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벨기에 브뤼헤 출신의 문화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 고고학을 전공하고 영국 케임브리지와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에서 차례대로 수학, 이후 2010년 과거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자행했던 모국 벨기에의 행적과 맞닿아 있는 일종의 르포 역사서 ‘콩고’로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Tegen Vekiezingen’으로 출간되었고, 영문으로 번역된 동일한 글의 제목은 ‘ Against Elections : The case for Democracy’ 입니다. 국내에는 2016년 번역 출간되었는데요. 다만 책에 표시되어 있는 것처럼 영문판이 아니라 벨기에 판을 번역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선 저자의 이 글은 외형상 4장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내용의 전개로 봤을 때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를 바탕으로 다소 적은 분량의 결론을 두고 있습니다. 1장과 3장까지는 오늘날 세계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시민들에게 피로감을 안기고 있는 이유와 선거 민주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을 통해 저자가 대안으로 여기고 있는 ‘제비뽑기 민주주의 (혹은 추첨 민주주의)’를 여러 사례에서 끄집어 분석하고 특히 자국인 벨기에의 독특하게 발전된 민주주의 제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성공적인 주민들에 의한 제비뽑기 참여 등 이른바 ‘숙의 민주주의’로 귀결되는 논리적 이해에 한층 가까워지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제비뽑기 민주주의가 곧 숙의 민주주의와 동일하다는 분석은 앞선 측면에서 꽤 설득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글 초입에서 레이브라우크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초에 과거에는 국가의 근간으로 존중되었던 주권이 지금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하고 과거 루소에 의한 공화주의적 가치가 선거로 대표되는 민주주의로 분화됨에 따라 전통적으로 중시되어 왔던 시민에 의한 ‘주권 개념’이 ‘미디어와 선거’라는 현대 민주주의의 특성으로 점진적으로 약화되어 왔다고 글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정당 정치가 무분별한 금권정치로 인해 변형-왜곡되어 왔다는 것과 전반적으로 선거 민주주의에 의한 기록적인 투표율 저조(신기하게도 기존 정치와 미디어는 이것에 대해 별반 말이 없고)가 저는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민주주의에 대한 피로감-으로 악화되어 왔다는 논리적 전개입니다. 이런 풍조에 대한 원인으로 포퓰리즘과 관료주의 및 관료제 확대, 그리고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의 확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언급한 저자의 포퓰리즘의 인식에 대해 조금 말을 꺼내야 하겠는데요. “내가 보기에 손사래질만 치면서 포퓰리즘을 반정치적 형태라고 밀어내는 것은 지적으로 그다지 성실하지 못한 태도 같다”고 다른 해석을 보이고 있는데요. 간략한 요점으로 정의한다면 포퓰리즘을 통한 신생 정치 참여자들이 기존의 의회 정치에서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있다는 것으로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꽤 중립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자인 그가 주장하는대로 다수가 포퓰리즘적 소수를 과연 존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저 개인적으로는 매우 회의적이며, 기존의 정치체제의 타도를 주된 타겟으로 삼는 포퓰리즘을 설사 그렇다 치는 식으로 용인한다 하더라도 현재 유럽에서 반이민주의와 인종주의의 비민주적 행태는 단언컨대, 파시즘의 사생아라고 불릴만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파시즘과 공산주의와 관련해 꽤 이상한 인식이 나오는데요. “오늘날에 와서는 그 사실을 자주 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본래 민주주의를 활성화려는 시도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제외하고 원론적인 입장에서 저런 인식을 보이고 있는건지, 당시 유럽의 레닌에 의한 소비에트 혁명을 사실상 두려워한 중산층 이상이 주도하여 만든 민주주의의 변형이라는 과정을 감안하더라도 꽤 설득력이 약해 보입니다.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관계를 파헤치려고 한 학자들은 꽤 많으나 저자의 뭔가 뇌피셜에 의한 저런 단언은 요상해보입니다. 전체주의에서의 권력의 본질을 망각하고 저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닌것 같은데 하여튼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또한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에 대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월가를 점령하라’는 운동과 관련해서도 이것이 ‘직접 민주주의의 허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과 그 대안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에서 다소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누엘 카스텔이라면 당연 반대할만한 입장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는 사회에서 가장 우수한 인적 자원들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가 아니다”라는 민주 정치의 본질과 관련해서 “미국에서 실시한 한 연구결과를 보면, 일반 시민들은 선거를 통해서 뽑히지 않은 전문가들이나 기업인들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일종의 경각심을 내보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관료주의와 관료화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시민들 스스로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에도 동일한 논법이라 파악됩니다. 