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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의 개념 - 서문과 세 개의 계론을 수록한 1932년 판
카를 슈미트 지음, 김효전 외 옮김 / 살림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독일 출신의 공법학자로서 나치스의 법학 초기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오늘날에는 여러 의미로 주목을 받고 있는 카를 슈미트의 논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일독했습니다. 슈미트는 지젝과 바우만을 비롯한 여러 진보와 좌파 학자들에게 널리 인용되고 있는데요. 슈미트는 다소 위험한 국가주의자 및 결단주의자로 해석될 수 있을 만큼 근래 민주주의에서는 꽤 불안한 인식적 요소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많은 학자 및 사상가들의 입에 오르 내리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레오 스트라우스와 조르주 아감벤의 기여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레오 스트라우스는 조지 W. 부시의 임기 당시 백악관과 공화당의 주요 정치 세력이었던 ‘네오콘’의 대부로 그가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하자 동시에 카를 슈미트 역시 미국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근래 조명받고 있는 ‘21세기 백과전서’의 아감벤 역시 그의 ‘예외상태’ 개념에 대한 독창적인 카를 슈미트의 독해는 학계에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 저는 최근까지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련된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카를 슈미트가 심심찮게 어록으로 등장하는 것을 목격했는데요. 이 점은 확실히 민주주의 이론에 있어서 상당히 복잡미묘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국내에는 2012년 번역 출간이 되었는습니다. 물론 국내 최초 출간은 아닙니다. 서문은 1963년 판의 서문이 실려 있고, 1932년 판의 원전을 기반으로 새롭게 출판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3개의 계론과, 레오 스트라우스의 주해를 실어 기획으로는 정중한 모양새를 갖춘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다룬 총 8장의 소주제와 뒤이어 중립화와 탈정치화의 시대를 다룬 1929년 바르셀로나에서의 연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단 슈미트의 이 논저의 주제는 ‘강력한 국가 내지는 국가주의를 위한 일종의 정치 이론서’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극명한 이분법론적 이해 수단인 동지와 적을 그가 정치학 기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조와 그렇지 않은 이념과 사조를 적절하게 비판하고 사실상 1932년 이후의 어떤 자유주의의 퇴색과 더불어 기술의 진보에 따른 현대 국가의 개념성에 부정적 시각과 비판을 강력한 국가 체제에 대한 반대 인식으로 논리적인 범주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매우 애매하게도 부르크하르트의 입을 빌어 “민주주의에서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권력은 너무나 커서 국가와 사회 간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끊임없이 논의 가능하고 변경 가능한 것으로서 유보하려고”라는 등의 뒤에 나오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관과 민주주의의 다양성, 더 나아가 정치적 다원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앞서 설명했던 ‘강력한 국가체제 내지는 국가주의’에 대한 당위를 슈미트는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의 암울하고 부정적인 역사관이 한 몫 거들고 있는데요. 프랑스 혁명 이후의 나폴레옹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점,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부분에서도 일종의 이상주의나 독일의 초기 법학자 푸펜도르프의 세속화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하는 등의 예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국가적인 개념과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 일치했던’ 시기가 있었고, 본인이 독실한 가톨릭 신도여서 계몽시대 이전의 신앙과 복음이 주된 개인의 관심사였던 시기에는 도덕적 및 윤리적 관점에 대한 이견이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919년 이후 유럽에도 민족을 바탕으로 ‘국민국가’가 속속 나타난 것과 비슷하게 이 국민국가를 있게 하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과연 전쟁과 평화 양 극단의 해결책이 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5장에서 그가 중요하게 주장하는 “법의 지배라든가, 나아가 법의 주권성 같은 표현법에 대해 언제나 약간의 상세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정치적 사유의 측면에서는 당연한 것이며, 법의 지배란 즉 특정한 현 상태의 정당화에 불과하며”라고 일축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루소에 의해 고안된 주권에 의한 정부, 법에 의한 지배를 명확히 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의 출현을 막고자 했던 이 초기 민주주의 이론에 대한 거의 전면적인 부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4장에서도 “국가는 그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는 다른 이익사회들과 동위이자 동렬에 있는 하나의 이익사회가 된다”고 명시하며, 이것은 국가이론의 ‘다원론’이며, 그 이론의 예리한 의미는 전부 국가에 대한 예전의 과대평가”라고 언급하고, 이러한 이익 사회에 대한 정치적 통일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불문명하다고 밝히는데, 이것은 일찌기 토크빌이 개인과 정부의 무분별한 이익화에 대한 경고와 그 궤가 비슷해 보이지만, 이 이익사회의 출현이 다원론의 입장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익사회와 다원론을 연계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대략 보여집니다. 이 부분은 홉스를 사실상 비판하고, 스펜서의 역사관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경제적인 권력적 지위의 개념이 생길 수 있다는 것”과 “오늘날 기술적 발명은 엄청난 대중지배의 수단이 된다는 점” 무정부주의에 대한 견고한 비판과 “인도적, 도덕적 진보는 누군가의 관심을 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진보의 부산물처럼 보인다”는 평가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직면한 자본주의적 엉킨 실타래에 대한 묘한 상황과 언술적으로 일치가 되어 보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사회와 정치적 진보에 대해 그가 일정 부분 회의의의 시각으로 그린 것은 아마도 앞선 다원주의화 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불편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요. 여기에는 “오늘날 기술적 발명은 엄청난 대중지배의 수단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자유냐 예속이냐의 측면을 인정하고 오히려 앞으로 우리의 자유를 어떤 식으로 지켜나가야 할지에 대한 ‘전반적인 기술의 진보’를 독특하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술의 정신은 무시무시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종의 ‘자연적 한계’에 도전”으로 여기는 점도 이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꽤 현재 상황에 대한 해석으로 설득력이 높은 경제적 계급에 대한 인식과 기술의 진보가 ‘자연 상태’의 한계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대중 지배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은 슈미트의 비범한 통찰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감안한다면 일견 단순한 해석상의 경제적 계급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 대두의 가능성일지라도 몇가지 논리의 일관성이 부족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역자가 후기에서 이러한 슈미트의 사상이 무분별하게 여러 경로의 해석상 차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이러한 해석의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뒤에 레오스트라우스의 주해에서도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종종 슈미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그가 자주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 종사하여 온 것” 등의 해석은 슈미트가 이것을 위해 글을 여러 정치적, 역사적, 철학적 관점에서 논의해 온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물론 스트라우스 개인의 해석일 수도 있지만, 홉스를 비판한 것이나, 루소를 다소 평가절하하고, 진보에 대한 점진적 비관과 특히, 적과 동지라는 개념을 맨처음 도입하고 이것을 정상적인 사회구성론의 한 방편으로 보았던 것은 즉 자유주의 내지는 인간 자유의 진보를 대척점으로 여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며칠에 걸쳐서 이 책을 독해하면서도 뭔가 불편한 기분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런 요인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슈미트는 나치스와의 관련 내지는 전쟁 책임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소련과 미국에 의해 체포되지만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게 되는 이력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최근에 서평을 썼던 ‘정치 신학’과 이 책 역시 그의 학문적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저버릴 수 없는 개인적인 복잡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내에 그의 이 글을 한 번 더 정독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저의 자기 고백은 이 서평이 너무 부족한 것임을 자임하는 꼴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