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수수께끼
존 던 지음, 강철웅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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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캠브리지 학파’ 의 일원으로 알려진 존 던 교수의 ‘민주주의 수수께끼’를 읽었습니다. 저에게는 존 던 교수의 글이 두번째인데요. 며칠전에 ‘민주주의의 마법에서 깨어나라’ 를 꽤 의미있게 소화하고 나서 다시금 존 던 교수의 글을 검색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입니다.

2004년에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헌사글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짤막한 글이 소개되어 있는데요. 존 던 교수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김 전 대통령이 영국 체류 시절, 그 즈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김 전 대통령을 잠시 떠올려보기도 했네요.

이 책은 우리가 간과하거나 빠트리기 쉬운 민주주의의 발생 초기 부터 테르미도르 시기의 공화주의 혁명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기순차적으로 서술되고 있어서 흐름을 집고 넘어가는데도 큰 도움이 되는데요. 그리스와 자치주 시절의 네덜란드, 미국 독립전쟁, 그리고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과 이후 로베스피에르로 비롯되는 자코뱅 당 집권시기 등에 대한 최소한의 배경 지식이 있어야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번역은 평범한 수준이라고 생각되고요. 개인적으로는 테르미도르에 대한 서술이 나오는 3장 전까지는 꽤 잘 읽혔던 것 같습니다.

초기 아테네 시절의 직접 민주주의 형태의 정치는 노예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기본 상태에 투표권과 참정권리가 제한적으로 일부 사람들에게만 부여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와 특징이 명확했습니다. 저는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아프리카 노예를 바탕으로 경제적 특권을 지닌 당시 남부인들의 상황이 아테네 시절의 권리를 가졌던 소수 남성 계층과 동일시 되었는데요. 프랑스 혁명 시절의 사상가 시에예스가 ‘특권층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의 당위성이 크게 와 닿았습니다.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배심 살인’ 을 당한것으로 극도의 민주주의 비판자가 되긴 했지만 그가 당시 민주주의를 비판 해석한 바대로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의 지주들이 노예 경제를 거느리며 특권을 유지한 것은 사실상 민주주의를 거부한 것으로 봐야할 텐데요. 더욱이 아테네와 미국 초기에 노예가 밀접하게 붙어있어서 민주주의 체제 자체로 이상적인 목표를 삼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저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즉, 노예 제도라는 폭력에 기반한 경제적 특권이 앞선 이들과 함께 했기에 현실적 결핍없이 민주주의의 이상에 다가설 수 있었고 그래서 완벽한 민주주의란 오늘날 현실에서 가동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자본주의를 가장 잡음없이 행할 수 있는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를 선호했던 이유도 크게 작용했으므로 시장의 권리를 크게 강조했던 많은 경제학자들도 민주주의에 대해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작은 정부’를 민주정이 해낼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죠.

플라톤도 역시 집단 이익보다는 공동선에 헌신하는 폴리테이아에 대해 긍정했고,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데모크라티아로 칭하게 되는 옛 민주주의 형태와 더 나아가서는 우중 지배로 불리우는 오클로크라티아를 멸칭적인 기준으로 비판했습니다. 샤피로 교수가 언급한대로 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에게 잠정적인 부의 재분배를 바란다면 자본주의를 이식한 경제 제도하의 여러 모순과 이익간의 잡음들을 해결하고 소수의 기득권들이 민주주의가 중우 정치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려에 당연히 반박하며 평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제적 분배 문제가 결코 왜곡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해야 하겠죠. 민주주의가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기재라고 거듭 재생산 하는 이론에도 더욱 비판해야할 것입니다.

