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의 길 - 엇갈린 남·북·미의 선택
라종일.김동수.이영종 지음 / 파람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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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가천대학교의 석좌교수를 맡고 있는 저자는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대학 석사를 마치고,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정치학 박사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그는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김대중 대통형 후보 선거캠프에 참여했고, 1998년 3월에 국가안전기획부 1차장이 되었습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주영 대한민국 대사관의 대사를 역임합니다. 여기 이 책은 라종일 교수와 함꼐 김동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과 이영종 전 중앙일보 외교안보팀장과 함꼐 쓴 글이기도 한데요. 주된 배경은 평창 올림픽에서의 남북 화해 노력, 이후 싱가포르 북미 회담 및 트럼프 김정은 간의 하노이 정상 회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은 거의 최근이라 볼 수 있는 2022년 2월 출판되었습니다.

흔히들 근래 미중 관계에 있어 양자간의 '전략적 불신'을 극복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화해 협력이 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요. 물론 현재 돌아가는 양상으로 봤을 때, 과연 워싱턴이 베이징과의 극적인 화해를 바라고 있는지는 극히 회의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남북관계에 있어 전략적 불신이야 말로 우리의 어려운 현실을 매우 극명하게 드러내는 문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거의 유례가 없는 전임 대통령의 탄핵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남북 화해와 북미 정상화에 사활을 걸고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과 싱가포르 회담 및 하노이 회담을 운전자와 중개인의 입장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요. 바로 이 적은 분량의 글은 당시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의 바쁘게 돌아갔던 외교적 행로를 제법 차분한 어조로 그려내면서, 해당 당사자들의 막전막후의 여러 상황들을 거의 가감없이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일반 언론의 추정으로만 간접적으로 접했던 당시의 실상을 거의 진실에 가깝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우리 정부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다소 파격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웠던 인물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한반도 비핵화를 비롯한 시급한 문제에 있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 이 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이 부분에 있어 트럼프 대통령에게 각별한 기대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존 미어샤이머의 입을 통해 트럼프에 대한 저간의 평가를 인용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트럼프가 비정상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라 외교에는 맞지 않는다"는 언급이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백악관이 자신들의 국무부 관료 등과 백악관 내부의 참모들 의견을 수렴하여 미국의 외교 노선을 적절하게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일텐데요. 과거 클린턴 행정부나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도 바로 이러한 논의 과정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공개된 볼턴의 발언이나 폼페이오의 여러 심각한 의견들을 취합해 봤을 때, 트럼프는 정치외교적인 문제에 있어 다소 정상적인 범주 안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나 트럼프가 혹여 국익에 반하는 예상치 못한 폭주를 감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김정은과의 싱가포르 회담에서도 볼턴과 폼페이오가 밀착 마크를 했다는 일화는 뭔가 희극 같지만 그 의미하는 바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종래의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 혈통의 존재는 여러 언론과 북한 정권의 세습을 다룬 논저들을 통해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이 백두 혈통에 대한 기본적인 저의 인상을 크게 바꾼 것은 이 글에서 보여지는 이들 남매들에 의해, 자신들이 과거 유럽의 구귀족보다 더한 혈통의 자손들이라는 것을 이미 자기들 스스로가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내부 단속과 체제 유지를 위해 백두 혈통을 일종의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 스스로가 '신의 자손'과 같은 맥락의 북한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유지 및 강화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는데요. 