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 권력의 논리
후베르트 자이펠 지음, 김세나 옮김 / 지식갤러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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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공신력과 명성을 떨친 ‘데어 슈피겔’의 전 편집자이자 독일 방송계로 진출해 정치 관련 방송 활동을 하고 있는 후베르트 자이펠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데요. 현직에 있는 정치인의 기록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 독일 기자의 정치인 푸틴에 관한 글이 번역 출간되어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는 그동안 정치인 푸틴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특히 미국은 언론을 통해 러시아의 현재 정치에 대해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주의적이라고 비판을 가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푸틴의 악마화에 대해 저자인 자이펠은 명백한 반대의 입장이라기 보다는 소모적인 것으로 여기는 듯 했습니다. 러시아 정치 체제 대해 실체적인 분석을 시도하기 보다는 도덕적 우월론에 빠져 가치 판단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입장인데요. 사실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은 설사 과거 CIA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적지 않은 여러 민주 정부들을 굴복시키고 독재 권력이나 정당성이 전무한 정치인들을 지원했던 것과는 별개로 자신들이 세계의 모범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의 지위에 있다고 보고 있죠. 국제 정치를 배경으로 각국의 이익과 이권을 위해 움직이는 수단들은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매번 획득하는 것이 아님에도 특히 미국은 그동안 푸틴의 러시아에 대해 자신들의 무결점 도덕적 가치관으로 평가 및 판단해 왔습니다. 아마도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이러한 소모적이고 도움이 안되는 서구의 도덕적 우월 이데올로기를 탈피하고 푸틴이 어떤 정치인이고 어떠한 배경과 목적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고 하는 듯 합니다.

과거 보리스 옐친에 의해 정치적으로 발탁된 푸틴은 오랫동안 첩보를 다루는 위치에 있다가 공개된 정치 행위의 일선으로 나서 그동안 러시아 인들에게는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정치인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좀 더 이전으로 들어가 살펴본다면, 독일 통일 전후에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동진은 없을 것이라는 확약을 받고 독일 재통일을 승인하고 소련의 해체가 이어졌는데요. 푸틴은 이 시기의 미국의 확언은 그것이 문서화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반대의 입장이 되기도 했는데요. 미국과 합의한대로 규모로만 본다면 당시 배치된 핵무기들의 3위 규모였던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어 있던 핵무기들을 다시 러시아로 불러들이고 우크라이나를 비핵화로 만들면서 두 강대국이 확약했던 안보 보장이 한낱 유명무실해진 것처럼 여기서 그려지는 푸틴은 실로 완벽한 현실주의자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올리가르히를 제거하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 개입, 시리아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과 선을 달리하는 것을 보면 푸틴 역시 조지 W. 부시와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이 두 명의 거물 정치인이 서로 몇십차례 만나며 적지 않은 관계를 쌓은 것은 아마 이러한 유사성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자이펠의 이 독특한 글은 푸틴은 둘러싼 생생한 러시아 정치에 대한 이해와 서구가 푸틴의 러시아에 대해 갖는 정치적 배경과 연원에 대해서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서술되는 관점들은 딱히 치우치지 않아 정치적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접근을 도와줍니다. 각종 굵직한 사건들은 따로 위키 백과 등으로 검색을 해봤는데요. 그동안 단순히 지정학적이거나 표면적인 러시아 정치를 접해왔다면 그런 측면에서도 꽤 이 책은 도움이 될만하다고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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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배반
쥘리앙 방다 지음, 노서경 옮김 / 이제이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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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파리에서 처음 출간된 쥘리앙 방다의 이 책은 그 시기를 지나 오랫동안 여러 시간을 거쳐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당시 유럽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불온한 기운, 즉 파시즘과 그것에 동조했던 수많은 지식인들과 앞서 1898년의 프랑스에서의 드레퓌스 사건과 같이 명백하게 맨 얼굴을 드러냈던 프랑스 지식계의 패거리 행태를 보면서 일찍이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꽃피웠던 진정한 인문주의와 그러한 근원적 지식인의 토대에 반하는 지식인 무리들에 대한 아주 냉엄한 비판이 방다의 이 글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만 139만명이나 희생되었던 1차 대전의 참혹한 실상과 그 이후의 또 다른 대전에서 보여졌던 선명한 인간 스스로의 악의 측면과 독일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의 상당수가 그러한 폭력에 스스럼없이 동조했던 역사적 현장에 제일 먼저 앞장섰던 지식인들에 대해 처음으로 느꼈던 좌절이 1946년 판 서문에 깊게 남아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 자유의 기본 입장에 반하는 지식인들과 그것을 경멸해 마지않는 무리들에 대한 비판을 역사와 종교적 교리, 식민주의 등으로 부분 대 개념 해석으로 방다 자신의 고유한 해석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특유의 직설적이고 무차별적인 문장은 진정성이 깊게 느껴지는데요.