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의 유령
셸던 월린 지음, 우석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이자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바 있는 쉘던 월린의 이 책을 일독했습니다. 3일에 걸쳐 약 15시간을 할애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이해가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 조만간 다시 읽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분량은 대략 480여페이지 입니다. 전체적으로 번역의 문제는 없어 보였는데요. 다만 원문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국역으로 된 문장도 대체로 길어서 속독을 하는 경우에도 문장의 의미가 자주 손실되어 다시 뒤로 가서 읽어야만 했습니다. 이해력이 부족한 제 개인의 문제겠지요.

부제에서 명확히 밝히는 바와 같이 현재 미국 정치의 본질이라고 여길만한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 를 중점으로 글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 책은 현재 미국 민주주의의 거의 대부분의 병폐와 문제점을 서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높은 평가를 주고 싶습니다. 단순히 열거하는 수준을 벗어나 그것의 근거와 배경을 아주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데요. 독자들에게 이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 글에 들어가 있는 용어들은 저자인 월린의 독창적으로 만든 정치사회학적 개념이라 부를 수 있을텐데요. 우선 전도된 전체주의는 과거 히틀러의 나치즘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전체주의적인 개념이 아니라 앞뒤가 바뀌어 여기서 전도란 본래의 의미로 해석되기 어렵고 매우 편의적으로 변질된 개념인데요. 전도된 전체주의는 기성 체제의 전복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로비시트들을 비롯한 그러한 체계의 워싱턴에 대한 금권 정치라고 볼 수 있으며, 국가 권력을 소수인들로 이뤄지는 독점 형태로 유지시키려는 노력이라 칭할만합니다. 여기에서는 지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그의 내각, 그리고 네오콘 등의 정치적 관여가 이에 속한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관리되는 민주주의는 크게 로마 바티칸으로부터 세속 정치를 분리시켜왔던 과거 역사로부터 현재 미국의 공화당과 기독교주의적 근본주의 및 세속주의자들과의 결합으로 종교와 정치의 엄격한 분리를 근본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의에 대한 오염과 레이건 행정부 때 광범위하게 추진되었던 실질적 복지 쇠퇴와 감세를 기반으로 하위 계층에 대한 거의 반강제적인 탈정치화를 일으켜 현실 정치에서 퇴장시키고, 그러한 정치 혐오와 정치 불신을 조장해 자신들이 국가를 좌지우지 하기 수월한 정치 형태로 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불어 월린은 미국이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세계 각지에 이식시키려 노력해 왔지만, 그것은 아주 표면적인 입장이며, 실질적으로 경제적 혹은 군사적 이익이 사실상의 본질로 이러한 민주주의의 본류로 자임하는 국가가 패권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 만으로도 민주주의 국가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일종의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한국과 베트남, 이라크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미국의 시민들이 원해서였다기 보다 이를 수행한 엘리트들의 과오와 패착이라 볼 수 있으며, 항시 엘리트주의적 정치가 민주주의에서 좋은 결과를 답보하는 것은 아니며 아마도 오늘날 공화당의 패거리적 정치 문화와 이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는 민주당의 현실로 봤을 때 이를 개선시키기 위해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이 워싱턴에 더 자주 나타나야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는데요. 이것은 실질적으로 노동 계층이나 하위 계층의 인물을 지지하여 계층적 이익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그러한 시민들의 정치 행위가 우선되어야 하지만, 특히 언론과 다수의 정치인들이 정치 혐오와 불신을 오랫동안 조장해왔고, 온전한 시민 정치가 기반인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보다는 대중 영합의 좀 더 왜곡된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것으로 확대되어 왔다고 의미심장하게 분석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여러의 책들을 통해 어느 국가나 배타적 기득권을 갖고 있는 기득권층들이 민주주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이미 공인된 소수의 엘리트들이 정치 현실에서 과연 시민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정치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아직은 미국의 엘리트 계층들이 현재의 미국 정치가 자신들의 기반으로 축적되고 견고해진 현실을 대외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하지만 앞으로 얼마간의 기존의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요인이 부재한다면 이러한 현실이 더욱더 고착화 될 가능성이 높다고 