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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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미국 민중사와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깨어있는 양심'이었던 하워드 진은 전세계에서 정말 보기 드문 행동주의적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애틀란타에 있는 흑인 여자 대학 스팰먼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학교 당국에 의해 해고를 당하기 전까지 미국 진보주의 운동과 반전운동에 있어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는데요. 이후 보스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국 사회의 본질과 '병영 국가'로서의 미국을 파헤치는데 온 힘을 다해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2010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시민 운동과 시민의 권리에 영감을 안겨줬던 그를 후에 노엄 촘스키는 실로 애석하게 여겼는데요. 사실 그동안 촘스키의 저작을 통해 하워드 진의 존재를 익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이제서야 그의 저작 하나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미 위키백과나 수많은 기사 자료들을 통해 하워드 진의 정력적인 활동과 살아온 자취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정말로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몸소 체험한 진정한 지식인인 하워드 진에 대해 실로 겸허한 마음이 드는 건 아마도 그의 이력을 접하게 되는 많은 분들도 똑같은 마음이리라 생각됩니다. 더불어 하워드 진의 진실된 이야기를 끄집어 낸 언론인인 데이비드 바사미언은 이미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사이드를 통해 대가들과의 대담을 훌륭하게 이끌어낸 바가 있습니다. 특히, 그는 국내에 번역된 촘스키와의 여러 대담집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그리고 강주헌 선생의 번역 또한 크게 나무랄데가 없어서 읽는 내내 편한 마음으로 글을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번역가의 큰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은, 원제 "Conversations on History and Politics"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8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책은 고유한 주제를 담은 총 8장의 구성으로 하워드 진이 알생에 걸쳐 천착한 학문적 양심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제가 국내에 번역된 하워드 진의 글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이 책은 그의 사상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글이리 여겨졌습니다. 특히,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 의식은 현재 미국은 거대한 군국주의적인 체제에 제국주의적 이해 관계를 몸소 달성하고 있는 국가로서, 이 외형적인 민주주의적 국가가 어떻게 지난 세기 동안 병영 국가화가 되었는지에 대해 하워드 진과 데이비드 바시미언의 대담을 통해 밝혀 나가고, 그 와중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흑인에 대한 권리 운동과 시민들의 불복종 운동 및 반전 운동에 대한 하워드 진의 과거 행적들을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제 임의로 정해본 1장과 2장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도 한데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분석하고 그에 따른 첨예하게 불평등한 사회속에서 지배 계급의 논리가 어떻게 일반 시민들의 관념에 침투하고 이를 통해 어떻게 그들의 논리가 재생산 되는지를 논하고 있는데요. 전반적으로 미국이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정부가 매우 성공적으로 기업과 결탁하고 그러한 자본주의 하에서 어떻게 '자유 시장 free market' 이데올로기로 진화되어 왔는지를 독자들에게 낱낱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은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화신'이라 자임하면서도 소위 국익을 위해 다른 권위주의 국가와 독재 체제의 버팀목이 되기도 하였는데요. 이것은 CIA와 군이 일원화 된 체계로 각지의 전쟁에서 노력한 결과로 이 글에 등장하는 해병대 출신의 인물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진은 미국을 소위 '군국주의 국가' 내지는 '병영 국가'라고 지칭하고 있었는데요. 좀 더 엄밀히 분석한다면, 막강한 산업정치적 권력을 지닌 '방산 업체'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자본주의적 체제가 국가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변형된 이 '방산 자본주의'가 엘리트 정치 전반을 관장하고 이런 결합이 저들의 노골적인 이해관계에 포섭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바로 여기에 시민의 정치는 실종되었다는 것이 하워드 진의 일관된 논점이었습니다. 즉, 루소를 발언을 통해 지금의 미국 사회를 인용하고 있는 하워드 진은, "가까운 미래에 공고히 할 전문가 계층의 정치에 따라 시민들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규정될 만큼 이 해석상의 관계가 크게 어긋난 부분이 없어 보였습니다. 따라서 이렇듯 체제의 변화를 일종의 '국가주의화'로 그는 바라보고 있었는데요. 사실 사회학에서의 사회진화론자들이 그토록 혐오스럽게 여겼던 '국가주의'와 하워드 진이 인식하고 있는 '국가주의'는 사뭇 다른 내용이기도 합니다. 특히,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병영 국가로서의 국가주의'는 앞선 부분과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장과 2장, 뒤이어 논의되는 3장과 4장에서도 이런 미국의 국가주의가 시민들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사실상 제한시키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함께 엘리트 지배 계층의 또다른 이해관계(자신들이 속한 기업의 이익 뿐만 아니라 국방비와 방산 업체의 이해 관계에 따른 다른 이익)에 봉사해 전쟁을 거부할 시민의 권리조차도 국가의 명령에 시민들이 승복하게 되는 악순환을 진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지배 엘리트들은 명예롭지 못한 중동에서의 전쟁으로 발생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과 작전중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시민들이 더이상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언급하고, 마찬가지로 헬리버튼과 같은 용역 회사들의 전쟁을 통한 이익, 중동 내 있는 유전에 대한 권리를 추구하는 등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해 많은 시민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그래도 '온건한 제국주의'를 통해 세계 안보에 이바지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미국의 '안보주의'가 마찬가지로 국가주의에 투신한 일례를 증명하는 것이라 저자는 밝혀내고 있습니다.

다음 5장은 '시민들이 왜 비판적 인식을 키워야만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제언이 담겨 있는데요.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펼 때, 마땅히 시민들이 비판을 해야한다"는 맥락의 주장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더 많은 독서를 통해 매스컴이 주입하는 정보들을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는 부분도 동의할 수 있었는데요. "종일 TV만 보는 사람이 오히려 진실과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2차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실제로는 명분이 없었고, '후세인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핵무기 1개 때문에" 미국이 지역 안보를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 당국의 주장들은 만개가 넘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소위 '우위의 도덕적 관념'을 이중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 견고화된 이데올로기가 충분한 교육과 지식 활동으로 축적된 것이라 인정하는 저자는 단순히 이념적 차이 때문에 반대편에 있는 시민들을 '세뇌당했다'고 터무니 없이 비난하는 것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러한 지식활동과 교육이 맹목적이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의 총아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여겨지는데요. 그래서 듀이가 말하는 시민 스스로의 교육이 자발적이든 어쩔 수 없는 것이든 간에 '시민의 의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분명한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반지성주의'가 인용되는 마지막 장에서 현재의 미국 정치가 처한 일면을 저자의 인식을 통해 정확히 목도할 수 있었는데요. 텔레비전이 대다수가 되어 시민의 정신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더욱 시민들이 책과 멀어지는 것이 아마도 작금의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는 토양이 되었을 겁니다. 애초에 투철한 도덕적 관념을 지니고 있는 엘리트들이라 할지라도, 2세기가 넘는 동안 대중 정치에 대한 터무니 없는 두려움을 안고 있는 저들이 일반 시민들이 사색과 이론을 통해 정치적으로 무장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많은 사회학자들의 인식이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이 만연된 오락거리에 노예가 되는 것을 안타까워 하기보다는 그런식으로 실제 정치에서 멀어지는 것을 오히려 반기는 것이 하워드 진이 말하는 지배 계급의 어쩌면 원하는 바일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행동주의로 갈 수 있는 교두보가 선험된 지식들을 통해 마련되는 것이고,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변별력이 없는 시민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맥락이겠죠. 이는 촘스키도 그랬고, 바우만 역시 숱하게 강조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하워드 진 역시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사색하라고 시민들에게 권유하고 있었는데요. 작금의 네트워크의 출현과 그에 따른 온라인 상에서의 국경을 초월한 문자의 접근성을 오히려 극우들과 왜곡된 보수 우파가 더 유연하게 이용하는 것은 가짜 뉴스와 거짓말을 구분할 수 있는 변별력이 우리들에게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전역에 파견하는 미군이 좋은 일을 하고 있고, 그 의도가 순수한 거라고 그들은 전제한다. 하지만 세계를 약탈한 미국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런 전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의 교묘한 결탁이 있었다