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자임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은 수많은 대다수를 위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교과서적인 입장을 열거하고 비교 분석과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정치 정념에 스스로 동조하여 대중이 이에 스스로 편입되게 하기 위함이나, 형이상학적인 가치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경멸, 정의로운 자들과 정의롭지 못한 자들을 가려내기 위해 힘써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 민족 정념이 야심에 따라 얼마든지 폭력적, 배타적이 될 수 있음에도 그것을 경고하지 않는 것, 특수한 것을 숭배하고 보편적인 것을 경멸하는 것, 악이 정치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악은 언제나 악인 것인데 그것에 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부조리에 격렬히 저항해야 하는 것, 개인주의와 개인적 견해를 집단주의를 옹호함으로써 터부시하고,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인 개인주의를 침해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하지 않는 것 등에 대한 사례를 일일이 방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내지는 철학적 의견 등을 대입해 단순히 논거와 주장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묵직한 진정성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약간의 논외이지만 방다가 인문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인간의 악의 측면이 개선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에 반대하는 일반 지식인들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한 부분입니다. 즉, 지식인이라면 인간의 선한 측면을 옹호하고 발전시켜 그것을 거부하고 경멸하는 자들에게 마땅히 격렬하고 사력을 다해 비판을 가해야하지만 니체나 베르그송과 등과 같이 인간의 이성에 대한 측면의 불신을 주의로 삼은 철학자들과 다른 학문적 연구자들이 마찬가지로 보편적 도덕에 대한 불신이 저 역시도 이해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다만, 방다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을 다소 단순화 시켜서 말씀드린다면, 인간과 사회의 기본적 개념을 경멸하는 태도와 그러한 주의화에 대한 저항이 아무래도 지식인들이 가져야하는 책무임은 아주 당연하지만, 전세계가 고도로 민주주의화의 길과 자본주의 시장체제로 나날이 확장되고 있는 환경에서 개인의 이기주의적 측면의 현실과 그러한 현실주의가 그 기본 임무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식인들의 명예와 출세에 관한 부분이 바로 이러한 측면이겠죠. 물론 방다의 주장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앞서 제가 해석한 현실주의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부분이 이상주의적 가치관이라고 해석되어 폄하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개인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범주에서도 최종적으로 정치의 범위에 속속 항복을 하고 편입되는 지식인들의 현상을 오늘날에도 많은 만큼 최소한 이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최소한 인간의 기본적 토대인 이성, 도덕, 자유, 평화 등을 보존하기 위한 대책과 연구가 절박하게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방다 역시 이러한 현실주의에 대한 고민을 풀어놓기도 했는데요. 어쩌면 이기적 현실에 편입되지 않고 격렬히 저항하는 지식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역으로 좀더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약간의 사족입니다만, 개인적으로 학부 시절이었던 지난 90년대 말에 어느 헌책방에서 이 책의 오래된 구판을 발견했습니다. 당시에 집어든 그 책의 몇 장을 넘겨보고선 고리타분한 도덕 논쟁과 비슷한 글로 보여 금새 바닥에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돌아서 만나 읽게 되었던 이 책은 제 머릿속에 제법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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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의 포로들 - 세계의 패권 싸움은 지정학의 문제다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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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신간들중에 저의 관심을 절로 끌었던 이 책은 한겨레 신문 국제부 선임 기자를 역임한 정의길씨가 저자인데요. 이분의 이름이 그리 낯설지가 않아서 잠시 검색을 해봤는데, 여러 매체를 통해 저에게도 역시 꽤 익숙한 분이었습니다. 요즘 시절이 어수선하여 아마 많은 분들도 국제정치학에 관심이 있으실텐데요. 국제정치학에 올곧이 지정학을 붙인 저자의 의도가 너무 궁금하여 금새 책이 제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약 490여페이지 분량의 글은 다소 소화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짐작보다는 일찍 완독을 했습니다. 문장들은 거의 군더더기 없이 명료했는데요. 아마 이 때문에 수월하게 읽혀졌던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은 온전히 국제정치의 범위에 지정학이라는 관점을 녹여 새롭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동안의 소개된 일반적인 사례들을 평이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씀드리면 과거 세계 역사에서 큰 반향과 전환이 되었던 세계 정치 외교사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191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세밀한 세계 근현대사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크게 소위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지칭하는 3가지의 사례를 중심으로 글을 풀어가고 있는데요. 즉, 제1,2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과 냉전시기의 구소련, 오늘날 중국 등을 그레이트 게임의 주된 행위자로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라든지, 특히 러시아의 팽창과 미국의 독립과 그 과정과 관련해서 여느 책에서는 좀체 알 수가 없었던 상세한 이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러시아 제정부터 소비에트 혁명 전까지의 러시아 역사를 이렇게 개략적이나마 세밀한 역사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은 특별히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사례들과 더불어 당시 각국의 이해관계와 행적에 대해 ‘지정학’이라는 수단으로 해석 평가하는 것에도 좋은 평가를 하고 싶군요.