다수의 여러 의견들이 폭발적으로 제시되는 소위 다수의 의한 정치는 그러한 의견 갈등과 대립을 설득과 타협으로 조정할 수 있는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공화입니다. 과거 동서 냉전의 결과로 민주주의 자체의 성찰과 반성없이 오늘날까지 이르긴 했습니다만 삼권 분립과 헌법에 기반한 법에 의한 통치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엘리트주의적 정치주의에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교활하고 왜곡을 일삼는 직업 정치인들’에 대한 시민사회와 시민들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키워야 하겠죠. 이렇게 제가 제기한 우려를 3부의 테르미도르에 담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4부에서 밝힌 그것은 하나의 핵심적인 판단을 아주 올바르게 내리는 민주주의는 한 나라 안에서 정치적 선택을 조직하고 시행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혹은 신뢰할 만한 묘방을 제공하거나 못할 수도 있다고 던 교수의 ‘의도적인 불확실한 결말’ 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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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 배관표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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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학교 정치학과의 명예교수였던 세계적으로도 매우 정교하게 민주주의를 분석했던 학자인 로버트 달 교수의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를 읽었습니다. 달 교수는 지난 2014년에 작고를 했는데요. 8월에 이곳을 통해 리뷰했던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에 이어 두번째로 접하는 달 교수의 글이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평등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느냐는 주제는 여러 학자들간의 논쟁이 되곤 했는데요. 좀 더 확장된 자유와 평등의 개념간 논쟁인 ‘재산권과 부의 분재 및 법인 자본주의에서의 민주화’ 등에 관한 논점들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첫장에서 저자는 초기 민주주의 이론의 아버지인 토크빌을 우회 비판하며 ‘평등은 자유를 위협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토크빌의 딜레마로 언급되는 평등이 명백히.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필요 조건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인데, 거꾸로 평등이 다수의 독재를 부추긴다며, 이런 민주주의 필요조건이 자유를 항상 위협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유 중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대해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그 어떤 이상적 체제도 민주주의 만큼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폭넓은 범위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없으며, 질서 정연한 사회라면 적어도 정치적 평등과 정치적 자유 그리고 경제적 자유라는 세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이 정치적 평등과,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이 세가지 요소는 서로 대등하고 독립적인 가치라고 여기고 각자를 중요하게 취급해야만 민주주의적 가치와 질서를 수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기계적 평등만을 주장하고 그것을 추종하게 되면 일견 독재 정치가 출현할 수 있으므로 그것에 대한 견제와 대비가 필요합니다. 중우정치를 포함하는 민주주의의 대중 독재를 만들어 내는 온상이 될 수도 있는데 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달 교수도 지적하는데요. 민주주의 체제가 쉽게 권위주의 체제라 탈바꿈하는 사례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그것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 자유 권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개인의 재산권에 대해서는 ‘재산권이 과연 자연적인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것인가’ 라는 질문에 애초에 헌법에서 자연적인 것이라 확대해석해 ‘법인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확립했던 기업들의 실례들을 들며 이러한 재산권의 제한없는 명백하고 확정적인 인정은 시민들이 경제적 자원에서 불평등하다면, 정치적 자원에서도 불평등하기 쉽고 정치적 평등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평가하는데요. 