이는 평창 올림픽에서의 북한 당국자들의 언행이나 행동을 통해, 체제 자체보다 김정은과 김여정 남매에 대한 거의 신격화와 다름없는 숭배가 우리의 예측을 넘어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신정 국가와도 같은 북한과 가열차게 타협과 협의를 진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한데요. 민족의 대의라는 측면에서 북한과의 협의도 중요하지만 이들에 의해 자행된 한국 국민의 불법적인 납북에 따른 이들 납북자들의 송환 문제와 아직도 북한 내에서 핍박 받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국군 포로들에 대한 생환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보인다는 저자의 비판은 정치권이 새겨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미국과 일본이 기울인 노력과 매우 상반되는 면이라 비판할 수 있겠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종전 선언'에 다소 매몰되어, 1950년 한국전쟁을 일으킨 스탈린과 김일성의 군사적 모험주의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 요구 없이 그저 종전 선언에 급급한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우리의 진보세력과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이와 같은 문제 등한시하고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로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점을 들어 당시 논란의 인물이었던 볼턴이 문재인 대통령을 현실을 보지 못하고 형식에 급급하다고 평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나르시시즘의 화신이라고 평가 받는 도널드 트럼프에게 당시 우리 정부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큰 기대와 모험을 걸었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후에 정의용 실장이 백악관으로 가져온 김정은 위원장의 제안에 즉흥적으로 반응해, 모두의 예측을 벗어나는 백악관에서 회담 수락 기자 회견을 트럼프가 허락한 것은 이를 잘 증명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여기에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맥마스터 보좌관을 차치하더라도 그저 우리측 특사인 정의용 실장의 '홀로 회견'은 워싱턴과 서울의 보이지 않는 선을 여실히 보여줬던 일화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의 청와대는 이 예측불가의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보이게 되었고, 이러한 북미 간의 조율에 막대한 외교적을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북한 간의 동상이몽은 결국 손쉽게 드러났고, 트럼프 스스로가 '남들보다 먼저 배신을 감행하는' 캐릭터임과 동시에 김정은 위원장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힘들게 구축한 핵무기를 포기할 의도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마찬가지로 타당해 보입니다. 김정은은 그저 미국과 적절한 협상을 통해, 핵보유국으로 인정 받고 미국 주도의 유엔 제재를 풀어내어 손쉽게 북한 경제의 정상화를 이룩하는 것이 자신의 시나리오였음이 분명해 보이는데요. 물론 많은 대내외의 전문가들에 의해 이 점은 충분히 예측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저자의 발언에 의하면 북한 당국이 미국 주도의 핵 시설에 대한 완전 검증 가능한 사찰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운 부분이었으며,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찰을 북한이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자는 거듭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제약에서도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미국과 북한 양측을 조율하는데 엄청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고 봐야 하며, 이는 문 대통령 스스로의 신념을 떠나 매우 지난한 과정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개성 공단의 남북협력사무소가 회담 실패를 경험한 김정은에 의해 무참히 파괴될 정도로 북한의 터무니 없는 책망과 비난의 화살을 이 정부에게 쏟아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국내 일부 언론들의 냉소와 많은 국민들의 지탄을 전부 받기까지 하였지요.