다만, 여러 내용들 중의 저자의 판단 중에, “소련의 경제 악화는 경제 정책과 운용의 실패라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이 결부된 체제의 한계’ 라는 부분은 다소 납득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당시 소련의 정치 권력이 어떠한 실패를 답습했고 자신들의 정치 권력 유지를 위해 또 어떤 일을 벌였는지 찾아보면 앞의 이 소련의 붕괴가 단순히 미국의 대소 봉쇄와 그로인한 한계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구소련의 해체로 인한 냉전의 소멸은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의 소련 정치권이 국민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한계까지 몰아간 것은 결국 이러한 내부 모순과 피폐한 국가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을 자초한 것이죠. 최종적으로 고르바초프도 소련이 과거의 체제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책 말미에 대중화 세력권이라는 삽입된 한 지도에서 일본과 인도는 그러한 세력 전이에 저항하는 국가로 표기하고 다른 지역내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소위 중화 세력권으로 편입되는 식으로 판단한 듯 한데요. 현재 중국 경제권이라는 측면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고 미국 측에서도 한국과 일본도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정치외교적으로는 아세안 국가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순순히 이러한 중화 세력권에 편입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미 동맹은 계속 유지가 되어야하고 저는 앞으로 급변하는 안보 변화의 측면에서 더욱 한미간의 상호방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도나 일본이 중국의 지역 패권국의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열망에 반대하는 이유는 서로간에 다르고 아세안 국가들 중 특히 캄보디아는 중국 영향력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점차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과거 중화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국가들이 분명 많은 만큼 이러한 중국의 ‘중국몽’이 달성될 상황은 비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내부 모순이라든지 이런 것은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글의 전체적인 논지가 대체로 균형이 잡혀 있어서 글 서두에 지정학을 바탕으로 현실주의적 국제정치를 그려보고자 했던 저자의 목적이 대체로 부합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과거의 소련 등이 배후에 안보 불안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려는 목적이 이러한 지정학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공인된 5개 핵강국과 그외 몇개의 핵 보유국이 있지만 1945년 이후 오늘날까지 국제 정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자신들의 국익을 부분적이나마 배타적으로 사용한 국가들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이런 측면에서 지정학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처해있는 국가적 상황과 판단을 능동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소수에 지나지 않나 싶습니다. 만약 이러한 가정이 틀렸다면 냉전 시기에 왜 많은 국가들이 제3세계에 자청해서 속하려고 했는지 그 속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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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 - 누가 진보를 죽였는가!
크리스 헤지스 지음, 노정태 옮김 / 프런티어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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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Death of The Liberal Class’ 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된 전직 뉴욕타임스 기자이자 현재 비영리 미디어 센터인 네이션연구소에 재직중인 크리스 헤지스의 ‘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를 읽었습니다. 국역된 제목이 원래 제목과는 상이한데요. 일종의 ‘리버럴 계층의 죽음 혹은 몰락’ 이라면 번역된 제목은 ‘중산층 시민의 몰락’이 진보 및 리버럴 지식인들과 그 계층의 책임이라고 에둘러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 부분 책임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해보입니다.

