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잉크
이택광 지음 / yeondoo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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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의 이택광 교수는 저에게는 비록 공저였지만 ‘우파의 불만’ 과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및 슬라보예 지젝과 관련한 인터뷰, 연구 등으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택광 교수의 글과 번역을 좋아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바쁜 일상 때문에 구입한지 몇 주가 지나서야 서평을 쓰게 되었습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고백일 수도 있겠군요.

이 교수의 이 글은 일종의 광범위한 시론 내지는 현상의 요약본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논의된 여러 주제들을 아우르는 문구를 발견했는데요. 그것은 ‘삶은 있되 삶의 의미는 없는 상태’라는 부분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공사의 구분이 사라진 근대로서의 규정’으로부터 차용한 위의 인식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액체성’이라는 오늘날 우리를 포함한 전세계의 많은 노동자들을 고통에 담가 버리는 액상 물질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깊은 통찰력이기도 한 이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차용하고 인용하기도 했기에 이 해석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저자는 글의 앞선 ‘인간 지성과 이성을 격멸하려는 시도를 벌이고 또한 지성의 하향 평등을 부르짖는’ 반지성주의는 이면에 쾌락의 평등주의를 내포하고, 이것의 정치적 작용으로 포퓰리즘이 탄생하고 궁극에는 민주주의의 붕괴를 불러일으키는 극단주의가 비롯된다는 점은 시민이 자신의 사적 이익에만 치중하고 그 의무를 저버린다면 어떠한 일이 발생하는지 오늘날 정치와 경제 양대 관점의 왜곡과 불안 상태에 대해 철학적으로 또는 사회학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 및 파시즘이 민주주의의 위협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반지성주의가 종교적 극단주의와 만나 포퓰리즘으로 변질되어가는 사회학적 법칙에 대해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의 관계가 동시 다발적인 측면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해 왔는데요. 이 점은 차치하더라도 역시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은 아주 밀접한 관계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글의 후반부에서는 한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페미니즘과 여성혐오 및 남성혐오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택광 교수가 우리나라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한국의 자본주의가 기형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한국이 덜 자본주의적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 너무나 순수하게 자본주의 본연의 모습이라서 그렇다고 봐야 한다.” 는 관점과 관련해서 일전에 헨리 키신저가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 충분히 시장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한 언급과 일맥 상통해 보입니다. 다만, 전세계적으로 불평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고, 엘리트 기득권 정치에 대한 분노와 비판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내부에서는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고 분단 이데올로기에 따라 색깔론으로 몰아가는 역사가 민주주의 시작과 함께 단기간 집중적으로 고착해 왔습니다. 모든 정치경제적 이념과 사조는 완벽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이 사회 이념화가 되었을 경우에는 끊임없는 비판과 개선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뭔가 종교 개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어려운 부분이죠.

요즘 온라인-오프라인을 포함한 여론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해 “촛불 이후 정치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페미니즘이다”라고 밝히고 있는데요. 미투 사례에 대해서도 단순한 가해자-피해자 논법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이데올로기화 되어 있는 견고한 남성 권력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전세계적으로 많은 여성들이 아주 극심한 불평등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아마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산업 개발 시기에 가부장제에 의한 남성 소득의 집중과 이를 통한 가정 경제 유지의 측면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계실겁니다. 남녀 소득 불균형 뿐만 아니라 가장 역할을 하는 남성에게 사회경제적 인세티브가 있었던 것도 분명한데, 이택광 교수는 이 점을 들어 “이제 이런 과거의 인식이 인권과 남녀 평등 가치에 준하는 사회적 정상 상태”로 올라서고 있는 과정인데, 아마도 이 점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고 봐야 하겠죠. 다만, 한 가지 쉽게 수긍히가 어려운 부분은 “오히려 일베는 보통의 한국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극단적으로 희화화해 보여주는 사례에 불과하다”는 언급이었습니다. 일베가 규범을 넘어서는 파격성을 통해 집단적 쾌락을 즐기는 ‘사디즘적 주체’라고 뒤의 행간으로 첨언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다만, “일베가 토로하는 상대적 박탈감은 여성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런 가부장제를 중심 이데올로기로 구축했던 근대적 경제 모델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는 점을 든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만 사실 일베를 ‘한국 사회의 개념화 된 정치사회적 현상’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오늘날 노인들의 ‘태극기 부대’와 비슷한 이해와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일베가 한국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이택광 교수는 서문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농담과도 같은 책의 제목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적확하게 보여준다는 생각”이라고 밝혔습니다. 진보와 좌파가 지리멸렬한 미국과 유럽의 상황을 보노라면 보수의 치명적 대안이 극우가 될 수도 있는 암울한 상황을 우리는 지난 유럽에서 목도할 뻔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미국의 트럼프를 제외한다면 말이죠. 일찍이 존 듀이가 “시민들이 시민의 의무와 역할이 현대 사회의 즐길거리와 오락거리들 때문에 어려운 처지”라고 밝힌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단순한 먹고사니즘의 문제 뿐만 아니라 가면 갈수록 우리가 민주주의 체제를 더 건강하고 개선시키는 데 힘써야 되는 의무로부터 스스로가 벗어나려고 하는 건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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