외교가 아무리 기본적으로 불활실성을 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글에서 드러난 2018년의 험한 난맥상은 오로지 우리 정부만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에 오래도록 외교가에서 금언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문구는 "상대방의 정확한 의도를 감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과연 미국과 완전무결한 핵포기를 합의할 수 있었는지는 매우 불확실한 측면이 있습니다. 국내에 많은 전문가들이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에 있어 김정은이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고들 하고 있지만, 아마도 김정은이 원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UN 안보리 이사국과 같은 핵보유 인정이 아니더라도 최근에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에 내렸던 사실상의 핵무기 보유 묵인을 바라고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국내 정치에 있어 핵무기는 김정은 자신의 통치 명분이자, 내부의 강경파를 달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고 아마도 미국의 체제 위협에 대한 대처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일수도 있겠습니다. 설사 몇 년간에 협상으로 미국과 북한이 핵합의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김정은이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한미 동맹 파기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철폐 및 주한 미군 철수 카드를 꺼낼텐데 위의 사항은 현실적으로 한국이나 미국 양국에 있어 들어줄 수 없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북한의 핵무기 포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북한은 나름 ‘자신들이 미제의 침략을 막아주고 있으니 남한이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등 지원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개발했다

불충분한 대로 그사이 알려진 몇 가지 자료를 근거로 살펴보면 역시 이 회담에 가장 열성적인 것은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었고, 그 측근들 사이에서는 회담의 의미에 관하여 회의적인 의견과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 핵무기 폐기의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러서는 합의를 중단하거나 번복하는 것으로 핵 보유와 함께 경제적인 실리를 기하는 것이 기본적인 북한의 입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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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중도 - 한없이 나약하고 터무니없이 가벼운 중도정치의 민낯
알랭 드노 지음, 클레망 드 골작 그림, 권희선 옮김 / 인문결출판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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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노는 캐나다 퀘벡 주의 아우타우아이스(지명의 독음이 정확한지는 불확실합니다)에서 태어나 독일에 소재한 마크 블로흐 연구 센터에서 연구 박사를 수여받고, 자크 랑시에르의 지도하에 파리 8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의 독특한 연구는 프랑스 철학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게오르크 짐멜에 집중되어 있기도 한데요. 너무나 의외이긴 하지만 국제 금융이 주도하는 세계화와 초국적 기업의 조세 피난처와 관련된 주제로 여러 글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철학을 전공한 학자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는 점은 저로서는 꽤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의 이력을 보면서 지식인의 진정한 의무와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고심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는데요. 그가 집필한 여러 논저들이 왜곡된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다루고 있어, 하루빨리 다른 글들도 역시 국내에 번역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이 글은 원제, "Politiques de l'extrême centre"로 지난 2016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11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알랭 드노의 이 글이 주는 인상은 흡사 타리크 알리의 대표적 논저를 떠올리게 합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다소 구색을 맞추기 위해 등장한 이 중도라는 개념은 드노의 말마따나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명확한 정치적 의견 없이 그저 현실을 오도하는데 일정 부분 이용당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가히 영속된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자본주의에서 "자신의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경제 사회적 변수에 어떠한 통제권도 없다는 점을 중산층을 포함한 다른 계층들이 미처 생각도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기득권층의 숨겨진 의도"가 명확하다고 저자는 10장에서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단순히 좌우파의 구분과 진보와 보수라는 설명은 그저 자본주의가 이 정도로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요. 마찬가지로 우파의 정치가 표면적으로는 자유를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은 힘있는 자들을 위한 정치라는 점에서 이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자유주의'라는 관념의 진실된 정체를 저자가 중도를 비판하는 논증 가운데서 얼마간 이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현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어느 정도의 불평등을 통해 경제 발전을 추동하는 일련의 강고한 이행은 진정한 중도 따위는 이미 의미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됩니다. 