이것은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휩쓴 전세계의 민주주의 국가에 해당됐던 내용으로 일부 계층의 부의 집중은 경제적 불평등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일반 시민간의 불평등을 조장하기 쉽고, 이렇게 고착화 된 기득권층들은 보통 선거를 비롯한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에 대해 적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정부와 사회 그리고 조직적인 시민 결사체 등이 균형자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요청하며, 이에 폴란드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뒤이어 기업내의 민주적 권리에 대해 분석하며 기업을 정치 통치 형태의 민주적 운영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의 권리는 대체로 보호해야하나 현대의 기업 경영은 전세계적으로 경영자에게 자율권을 보장하고 있고, 그것을 지난 20여년간 견고하게 쌓아온 재산권 행사의 한 형태로 매우 정당한 권리라는 경영 논리가 지배해왔던 관계로 이것을 일방적으로 주입하기란 어려운 실정입니다. 다만 그러한 대안으로 협동 조합과 같은 예를 들고 있는데요. 이것은 앞으로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책이 전체적으로 결론을 내고자 하는 것은 평등이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민주주의 이론의 기본적인 조건인 평등을 과거 토크빌이 ‘시민들의 조건적 평등’을 민주주의 기본이라고 인식했던 것처럼 평등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부분입니다. 자유와 평등이 이론적으로 갈등하며 약간의 모순적 결과가 나타나긴 하지만 민주주의가 추구 하는 다수의 행복과 이언 샤피로 교수가 ‘정치의 도덕적 기초’에서 민주주의의 필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부의 재분배에 있다고 믿는 것이라면 개인의 평등 더 나아가서 시민의 정치적이고 경제적 평등이 당연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봐야되겠죠. 폭넓은 논리와 매우 합리적인 자료들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에서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자유와 평등에 관해 이 책은 좋은 해답을 내놓고 있다고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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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가전략과 동아시아 안보 - 아베 신조의 탈 전후체제와 안보정책의 대전환
정구종 지음 / 논형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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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서대학교 국제학부 석좌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고문인 정구종 교수의 논문 모음집은 ‘일본의 국가전략과 동아시아 안보’를 일독했습니다. 동시에 이 책은 논형 출판사에서 연간물로 출간하고 있는 ‘논형일본학’ 의 일부인데요. 최근에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본 정치사회학 서적을 시리즈물로 간행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꽤 의미있는 연구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정치 연구와 사회 연구는 우리가 현재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상이한 것이 많기 때문이죠. 그 인식의 간극을 생각하면 이러한 춢간이 더욱 더 많이 이뤄져야 생각합니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제목대로 여기에 공통된 연구는 일본의 국가전략 측면에서 외교와 안보, 군사적 부분의 분석과 이해를 담고 있는데요. 1부는 대략 냉전 시기부터 1993년 이후까지의 시기가 포함되고, 2부는 현재의 시점이 주요 범위라고 보면 됩니다. 앞선 1부에 해당되는 내용들은 오늘날 현실에 비춰 참고할 만하다고 여겨지지만, 대체로 급격한 중국의 부상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해석상의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6장 헌법개정에 대한 부분은 꽤 중요하다고 여겨졌는데요. 현재 일본 정치에서 헌법의 개헌과 관련한 호헌론과 개헌론에 대한 연원과 그 과정에 대해 제법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여간의 민주당 정권 이전의 자민당 정권 시절의 개헌 시도와 관련된 내용들을 접할수 있었고, 꽤 복합적인 개헌에 대한 내용들이 나와있더군요. 일본 국민의 여론이 분열되어 있고,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이러한 헌법 개조에 대한 부분을 정치권의 역할 해석론적 한정은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아베 정권을 비롯한 일본 정치권이 과거 2차대전 종전 이후에 이식된 사회 기초와 헌법을 소위 ‘탈각론’에 근거하여 정상 국가화하겠다는 시도에 대해 아무런 역사도덕적 성찰이 없는 것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은 외부 세계에서 보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일본의 정상화’로 맞받아 치는 것은 일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느끼게 합니다.