바로 앞의 관료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사례를 중국 경제를 이끈 중국 관료제도로 들고 있는데요. 경제적 조건이 악화되면 시민들 대다수가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중국의 경제와 정치 관계를 이런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현재의 우리 정치가 정당으로 비롯된 의회 정치의 변질로 선거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피로감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고, 저자 스스로가 시민들에 의한 숙의 민주주의를 당위성으로 전제하고 4장에서 착실히 논증하고 있는 것은 크게 인정할만한 부분입니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헌법 개정과 관련된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 사례에서 많은 시민들이 발언권을 갖고 국민투표로 참여했던 경험은 민주주의의 혁신 사례라고 불리워도 무방해 보입니다. 최종적으로 케빈 올리어리가 대안으로 제시했던 ‘민회’와 비슷한 성격의 제비뽑기 내지는 추첨 민주주의가 선거와 만나 시너지를 보이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부정적인 인식을 해소하는데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언론과 정치인들이 이것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이들이 기존의 민주적 체제를 전복하려고 한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피력하려는 가능성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또 당면한 문제일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 높은 지속 가능성을 위해 강력한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단지 제시된 더 나은 조건의 정치인을 뽑기 위한 기존의 선거제도, 포퓰리즘과 더 왜곡된 관료주의, 이를 통해 더 빨리 식고 있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등 글에서는 짧게 언급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경제 만능주의에 빠져서 여러 복합적인 부정적 기류가 현재의 정치 무대를 가속화 시켜 왔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여러 정치학자들의 입을 통해 시민들이 주도하는 숙의 민주주의와 건강한 시민 단체의 대두가 요청되고 있는데요. 저는 여기에 대중 정치에 대한 불신을 보이고 있는 많은 이들의 생각의 전환과 이를 위해 언론이 건강한 여론을 만드는 것에 중점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이런 원론적인 인식은 현실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만 정말 ‘단순하게 선거가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되는 현실’은 개혁되어야 하겠죠.

“대부분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스텔스 전투기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효율적이기를 희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동적 자유 - 민주주의 헌법을 해석하는 방법
스티븐 브라이어 지음, 이국운.장철준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의 연방 대법관이자 호주 시드니 법대를 비롯한 여러 법학 대학에서 방문 교수로 활동한 이력을 갖고 있는 스티븐 브라이어 (브레이어)의 ‘역동적 자유’를 일독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보수주의적인 미국 사법 분위기에서 독특한 자유주의적 사법 관료로서 유명한데, 특히 지난 미국 동성결혼 합헌 판결로 전세계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Active Liberty : Interpreting Our Democratic Constitution’ 으로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인 ‘Active Liberty’는 ‘역동적 자유’로 해석상의 배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역동적 자유는 우리 인민 (We the People)의 개념과 함께 시민의 자유와 재해석된 저자의 판단에 따르자면 ‘국가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주권적 권위의 분배를 가리킨다’고 기본적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콩스탕의 입을 빌어 분석하고 있는 것에서와 동일하게 “입헌 민주정치에서 인민에 대한 깊은 확신은 크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중요한 인민 주권적 이해인데요. 이 점은 또한 “시민들의 참여적 자기 통치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 시민들이 스스로를 통치하고 적극적으로 정치 참여를 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운명은 민주체제를 유지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근래 루소의 인민 주권이 공화주의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권리를 뜻하는 것과 같은 “자유민주주의가 신봉하는 제한주권의 논리, 즉 권력분립 및 견제와 균형의 정신”이라는 중요한 의미와 같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고 이것들의 확장된 의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사법 체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에 소위 ‘전문직업인’으로 일하고 있는 판사들이 헌법자체의 문언주의적 해석에 고립되어 기득권층을 위한 역사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저자는 여러 인용을 통해 일관되게 경계하고 있는데요. 