월린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결국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역할이 중요하고, 정치 권력을 좀 더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현재의 시민들이 의견을 낼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즉각적인’ 인터넷 환경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마간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월린도 인정하듯이 기존의 민주주의 체제가 견고한 듯 보이나 과거 역사를 보더라도 조직된 시민의 힘이 왜곡된 권력이 민주주의를 훼손시킬 때마다 자정 능력을 발휘했듯이 이에 대한 믿음이 월린 스스로도 갖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이 적지 않은 분량의 글들이 오로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대한 월린의 소산이며, 그것을 위해 평생 스스로를 독려하고 살아왔던 것에 경의를 표하고 싶더군요. 위키피디아에서 검색해보니 지난 2015년에 그가 작고한 것으로 나오더군요. 남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이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킬 부채를 갖고 있다고 봐야할 것 입니다. 이 조직적이고 강대한 ‘정치 혐오’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부수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격차사회 -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풀것인가
다치바나키 도시아키 지음, 남기훈 옮김 / 세움과비움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의 빈곤 연구’ 등으로 유명한 경제학자인 다치바나키 도시아키의 ‘격차사회’를 일독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얼마전에 격차는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이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책에도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가 “격차 사회의 어디가 나쁜가” 라고 말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급격한 계층간의 격차 확대가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관심 없이 일국을 책임졌던 총리의 의견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그것을 통해 정부를 이끄는 정치인이라면 각 개인들의 평등과 최소한의 삶의 복지를 위해 고민해야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자신을 평범한 경제학자라고 소개하는 이 글의 저자인 도시아키 교수도 고이즈미 전 총리의 저 발언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토크빌은 민주주의란 장기적 사회 변화 속에 등장한 ‘조건들의 평등’ 이라는 사회 상태라고 인식했으며,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을 위해서는 민주정을 채택한 국가들에서 그 국민들이 중산층이 되어야 한다고 촘스키도 언급했는데요. 즉, 격차의 확대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측면에서 저도 심각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저자인 도시아키 교수는 격차사회에 대해서 중산층의 붕괴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 경제적 양극화 현상을 일컫는다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최근의 일본 사회에 이러한 격차 심화에 대해 많은 통계와 자료를 인용하며 그 우려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일본의 문제들이 우리의 상황과 너무 유사하다고 여겨졌는데요. 사실상 부의 편중 문제라든지, 복지제도의 미흡, 비정규직 문제, 실업자 양산과 니트족 문제 등이 우리의 요즘 현실과 동일하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일본 정부의 복지비용 지출은 미국보다도 저조해 OECD 국가들 중 하위권에 속해 있는데요. 우리나라도 일본과 상황이 비슷할 겁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채택한 국가의 사회 격차가 심화되면 심화될 수록, 작게로는 사회 안정에 마이너스 요인이고, 크게는 민주주의가 유명무실해지고 기득권을 비롯한 일부 계층의 권력 독점과 집중이 심화되는 악영향이 발생합니다. 일례로 실업자보다는 낫기 때문에 저소득의 비정규직으로서 참아야한다는 타당하지 않으며, 특히 선진국이라면 그런 생각은 마땅히 버려야 함에도, 부의 재분배가 정체되고 최소한의 하위 계층에 대한 복지가 무시된다면 부와 권력에 집중된 상위 계층과 기득권 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크게 훼손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격차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비정규직의 문제도 노동 시장의 규제 완화가 비정규직을 양산시킨 것이 사실이며, 정규직이 줄어들고 비정규직이 양산됨으로써 사실상 사회적인 부의 재분배가 불균형하다는 증거일 겁니다. 그렇다고 부유층에 대한 과세가 나날이 규제완화와 특혜로 줄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시장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그동안 아주 미흡했고, 저자도 인정하는대로 일본 정부 역시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작은 정부로 자임해 왔기에 이에 대한 전반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결론내고 있습니다.