오웰의 ‘1984‘는 요즘의 세계를 불안할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주는 안내서라 할 수 있다. 여론조작, 언어조작, 사용되는 선전 문구, 악랄한 외교정책에 붙여지는 명칭, 폭격과 전쟁에 붙여지는 이름 등이 섬뜩할 정도로 비슷하다

‘안보‘라는 단어는 국가주의의 산물이다. 다른 나라의 안전은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나라를 폭격하는 짓은 그 나라 국민의 안전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미국은 유럽의 구 제국들, 예컨대 영국과 프랑스에게서 중동 석유의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양도받았다

결국 미국은 민주국가가 아니다. 우리는 경찰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후 나는 사회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가졌고, 대부분의 사람은 무력하게 의사 결정자들의 희생자가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18세기 말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 세계에는 공학자, 과학자, 성직자 등 온갖 전문직 종사자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시민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무자비하고, 그 어느 때보다 기업과 결탁되어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군국주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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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로 본 한중관계의 오늘과 내일 (양장) 원광대학교 한중관계 브리핑 5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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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관계 특히, 중국 연구와 관련되어 국내에 명성을 갖고 있는 곳이 성균관대의 성균중국연구소와 경남대학교 그리고 한동대 정도가 개인적으로 생각이 납니다만 한울에서 나온 이 책의 집필진 또한 앞선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최근에 중국관계학에 대한 연구를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인데요. 사실 1992년 한중수교 이래로 한중간의 교역 규모가 나날이 증대되면서 양국 간의 활발한 민간 교류에 힘입어 국내 대학에서도 중국 연구에 대한 붐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최근의 뉴욕 타임즈의 설문조사로 밝혀진 바대로 한국에서 더이상 중국에 대한 희망적인 의견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의 '혐중 인식'은 이미 여러 국내외 언론사들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었죠. 현재 미국의 대 중국 압박 나날이 강도를 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경제와 안보라는 이원화된 외교로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 바로 그런 내용들을 이 책이 담고 있기도 한데요. 여기에 실린 글들은 일종의 시론이나 적은 분량의 칼럼으로 얼마전에 중국측의 보복으로 이어진 사드 사태와 근래 한중간의 여러 현안들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에서 기획하여 지난 2017년 2월 국내에 출판되었습니다.

여기 글에서도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만 현재 미국의 대 중국 압박은 과거 고대 로마 시절의 '분할 통치 Divided and Rule'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볼 수 있읕텐데요. 동맹과 우호국들을 늘려 중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는 전형적인 형태로 과연 중국이 이러한 고립에 빠지게 될지는 좀 더 두고 볼일입니다. 다만, 제가 좀 주의 깊게 본 대목은 2015년 8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한중간의 관계가 더할 나위 없는 밀월관계에 이르렀고 국내 보수 신문인 모 신문사 조차도 박 대통령의 참석을 인정한 바가 있다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드 배치로 인해 이러한 한중간의 밀월이 무너지게 되지요. 저는 중국의 노골적인 사드 보복을 언급하기보다는 이 글을 통해 한가지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결과론적이겠지만 미국이 한국에 대한 사드 배치를 통해 노리는 바가 확실히 있었다는 점입니다. 뭐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미사일 방어를 위해 들어왔다는 소리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미국이 주도하는 MD 체제와 중국과 러시아의 미사일망을 훑어낼 수 있다는 것이 미국 국익의 유리한 점이라고 여러 지면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아마도 이 글을 통해 추측해 보건대, 당시 워싱턴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던 한국의 대중 외교를 작살내면서 일본처럼 미 동맹 체제에 편입시켜 미국이 원하는 외교를 하고자 한 노림수였다고 여겨졌습니다. 익히 잘 알려진 바대로 사드 사태로 인한 중국의 노골적인 보복에 한국을 위해 미국이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외교가에서 유명했습니다. 물론 사드 배치가 전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에 중국은 여러 외교 통로를 통해 아마도 박근혜 정부의 사드 배치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외교에 단언하는 확답은 있을 수 없지만 아마도 당시 한중간에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요. 결국 사드는 성주에 배치 되었고 러시아의 경고 그리고 중국의 엄청난 보복이 이어졌습니다. 여기 집필진들도 당시 박근혜 정부의 외교 무능을 꼬집고 있었습니다만 한국의 국익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초등학생처럼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녔었죠.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독트린처럼 우리나라도 미중간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명확한 기준을 놓고 양국을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친중과 친미는 사실상 우리나라 국익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여기에는 꽤 귀중하게 사드 배치와 관련된 중국측의 의견을 엿볼 수 있는 글이 하나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 산둥대학교 중한관계연구중심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비잉다의 글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한국 수역에 할당된 중국 어선들의 어획량을 기존의 6만톤에서 더 늘리자는 것이 그의 다른 주장이기도 하였는데요. 중국 내의 지식인들이 대부분 당과 정권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러한 주장이 크게 새롭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냥 원론적인 내용에 자기들의 주장만 담은 (한국측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전형적인 중국인의 글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글을 볼때마다 한숨만 나옵니다만 근래 중국측의 전방위적인 강요와 방만한 태도는 실로 눈살을 찌뿌리게 합니다. 이미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왜곡 때문에 중국인들의 관념 체계 자체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임을 우리는 익히 알게되었는데요. 이러한 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떤 식으로 우리의 이익에 수렴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제가 외교 관계자는 아니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이 책은 크게 한중관계 및 중국 인식에 있어 크게 새로운 내용이 담겨져 있는 글은 아닙니다. 그저 평이하고 근래 언론이나 여러 글들을 통해 나온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만, 이 글이 논하고 있는 두 가지 지점이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요. 황당무계한 홍콩의 독립 가능성과 "남북 교류의 마지막 보루인 개성공단마저 폐쇄되어버린 우리의 상황에서는 만나서 다툴 수라도 있는 중국과 홍콩이 참으로 부러워 보인다"는 글에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홍콩의 많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희망도 보이지 않는 미래와 투쟁하고 있는 상황을 '만나서 다툴 수라도 있는' 배부른 다툼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 저는 실로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또한, 다음 글에서 "중국 동포 (조선족)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일원"이라고 언급하는 것도 절로 짜증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는데요. 엄연히 법적으로 중국 국적인 자들을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항변하는 것은 중국 측의 불쾌를 초래할 수 있고, 중국 동포 대부분의 정치 인식과 역사주의를 고려해 봤을 때, 그저 다른 나라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이 우리 나라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자들의 사해 동포주의는 충분히감안하더라도 이렇게 말도 안되는 수사는 지식인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세계화 시대에 편협한 인종주의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앞서 나간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산에 급하게 출장을 내려와서 저녁에 읽을거리를 찾다가 중고서점에서 구매한 책이기도 한데요. 근데 앞장에 출판사의 증정품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서점들은 암묵적으로 증정품은 판매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확인을 해보지 않고 산 일차적인 책임이 저에게 있습니다만 검수를 제대로 하지 않고 중고 서가에 올린 알라딘 측의 무성의에 실망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출판사의 의도된 편집인지 아니면 집필진의 원래 원고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글로 된 용어와 단어 뒤에 한자를 '간체자'로 표기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중국어 글도 아니고 중국 원본이 한글로 번역된 것도 아닌데 왜 우리 한글로 표시되는 한문 조차 간체자를 봐야하는 걸까요. 이것도 전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영국을 EU 시장의 교두보로 삼으려고 공을 들였던 중국은 영국의 EU 탈퇴 소식에 쓰린 마음을 부여잡아야 했을 것이다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이 갈수록 희박한 상황에서 최근 한국 국내 여론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은 핵 보유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2015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은 역사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우군으로 삼고자 한다

