 투입에 점차 발을 빼고 있던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오바마 정부는 잠깐 ‘아시아로의 회귀 (pivot to Asia)’를 잠깐 대외에 천명하긴 했지만 사실상 직접적으로 어떤 정책이 추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근래 중국의 지난 시절의 대국의 권리를 노골적으로 획득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지금 미국의 정치경제적 상황도 적지 않은 요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지역내에 자신들의 이익을 해치는 지역 패권국이 나타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므로 아주 수수방관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 국내적 요인으로 발생한 미국의 군사비 감소가 영향력 축소에 기여했고, 국내적 에너지 수요 문제가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중대한 요인은 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책에서 제가 가장 동의하기 힘든 부분은 앞으로 발생할 중국-일본의 지역 대결에서 방향타를 잡고 있는 타이완과 한국을 분석하며, “한국으로서는 일본과 손잡는 게 뻔한 선택인 듯 보인다”고 애매하게 언급하며, 중국과 일본 사이에 줄타기를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며, 우리를 친중과 친일 양자 사이의 가능성을 살펴보며 분석을 시도하고 있지만 자료는 매우 부족합니다. 중국은 현재 우리의 제1 교역국이고, 일본은 미국이라는 수레바퀴 동맹의 한 축인데 한미 동맹관계를 고려하면 일본과 협력할 수 밖에 없다고 여기겠지만 이 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역사 문제를 빗대어 오로지 아시아인들 특유의 민족주의 근성이라고 말해왔던 것을 고려해 보면 한일관계에 대한 서양인들의 특유의 인종주의적 시각을 볼 수 있는데요. 우리의 내부에서 미래 있을 수 있는 중국과 일본의 경쟁에 과연 어느 한쪽의 손을 드는 것이 과연 이익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평가는 그럴만하다고 여기나 과연 중국이 미국의 포위망을 뚫고 자기들 인근 바다의 제해권을 획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저는 매우 비관적입니다. 이것과는 반대로 중국 자체를 완전히 취약하고 닫힌 국가로 자이한은 보고 있지만 동남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과 파키스탄과 지부티, 스리랑카에 해군 기지를 조차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완전히 중국이 손을 놓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 살려고 하는 중국이 남중국해와 말라카 해협 등지에서 군사적 방법을 모색하려고 할 때가 대규모 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우디-이란의 중동 지역 맹주를 놓고 벌이는 대결에 대해서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경우나 중동 최대의 재래식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란에 대한 위협이 심각해질 경우 사우디가 동맹국인 파키스탄으로부터 핵무기를 도입하게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점은 우려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중동 자체가 핵전쟁의 도화선이 될 지역이 높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유럽-러시아의 경우도 러시아가 과거의 동유럽 지배권을 획득하는 것을 시도하고 발트해의 3국과 폴란드 일부 지역 내지는 핀란드 지배에 까지 나서게 된다면 독일의 재무장을 초래하고 이런 상황임에도 미국이 참전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는데요. 과연 나토 동맹국에 의한 공격이 유럽 동맹군의 참전으로 이뤄질지는 자이한이 이미 말한대로 러시아가 폴란드를 차지하려고 든다면 폴란드 스스로는 적지 않은 기간동안 게릴라전을 펼쳐야 한다는 점을 들어 유럽이 대 러시아 단일대오에 설지는 반 정도의 의문을 갖게 됩니다.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글의 얼마간 내용을 보더라도 자이한의 여기 이 책은 꽤 도발적입니다. 미국의 영향력 축소가 3지역의 큰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단순히 현실주의적 시각을 넘어 음울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다 전세계적으로 이미 노동층의 심각한 인구 감소와 이런 이유로 시장 붕괴의 시나리오까지 얻게 될 수 있는 산업국가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그는 보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의 이런 이해와 분석은 미국이 계속 앞으로 패권국으로 남을 이유로도 분명해 보이는데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와 같은 중견 국가들은 자국책을 찾아야만 하는지 그게 불가능하다면 국제 무대에서 어떠한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지 일단 많은 이론적이고 외교적 노력들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뭔가 잡음이 있더라도 한미 동맹이 유지되는 것은 국익에 이로운 일이나 마찬가지로 일본이 과하게 중국을 도발하여 미국이 개입하거나 이로인해 대 중국 봉쇄 동맹이 연결되어야만 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트럼프의 미국은 그 불안정성이 지대하다고 봐야하는데 이 점과 관련해서도 자이한은 미국의 포퓰리즘 시대에 들어섰다고 보는 등의 기존의 엘리트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를 보이는 것과 비슷한 관점이 보여 이 점도 매우 불편했습니다. 국제 정치와 외교 문제에 관한 전문가가 이나라 일반적인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보고 받아들일지는 예상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분명히 해석 수단으로서도 자이한의 논리는 과한 부분이 있습니다. 과거 냉전 시기의 미국 역할론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분명 많고, 베트남과 쿠바를 논하지 않더라도 니카라과와 파나마, 그레나다에 있었던 미국의 행적을 눈감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면에서 자이한은 미국 없는 세계의 묵시록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전부 일독을 마친 저로서는 모든 것을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한편으론 캐나다 앨버타에 대한 그의 집착은 꽤 귀엽기까지 했는데요. 국제 정치에 대한 여러 시각들 가운데 이런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관점으로 타협하시고 보면 흥미로운 것들도 확실히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이쯤에 글은 적당히 써야하는 압박이 있어서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본문 번역 중에 ‘빡세게’라는 표현이 있던데, 제가 국어 사용의 엄숙주의자는 아니지만 문어체에 다른 표현도 많은데 굳이 일상 대화에서나 쓰일법한 빡세게라는 식으로 했어야 했는지 의문입니다. 이춘근 교수가 서문에 역자가 이 책을 상쾌, 통쾌해 했다고 언급하는데 서평을 쓰고 나서 원서를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 점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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