명백하게 극우일 수밖에 없는 이들을 보수라고 치부하는 것처럼 스스로 중도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실상 어떠한 공동체적 이익에도 관심이 없으며, 진정한 이데올로기적 가치가 전무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이를 다시 풀어본다면 현재의 자유주의적 기조로 쌓아 올려진 자본주의는 명백하게 개인주의적이고 보다 이기심을 용인하는 분위기로써,  이것을 신자유주의이든 자유지상주의든 뭐라 부르던 간에, 변형된 보수주의와 아주 밀접하게 결탁해 이들 전부가 각국의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는 건 거의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이와 비슷하게 저자도 글 3장에서, "신자유주의자와 초자유주의자는 서로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적 형태의 발전이 자유를 추구함에 있어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점은 신자유주의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정치적 이미지 문제 때문인지 이런 약탈적 이론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여왔으나 제대로 된 본질은 앞선 점을 거의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인 드노가 비꼬는 듯한 언설로 소개하고 있는 "나는 우파이긴 하지만.."이라는 스스로를 별볼일 없는 우파들과 구분하는 듯한 논법이 얼마나 허망한지 입증하고 있었는데요.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던 그해부터 많은 미국의 리버럴들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투신한 것은 이를 잘 설명한다고 여겨집니다. 그저 솔직하게 "나는 시장 자유와 개인주의, 인간의 이기심과 이를 바탕으로 다수의 능력 없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구조를 그저 감내하는 것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더 설득력이 높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물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러한 노골적인 논법에 전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맥락에서 글 13장에서는 "좌우를 가르는 스펙트럼 자체가 너무나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에 대중은 이러한 좌우의 근본적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민주주의가 도식적인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주 직접적인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수많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의견을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민주주의가 엘리트주의에 다소간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부정하기 어려울 점일텐데요. 여기에는 시장 자유에 입각한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영화와 급격한 복지 축소를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몰아가 이 글에서 보여지는 중산층의 유명 무실과 더불어 시민들의 '정치적 의지의 거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구조적으로 강고하게 이식되는 과정에서 상위 기득권층을 제외한 다수의 일반 계층들에겐 별반 이득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밀턴 프리드먼은 애초에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없다고 일갈하기까지 했습니다만 굳이 수십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루소의 사회계약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러한 종교적 맹신과도 같은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대한 믿음을 과도하게 정치화하고, 이외에는 전혀 어떠한 대안도 없다는 식의 그릇된 신념을 공익과 공동체주의의 회복을 위해 어떻게 하면 조절할 수 있을지 시민 사회가 의견의 공유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드노의 언급대로 중도라는 정치적 개념 자체가 현재의 극심한 불평등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명확합니다. 그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익을 위해 사회의 모순을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에 기대 숨지 않도록 비겁한 신념보다는 최소한의 정치적 선명성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시민이 지켜야 할 의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많은 시민들이 중도 놀음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결국 과두제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전에 다시 한번 극우 파시즘이 도래해, 정치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들을 제외한 모두가 적"이라는 이들 극우주의자들이 나날이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귀결될지 참으로 우려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데요. 이 글 16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이성과 균형,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를 표방하며 좌우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겠다"는 일부 극중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이처럼 설득력이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체제에 대한 순응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너무나 강고한 것이 현실이고, 철지난 이념적 구도를 바탕으로 반대의 비판적 의견을 묵살하는 것도 현재의 단면이기도 할텐데요. 무엇보다 조지 소로스와 같은 자가 현재의 금융 시스템을 이용해 한 국가의 경제를 투기로 절단 낼 수 있는 상황을 우리가 용인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를 통해 조세 피난처 문제를 비롯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관련된 시급한 문제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이러한 노정은 앞선 과두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다수의 시민들이 극단주의의 포로가 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개인 활동이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자들을 흉내 냄으로써 완성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와 초자유주의자는 서로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적 형태의 발전이 자유를 추구함에 있어서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나키스트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자명하다. 현대 정치 시스템이 민주주의 무덤을 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폭압적 연대 행동에는 강력하다 못해 폭압적이까지 한 공권력의 진압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민중이 결집하여 조직화되면 어디에서나 그렇듯 카리스마적 권력이 출현한다