즉, 입헌 민주주의 하에 있는 판사들이 먼저 민주주의적 가치를 먼저 고려해서 판단해야 하고, 반대의 측면에서 문언주의적 해악은 “민주적 정부의 틀을 창조하려는 헌법적 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경향을 띤다”고 주요 반론에서 이와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이런 주요한 논리적 관점을 뼈대로 삼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 건국 초기에 토마스 제퍼슨과 존 애덤스의 ‘권력의 면밀한 분립’의 초기 사상으로부터 시작하여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례들을 포함한 사례들을 분석해보고 있습니다. 수정헌법 제1조에 관련해 콩스탕의 표현대로 “모든 시민들이 예외 없이 참여하도록 개방된 정부 형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는 판단과 더불어 미국의 제헌 헌법들이 대체로 시민들의 ‘공화주의적 자유’에 집중함으로써 이를 위한 적절한 규제와 통제 또한 헌법의 틀에서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저자는 사법 관료와 전문 직업 등의 엘리트 들에 의한 지배 체제에 대한 견제를 민주주의적 원리에 입각해 그 필요성을 충분히 개진하고 있고 이런 입장에서도 오늘날 판사들의 역할이 매우 지대한 것을 다시금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수정헌법 1조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애초에 민주주의의 구조적 통치 과정을 수호할 필요에서 비롯되었던 표현 권리에 대한 강력한 보장으로 말미암아, 경제. 사회 분야에 관한 공적, 실질적 규제의 선택이 부당하게 제약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모든 통제에 구별 없는 기준이 적용되는 것과 유사한 부정적 파급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뒤이어 나오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조치와 관련해서는 명백히 오늘날 기술 발전 상황으로 인한 개인 자유와 기본권의 부정적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는데요. 행정부와 사법 당국이 아주 간편하게 “프라이버시를 위협받은 개인에게 사실을 알리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요건을 규정하기만 하면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프라이버시의 예는 사법적 신중성 측면에서 더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는 저자의 평가는 시의 적절하고 해당 판사들의 실용적인 고려 내지는 합법적인 속성을 구분하거나 이 자체를 종래의 문언주의적 판단으로 일관한다면 그만큼 중요한 민주적 가치라고 볼 수 있는 ‘권력으로부터의 시민의 보호’가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측면에서 제가 전부터 고려해 온 사법부의 판사들이 많은 대중들과의 공개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삼권분립하에 사법 관료들이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우리의 사례는 장기적으로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저자가 입안하고 있는 이 ‘역동적 자유’와는 거리가 있는 경우라 여겨집니다. 물론 글에서는 판사들이 전문직업인으로서 고도의 법체계로 훈련된 전문 관료여야 하지만 따로 민주주의적 원리주의를 개인의 양심의 문제로 남기는 것은 다소 제한적이고 판사 스스로가 문언주의 및 텍스트주의에 갇히지 말고 시민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민주주의에 있어서 뭐가 필요한지를 사실상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라 봐야겠죠.

연방주의와 총기 휴대에 따른 정당성과 같은 문제들에서도 저자는 이 역동적 자유에 근거하여 헌법을 해석하는 판사들의 일관된 문언주의적 해석을 경계시키고 있고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제도와 가치를 제일선에 두고 판결을 내릴 것을 내내 강조하고 있습니다. 앞선 연방주의 및 제도의 공고화가 시민들의 자유와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토대를 위해 발전했고, 이런 대외적인 정부에 대해서도 “민주적 원리에 충실한 정부란, 실제로 작동가능하면서도 압제에 대항하여 개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실천적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정부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전체적인 윤곽은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인식과 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판사들에게 하는 요청과 그에 따른 정당성을 제공하기 위한 논리적 배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판사들 모두가 민주주의 제도를 수호하는 첨병으로 일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성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나라와 같은 국가 시험 제도하의 선출된 이 엘리트 사법 관료들을 민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내지는 재임용과 관련 모든 문제를 사실상 법원에 일임하는 것이 아니라 배심원 제도와 비슷하게 시민과 학자들을 포함한 심의기구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공수처 제도와는 별개로 그 필요성이 요구되어 보이고 또한 대중 정치에 대한 엘리트 지배 권력의 터무니 없는 확대 해석도 전환이 필요해 보입니다. 마이클 사워드가 지적했던대로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비전문성과 부족한 이해는 ‘면밀한 숙의 민주주의’로 해결이 가능하고 전반적인 민주주의의 확대 만이 기득권 권력 정치를 불식시키는 유일한 길임을 믿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