한국과 중국이 2015년 6월 정식 서명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체결 찬성을 주장하는 언론이 82%로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반대는 4%에 불과했으며 불분명한 입장을 나타낸 언론은 14% 정도였다. 경제와 관련한 두 가지 사안에 대해 국내 언론은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 적극적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우려는 설득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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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8-30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끼인각은 각도라도 명확해서 포지션 잡기라도 쉬운데, 우리나라는 참 슬픈 운명을 타고 난 것 같아 답답하네요! 하노이회담 이후로 절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우린 언제까지 줄타기를 해야 할지!ㅠ

베터라이프 2021-08-30 19:28   좋아요 0 | URL
아세안 국가들도 보통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 이렇게 이원화가 되어있는데 일본의 마뜩잖은 요구 때문에 그동안 한국의 이중외교를 미국이 여러차례 외교 경로을 통해 아쉬움 반 그리고 압력을 가했다고 여겨집니다. 미국 국무부는 그동안 한국과 일본이 자신들에게 있어서 고분고분 했기에 양자간의 관계가 오랫동안 견고하게 학습된 상태로 이어지게 되었죠. 그런 측면에서 중국측이 한국은 외교가 없다고 하는게 그런 연유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리버럴한 문재인 정부가 적당히 줄타기를 해왔지만 이제 그 한계가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대만 사태가 시발점이 되겠지요. 오랜만에 막시무스님 글을 보니 너무 반갑네요 ^^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남성 특권 - 여성혐오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케이트 만 지음, 하인혜 옮김 / 오월의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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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의 여성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케이트 만은 호주 멜버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도미해 메사추세츠 공과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현재 그녀는 코넬 대학의 철학과 부교수로 일하고 있는데요. 익히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녀는 여성 권리에 대한 보편적 지지와 더불어 현재까지도 각 사회들이 관습과 가부장제에 따른 여성들의 사회적 권리의 침해에 대해 폭넓은 비판을 지속하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그녀의 다른 주장들 가운데, "성차별이 전통적인 가부장적 체제를 지지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강조한 것이 그녀가 크게 유명세를 타는 데 이바지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녀의 주장들은 기존의 여러 형태로 알려져 있는 남성 특권들을 분석하고 진보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권리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그녀 스스로의 저술 활동의 주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선 부분은 여성의 지위 뿐만 아니라 성 소수자들이나 동성애자들 및 인종 혐오가 없는 평등한 사회를 위한 일종의 필수 불가결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지금 글을 쓰고자 하는 이 "남성 특권"이라는 책을 통해 좀 더 면밀하게 알게 된 사실이기도 합니다만, 오늘날의 미국이라는 '자유 아메리카'가 얼마나 그와 같은 진보와 극심하게 멀어져 있는지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국 사회의 실제적인 단면을 독자들이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케이트 만의 이 책은 충분히 그 몫을 다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은 원제, "Entitled : Hpw Male Privilege Hurts Women"으로 2020년 8월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21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케이트 만의 이 책은 '여성 혐오'라는 것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이를 통해 여성들이 알고 있어야만 하는 여러 불편한 사회적 관습과 남성 전반이 항유하고 있는 '특권적 인식'에 대해서도 논증하고 있습니다.이 '여성 혐오' 소수의 여성차별주의자들이나 여성 혐오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혐오론'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불건전한 사회적 인식속에서 비롯된 사회 문제로서 저자인 만은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글의 2장에서 '인셀, 즉 비자발적 독신상태'에 있는 욕구 불만의 평범한 남성들의 여성 혐오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젊은 여자들을 폭력의 타겟으로 삼고 심지어 증오하는 수준에 이미 도달해 있다고 서술합니다. 이들은 내심 여자를 너무나 만나고 싶어하고 또한 매력적인 여성과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고 있으나 이들이 평범한 젊은 남성임에도 스스로 실패할 것을 두려워 해 데이트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저 스스로의 소극적 태도의 문제 삼지 않고 극단적인 여성 혐오로 발화시킨 이들은 진취적이고 매력적인 남자들을 만나고 있는 주변 불특정 여성들의 생명을 빼앗는 폭력으로 이르게 되는데요. 물론 이들이 "만화에나 나올 법한 우스꽝스럽고, 우스운 존재들"이지만 여기서 문제는 이들이 '인종차별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터무니 없게 자신을 옭아매는 절망에 기대 극단적인 폭력성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특정 다수들에게 실탄을 쏘아 치명적인 상해를 입힌 엘리엇 로저와 스콧 비얼리와 같은 자들이 단순히 반사회적인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저자가 글에서 강조하는대로 "여성 혐오가 순전히 사회구조 내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며, 사회적 관습, 정책, 넓은 의미의 문화적 통념에 작동되는 것"으로 단순히 저 인셀들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뒤이어 진술되는 가부장적 인식과 남성 특권에 대한 과도한 믿음에 비롯되어 있다 봐도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와 더불어 불특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남성에 의한 강간 시도와 데이트 강간, 여성을 향한 성폭력 등이 삐뚤어진 남성들의 특권 의식에 있다고 저자는 다시 한 번 꼬집고 있는데요. 다만, 그러면서도 이런 상황에 대한 저자의 인식 전반이 남성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보다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사회 전반의 잘못된 인식과 그 반대로 내재되어 있는 남자와 여자간의 권력 관계 및 전자에 의한 특권적 관념이 '여성 혐오'를 통해 물리적인 폭력과 사회적인 억압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진술되고 있습니다. 