‘자유주의자이긴 하지만 좌파‘들은 모든 정치적 요구를 이상하다 못해 뒤틀린 방식으로 다룬다

그런가 하면 조지 소로스는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도 한 나라의 경제를 붕괴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외환 투기가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도대체 어째서 현대 금융 시스템이 이를 용인하고 있는지 의아해 한다

비정상적인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정상적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중도층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가능성에 기초한 분석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또한 자유주의 정책이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음은 어린 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를 신성한 가치로 떠받드는 자유주의자들과 사유재산 축적에 집착하는 초자유주의자 및 정치 활동의 의미를 신적 대상과 연계시키는 종교적 광신도 같은 ‘보수주의자‘들과 자신을 구분하려 할 때에는 그 명칭을 쓰지 않는다

전통주의자들은 국가가 집행하는 폭력에 대해 현실론을 내세우며 적극 찬성하지만 그들이 그러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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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에 관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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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독일계 유대인으로써, 전세계에서 인정받는 사회심리학자, 사회학자, 인본주의 철학자 그리고 사회 민주주의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여기 프롬 만큼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면밀히 연구한 학자는 보기 드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1900년에 프랑크푸르트의 정통 유대교 부모 밑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거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이후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잡은 이후, 여느 유대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미국에서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게 되는 정신 분석과 심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고 동일 학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에 이릅니다. 이 책은 원제, "On Disobedience : Why Freedom Means Saying 'No' To Power"로 지난 198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프롬도 이미 장 자크 루소를 접했을 수도 있겠으나, 단편적으로 이 글의 제목과 관련되어 떠오른 것은 루소의 "인민은 자신들의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가 있다"는 문구였습니다. 물론 프롬의 이 책이 시민들의 일반적인 야생성을 단순히 고취시키고자 쓴 글은 아니었는데요. 그가 버틀란드 러셀을 줄곧 인용하면서 우려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무분별한 핵전쟁으로 인한 전세계의 절멸이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첨예한 종말을 위해 대결하는 사실상의 맹목적 군사주의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심도있게 고찰해 보는 것이 그의 일관된 학문적 목적이기도 할텐데요. 그의 확신대로 러셀이 단순한 회의주의자가 아니라 "누구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무엇보다 긍정하고 중요시하게 여겼던 휴머니스트로서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고 봐도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삶을 위해 모든 시민들이 최소한의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를 명확히 한 것이 바로 이 책의 꽤 숭고해 보이는 목적이라고 판단됩니다.

글의 2장에서 프롬은 과거 한정된 자원으로 인한 견고한 계급주의적 체제에 어떻게 소수의 지배자들이 다수의 피지배자들을 억압하고 제압해 왔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데요. 그것은 일반적인 수준의 '복종'이라는 관념을 넘어서는 거의 세뇌에 가까운 '만연된 복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부분의 개념적 도출은 다음 3장에서 드러나는,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사색하고 생각을 진행시킬 수 있는 분위기"를 과연 이를 자본가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를 단편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기도 한데요. 프롬은 논리적 전개 과정에서 과거 자본주의적 관리 체계와 공산주의적 관리 체계의 양대 관리 체계가 실상은 많은 인류의 삶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그러한 측면에서 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인 3장의 시스템적 모순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는 더 부유하지만, 덜 자유롭다"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배타적인 시장 자유에 경도된 자들은 오늘날 이룩한 자본주의가 아무런 결점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2008년의 대몰락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자본주의가 '합리주의라는 만능의 잣대로 시민들을 세뇌'시킴으로써, 과거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인들의 스스로의 양심에 따른 불복종과 저항을 거세시켜 버린 비극적 작용을 추동한 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그따위 사회 정의와 불평등의 개선이 뭐가 중요하냐는 것과 같은 주장들 말입니다. 이에 프롬은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같은 우리의 불복종의 정신이 너무나 터무니없게 죄악시 된 것을 '권위주의적 양심'에 빗대고 있기도 한데요.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19세기의 공공연한 권위주의를 극복했다고 자랑스러워 한다"고 비꼬고 있기까지 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 권위주의를 극복했는지는 그 실상에 대해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프롬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크나큰 애정을 갖고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관리주의자들이 마땅히 누려할 시민의 자유와 권리들을 사회를 통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계층들을 위해 적절하게 관리해 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오늘날 우리의 사법제도가 과연 모두의 시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오늘날 심지어 내면화 되었다고 판단되는 자본주의 체제가 민주주의를 시녀로 거느리고 있는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사법제도가 과연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모두가 다시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대다수의 시민들이 보다 자유롭게 사회에 대해 혹은 체제 전반에 대해 인간이 지닌 이성의 권리로써 마땅히 사색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또한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지만 프롬의 우려대로 인류와 인류 문명 전반을 절멸에 이르게 하기 충분한 핵무기의 위협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이를 방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초로서, '시민의 불복종'이 매우 시급한 상황입니다. 단언코 미국을 포함해, 순간 감행될 수 있는 군사주의적 모험을 얼마나 견제할 수 있는지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할텐데요. 이렇게 암울한 냉전의 시기에서도 모든 인간의 삶과 자유를 위해 노력하고 경주했던 러셀과 프롬과 같은 소수의 지식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정도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저자인 프롬은 3장과 4장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벌어질 경색된 시장 자유가 초래할 사회의 양상을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단순히 노동자들이 자본을 제어하는 것에 이르는 것을 추종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질적 목적이 삶의 주요 관심사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속박으로부터 삶이 해방되게 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언급하게 되는 것이지만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그토록 강조했던 화두였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 시민들의 불복종 정신이야 말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건전해지는 선결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지금도 특히, 최상위에 위치한 자본가들과 엘리트주의자들이 시민들이 스스로 사색하고 자신의 삶을 위해 견실히 학습하고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적인 관념에 노예가 되어 있는 저들의 인식론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자본주의가 어떤 집단의 이해 관계에도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속성 자체가 공익과 별반 상관없이 배타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에리히 프롬의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자의 번역이 거의 군더더기 없이 좋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향후 5년에서 10년 안에 인류가 인간 문명을,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절멸시킬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것도 상당히 현실적인 가능성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에 복종한다고 할 떄 대개 그것은 권위주의적 양심에 복종하는 것이다