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 플래닛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최근 우리에게 근대 유럽사를 정리한 ‘포스트워 1945-2005’로 깊은 인상을 남긴 영국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이 글은 세상의 남은 자들을 위한 그의 애정어린 마지막 유고가 된 책입니다. 본디 그는 켐브리지에서 수학해 여러 유수의 대학을 거쳐 뉴욕 대학에 학문적 안착을 하기까지 역사학자로서는 매우 드물게 불의와 부정의한 사회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을 가했던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이 된 이 논저도 심각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끊을 수 없는 사명감이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010년에 타계했다는 부고 기사를 읽어보니 제 마음도 절로 무거워졌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원저는 지난 2010년 ‘ILL Fares The Land’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1년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글 초입에 저자인 토니 주트는 이 글의 목적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정부가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긴밀히 연결되는 총 6장의 주제와 1장의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글은 특히 3장,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움’만으로도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1장과 2장은 바로 이 3장을 위한 배경 설명이고, 나머지 4장과 5장 및 6장은 오늘날 이러한 사회적 모순 상황을 만든 총체적 신자유주의의 비판을 바탕으로 그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으로 끝맺음이 되는데요. 결론에 이르는 논증의 많은 과정에는 맨 처음 ‘현재 미국과 유럽의 모델 가운데 그나마 유럽의 그것이 낫다’는 도입으로 시작되고, 특히 이 부분과 관련하여 미국과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를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진행된 국가로 나머지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을 그나마 사회민주주의 기반의 국가로 평가하며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복지 모델에 대해서는 과세 형태와 복지 기반의 제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약간의 제한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케인스주의가 전면적으로 철회되면서 ‘자유원리주의자’와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초래한 오늘날의 급격한 사회문제는 크게 세가지 요인이 있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에 있어 ‘합리적’ 선택에 너무나 많은 면죄부를 부여했고, 둘째는 경제적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부의 불평등이 더욱 완화될것이라는 자유주의적 세계화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고, 셋째는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익히 말하는 합리적인 결론을 결코 도출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토니 주트는 많은 신자유주의 비판론자들이 주장하는 시장의 심각한 문제 혹은 이로인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은 ‘도덕’의 결여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많은 ‘자유원리주의자들’이 강조하고 주장했던대로 개인의 이기심을 본질적인 자유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역사에서 오랫동안 그 가치를 반복해왔던 공공선과 공동체주의가 소멸에 이르렀다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가의 역할론에 대한 재강조와 면밀한 과세 제도에 대한 기반을 앞선 공공선의 입장으로 저자는 재정립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논리 기반에 대해 대체로 수긍되지만, 이를 바탕으로 ‘인간이 본래 도덕적 기질을 갖고 있다’는 논법에는 크게 동의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저는 저자와는 반대로 인간 자체가 매우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존 입장에 찬성하고 단지 인간을 선악의 문제인 이분법으로 제한적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도덕 자체와 관련해서는 교육과 이를 통한 공공정신의 필요성이 만드는 것이라는 데이비드 흄의 도덕적 인식론에도 크게 동의하는 편입니다. 즉,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박탈한 것이 아니라 원래 도덕성과 도덕주의를 인간 주변에 머물게 하는 강력한 동인이 과거에는 존재했다고 밝히는 것이 좀 더 나은 해석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다시 앞선 논의로 돌아가서 오늘날 미국과 유럽을 다르게 인식하게 된 사회경제적 상황이 미국이 과거 작은 공동체로 시작되어 국가와 중앙정부의 권력 비대를 경계해온 역사적 전통이 기반되어 왔다는 것과 이를 바탕으로 개인 자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과세와 복지를 이해하고 결국 마틴 길렌스가 미국인들이 복지와 세금 문제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갖게 된 원인에 비판적으로 화답한 것과 같이 저자도 이 점을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한가지 여기서 따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만약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면, 과거 미국의 매카시즘이 