2부는 근 몇년간의 중국의 부상과 남중국해를 비롯한 센카쿠 열도 및 막대한 군비 증가에 대한 일본의 우려와 대응 및 앞으로 미일 동맹에 대한 예측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더 첨언하면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문제가 일본의 안보 불안의 지렛대로 작용하면서 중국과 북한을 대척삼아 미일 안보 동맹과 집단적 자위권 및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는데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 핵문제와 미사일 발사는 심각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이것을 일본이 아주 적시적소로 이용하고 있다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지역 패권국이 발생하는 것을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역외균형론의 입장이니 중국의 부상을 어느 정도 견제해야만 합니다. 동북아시아 및 태평양에서의 중국의 부상은 이러한 미국과 일본의 이익에 대한 심대한 침해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대체제로 미일 동맹 및 일본에 대한 안보확대 및 안보군사적 참여의 길을 연 것으로 우리에게는 마냥 좋을 수 만은 없는 부분입니다.

저는 2부에서 관심깊게 본 것은 2015년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와 미일간의 논의로 발생된 일본의 집단적 안보 범위의 일환으로 우리 정부와 갈등의 문제로 ‘유사시 한반도에서의 일본 자위대 진출 가능성’ 문제였는데요. 과거 고노 담화를 무력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아베 정권과 이러한 위안부 합의를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유사시 한반도에서의 일본 자위대 병력의 미일 합동 작전 문제에서도 한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요청 및 협의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입장을 우리 정부에 전달하기는 했지만 오로지 38선 이남 지역만이 한국 정부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입장을 교묘히 내세우며 이북 지역인 북한 지역에 대한 개입을 전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자도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현재 한반도 전시 작전권이 미군에게 있어서 한반도에 유사시 상황이 발생하면 아무래도 우리 정부의 입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를 가지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전시 작전권 전환은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끝으로 여태 접한 논문을 비롯한 학술서적들 가운데 정구종 교수의 이 책은 놀랄만큼 가독성이 좋았는데요. 문장들도 늘어지지 않고, 인용된 자료들도 핵심만 가다듬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술술 익혀져 만족스러웠습니다. 대체로 글이 내세우는 주장들이 크게 논쟁적이지 않고 근래 자주 언급되는 것들이라 특별히 독창적인 것은 없으나 독자들에게 쉬이 의미가 전달되어 큰 장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근래 일본이 안보를 잣대로 과거 역사를 망각하고 수정주의적 입장에 들어선 연유를 알고 싶으시다면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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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마법에서 깨어나라
존 던 지음, 황미영 옮김 / 레디셋고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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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Breaking Democracy’s Spell 인 이 책은 지난 2014년 에 출판된 것을 2015년에 ‘민주주의의 마법에서 깨어나라’ 라는 제목으로 2015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저자는 세계 정치학계의 거두라 칭할 수 있는 존 던 인데요. 그는 영국의 ‘옥스브릿지’ 중 캠브리지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주로 정치학계에서 활발한 연구를 해왔는데요. 존 던 교수가 예일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고 출판사측에서 소개하고 있는데요. 단순한 강연록인지 아니면 강연을 바탕으로 새로 논문 형태로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강연에서 좀 더 명확한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에 어떤 영감을 받은 모양입니다. 제가 이렇게 느낀 연유는 글 전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한계, 역사적 배경 등 왠지 모르게 일반 시민들이 알아야만 하는 개념을 저자 스스로 정확히 알려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죠. 약간의 확대해석이 가미된 저의 억측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의 체제의 확립과 확장은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힘을 잃은 유럽을 대신해 미국이 소련과 더불어 패권지향국이 되면서 동시에 찾아온 극심한 동서냉전시기와도 맞물려 도래했는데요. 이러한 배경보다도 더 중요한 요인은 미국이 스스로 민주주의 국가의 본류로 자임했기 때문일겁니다. 작게는 니카라과와 파나마, 그레나다, 좀 더 크게는 한국전쟁,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의 한결같은 구호는 민주주의였습니다. 존 던 교수는 우리가 갖고 있는 오해에 대한 시작으로 ‘민주주의가 곧 좋은 정부’ 라는 식의 선입견이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먼저 꼬집어 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태동했다면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민주주의 이념이 다소간 확장되었던 그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시대의 대두를 이끌었으며,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권역이 스스로 자멸함으로써 사실상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반성이 부족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체제 자체가 스스로 만능이 아니고 모든 사회 갈등요소를 해소 할수는 없으며, 물론 민주주의가 부의 재분배에 대한 문제에 고민은 하고 있지만 사회 내의 부의 집중 문제는 아마도 자본주의의 모순이 큰 원인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다수의 시민을 이끄는 정치 체제의 한 형태인 민주주의에 대한 너무나 큰 기대나 과도한 찬양을 보일 필요는 없겠죠.

그는 또한 현재 중동의 많은 시민들과 일부 유럽의 시민들까지 민주주주의가 자신들에게 안정과 번영, 실존적 안정을 제공해준다고 전적으로 확신하는 이는 없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부가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좋은지 평가할 책임은 전적으로 국민 전체에게 있다는 선을 그으면서 저는 이 부분을 민주주의를 좀 더 개선하고 발전시킬수 있는 역할은 해당하는 시민들이 스스로 해내야하는 부분이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느꼈는데요. 다만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는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를 시민의 위임을 받은 통치 권력에 부여함으로써 국가를 통치하게끔 하는 역할로 표현되고 있는데요. 이러한 입장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모습이라면 실질적으로 일반 투표권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기란 아직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민주주의는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오도되면 심각한 중우정치와 포퓰리즘 심하면 파시즘까지 잉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존 던 교수가 마지막 부분에 강조하듯이 교육이 차지하는 역할이 실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이게도 인터넷의 발달로 시민들의 거의 즉각적인 정치적 반응이 이뤄질 수 있는 현실은 그나마 위안을 가질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들이 실제적으로 정치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평등 선거에 있는데요. 아직까지는 이 평등 선거가 가장 공정한 토대이므로 이 부분은 인정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오늘날 미국의 정치는 거의 ‘금권 정치’ 로 왜곡되었기 때문에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의 정치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수 이익 집단에 대한 무차별적인 의회와 행정부에 대한 로비를 민주주의에서 당연히 용인되는 시민들의 정치적 의견 정도로 볼 것인지 아니면 명확하게 선거와 투표로 그 통치권이 부여되지 않은 이익 집단들이 고용한 하수인들의 매우 심각한 민주주의 침해인지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할 것 입니다. 의료 보험 개혁이라든지, 복지 문제 등 시민들의 실생활에 밀접한 안건들에 대한 나쁜 간섭들이 바로 이러한 금권 정치에서 비롯되니까요.