끝으로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현실에서 자신의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영위하기 힘든 계층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확실히 있어야 하며, 시장과 자본주의가 왜곡되지 않고 사회를 붕괴시키지 않기 위해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정부가 취해야 될 최소한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정부도 세계에 선진국이라고 스스로 자임한다면 선도하는 국가로서 이러한 인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프랑스 정부가 OECD에 프랑스가 불평등하다는 자료에 강력하게 항의한 것처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정부가 할 일을 찾아 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는 거대한 허구다 국가란 무엇인가 3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경제자유주의자인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국가는 거대한 허구다’ 를 일독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다 발견한 흥미로운 점이 있었는데요. 바스티아의 이 책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의 ‘국가란 무엇인가?’ 시리즈 물의 3개의 번역작의 제목과 저자들이 의미심장하더군요. 허버트 스펜스와 라이샌더 스푸너 다음에 바스티아의 이 책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제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국가와 정부론과는 사뭇 그 시도와 이해가 다르지 않나 싶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즈음에 태어난 바스티아는 1850년에 숨을 거두었는데요. 당시에는 큰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2차대전을 거쳐 동서 냉전이 극심한 시기에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경제학자들에게 각광을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뒤에 하이에크의 그에 대한 소개글이 실려 있는걸 봐서도 그렇습니다.

전체적으로 5개 분량의 논문을 실은 형태로 1장이 도입의 형식으로 2장의 정의와 박애, 3장의 재산권과 법은 뒤이어 나오는 4장의 법에 대한 주제를 받쳐주기 위한 글로 저는 해석이 되었습니다. 5장은 당시 프랑스의 정치 경제 시스템에 대한 조목조목한 글이었습니다. 특히 5장은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5장은 반복 정독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바스티아는 오늘날에 국가는 부를 모든 사람에게 분배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이러한 일종의 변화된 국가의 역할과 그 기능에 약간의 제한을 두려고 합니다. 경제학적인 접근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은 본디 이기심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물리적인 방법, 즉 법을 통해 제약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 발휘되어 파생되는 몇 가지 결과물들을 봤을 때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더불어 자유 또한 주어진 권리 형태의 자연발생적인 토대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여기에는 정의가 지배하고 법이 보호하는 조건이 중요하다고 또 언급합니다. 개인의 이기심이 동시에 개인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그 바탕이 온전하다는 측면에서 국가와 법, 그리고 정치경제학이 이에 대한 보장을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당시 프랑스의 상황이 지금의 현대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한 일련의 민주주의 국가들과는 사뭇 다르고. 그런 측면에서 평등과 부의 분배에 대해 다소간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를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의 재분배 측면에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어야 한다’고 밝히는 것으로 보아 이기심과 경제적 자유에 대해 이론적인 한계 개념은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은데요. 여기에 대한 바스티아의 추후 설명이 뭔가 추상적이어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이어 법에 대한 그의 고찰에서는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관점에서 법의 임무는 상호적인 권리들의 경계를 확인하고 존중하게 하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있는데요. 여기에 프랑스 혁명에서 중요한 가치인 박애는 자유롭고 자연발생적이어야 하며 그것을 법이나 다른 수단이 강제로 강요하는 것은 노동을 한 자체의 권리를 고려하지 않고 박애의 가치관으로서 부의 재분배가 이뤄진다면 그것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실행될지 알 수 없으며 이로인해 과연 사회가 존재할 수 있겠냐 우리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지막에 하이에크가 강조한 것처럼 바스티아의 기본적 사고방식은 개인의 이기심과 재산권, 자유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자율적인 판단을 보장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봐야겠죠.