금방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예측에는 묘한 감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뭔가 “개인적 주관주의, 즉 순전히 자기 기준에서만 측정한 이해관계와 욕망”이라는 해석에는 이상하게도 셀던 월린이 말했던 ‘전도된 민주주의’와 닮아 있습니다. “정부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이고,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역할 역시 다시 한번 조정자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되어야 했다”는 보수주의적 신자유주의자들의 인식론이 앞선 논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수많은 민영화 논리를 강조하고 경제적 국경을 무너뜨려 전세계적인 경제 블럭이 결국 불평등과 사회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은 것은 매우 자명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3장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3장은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된 미국 시카고 대학의 ‘시카고 학파’가 하이에크, 칼 포퍼, 조지프 슘페터 등의 이들 오스트리아 인들의 자유주의와 맛닿아 있으며, 일찍이 하이에크가 본디 밝혔던 것처럼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그 모든 간섭이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전체주의로 인도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은 허구로 드러났습니다. 이 점은 민영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교의가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최악의 혼합 경제’로 나타났고 달리 말하자면 “사기업이 무기한으로 공공자금의 지급 보증을 받게 된 것이다”와 같은 말입니다. 철도와 같은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단물을 뽑아내고 이후 경영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국가로 환원하여 국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악순환을 빗댄 해석입니다. 여기에는 영국의 철도 사례를 간접 인용하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이런 차원의 이행과정에는 우리의 민주주주의적 결핍을 초래하고, 더욱 개인들을 파편화 시킨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얼마전에 이곳을 통해 서평을 작성했던 닉 콜드리의 ‘왜 목소리가 중요한가’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상이한 인식과 비판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 민영화와 관련해서도 기업의 사실상 배타적 이익이라는 해석에서 콜린 크라우치와 그 이해를 같이 한다고 봐도 무방해보였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우리의 경제적 삶을 설명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저자가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상생해야 하고, 과거 신자유주의가 경제를 위해 마땅히 민주주의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모순된 필요성에 일침을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는 ‘사회적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만 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공동체와 공공선의 가치를 다시 재정립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당위성과 관련하여 오늘날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저자의 평가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되었습니다. 죽기전에 그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특히 그러한 젊은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글 마무리에서 언급하며 “우리에게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의무가 있다”는 대의 명제를 진정성과 함께 설득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많은 이들을 위한 이론적이고 사회철학적인 글로 자리매김 하기를 일개 독서인의 마음으로 기원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신자유주의 정권들은 보편적인 혜택을 납세액에 따른 선별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과거에 시행되었던 ‘적합성 검사’를 부활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후 일본의 역사 문제 논형 일본학 41
하타노 스미오 지음, 오일환 옮김 / 논형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내의 방대한 아시아 역사 관련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센터장인 하타노 스미오는 일본 명문인 게이오 대학 출신으로 특히 외무성 외교사료관을 역임하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학자이기도 한데요. 특히 전후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대한 연구와 일본 전후체제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로도 유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그의 학문적 관심사가 놓여 있는 글이 소개할 이 책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2011년 일본에서 출판되어 국내에는 2016년 논형에서 번역 출간을 맡았습니다. 번역을 맡은 논형은 서울대학교 일본 연구소와 더불어 ‘논형 일본학’ 이라는 카테고리로 국내에 몇 안되는 일본 역사, 사회, 정치 관련 책을 꾸준히 내고 있는 출판사입니다.