1980년대 부터 미국 사회가 이전의 베트남 전쟁과 냉전시기의 국가가 다소 안보를 위해 급격히 정치적인 보수화와 경제적으로는 개인의 이기심과 시장주의에 맡기자는 신자유주의적 입장으로 오늘날까지 이러한 정치경제 기조가 미국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신자유주의적 기조와 그러한 경제 정책이 어떠한 혜택도 답보하지 않는 사기임에 들어났어도 이러한 파워 엘리틀이 견고하게 구축한 정치경제적 시스템에 ‘제도화된 진보주의자들’ 이 이런 흐름에 편승해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의 중산의 시민 계급이 특히 경제적으로 사회에서 이탈하게 된다면 이것은 심각한 상황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는데요. 기본적으로 진보와 (관습적으로 쓰이는) 리버럴 지식인들이 사회 시스템의 모순과 정부의 불합리한 정치 행태, 기업과 한층 가까워진 언론들에 대한 적극적이고 마땅히 해야하는 비판과 견제를 왜 포기하고 등한시했는지에 대한 인과관계 또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헤지스의 이 글이 인상에 남은 것은 그가 언론인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독서를 해 온 것을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원문과 많은 주석의 출처 등이었는데요. 이러한 점은 저자가 언론인으로서 겪은 체험과 거기에 주장하는 근거의 이론 등이 더해져 이런 부분이 전체적인 글의 요지를 일관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번역도 크게 나무랄데가 없어서 저는 읽는내내 편안하게 읽었는데요. 다만 저도 이 책을 구입할 때는 인지하지 못했다가 조금 검색을 해보니 2014년에 ‘진보의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신판이 재출간이 되었더군요. 혹여 책을 읽어볼까 고민인 분들은 신판으로 구입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사회와 관련하여 진보에 요구해 왔던 것은 기득권과 정치 권력 및 경제 엘리트들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견제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진보나 좌파에는 반대에 있는 부류들과는 달리 사회에 대한 소명의식과 건강한 양심이 뒷받침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전반적으로 자본주의화가 고도로 이행되면서 진보 계층 및 지식인들이 기존의 자신들이 마땅히 비판하고 견제해야 될 대상들의 권역으로 편승되기 위해 소위 ‘제도권 및 제도화되어 공인된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이러한 경계에 교묘히 오고 가면서 회색 박쥐와 같은 처신을 하고 있는 진보 지식인들이 많은데요. 단순히 양심의 유무와 단순히 맹세를 어겼다는 측면에서 극단의 양면적인 비난을 하기에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개인적 삶’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적극적으로 편승하고 있는 지식인들도 사뭇 많아 그것을 기득권과 권력층이 교활하게 이용하고 있는 상황이 오늘의 현실일겁니다.

이러한 급격한 과정은 특히 미국 사회에서 결정적으로 드라났는데요. 저자인 헤지스도 인정하고 있지만 부시 행정부 때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개입의 명분이 ‘타협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문제라기 보다는 일종의 이익 문제의 측면이 컸고, 당시에 미국 사회의 상황은 언론을 교묘히 통제하며 홍보를 지속한 당시 정치권력의 왜곡의 프로파간다였음에도 마땅히 그러한 상황에 침묵한 진보 지식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야겠습니다. 특히 뉴욕타임스와 같은 일부 언론은 기사로 내보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목록을 갖고 있었다는 헤지스의 주장을 접하고 보니 당시의 그런 연결고리가 얼마나 견고했는지 짐작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토크빌은 민주주의 시민 사회에서 개인들의 이기심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하면 그것이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인간들의 브레이크 없는 경제적 팽창에 지구가 병드는 환경 문제라든지, ‘대량살상 금융무기’라고 불러도 무방한 각종 금융시장에서 발휘되는 투기적 증권화와 한도와 제한없는 투기 거래 등과 이렇게 벌어지는 이권의 명백한 당사자들의 돈과 영향력에 굴복해 투쟁하지 않는 진보에 대해 전체적인 일관된 어조로 크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에서라도 진보와 좌파는 ‘진실과 아름다움 (아마도 마땅히 지켜야 될 가치)’을 약탈적 이익 계층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특히 강조합니다. 다만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상황의 얼마간 책임이 있는 진보 지식인들이 그들에게 멍청하게 속아 넘어 간 것이라고 비판의 정점을 찍는 발언이었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지식인의 역할이 공화주의를 왜곡하는 이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라고 규정했는데요. 견제하기는 커녕 아예 자발적으로 속아 넘어간 것이라면 지식인의 사전적 의미를 고쳐야될 정도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것을 확대 해석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이익 사회’의 단면이 아닌가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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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 조세피난처의 원조, 스위스 은행의 비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홍기빈 해제 / 갈라파고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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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 곳 리뷰에서 장 지글러의 ‘유엔을 말하다’에서 잠시 언급했던,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를 읽었습니다. 