확실히 아직 고전적인 경제학의 학문적 한계에서 바스티아가 옳다고 믿는 그러한 불간섭과 (이기심과 재산권 추구를 비롯한) 자유 보장이 오늘날 적용해서 받아들이기에는 세계의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경제학의 의무는 자본주의의 시장 경제 시스템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그에 따른 이론적 받침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자본주의가 심각한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유수의 경제학자들 조차도 필요한 비판에 입을 닫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과거 동서 냉전시기에 바스티아가 자유주의자들과 작은 정부로 대표되는 폭넓은 시장 경제주의자들에게 인용되고 지지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사실상 그러한 신자유주의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자초한 것으로 증명된 것처럼 자유 분방한 시장이 더이상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침해하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미국인들은 복지를 싫어하는가 세미나리움 총서 26
마틴 길렌스 지음, 엄자현 옮김 / 영림카디널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프린스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마틴 길렌스의 ‘왜 미국인들은 복지를 싫어하는가’ 를 일독했습니다. 원제도 Why Americans hate Welfare 로 의미가 명백히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대선에서 뿐만 아니라 정부의 복지 지출에 대한 쟁점이 현안으로 나올 때마다 미국 사회의 복지에 대한 자료들이 여기 저기에 나오는데요. 국내의 보수를 자임하는 정치권이나 그 지지자들이 특히 이런 미국의 복지에 대해 논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 내의 전반적인 복지 제도와 가치관에 대해 미국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해 왔는데요. 그런 궁금증을 채워줄 역할을 바로 길렌스 교수의 이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의 구성은 이론과 그에 수반되는 자료와 설문조사 통계 등을 제공하여 독자들에게 폭넓은 이해를 구하고 있는데요. 미국인이 아닌 국외의 독자들이 미국의 일반적인 현실을 알려주고 있어 꽤 흥미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주 직접적으로 왜 미국인들이 복지와 복지제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그 뿌리깊은 연원과 분석을 하고 있는데요. 그들은 원칙적으로 복지에 대해 동의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사항에서 빈곤층에 대한 현금과 현물을 포함한 지원에는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러한 지원이 개인을 게으르게 만들고 소위 복지여왕과 같은 다소간의 프로그램에 대한 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 사회에 신자유주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건국 이래로 개인에게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려는 기저에 깔린 인식과 부와 관련된 부분은 개인에게 더 재량을 부여해야 한다는 가치관도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런 부분은 전세계에서 일본을 제외하면 가장 작은 정부의 복지 지출로 표출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길렌스 교수의 분석에 잠시 의아했던 것은 복지 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를 포퓰리즘적 문제로 바라 보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는 사뭇 대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이처럼 미국인들의 복지에 대한 반감은 꽤 오래되고 묵은 가치관의 문제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복지와 그 대상 계층에 대한 왜곡된 시선도 존재하는데요. 그것은 미국 사회에서 빈곤층의 대부분이 흑인이라는 편견과 지난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각종 잡지와 텔레비전을 비롯한 매체에서 왜곡된 시선으로 이를 조장했고, 이러한 편견이 결국에는 인종적 악의로 확장되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미국 사회의 빈곤층 가운데 흑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30% 내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흑인들의 대부분이 직업 윤리가 결핍되어 있고, 게으르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다수의 백인들에게 편견으로 남아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편견이 오늘날에는 다소간 불식되고 있지만 아직도 노령층과 백인 중산층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복지 자체에 대한 핵심적인 논점 일탈과 더불어 왜곡 해석된 논쟁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아 이에 대한 해결책이 미국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사회는 오랫동안 아메리칸 드림으로 대표되는 개인주의적 이상의 발현과 성공에 매달려 왔고 아직도 개인의 노력으로 부와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국민들의 빈곤 문제가 자본주의의 모순과 사회적 문제로 발생하는 요인이 크다고 보고 있지만 미국 사회는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일찍이 토크빌은 ‘의기양양한 개인주의가 사회의 퇴보를 이끌 수 있다’고 경고한 것처럼 개인의 이기심과 개인주의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미국의 사회 발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우리 사회에서의 복지 제도에 대한 논의를 자칭 보수권에서 포퓰리즘적 잣대로 받아들이고 있는데요.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더불어 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적절한 감시와 연구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겠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 전쟁을 진지한 학술 연구의 시초로 닦은 ‘한국 전쟁의 기원’의 저자이자 미국 시카고대 석좌 교수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최근 출간작인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 을 일독했습니다. 그는 80년대에 미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는데요. 박명림 교수를 비롯한 국내의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한국 전쟁에 대한 ‘실제 역사’가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근에 러시아가 공개한 구소련 시절의 스탈린과 마오쩌둥, 김일성 간의 외교적 대화와 기록들이 공개되면서 당시 김일성의 행적이 낱낱이 검증되어 논란이 불식되었습니다. 1950년 초에 스탈린이 김일성의 요구를 잠정적으로 인정하면서 김일성이 주도한 북한군의 38선 이남 남진이 사실로 밝혀졌죠.