글의 서문에는 “일본 제국의 청산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졌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도출되어 있습니다. 저자인 하타노 스미오는 현재 일본의 ‘전후 탈각의 시도’와 관련하여 그것의 주요한 원인을 연합국과 일본 제국간의 전후 강화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체제로 꼽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원인이 미국이 주도한 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체제에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최종적으로 일왕을 전범에서 제외한 1946년 4월, GHQ와 맥아더 및 미국 정부의 결정”이 포함되고 이를 통해 일왕이 계속 재위에 존재함으로써 ‘과거 군사 침략에 대한 일본인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특히 앞선 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체제는 우리에게는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은 익히 아실겁니다. 일본과의 교전국 지위를 부여받지 못함으로써 배상과 청구권이 훗날 급조된 괴이한 형태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그 당시에도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영국 등의 반대로 당시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고문이 한국을 교전국 지위에 올리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일본은 최대 침략의 대상이었던 중국과는 대만의 장제스 정권이 그 국권이 날로 추락하여 유명무실해졌고, 반대로 베이징의 마오쩌둥 정권과는 1972년 당시 저우언라이와 다나카 가쿠에이가 식민 지배에 따른 배상 문제를 중공의 양보로 불문에 부침으로써 사실상 이런 일본의 국내 분위기와 맞물려 동아시아와 관련된 일본 제국주의적 침략의 전후 태도의 모순이 더욱 고착화 되었습니다. 이 점은 현재 전면적인 일본 정치권과 국내의 ‘수정주의적 역사관’과 보통 국가화를 천명하는 ‘전후 탈각’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도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전후 도쿄 전범 재판부터 그 과정을 분석하고 있는데요. 연합군, 특히 미군 주도하에 이뤄진 도쿄 전범 재판에 대해서는 그 초기에 “일본인에게 패전이란 태평양전선에서 미군에게 참패한 것이, 중국전선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는 입장과 난징학살사건을 자각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마닐라의 강간’으로 알려진 필리핀 마닐라 시내와 주변지역에서 벌어진 무차별 살해, 강간, 고문, 방화와 후에 언급되지만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민간인을 동원한 무차별적인 ‘반자이 어택’ 등과 같은 일본군에 의한 광범위한 전쟁범죄가 이 재판 준비 시기에 희석되고 맙니다. 더군다나 패전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집중하게 되면서 미군에 의한 점령, 그리고 불만족스런 강화로 일본인들에게 인식되게 됩니다. 이에 저자는 주일 미국 대사를 지낸 조셉 그루의 회고록 가운데 “원폭 투하에 대해서는 ‘전투의 종결을 촉진시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고 합리화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내면화 된 패전 인식이라고 생각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커티스 르메이가 주도한 ‘비처럼 내리는 소이탄 공습’인 도쿄 공습 등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부수적 피해’라고 비윤리적 판단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시 일본 고위층이 소련과의 중재를 기대하는 등의 쓸데없는 짓을 벌이지 않았다면 그런 무고한 민간인 피해는 좀 더 줄일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런 정보들이 공개된 마당에 태평양 전쟁과 대동아 공영에 대한 진실된 인정이 일본 국내에서 이처럼 거부되고 있는 것은 저같은 한국인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국민의 정부 시기 김대중 대통령과 무라야마 총리와의 전반적인 한일 협력 시기에 당시 일본 정부가 공동 성명에 ‘침략’이라는 단어 대신에 ‘지배’라는 표현으로 대체하자고 했고, 침략이라는 단어에 일본 국내의 반발이 우려된다는 설명으로 이 책에서도 소개되어 있는데요. 고이즈미 총리가 주변국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던 것과 관련해서도 그동안 꾸준히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조선인들을 분리해 달라는 한국 민간의 요구를 묵살하면서도 ‘태평양 전쟁 당시 조선 출신 군인 및 군속 24만명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해주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의 표리부동이 어떠한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조선과 타이완은 교전지역이 아니라 분리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 대한 일본의 통치는 ‘돈을 쏟아 부은 셈’이라는 것”은 한국 국내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맛닿아 있습니다. 이로써 저는 한가지를 확인한 셈인데요. 이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 침략주의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근본적 이익과 아주 맞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글의 마무리에서 “일본 정부는 침략 전쟁이라는 국제적 비판을 엄숙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침략 전쟁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모순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전후 체제에 대한 모순된 입장에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라야마와 고노에 이르는 ‘주변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 사과’를 바탕으로 앞선 평가를 보인 듯 한데요. 이미 아베 일본 총리는 무라야마 및 고노 담화를 무력화 하는 것을 시도했다가 당시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시도했던 일본 총리는 지금도 그 총리이고 오바마가 중재해서 나타났던 박근혜 정부와 아베의 ‘위안부 합의’가 어떤 식의 결과로 자리매김 했는지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보통 국가화에 이 전후 문제는 심각한 국격 상실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으며, 여기에 기반이 되고 있는 많은 일본인들은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해 아주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사과 하지도 않고 그럴수도 없다. 하지만 너희들은 이러한 우리 태도를 사과로 받아들여라” 바로 이것이 일본측의 본심이겠죠.