소위 남녀가 정상적인 교제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남성의 섹스 시도에 대해 통념적인 여자들의 '좋은 여자'가 되고 싶은 내면의 강요 때문에 이를 자신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남자친구의 요구를 대체로 수용하기 마련이고 심지어 나중에 교제가 끝나게 되는 상황에서 '리벤지 포르노'나 이별을 통보받은 남자 친구가 휘두르게 되는 심각한 폭력 상황에 여자들은 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남성들이 평소에 쉽게 겪어보지 못하는 경험으로 여성들이 겪을 수 있는 끔찍한 사례에 대해 심정적으로 공감을 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에 저자는 3장에서 '가해자 감싸기' 즉, 힘패시 himpathy 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를 아주 간단히 설명해보자면 강간 피해자들에 대한 일종의 '피해자 지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강간과 관련해 기소되는 비율이 매우 저조한 것은 단순히 '무고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 그리고 기소와 법정 다툼에서 남자 가해자들에 대한 만연된 동정심을 부여받는 것에 있다고 저자는 법정 사례를 통해 논증하고 있었는데요. 또한, 낙태와 관련된 6장에서 저자는 '적법한 강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만 강간에 대한 남성들의 무지는 대체로 심각한 수준이며, 남들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강간 가해자 남성을 미국 법정에서 기소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글의 전반적인 진술을 통해 입증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앞선 3장에서. "권력을 쥔 남성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쥔 남성은 별다른 대가를 치르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을 성적으로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는다"고 서술되고 있었습니다. 즉, 이는 미국 사법 시스템 하에, "처벌에 대한 염려를 없이 여자들을 강간할 남성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라고 첨언되고 있기까지 한데요. 이러한 왜곡된 성인식을 가진 남성들을 기본적인 도덕적 관념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가장 큰 현실적인 문제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앞에서 3장을 통해 잠깐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만, 데이트 관계에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마땅한 성적 권리가 교제하는 남성을 위한 일종의 '섹스 봉사'로 인해 스스로 자결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은 익히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여성들이 관계 전반이 무너질까봐 스스로 원치 않는 시기임에도 섹스를 거부할 수 없었고 그것을 그냥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여성들이 많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가부장적 관념이 뿌리 깊은 사회일수록 심각한 편이고, 국제 사회로부터 남녀 평등이 잘 유지되고 있다는 미국에서 조차 이것은 여성들에게 내면화되어 있었습니다. 원치 않는 섹스로 인한 임신의 중단을 위해 필요한 낙태권은 오랫동안 미국 사회의 갈등과 사법 체계의 모순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수많은 사형수들을 '독약 주사'로 처리하고 있는 미국 사법제도가 어떻게 낙태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 생명 윤리를주장할 수 있는지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인데요. 저자는 이를 교묘한 정치적 논리라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만 여성의 몸에 대해 무지한 비전문가들의 터무니없는 주장들과 임신의 문제가 오로지 여성의 문제라고 보는 보수적인 종교관에 의해 강요되어 왔다는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단순히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허울좋은 정치적 다툼이라기 보다는 여성의 성을 매개로 일종의 사회적 헤게모니가 걸려있는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여기에 강간을 제외한 일반적인 섹스 자체에 있어서 피임 기구를 사용하는 데 있어 남성들의 동의가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는지는 이젠 거의 언급할 필요가 조차 없습니다. 물론 낙태 자체를 여성의 성적 결정권으로 소급 적용하는 것은 설득력을 얻기가 다소 어려울 수 있다고 보는데요. 단순히 생명에 대한 존중을 떠나서 임신에 이르게 된 여성에 대한 좀 더 전반적인 이해와 더불어 정치적 논리로 비화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여성의 건강권과 최소한의 신체적 안전 보장으로 봐야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미국 내의 정치에서는 낙태와 관련된 소모적인 논쟁을 통해 특정 단체와 진영 논리로 비화되어 왔고 이것은 시민들의 권리 내지는 여성들의 자결권과는 전혀 하등 상관이 없는 쪽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끝으로, 교육 받은 여성에 대한 대다수 남성들의 내재된 반감은 미국 사회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관념이 남아 있는 다른 사회에서도 여전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진보에 있어서 그리고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남녀의 동등한 권리와 평등은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단순히 여성 혐오가 반여성주의라든지 여자 전반에 대한 터무니 없는 반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국한시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개선되지 않는 불편한 사회적 관념에 기대고 있기 때문일겁니다.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남성의 특권이 대체 어딨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반적인 가정에서 아직도 극심한 차별을 보이고 있는 가사 분담이라든지 여성이 거의 의무라고 여기고 있는 남성 배우자 혹은 남자친구, 파트너에 대한 사회학적인 성적 관계라는 '재화'가 소위 마땅히 거래되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여기는 남성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선 논증과는 약간 상반될지라도 케이트 만의 이 책을 마냥 '여성 혐오'라는 키워드에 집중해서 읽어서는 안되는 부분이 여럿 있기도 한데요. 특히, 현재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색 인종의 여성들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인종주의적 인식은 결코 허투르게 이해되서는 안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백인 여성이 강간 피해자일 경우와 그렇지 않은 흑인 여성과 유색 인종 여성일 경우 미국 경찰과 사법제도가 대응하는 수준이 다르다고 언급하는 부분은 이를 여실히 입증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처음 도입부에서 저자인 만이 여성 혐오주의자가 어떻게 인종주의자로 연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언급에 대해 저는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이 글의 마지막 장까지 일독 하고 나서 그러한 인식의 가능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성 차별과 여성 혐오에 대한 문제는 성적 소수자와 인종 차별의 문제와 다름없다는 것에 거의 동의하고 이것은 민주주의적 가치에 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진정한 사회적 진보와 인간의 진정한 평등은 아직 거쳐가야 할 장애물이 많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글과는 전혀 상관없이 막시무스님이 다시 와주셔서 뭔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북플러들 중에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막시무스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성혐오란 순전히 사회구조 내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며, 사회적 관습, 정책, 넓은 의미의 문화적 통념에 의해 작동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수십 명의 여성들을 강간하거나 성적 괴롭힘을 일삼았다는 타당한 혐의를 받았지만, 현재 미국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채우고 있다