지금도 한국의 많은 관련 학자들은 커밍스 교수의 한국 전쟁론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밍스 교수는 특유의 노력으로 미국이 보유했지만 그동안 잊혀져 있던 수많은 한국 전쟁 자료들을 발굴해 내었기에 이 부분 만큼은 인정 받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1999년에 공개된 남측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진 자료들이 일부 실려 있고, 책 후반부에 이 주제에 대한 글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제가 고교 시절에 배웠던 국사 교과서에도 나와있던 소쉬 ‘애치슨 라인’ 이 간접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제공한 것으로 설명되는데, 커밍스 교수는 ‘한국 자체로서 대 공산주의 대결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는 것을 애치슨을 비롯한 트루먼 대통령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것을 표면적으로 밝히는 것이 어려웠다. 그 이유는 이런 미국의 입장을 내세워 이승만이 겁없이 전쟁을 시작할까 두려웠기 때문” 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전쟁 기간 내에 맥아더와 트루먼의 대립은 익히 알려진대로 그러했지만, 숨어있던 내막은 트루먼이 맥아더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던 이유는 미국 정부가 핵폭탄 사용을 결정하면 햔직에 더 신뢰할 만한 지휘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번역 출간된 데이비트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 보여지는 맥아더, 트루먼의 일련의 갈등의 본질을 잘못 끄집어 냈다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그외에도 핼버스탬이 미국 정부에 있어서 한국 전쟁에 대한 실제적 이해에 대해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커밍스는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이에 애치슨의 표현대로 ‘한국 전쟁은 발발하여 우리(미국)를 구한 위기’ 였다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봐야겠죠. 당시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싸여 있던 미국 정계에서도 이 한국 전쟁의 의미는 단순히 먼 아시아의 내전으로만 한정하기에는 어려웠을 겁니다. 더욱이 자신들의 태평양 안보에 있어서 중요한 일본을 재건하는데 한국전쟁을 십분 이용함으로써 미국의 정치권에게는 실로 적절한 위기였다고 해석하고 싶군요.

그리고 미국인들이 우리에게 갖고 있던 인종주의적 편견에 대해서도 2008년에 출간된 커밍스 교수의 공저 ‘악의 축의 발명’에서 언급된 공통된 인식이 들어가 있는데요. 특히 당시 남한에서 군정을 수립하고 거기에 참여했던 미군과 그 수뇌부들이 갖고 인종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요. 제가 느끼기에는 제주에서의 사건, 여수와 대전, 수원 등지에서 자행되었던 한국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이러한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인식되어 정치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은 당시 현지의 (권력을 지닌) 미국인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이승만 정권과 그에게 부역했던 권력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확인되지도 않은 사상의 껍데기로 싸잡아 처단해 아직도 진실과 화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미국에게도 공통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근리 사건에서 보여졌던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대응을 봤을 때 이러한 화해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지나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외에도 한반도 전체를 ‘달 표면’과 마찬가지로 만들었다는 미 공군에 의한 무차별 폭격과 먼 미래에 이라크에 대해 1945년의 한국과 거의 동일한 과오를 저질렀다고 자기 고백하는 미국인 커밍스 교수의 언급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국 전쟁의 진실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지만 커밍스 교수의 용기가 느껴지는 이 단행본은 조금이나마 우리가 과거의 동족 상잔의 비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약간의 논외지만 미일 동맹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많은 미국의 연구자들과 학자들과 달리 일본에 의한 냉혹한 한국 식민 통치와 ‘아베는 근본적으로 고노 담화를 거부한다’ 고 평가하는 그의 진심은 약간의 학자적 양심을 느껴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역사와 진실을 날 것 그대로 마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듯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