저의 설명이 약간 미진한 듯 하지만, 존 던 교수의 이 글은 실로 적절한 시기에 나온 저작이라고 생각됩니다. 중동에서의 민주화 바람과 그 절반의 실패, 미국과 유럽의 수수방관적 태도 등 오늘날 민주 진영들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기에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가 더욱 필요한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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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도덕적 기초 예일대학 최고의 명강의 오픈예일코스
이안 샤피로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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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정치철학자로 미국 예일대학교의 정치철학과 교수인 이언 샤피로의 ‘정치의 도덕적 기초’를 일독했습니다. 이 책은 예일대학교에서의 그의 정치학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으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책의 제목이 뜻하는 바대로 정치학에 관한 일종의 합리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윤리 도덕적 잣대로 오늘날 정치학의 기초를 쌓았다고 인정할 만한 사조와 여러 인물의 사상을 서사분석적 설명으로 풀어내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책을 다 읽고 느꼈던 점은 학부생들이 이 강의를 이해하기 위해선 많은 독서가 선행되어야 할텐데, 만약 그렇다면 미국의 학부과정에 있는 학생들의 수준이 어떤지 대략 짐작이 되더군요. 예일대학의 수준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 정도의 수준으로 수업진행이 된다니 놀라웠습니다.

여기에서 샤피로 교수가 주장하는 것은 크게 몇가지가 있는데요. 자연과학은 학문의 특성으로 진보하기 마련이고, 정치학이 그것에 영향을 받으며, 마찬가지로 가류주의에 대해 논하는데요. 즉 우리가 가장 소중히 간직해 온 신념들이 논박되었을 때 그것을 개조하고 수정하며 폐기시킬 수 있는 용기가 그 핵심인데, 이것은 얼마전 읽었던 번스타인의 ‘악의 남용’에서 갖고 왔습니다. 많은 학문의 범주에서 진리라고 알려져 있는 것들은 다수가 이 가류주의적 측면을 전제해야 하고 이것을 부정하는 논조나 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샤피로 교수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주의적인 공리주의부터 프랑스 혁명을 잉태한 루소로 대표되는 사회계약론과 이 모든걸 아우르는 사상으로서 계몽주의를 언급하며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일상의 정치성을 갖게 된 배경과 사회학과 정치학에서의 이 계몽주의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인간 사회를 발전시켜 왔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특히 계몽주의의 비판자들인 무정부주의자, 여성주의자, 실용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나 버크 같은 전통주의적 보수주의자들에게 일정 부분 비판적 의견을 갖고 있는 일부 독자들에게는 다소 논쟁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그가 주장하는대로 정치사회적 진보에 그동안 계몽주의가 큰 역할을 했고 앞으로도 그 영향력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전제에 앞서 설명한 반 계몽주의자들에 언급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더욱이 지나친 탈계몽주의는 파시즘을 불러올 수도 있다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진보주의적 입장이 인간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이뤄냈고, 그것에 계몽주의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하는 샤피로에게는 자신의 정치 사상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마지막 여정에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운명적 귀결이라 여겨질 수도 있을텐데요. 초기의 단순 사회계약적 정치 이론이 민주주의를 통해 위임된 정치 권력에 대한 해석으로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의 현대 민주주의는 소위 특수 이익 집단으로 알려진 다소간 은폐된 이익 집단들과 정치인들이 노골적으로 부패하지는 않았다 해도 대가가 충분히 크다면 대중에게 신뢰받는 지위와 사익을 맞바꿈으로써 예외 없이 앞서 특수 이익 집단을 만족시키려 들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더 일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일침이 와닿았습니다. 샤피로 교수도 앞서 글에서 미국이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의 본류로 자처함에도 매우 심각한 불평등 국가라고 인정했듯이 마국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시킬 요인들이 많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꽃이라 부를 수 있는 시민 구성원들의 활발한 토론과 정치 참여가 민주주의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이 노교수는 말합니다. 이 책과 어제 서평을 쓴 작고한 월린 교수의 글이 뭔가 지향이 비슷하지 않나 싶더군요. 나날이 가면 갈수록 이해력이 결핍되어 어려운 현실이지만 이렇게 좋은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일독을 한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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