반성적 사고를 통해 여성이 온전한 인간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권력을 쥔 남성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쥔 남성은 별다른 대가를 치르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을 성적으로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는다

여성들은 자신을 가해하거나 학대한 남성들을 감싸지 않는 것에 대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낀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남성들을 실망시키길 원치 않는다

가스라이팅에는 인식의 측면 뿐 아니라 특유의 도덕적 측면이 존재한다.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는 가해자의 시각으로 재구성 된 사건과 서사 혹은 그 자신만의 이야기에 반박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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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의 국제 관계에 대하여 - 세계적 마르크스주의 석학의 시사논평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정구 옮김 / 책갈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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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시어도어 캘리니코스는 아프리카 짐바브웨 태생으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서양 철학을 전공한 좌파 지식인입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어머니는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액턴 경의 딸이기도 한데요. 최근에 그가 그리스 경제위기에 대한 유럽 연합와 유로화에 대한 비판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가 액턴 경의 손자라는 사실은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와 같았습니다. 그는 영국 옥스포드에서 수학해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지난 2005년 9월부터 런던 킹스 칼리지의 유럽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캘리니코스는 여느 지식인들과는 달리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실제로도 시민들과 조직을 만들어 시위에도 동참하기도 하였습니다. 2001년 6월 제노바에서 열린 G8 정상회의 즈음의 시위가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에는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으나, 월가와 시티오브런던이 함께 맹위를 떨치던 2007년 이전까지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데올로기적인 낙인을 찍는 경우가 허다 하기도 했었는데요. 그럼에도 소신을 지키고 글과 행동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이는 캘리니코스가 한편으론 대단하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 소개할 이 책은 따로 원전이 존재하지 않는 책이기도 한데요.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영국의 반자본주의 주간신문 "소셜리스트 워커"에 실었던 논평들을 엮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의 글도 국내에서 이러한 형태로 발간된 적이 있으니 크게 새로울게 없는 일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2020년 3월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크게 7장으로 독자들이 보기에 쉽게 주제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특히, 튀니지 혁명과 시리아 내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는 장이 따로 있어서 기존의 기사만으로 한계를 느껴왔던 분들에게는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외에 크게는 세계 경제와 국제체제 그리고 중동 문제 등을 중점으로 캘리니코스 특유의 간략하고 일관된 주제를 포함한 제법 인상깊은 글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세계 경제와 관련해 캘리니코스는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2007년 이전까지 미국 경제를 포함한 세계 경제를 추동한 것이 민간의 막대한 부채였다고 분석하고, 2008년 이후에는 정부가 주도하는 막대한 공적자금의 지출이 사실상 세계 경제 특히, 금융을 포함한 시장 전반에 생명수를 붓고 있었다고 진단하는데요, 이것은 아직까지도 미국 경제가 2007년 이전의 경제 규모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큰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2008년의 뉴욕 발 위기는 세계 경제를 파탄해 이르게 했는데요.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은행들이 2000년대 중반까지 무분별한 대출을 해왔다고 저자는 진단하고, 스페인의 경우는 해안가를 따라 소위 '콘크리트 건설 붐에' 지방 은행들이 대출장사에 뛰어든 것으로 이는 당시 세계 경제가 건설 시장의 거대한 거품으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과 같습니다. 뉴욕 발 금융 위기 역시 외형상으로는 금융 문제이긴 했으나 그 본질은 주택 시장 자체의 거대한 거품과 그를 이용한 은행과 신용 평가 기관의 거대한 도덕적 해이가 일으킨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현재까지 이어진 세계 경제의 상황은 누리엘 루비니가 언급한대로 전반적인 경기 침체가 꾸준히 이어진 더블 딥 상황이라고 진단 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케인스가 언급한 "자본주의가 불안정한 것은 이 체제가 기본적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돈을 거는 메커니즘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라는 본질에 따라 이 '카지노주의적 자본주의'가 그 실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지는데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가 이러한 맥락하에 시장이 움직이고 있고, 개인들의 대출이 증권화가 되어 그 리스크와 하등 상관없이 팔려나갔다는 점에서 이는 거의 명백한 부분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장에서 인용되고 있는 우파 지상자유주의자 데이비드 스토크먼의 발언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월가 카지노를 후원하던 중앙은행 불한당은 예금주들을 제로 금리라는 십자가에 못 박고 국제상품시장 거품을 키워 식량과 에너지 가격을 높이면서 중산층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렸다"는 다소 분노에 휩싸인 듯한 말입니다. 이는 데이빗 코츠의 말대로 건설 시장을 비롯한 시장 전반에 거품을 야기시키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이익 창출의 근본인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 이 지점에서는 그동안 숱하게 저항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더욱이 저임금 노동력이 있는 곳을 따라 생산 시설이 옮겨가는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 기조를 고려해 봤을 때, 저임금 상태의 소녀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이집트의 권위주의 정권을 미국이 열심히 후원했던 것은 세계 경제 시스템이 자본가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효율적 측면으로 지원해 마지 않는다는 신자유주의적 정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마찬가지로 대만 폭스콘의 노동자들에 대한 여러 처우 문제들도 이와 유사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도덕주의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세인들이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직도 세계 경제 전반을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권력을 잡고 있는 상황 때문일텐데요. 그럼에도 캘리니코스는 "이러한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의 상황에서도 유럽과 중국, 미국과 중국은 자신들의 경제 이익에 따라 무역 보복과 관세 카드를 남발했고, 최근 트럼프에게 시진핑이 굴복한 것은 이러한 측면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즉, 그렇게 수치화 된 자유시장과 거의 자연권에 필적한다는 시장의 갈등 조절이 사실은 거의 유명무실한 관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캘리니코스가 직접적으로 밝히는 오늘날 세계 경제의 진면목 일것입니다. 그래서 캘리니코스는 몇번이나 글을 통해 시민들이 자본주의에 대항해 나설 것을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세계 자본주의가 하나의 권력이라면 마찬가지로 반대편의 반자본주의를 주장할 시민들의 권리 또한 또 하나의 권력이라 저자인 캘리니코스는 크게 의미를 두고 있었습니다.