끝으로 이 책은 10장의 문제 제기 만으로도 충분히 역사에 대한 저자의 태도와 인식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글 중간에도 언급되고 있듯이, 일왕의 전쟁 책임을 법적으로 묻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히로히토의 퇴위라도 실행되어아먄 했으나 아시다시피 그는 천수를 누리며 아주 안온하게 삶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와 패전과 관련해서 일본 국민들에게 어떠한 본보기라도 보여줄 수가 없었던 것이 일본 정부와 권력층의 노골적인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일반 국민들이 지렛대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 역사 문제 전반을 주변국에 의한 불필요한 내정 간섭이라고 받아들이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이성적인 태도를 바라는 것도 물론 힘들죠. 그나마 최선이라고는 일본내의 리버럴한 지식인들이 뭔가 인식의 전환을 이끄는 수밖에 없는데 이들도 역시 역사 문제와 관련해 교묘하게 국익으로 포장하여 옹호하는 자들도 많아서 저는 딱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일본과의 협력이니 문화 교류라니 하는 것은 그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죠. 제가 비관주의에 탐닉하는 기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역사문제, 전후 체제와 관련된 책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 문제 만큼은 딱히 수월한 해결책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덧붙여, 이 책에서도 71페이지에 오탈자 한곳을 발견했는데요. 제가 구입한 것이 초판 1쇄이니 아마도 시중에 깔려 있는 책들이 다 똑같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반의 인민주권 정당론 클래식 1
E. E. 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인 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는 미국 피츠버그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은 뒤, 30여년 간 줄곧 코네티컷 주의 웨슬리언 대학에서 학부생을 지도한 바가 있는 저명한 정치학자 입니다. 그가 주장했던 여러 가지 중에 특히 “대중들이 대체로 정치적 분별력이 전무하고 너무 무식하다”는 일종의 대중편협론에 반대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글의 서문에서 “낙제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민주 시민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학자와 철학자들이라고 주장”한 것도 앞선 이유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가 30여년간 대학원 생들이 아니라 학부생을 지도한 것도 어린 학생들의 정치 참여를 고양시키고 보편적인 정치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비범한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책과 관련하여 약간 애매한 부분은 센게이지 런닝 (Cengage Learning) 이라는 곳에서 저작권 대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위키피디아에서 검색을 해봐도 특별한 내용은 없더군요. 대략적으로 대학 관련 교재를 대행하는 곳으로 추측됩니다. 1975년의 서문판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970년판을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판은 1960년에 나왔고, 원제는 ‘The Semisovereign People’ 이며, 국내에는 2008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샤츠슈나이더의 기념비적인 논저라 지칭될 만한 이 책의 핵심 주제는 갈등, 정당, 민주주의입니다. 혹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갈등을 먹고 산다”는 바로 샤츠슈나이더의 갈등에 관한 인식과 가까워 보입니다. 이 갈등과 관련해서 저자는 약간의 양가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본디 갈등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갈등 자체를 정치와 사회가 돌아가는 원동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갈등의 사회화’라는 개념도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많은 이익단체들이 경합하는 사회에서 경쟁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으로 보고 있으며, 갈등의 사회화 역시 이런 과정에서 ‘사회적 파급효과’ 내지는 ‘사회적 혹은 사회내에서 규명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요. 저자가 집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의 중요한 목적이 이들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는데 있다고 보는 것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갈등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스피노자의 한줄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정치의 존재에 대한 본질을 이처람 이익집단들 간의 갈등, 더 나아가 미국 정치의 핵심을 ‘정치 권력에게서 경제 권력을 분리하는 데 있었다’고 규정하는 것도 저로서는 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굳이 과거의 도금 시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치열한 양당 정치의 대결 속에서 미국의 현대 정치가 수많은 정치 로비에 의한 ‘금권 정치’로 전락한 지 오래인데, 한때 앞선 그것이 가능했던 잭슨 대통령 시절의 정치적 이상주의 시대를 대입하는 것이라면 크게 벗어난 설명이라고 여겨집니다.