이 책과 관련해서 소개된 해외 기사들도 있고, 저자 본인도 약간의 후일담으로 꺼내긴 했습니다만, 장 지글러는 1990년 출간 당시 자신의 모국인 스위스에서 수많은 살해 위협, 입에 차마 담을 수 없는 매국노라는 취급까지 받으며 더불어 민사 재판에 피소되어 법원까지 드나들어야 했었는데요. 이 글의 도입부에서도 “관계 당국이나 당사자들 그리고 법원에서 이 글이 밝히는 주장에 어떠한 허위성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그래서 1989년 당시 스위스 금융과 관계 당국, 사법 당국의 행적과 구조 등을 통해 어떻게 전세계 마약 자금 등과 같은 검은 돈이 스위스에 몰려 들었는지에 대해 이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유럽 한복판에 영세중립국이라는 입지 만으로 이 지역의 은행들에 돈을 맡기면 안전할 것이다 라는 속념과는 좀 더 상세한 구조적 개념을 알 수 있는데요. 확실히 돈이 있는 곳에는 일종의 카르텔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유럽의 스위스는 전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오래된 실질적 연대가 있는 국가인데요. 특히 직접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시민들이 특별한 사안에 대한 ‘직접 투표’와 이런 기본 토대를 바탕으로 꽤 견고한 연방주의적 통치구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의 고유한 통치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여기서 소개되는 연방 검사제도에 있어서 프랑스나 미국과는 달리 각 주의 사법 체계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으로 이것은 각 연방법에 관련한 사안에도 주정부에 상당한 권한이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스위스 금융 카르텔은 스위스 내의 정치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고, 그런 연유에는 스위스 경제에서 이 국제 금융업은 적지 않은 자본을 창출하고 이것을 스위스 국내에 재창출을 하는 즉, 시민들에게도 실질적 혜택이 돌아가는 등의 견고한 정치경제적 시스템인데요. 이러한 과정에는 대체로 정치권의 지원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시스템에 정치권이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봐야겠죠.

이러한 스위스 전체의 정치경제적 외부돈으로 인한 경제 순환행태가 그동안 이 검은 돈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게 된 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상 남의 돈으로 자본의 재창출을 해왔던 것으로 지난 2차대전 기간에 유대인들이 맡긴 돈을 관련 증언이 나타나기 전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던 사례나 각종 범죄 단체의 검은 돈을 캐내기 위해 유럽의 여러 수사당국들이 스위스 당국에 수사 요청을 해왔을 때도 그것을 갖은 수단으로 무시해 왔던 연유에는 이러한 기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2018년 현재에는 스위스-EU가 맺은 범죄와 관련된 계좌 사실 확인 협정이라든지 2008년 이후에 미국의 검은돈 추적과 관련된 미국 사법 당국에 의한 압력에 다소간 굴복해 스위스 금융권이 ‘계좌인의 사실 관계 통보’와 같은 정보 제공에 나서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 지글러가 이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마약 자금과 같은 비윤리적인 검은 돈을 아무런 윤리적 양심 없이 마구잡이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통해 스위스 은행들이 막대한 수익을 올려왔고, 그리고 이러한 카르텔에 연계되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스위스 정치권의 부패와 비윤리적 개입을 폭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스위스의 많은 변호사들이 이러한 검은돈을 관리하는 ‘페이퍼 컴퍼니’를 위해 일하는 등의 윤리적 문제는 아마도 덤이었겠죠. 지글러 자신의 의원으로서 그리고 학자적 양심으로 진실은 알려져야만 한다는 절박한 소신이 이 글의 출판의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외부에 꽤 훌륭한 민주주의 정치로 어느 국가 못지않게 부유하고 부강한 나라로 알려져있던 스위스 국민으로서는 장 지글러의 이 책이 매우 못마땅했을 겁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이익과 관련된 자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수없이 협박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1991년에는 이 책으로 의원으로서 면책특권까지 박탈당했으므로 저같은 평범한 사람은 그의 고된 개인사를 참으로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에 선뜻 나선 저자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저는 ‘노엄 촘스키’와 비견될 만한 지식인이 또 존재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검은 돈은 왜 스위스로 몰리는가’는 그러한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여겨지네요. 끝으로 얼마 전 제러드 듀발의 글에서 봤던, ‘성찰과 행동을 결혼시키자’ 는 문구가 문득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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