자유와 불복종의 역량은 분리될 수 없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소수에게 돌아갈 만큼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스러기만 가질 수 있었으므로 불가피하게 이러한 규칙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언자들은 가끔씩만 나타난다, 그들은 죽은 뒤 메시지를 남기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그 사상은 대중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사람들에게 악용되기 쉽다

지난 150년 동안 우리는 정치 사제들을 넘치도록 보아왔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자유라는 개념을 관리하고 집행했다

대부분의 사회체제에서 복종은 최고의 미덕이고 불복종은 최고의 죄악으로 여겨진다

버틀란드 러셀은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깊이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산업 시스템이 지나온 경로를 그대로 계속 밟아간다면 우리는 어디에 도달할 것이며 인간은 어떤 상태가 될 것인가?

거대 기업은 피지배자들에게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생산물이 우리 위의 객관적 요인들과 결합해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점점 더 거대해지면서 우리의 기대를 꺠뜨리고 우리의 계산을 무력화한다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책임을 두려워하고 그저 배불리 먹는 로봇 같은 노예가 되고 싶어 한다

연대와 사랑이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원칙, 인간의 의지와 비전과 계획이 아니라 비인격적 메커니즘인 시장이 사회의 삶을 조절해야 한다는 믿음 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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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 소셜미디어 시대의 고전과 여성혐오
도나 저커버그 지음, 이민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5월
평점 :
절판