뒤이어 정당 정치에서는 “정당 정치의 관점에서 이익집단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다”고 저자는 인지하고 다른 특수이익집단의 그들의 ‘특수이익’과 이들 특수이익집단이 “실제 선거에서 부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들 집단이 정당 정치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더욱 더 제약한다” 일종의 제한적 분석 또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예를들어 현재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미국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뉴욕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보다 확연한데, 아마 그가 이 책을 집필했던 1960년대에는 이 복합체의 영향력이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 당시에 밝혔던 국가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을 샤츠슈나이더 역시 과소 평가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건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이 책의 많은 내용이 추가되거나 바뀌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익 집단들이 추구하는 자신의 이익들을 공적 이익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추동하고, 4장에서 밝히고 있는 갈등의 치환의 주제에서도 궁극적으로는 ‘갈등의 관리’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등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동시에 통합한다”는 양면적 측면과 “공동체 내의 모든 긴장을 이용하려는 정치체제는 산산이 부서져 해체될 수 밖에 없다”는 부정적인 해석도 ‘관리’의 필요성으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이러한 사적 이익으로 인한 갈등을 공동의 이익의 측면으로 확장시키거나 이해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앞선 사적 이익을 큰틀에서 공동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닐까 감히 판단해봅니다. 어떤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현재의 미국에서 이들 이익 집단들의 꽤 규모와 응집력을 보이는 것은 개인을 포함한 사적 이익을 주장하는 데 미국 만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파악됩니다. 이것을 권위주의적 권력 독점의 출현을 예방하고자 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고, 원래 자유의 이념을 가장 효과적으로 현실에 도입한 이들이 미국인이어서도 그럴 수 있겠습니다. 우리와 같은 전통적인 공동제주의적 역사가 있는 국가들에게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정치사회적 토양이기도 하겠습니다.

또한 5장은 정치적 패러다임이 서로 뒤바뀌게 되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역사적 변화를 소개하고, 규모로는 전국 정당의 위치에서 각각의 지지기반인 ‘기업-공화당, 조직 노동-민주당’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업과 공화당 간의 관계를 적잖은 지면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꽤 견고한 모델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6장은 정당 정치와 더불어 많은 수의 미국 유권자가 스스로 투표 참여를 포기하고 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매우 소리 높여 “만약 4천만의 성인 시민이 법에 의해 참정권을 박탈당했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이 체체의 성격을 보여 주는 기본적인 지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법 외적 수단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은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라고 우려합니다. 법적인 문제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 참정권 포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익히 모두가 아는 내용입니다. 저자 스스로도 이 원인에 대해 해답을 갖고 있는데요. “민주주의에 관한 모든 고전적 개념들은 사람들이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이유와 관련하여 그들 개개인이 가진 자발적 욕구의 강도와 그 보편성을 과대평가해 왔다”고 제시합니다. 이 장의 중간에 “상당수 정치적 주장 내지 정책들이 무시되는 이유는 약 4천만 명의 투표 불참자들이 그 정책과 주장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정치체제와 정당의 현실론과 관련해 설명을 하고 있지만 크게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민주주의에 있어서 큰 냉소를 갖게 된 것은 “대중이 너무 민주주의에 대한 매우 단순화된 정의가 상정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저자는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대중이 경쟁적인 권력 체계를 좋아하고, 민주주의와 높은 수준의 삶의 질 둘 다를 원하다는 것”은 복잡한 민주주의적 사회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라 판명됩니다. 조직화된 여러 특수 이익이 미국 정치의 주된 행위자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많은 국가들에게서 유산 계급이 사실상 대중 권력에 대한 의문 부호를 갖고 있는 것과도 상반되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중의 권력이 중요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이 책에서도 분명 보이나, 날이 가면 갈수록 대중에 의한 정치 참여가 사그라드는 것은 그 이유가 대중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 자체가 본래적 이상주의에서 변질되어서 그런것인지는 양자 사이의 선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정치 철학의 중요한 물음인 “과연 권력을 누가 쥐고 또 어떤식으로 행사되어야 하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는 “인민은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를 갖고 있다”고 밝혔으며. 샤츠슈나이더 역시 이 루소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현실 정치의 문제가 엄연히 우리 시민에게 국한된 원인이 아니라면 더욱 현실 정치에 관여해야 되는 정당성은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만 하겠죠. 듀이와 토크빌이 우려했던 우리의 민주적 정치가 기로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이것과는 별개로 이익 집단의 측면에서 기업들의 권력이 비대한 것에 대한 판단은 저자의 통찰력이라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로 기업 권력과 정치 권력의 분리 작업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