다음 이어지는 국제체제와 관련해서, 그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의 개입을 잠정 실패한 작업으로 결론을 내리고, 애초에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게 된 명분조차도 거짓과 날조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한가지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있었는데요. 차기 정부였던 오바마 행정부가 네오콘들에 의해 주도된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잔혹한 고문들을 수행한 군인들의 얼굴을 공개하고 이를 경고하고자 했던 오바마 대통령이 주도적인 군부의 저항에 굴복해 무위로 끝난 것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그냥 제 상상의 공간에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만, 백악관의 관례대로 당선인인 오바마가 전임 대통령인 조지 W. 부시와 회견을 통해 대화를 나눴을 때, 아마도 부시가 오바마에게 "일단 이 자리에 앉아봐라. 너도 아마 별거 없을 것이다"라는 터무니 없는 공상을 떠올려 보는데요. 이는 다른 말로 전임 정부가 마무리를 짓지 못한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이미 군부에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장성들의 압력을 아마도 오바마가 해소하지 못했던 것으로도 여겨집니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이 글에서 앞선 제 상상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캘리니코스는 예상과는 다르게 민첩하게 탈출하지 못한 이라크 전쟁을 포함해, 그렇게 중동 정세하에서 지체된 미국이 푸틴의 러시아의 팽창을 미처 막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러시아의 그루지야 (현재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만을 키워준 꼴이 되었습니다. 이는 현재 대략 48만 규모의 미군으로는 주요 병력이 이미 들어가 있던 중동에서 러시아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것 자체로는 미국의 국익에 전혀 이롭지 못한 영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애초에 1994년에 서명했던 우크라이나 핵무기 철수를 명분으로 미국과 러시아가 보장했던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합의한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을 무력화시킨 것은 차치하더라도 당시 미국만 보고 있던 우크라이나 정권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미국의 행태는 사실 동맹국들의 우려를 짓게 하였습니다. 물론 전임 부시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오바마 역시 러시아와 핵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뒤이어 오늘날 중국의 대두와 관련해서 캘리니코스는 현재 미국의 각계 각층에서 우려하고 있는 '중국 위협론'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와중에 단지 우려스러울 부분은 지금까지 미국이 구축해 놓은 세계체제에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국가가 조만간 탄생될지도 모른다는 점일텐데요. 역외균형전략이 미국의 국익과 아주 밀접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는 현실적으로도 필요한 수단 중에 하나였습니다. 다만, 저자의 말대로 그동안 중동에 너무나 붙잡혀 있던 나머지 러시아와 중국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국제 정세의 한계가 미국의 발목을 잡은 것으로 봐야할 텐데요. 마찬가지로 소수의 수니파가 지배하고 있던 이라크를 절단해 버린 나머지 인근의 시아파 맹주인 이란의 지배력만 강화시켜준 결과를 초래한 개입 전쟁의 실패가 결국 이 전쟁에서 승리한 유일한 자는 이란이라는 저자의 냉정한 평가는 거의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이라도 이란과의 화해를 시도했던 오바마 대통령의 노력을 물거품시킨 트럼프의 행동이 과연 미국의 국익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는 지금으로서는 현재 진행형인 상황이기도 합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조차 미국을 믿지 못해 이란과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가까운 주변의 권위주의 정부들이 이집트와 튀니지를 돕지 않은 미국의 행태에 아직까지도 분노하고 있는 상황은 중동 내에서의 분열과 파편화를 좋아하는 미국에 입장에서 과연 이게 이득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기도 합니다.

4장에서는 별 기대가 없었는데도 우리 한반도에 대한 내용이 짤막하게 소개되고 있기도 합니다. 김정은 추구하고 있는 경제 발전과 안보 불안의 해결 추구 등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왜 미군이 한국전쟁이 끝난 지 65년이 지나도록 여태 남아 있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 실정"이라는 것에는 다소 실망스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말 왜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것일까요. 이 부분은 정말 캘리니코스의 인식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에 대한 서방 세계의 압력과 최근의 한반도 위기를 거의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그가 좌파임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좀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압도적인 한미 동맹의 재래식 전력에 북한의 김정은과 그 윗대가 두려움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이 '스탈린주의의 국가'가 자신들만의 왕조 시대를 열어 스스로 폐쇄적인 길을 걸은 것의 여러 결과물을 얻게 된 것을 전적으로 누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여기에다 굳이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를 꺼내지는 않겠습니다만 정상적인 정권이었다면 이러한 문제를 애초에 초래하지는 않았겠지요. 더 쓰고 싶은 말들이 많지만 이 정도에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바로 앞선 우리 한반도에 대한 인식을 제외한다면 캘리니코스의 이 글은 전반적으로 현재 세계의 진실된 이면을 독자들에게 가감없이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현재 미국이 구축한 국제경제시스템과 각지의 안보 동맹을 '제국주의'라고 불리우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분들도 계실겁니다. 다만, 미국의 이 시스템이 결코 만능이 아니며, 이러한 관점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국익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비록 우리나라가 오래전부터 자유 세계에게 포함되어 있지만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여지가 있다 생각됩니다. 일전에 노엄 촘스키는 시민들이 언론인들이 실어나르는 신문 기사 만으로는 현재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러한 글들이 자주 출간되는 것은 독자들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우리의 실질적 운명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점은 꽤 불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데요. 특히, 우크라이나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엘리트층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여기 이 글이 모두에게 반면교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찬가지로 알렉스 캘리니코스 역시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을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 지칭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트럼프와 푸틴은 둘 다 정치적 올바름을 싫어하는, 아니 혐오하는 정치인이라고 글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케인스는 자본주의가 불안정한 이유 하나는 이 체제가 기본적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돈을 거는 행위인 투자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라 말했다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과 현실 사이에는 여전히 큰 격차가 있는 듯 보일 때가 있다

유로존은 독일 자본주의 지배력을 공고화하는 데 이용된 신자유주의적 구성물이다

스토크먼은 연준에 특별히 분노를 느낀다. "월가 카지노를 후원하던 중앙은행 불한당은 예금주들을 제로 금리라는 십자가에 못 박고 국제상품시장 거품을 키워 식량과 에너지 가격을 높이면서 중산층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렸다

즉,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중국 국민 13억 6000만명의 평균 생활수준이 서구를 따라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전망 때문에 스위스 중앙은행이 최저환율제를 포기했을 수 있다. 포기 발표 후 몇 시간 만에 프랑화 가치가 유로 대비 무려 39퍼센트나 올랐다. 이 일은 세계적 금융 붕괴를 겪고도 얼마나 많은 위험한 행동들이 계속됐는지 그 민낯을 보여 줬다

설사 미국이 군사적 여유가 좀 더 있었다 하더라도 캅카스 파병은 러시아와 전면전으로 발전할 수 있다. 부시와 (부통령)체니도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핵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고립된 스탈린주의 국가 북한의 통치자 김정은은 사담 후세인이나 무아마르 알 카다피와 같은 최후를 피하고 싶어 한다