미국 뉴욕 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 소재한 도브스 페리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도나 저커버그는 근래 이름을 알리고 있는 고전 학자입니다. 이쯤에서 눈썰미가 있는 분들은 짐작하셨을 수도 있겠는데요. 바로 그녀의 오빠가 페이스북의 창립자로 유명한 마크 저커버그입니다. 웹상에서는 그녀와 오빠인 마크 저커버그 간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잘 찾아볼 수 없기에 어떻게 보면 두 남매가 각자가 서로 다른 분야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가 요 근래 등장한 SNS 인터넷 기업에 대해 상당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에 의외인 측면이라 생각되는데요. 더불어 그녀는 여성 지식인답게 넷상에서의 여성혐오와 남성 우월적인 인식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인 글을 언론에 기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그녀의 학문적 경로는 미국의 사회과학 명문인 시카고 대학에서 예술학 학사를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 고전 문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외에도 저커버그는 대안 우파 Alt-right 에 대한 비판과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마찬가지로 경고하고 있는데요. 지금 서평을 작성할 이 글 역시 이러한 학문적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Not All Dead White Men"으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커버그의 이 글은 일종의 '사회학적인 르포르타주가 가미된 일부 사회계층에 대한 폭로성의 글'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것의 주된 대상은 대안 우파와 여성 혐오주의자 및 인종차별주의자들과 픽업 아티스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레드필'이라는 반젠더적인 공간에서 "여성과 이민자들, 유색인들 그리고 자유주의 엘리트들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어떤식으로 표출"하고 있는지에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서평을 작성했던 케이트 만의 논저에서도 그렇듯이, 이 글에도 등장하는 '인셀 Incel, 즉 비자발적 독신'들이 어떻게 죄없는 일반 여성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분노로 점철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의 권리가 여성들에 의해 짓밟힘을 당하고 있다는 측면의 인식이 그녀에 의해 가감없이 논증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저들이 현재의 자유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성평등주의를 옹호하고 특정 인종만을 향하는 특권에 반대하는 소위 계몽적 태도에, 어떻게 저들이 논리적 근거 없이 거의 반지성주의에 가까운 주장들로 일관하고 있는지를 글 전반을 통해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는 "대다수의 남성들이 극심한 차별에 놓여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내재되어 있는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인 정치적 신념을 무슨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 마냥 '커밍 아웃'하는 꼴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끊임없는 노정을 기울여 온 사회적 진보에 대한 저런 터무니없는 분노와 혐오는 이 지점에서 저들을 민주주의적 가치 아래 포용해야하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하는데요.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철지난 이데올로기화를 시도하여 그것을 지지하고 인정하는 모든 계층을 극좌나 강고한 좌파로 몰아가는데 온갖 정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저들의 현재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저자인 저커버그는 경제사회적 체제의 해석에서 당시 합법적으로 노예제를 용인한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된 '스토아 철학'을 현재의 인셀과 여성 혐오주의자들이 앞뒤 맥락없이 자신들의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의 근거로서 무분별하게 내면화시킨 점을 2장 전반에서 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는데요. 아주 단적으로 말해, 전체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스토아 철학 전반이 성차별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직간접적으로 강조하고, 이렇게 드러난 성차별주의가 "오늘날 다수의 여성 혐오주의자들에 의해 공명한다"는 점은 학문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과거 레오 스트라우스의 고전 연구가 그 양가적 측면에서 네오콘들에 의해 일종의 교리적인 측면으로 지지받은 것과 제법 유사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처럼 순수 학문조차도 어긋난 이데올로기화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오늘날의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확산되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파급에도 이러한 왜곡된 학문의 인용이 분명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은 분명합니다. 즉, 백인 우월주의자들이나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전체주의의 논법을 적극 차용하고 있는 점을 과연 어디까지 용인해야 할지에 대해 시민 모두가 고심을 해볼 시기라고 생각되는데요. 저들이 이 시점에도 '파시즘'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적 가치와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야할 시민적 의무에 상당히 좋지 않은 영향이 될 것은 거의 자명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저커버그가 스토아 철학을 오용하는 이들의 행태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소위 '자기 길을 가는 남자들과 픽업 아티스트 혹은 여성 혐오주의자들'의 아전인수격인 학문적 인용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상세히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는데요. 이들에게 꽤 높은 팬덤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인용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3장과 4장은 스토아 고전 철학의 대표격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사랑의 기술'을 통해, 이미 원전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 자체가 지금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심각하게 여성차별적이고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강간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과 남성들에게 강간을 권유하는 등의 여성을 성적 도구로 삼는 저열한 시도의 근거로까지 삼고 있습니다. 