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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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브뤼헤 출신의 문화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 고고학을 전공하고 영국 케임브리지와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에서 차례대로 수학, 이후 2010년 과거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자행했던 모국 벨기에의 행적과 맞닿아 있는 일종의 르포 역사서 ‘콩고’로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Tegen Vekiezingen’으로 출간되었고, 영문으로 번역된 동일한 글의 제목은 ‘ Against Elections : The case for Democracy’ 입니다. 국내에는 2016년 번역 출간되었는데요. 다만 책에 표시되어 있는 것처럼 영문판이 아니라 벨기에 판을 번역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선 저자의 이 글은 외형상 4장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내용의 전개로 봤을 때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를 바탕으로 다소 적은 분량의 결론을 두고 있습니다. 1장과 3장까지는 오늘날 세계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시민들에게 피로감을 안기고 있는 이유와 선거 민주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을 통해 저자가 대안으로 여기고 있는 ‘제비뽑기 민주주의 (혹은 추첨 민주주의)’를 여러 사례에서 끄집어 분석하고 특히 자국인 벨기에의 독특하게 발전된 민주주의 제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성공적인 주민들에 의한 제비뽑기 참여 등 이른바 ‘숙의 민주주의’로 귀결되는 논리적 이해에 한층 가까워지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제비뽑기 민주주의가 곧 숙의 민주주의와 동일하다는 분석은 앞선 측면에서 꽤 설득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글 초입에서 레이브라우크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초에 과거에는 국가의 근간으로 존중되었던 주권이 지금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하고 과거 루소에 의한 공화주의적 가치가 선거로 대표되는 민주주의로 분화됨에 따라 전통적으로 중시되어 왔던 시민에 의한 ‘주권 개념’이 ‘미디어와 선거’라는 현대 민주주의의 특성으로 점진적으로 약화되어 왔다고 글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정당 정치가 무분별한 금권정치로 인해 변형-왜곡되어 왔다는 것과 전반적으로 선거 민주주의에 의한 기록적인 투표율 저조(신기하게도 기존 정치와 미디어는 이것에 대해 별반 말이 없고)가 저는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민주주의에 대한 피로감-으로 악화되어 왔다는 논리적 전개입니다. 이런 풍조에 대한 원인으로 포퓰리즘과 관료주의 및 관료제 확대, 그리고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의 확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언급한 저자의 포퓰리즘의 인식에 대해 조금 말을 꺼내야 하겠는데요. “내가 보기에 손사래질만 치면서 포퓰리즘을 반정치적 형태라고 밀어내는 것은 지적으로 그다지 성실하지 못한 태도 같다”고 다른 해석을 보이고 있는데요. 간략한 요점으로 정의한다면 포퓰리즘을 통한 신생 정치 참여자들이 기존의 의회 정치에서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있다는 것으로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꽤 중립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자인 그가 주장하는대로 다수가 포퓰리즘적 소수를 과연 존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저 개인적으로는 매우 회의적이며, 기존의 정치체제의 타도를 주된 타겟으로 삼는 포퓰리즘을 설사 그렇다 치는 식으로 용인한다 하더라도 현재 유럽에서 반이민주의와 인종주의의 비민주적 행태는 단언컨대, 파시즘의 사생아라고 불릴만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파시즘과 공산주의와 관련해 꽤 이상한 인식이 나오는데요. “오늘날에 와서는 그 사실을 자주 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본래 민주주의를 활성화려는 시도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제외하고 원론적인 입장에서 저런 인식을 보이고 있는건지, 당시 유럽의 레닌에 의한 소비에트 혁명을 사실상 두려워한 중산층 이상이 주도하여 만든 민주주의의 변형이라는 과정을 감안하더라도 꽤 설득력이 약해 보입니다.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관계를 파헤치려고 한 학자들은 꽤 많으나 저자의 뭔가 뇌피셜에 의한 저런 단언은 요상해보입니다. 전체주의에서의 권력의 본질을 망각하고 저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닌것 같은데 하여튼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또한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에 대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월가를 점령하라’는 운동과 관련해서도 이것이 ‘직접 민주주의의 허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과 그 대안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에서 다소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누엘 카스텔이라면 당연 반대할만한 입장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는 사회에서 가장 우수한 인적 자원들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가 아니다”라는 민주 정치의 본질과 관련해서 “미국에서 실시한 한 연구결과를 보면, 일반 시민들은 선거를 통해서 뽑히지 않은 전문가들이나 기업인들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일종의 경각심을 내보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관료주의와 관료화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시민들 스스로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에도 동일한 논법이라 파악됩니다. 바로 앞의 관료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사례를 중국 경제를 이끈 중국 관료제도로 들고 있는데요. 경제적 조건이 악화되면 시민들 대다수가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중국의 경제와 정치 관계를 이런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현재의 우리 정치가 정당으로 비롯된 의회 정치의 변질로 선거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피로감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고, 저자 스스로가 시민들에 의한 숙의 민주주의를 당위성으로 전제하고 4장에서 착실히 논증하고 있는 것은 크게 인정할만한 부분입니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헌법 개정과 관련된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 사례에서 많은 시민들이 발언권을 갖고 국민투표로 참여했던 경험은 민주주의의 혁신 사례라고 불리워도 무방해 보입니다. 최종적으로 케빈 올리어리가 대안으로 제시했던 ‘민회’와 비슷한 성격의 제비뽑기 내지는 추첨 민주주의가 선거와 만나 시너지를 보이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부정적인 인식을 해소하는데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언론과 정치인들이 이것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이들이 기존의 민주적 체제를 전복하려고 한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피력하려는 가능성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또 당면한 문제일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 높은 지속 가능성을 위해 강력한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단지 제시된 더 나은 조건의 정치인을 뽑기 위한 기존의 선거제도, 포퓰리즘과 더 왜곡된 관료주의, 이를 통해 더 빨리 식고 있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등 글에서는 짧게 언급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경제 만능주의에 빠져서 여러 복합적인 부정적 기류가 현재의 정치 무대를 가속화 시켜 왔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여러 정치학자들의 입을 통해 시민들이 주도하는 숙의 민주주의와 건강한 시민 단체의 대두가 요청되고 있는데요. 저는 여기에 대중 정치에 대한 불신을 보이고 있는 많은 이들의 생각의 전환과 이를 위해 언론이 건강한 여론을 만드는 것에 중점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이런 원론적인 인식은 현실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만 정말 ‘단순하게 선거가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되는 현실’은 개혁되어야 하겠죠.

“대부분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스텔스 전투기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효율적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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