결국 트럼프가 푸틴에게 경도된 것은 매수나 협박 때문이 아니라 푸틴을 진짜로 존경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트럼프를 싫어하는 것은 트럼프가 국제걱 극우의 성장을 부추기는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미국 제국주의와 다른 열강의 패권 경쟁에서 트럼프의 무능함이 갈수록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라크의 정치권력이 종단주의 세력들 간에 분할돼 내전이 일어나기 전의 레바논처럼 되기를 미국이 바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국방부는 2000년대 중반 이란을 공격하려던 부시 행정부의 계획을 가로막았다

더 근본적으로 중국의 부상은 세계경제라는 무대에서 미국이 만든 규칙에 따를 생각이 없는 강력한 행위자가 등장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트럼프는 이미 임기 초에 시진핑에게 값진 선물을 준 셈인데, 바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탈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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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 - 전 세계의 빚진 사람들, 미디어된 사람들, 보안된 사람들, 대의된 사람들이여,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라! 아우또노미아총서 37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 옮김, 유충현.김정연 협동번역 / 갈무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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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지식인들 중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는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로 이름을 알린 후, 마이클 하트와의 공저인 '제국'으로 큰 명성을 얻은 바 있습니다. 앞선 진술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에 대한 네그리의 편애와 사랑은 익히 잘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그는 소위 네오-스피노지즘으로 대표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1933년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지역의 파도바에서 태어난 네그리는 부친의 공산주의 경력으로 인해 일찍이 마르크스주의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그는 정치학에서의 꽤 저명한 좌파 이론가로 알려져있고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쇠퇴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파도바 대학에서 일찍부터 후학들을 가르친 바가 있습니다.

네그리와 더불어 이 글의 공저자 중 한명인 마이클 하트는 미국 메릴랜드 출신의 철학자 입니다. 그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시애틀로 이주해 워싱턴 대학에서 비교 문학으로 진로를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마이클 하트 역시, 네그리와의 학문적 협업으로 큰 명성을 얻기 시작하는데요. 하트는 1986년 프랑스 파리에서 네그리와 실제로 만나 스피노자 연구에 대한 공동의 관심사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1994년 이후부터 하트는 듀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Declaration"으로 2012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네그리와 하트의 또다른 협업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각지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했던 '점령하라!' 시위를 살펴보고, 다수의 시민들이 더 진전된 민주주의를 욕망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 대해 루소를 비롯한 여러 정치적 이론가들을 인용하고 있으며, 앞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나아갈 길을 두 공저자는 찬찬히 모색하고 있었는데요. 참, 아이러니한 현실은 네그리와 같은 좌파 지식인이 우리가 좀 더 체감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나름 그려보고 있다는 것인데요. 반대로 우파들은 점차 매스컴 앞에서 입으로 민주주의가 나오는 빈도수가 더욱 줄어들면서 오로지 '시장의 자유'와 자신들의 뒷배경인 기득권층의 원만하고 방해받지 않는 경제활동을 노골적으로 펼치는 데 온 노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모두의 자유로운 경쟁에 따른 합리적인 경제 활동으로 포장하면서 말이죠.

두 공저자가 냉혹하게 진단하고 있는 바대로, 현재는 신자유주의의 독점적 승리로 인해 벌어진 사회경제적 파행과 더불어 금융이 정치와 사회에 지속적으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명령을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노동 조합의 궤멸과 지속적인 좌파들의 몰락으로 인해 시민들 대부분이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과 상대적인 빈곤에 처해져 있어 민주주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시민들의 건전성이 오랫동안 무너져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저자들은 특별히 4가지의 주체적 형상들을 언급하면서 이들의 공통된 관심사를 기반으로 나아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회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이들은 "빚진 사람들 the indebted, 미디어된 사람들 the mediatized, 보안된 사람들 the securitized, 대의된 사람들 the represented" 로 분류되고 있는데요. 이들 모두가 처한 상황은 경제권력과 정치적인 측면에서 모두 궁핍화 되었다고 저자들은 주장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동시에 현재 다수의 시민들이 처해 있는 소위 굴레적 상황과 똑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각국의 만연된 정치 상황에 따라 이러한 문제들이 시민들을 옴짝달짝 못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치명적 문제들 가운데, 이러한 기반에서 꾸준하게 이득을 취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과 그들의 뒤에 있는 소수의 기득권들은 다수 시민들의 고통을 강요하면서 이러한 착취적 구조속에서 더욱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우리 정치는 신자유주의에 이미 포획된 상황인데, 이를 소위 국가 포획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금융 자본주의의 요구에 각국의 정부가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가운데 "대의된 사람들"과 대의제 의회 민주주의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저자들은 이 "대의"에 대해 보다 냉정한 분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바로 1장에서는, "정치적 대의가 투명성과 완벽함이라는 특징을 (설사) 갖고 있을지라도 대의는 정의상, 본질적으로 권력으로부터 주민을, 명령하는 자로부터 명령 받는 자를 분리시키는 메커니즘"이라고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고 있는데요. 시민들에게 이 정치적 대의가 어떤 식으로든 미화되어 그것의 소명에 대해 확신을 주고 있지만,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차치하더라도 현실 정치에 있어 이미 그것은 유명무실한 상황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즉, 장 자크 루소가 "사적 소유가 불평등을 창출하고 따라서 자유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는 정치 체계가 발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이를 지키고 보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설사 그 정치적 기능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미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그것을 여실히 방해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불균형적인 사적 소유의 결과물의 파급력이 시민 사회에 불안전성을 가중시킨다 할지라도 이미 신자유주의적 경제 관념에 의해 시민들이 정상적인 대항을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관념적인 이론을 고려하더라도 민주주의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인데요. 경제적 이행에서의 민주적 절차를 포함해, 무엇보다 정의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탈산업적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행동을 가능케 하는 가능성들이 훨씬 더 빈약한 상황에서, 대의된 사람들 그리고 대의제 의회주의에 처해 있는 우리의 민주주의와 정치는 오직 소극적인 정치적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의회 정치인 경우, 의회 지도자들과 로비스트들의 직접적인 매개를 제외하면 시민들의 요구가 의회에 전달될 수 있는 상황은 오로지 헌법의 이론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콩도르셰와 토마스 제퍼슨이 "각 세대는 그들만의 헌법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헌법을 손대려고 하는 어떠한 의도에 있어서 그것을 좋게 보지 않는 세력들은 '급진적인 음모'로 몰고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적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이와 관련해 3장 후반부에서는 사법부의 진정한 독립을 바라기 보다는, 사법부가 가진 특정한 기능들이 불가피하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니 이것을 어떻게 정치적 지형 위에서 적절하게 재배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공저자들은 강조합니다. 결국 사법부의 관료들이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정치적 토대에서 공익을 위한 것으로 재배치 또는 재인식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들의 인식적 골자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다만, 3장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들은 우리가 헌법을 쓰겠다는 식의 주제넘음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다소 실망과 놀람을 받긴 했습니다만 이 주장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렇지만 이와는 별개로 모든 시민들의 권리를 위해 그것을 실효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헌법을 위해 여러 방법을 통해 토론과 의견 교환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헌법의 토대와 그 전통이라는 것을 추호도 훼손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의 권리를 위해 어떻게 사법 관료들과 좀 더 적법한 판결을 위한 토대와 이들의 정치적 인식의 재배치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는 강고화된 계층적 엘리트화에 의해 상당히 요원한 일로 여겨지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1장과 2장을 통해 공저자들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앞선 서술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기조 아래 정치의 자유주의적 토대와 그에 따른 정치적 이행의 건전성이 무력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오로지 경제적 측면과 시장 자유에 대한 함의만을 강조했고 앞선 진술대로 이를 통해 국가를 포획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들은 2008년의 위기 막바지에 시장이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고 강하게 부르짖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의 진정성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아는 일일 겁니다. 더욱이 막대한 공적자금으로 은퇴 자금 놀이를 했던 월스트리트의 경제 엘리트들은 이제는 더 말하기도 입아픈 '도덕적 해이'의 전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공저자들은 좌파들의 철지난 도덕주의 운운이라고 다소 일축하고 있습니다만 신자유주의하에서 전통적인 도덕주의가 사회 각계 각층에서 무력화 되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정치 뿐만 아니라 경제에 있어서도 마땅한 '대항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데요. 물론 1980년 이후, 각국의 노동조합과 시민사회가 무력화 되고 사회가 오로지 시장을 위한 기능만으로 자리매김하고 이를 정치가 강하게 뒷받침한 상황이 근 몇십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피터 플레밍의 말대로 신자유주의는 마땅히 죽었어야만 했지만 현실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봐야 할텐데요. 시장과 경제에 종속된 정치를 위해 점진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자유주의적 시장 담론이 더이상 정치를 후퇴시키지 않는 쪽으로 앞서 서술된 4가지의 주체적 결핍에 처해 있는 시민들 모두의 공통된 의견과 이익을 모아 다음 세대는 좀 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그 토대를 마련해 보는 것이 현시점에서 가장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글에서 분석되고 있는 중동의 민주화와 2011년까지 산발적으로 발생한 '점령하라' 운동에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자생적 노력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데이빗 코츠의 말대로 자원 대 자원의 싸움이어서 네트워크 기업들 마저 노골적인 이익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얼마만큼 시민들이 정치적 활동에서의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부정과 긍정을 떠나 앞으로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끝으로, 어차피 모두가 사활을 걸어야 하는 경제적 요건에 처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저자들의 우려대로 생활의 유지가 내일도 어려운 사람들이 처한 시급한 처지와 방만한 소비 자본주의로 인해 골병을 들고 있는 지구가 언제 우리의 등을 돌리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뭐가 시급한 문제인가를 선택하고 개선하는 것은 다소 어려운 부분이기도 한데요. 현재의 상황에서 당장 이번주내에 실효적인 개혁에 나서야 하겠지만 모두의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기존의 엘리트 지배체로는 사실상 한계에 따른 해결책을 모색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대안적 정치의 기반이 되어야 할 수많은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기득권의 노골적인 저항과 경제적 불평등의 구조적 차이가 큰 이익이 되어 돌아오는 부유층의 저항을 과연 우리가 맞서 대응할 수 있을지는 짧은 지식 따위를 갖고 있는 저로서도 어려운 부분이라 느껴집니다. 물론 저자들의 경고대로 군사적 혁명 따위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급진 민주주의적 담론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저자들의 다각도의 제안이 담겨 있는 3장과 결론을 이 시점에서 좀 더 음미해 보는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럽은 극우 포퓰리즘과 극단적인 정치가 횡행할 여지가 전혀 제거되지 않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큰 위협이라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더욱이 과거 로마 공화정 하에서의 귀족 정치가 민회를 극도로 혐오해왔다는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다수 지배 체제에 대한 소수 기득권들의 저항이 앞으로의 건전한 민주주의와 다음 세대의 삶의 온전성을 좌우한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본래의 자본주의가 계급화를 용인하지는 않았지만 실상은 과거 봉건주의보다 극심한 계급적 몰이해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데이빗 코츠의 글에서도 그랬지만 시민들에게 시간이 남아있을지 깊은 우려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코츠가 신자유주의자들의 공적 지출에 대한 이중성을 논하면서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 대한 언급을 그의 논저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는데요. 이것에 대한 의문을 이 책에서 약간이나마 풀 수가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와 공화에 대한 여러 인용들이 너무나 훌륭해서 이 글을 읽는 내내 멈춰서 음미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많은 좌파 사상가들은 이토록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하나같이 갖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이들을 이데올로기적인 외눈으로 공격하는 자들이 이렇게나 많으니 실로 안타까운 생각이 절로 듭니다. 

삶 자체가 노동에 처해졌다

그리므로 이것들은,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부정의함 injustice 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유재산의 지배 이의를 제기한다는 의미에서 공통적인 것을 위한 투쟁이다

2011년 초, 근본적 불평등에 의해 특징지어진 사회경제적 위기들의 한 가운데에서, 상식 common sense은, 더 큰 재앙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배권력의 결정과 인내를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한다고 지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금리생활자들은 부를 생산하는 순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착취의 잔인한 현실, 생산적 노동에 대한 폭력, 지대의 생산에서 착취가 야기하는 고통을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미디어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능동적인 것도 수동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끊임없이 주의에 몰두하는 주체성이다

역사적으로 볼때, 다양한 형태의 보안체제가 발흥하는 것과 조응하는 하나의 현상은 자본주의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전략들의 우세다

게다가 현재의 경제적 금융위기는 일련의 다른 두려움들을 덧붙인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가장 커다란 두려움들 중의 하나는 실직에 대한 두려움, 즉 생존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다

대의가 사실은 민주주의의 수단이 아니라 민주주의 실현의 장애물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모든 것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기능한다 하더라도, 정치적 대의가 투명성과 완벽함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을지라도, 대의는 정의상, 본질적으로 권력으로부터 주민을, 명령하는 자로부터 명령 받는 자를 분리시키는 메커니즘이다

사적 소유가 불평등을 창출하고 따라서 자유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는 정치 체제 system가 발명되어야 한다

출구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푸코와 그에 앞서 마키아벨리가 설명한 권력의 본성에 대한 기본적 인식을 기억하는 것 뿐이다. 권력은 사물이 아니라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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