저자는 다수의 인용을 통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거의 '강간 노트'라고까지 주장하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인정하는 고전의 향취가 지금에와서 어디까지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꽤 중요한 바로미터로 취급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페미니즘의 철저하고 가차없는 성평등주의로 치부하지 말고 시대상에 따라 우리의 계몽주의가 그것을 면밀히 구분해 낼 수 있는 당위를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어느 정도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단순히 남녀의 문제라서가 아니라 여성의 권리, 아니 누구나 인간이라면 인간답고 평등하게 자신의 삶을 누리게 하는 인식적 차원에서 이러한 원칙을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자본주의적 이행 가운데서 사회 전반이 인정하는 시장 자유의 논법이 가미된 '능력주의' 같은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인정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의도된 사탕발림으로 결코 왜곡하거나 한정지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앞선 부분에서 이러한 "레드필 남성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학과 역사를 자기들 멋대로 인용해 자신들만의 가부장제와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로 강화시키는 것은 과거 히틀러의 나치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처럼 백인 우월주의와 여성 혐오를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 자체가 파시즘과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논증 과정에서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과 근거의 제시는 고전 철학을 연구한 전공자답게 큰 설득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여성 고전 학자라는 점을 색안경끼고 보지 않는다면 꽤 논리적인 비판이라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텐데요. 이 뿐만 아니라 주요한 비교 분석 대상으로 인용되고 있는 픽업 아티스트와 관련해서도, 이들의 행동과 주된 목적이 여성의 성을 트로피로 삼아 보통 인셀들로 규정되는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비교적 상이한 측면의 인식을 소개하고 있었는데요. 저자인 그녀가 '픽업 아티스트'라고 규정된 여성의 성과 섹스만을 목적으로 삼는 이들의 매우 현실적이고 치밀한 분석은 꽤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마치 실제로 현역(?)에 있는 어느 픽업 아티스트가 직접 자신의 일화를 기록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까지 받게 되었는데요. 이는 온전히 글을 쓰기에 앞서, 치밀한 자료수집을 선행한 그녀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다시 앞선 논점으로 돌아와서, 대부분의 픽업 아티스트들이 일반적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여성을 쟁취'하는 방법을 교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이 이들의 명백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인셀들과 마찬가지로 소위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의 성관념 자체를 남성에게 전적으로 종속시키는 작업에 이들은 왜곡된 노력을 경주하게 됩니다. 이는 픽업 아티스트들이 다소 이질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비교해, 후자들이 '여성의 인정'을 광범위하게 거부하면서 전통적인 가부장적 체제의 복귀와 여성의 성을 남성들의 소유물로 만들고자 하는 계몽주의 시기 이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터무니 없는 열망을 보이는 것과 유사한 인식적 체계를 짐작하게 되었는데요. 일반적인 남녀 관계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사실상 거부하는 것과 "남성에게 성적인 욕망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원래 여성에게 내면화된 욕망이기도 하다"는 그들의 해석은 이들 픽업 아티스트들이 분명한 왜곡된 성관념을 보통의 남성들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이는 극단적인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건전한 사회적 관념에 있어 분명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을 무슨 컬트와 같은 개념으로 용인하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분명하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학문적 연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현재의 사회구조가 "오로지 여성들의 권리만을 위한 토대"로서 발전되어 왔다고 믿고 있는 여성 혐오주의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의 관념 체계로 사회 전반을 변화시키는 것이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작게는 여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마땅히 섹스를 제공해야하며, 과거의 남성 권리를 비롯한 전근대적인 사회 관념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점은 단순히 그들의 일관된 신념을 넘어 익히 부정적인 관념론 자체로 심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겁니다. 어쩌면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들의 주장들을 사회 전체에 관철시키기 위해 이론적 근거로 '스토아 철학을 경쟁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도널드 트럼프가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마땅히 키스를 해야하고, 자신은 여태 그렇게 살아왔다는 자랑스럽게 고백하기까지 하였는데요. 이들 여성 혐오주의자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지신들의 이상향으로써 여기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왜곡된 논법들이 다수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는 점은 심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트럼프가 일개 사인이 아니라 한때 미국을 좌지우지 했던 정치인이었던 측면에서 미국 시민들의 정치인에 대한 변별력이 어느 정도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한편으론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여성을 일종의 소유물로 여기고 계몽주의와 그로인한 민주주의가 이룩한 사회적 진보를 오히려 남성 권리의 심각한 후퇴로 여기기까지 하는 이런 반지성주의적 인식은 실로 우려스럽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건전한 성평등주의 자체가 남성의 권익을 침해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적 비약은 또한 민주주의 정치 자체에 있어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여성 혐오와 백인 우월주의를 기치로 제도적 정치 무대에 속속들이 등장하는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무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계몽의 가치로 시민의 삶을 위해 발전시켜온 남녀 평등과 다원주의적 가치를 또 한번 짓밟힐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낱 음모론 따위로 여겨서는 안될 겁니다. 과거 네오콘이 자신들의 정치적 행로에 대한 근거로 고전 철학을 이용했던 점은 시민들 개개인이 이를 마찬가지로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민주주의를 전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치부했던 역사적 근거를 지금도 찾고 있는 어용 지식인들과 극단주의자들 또한 우리가 마땅히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3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약간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역자가 본문에서 여성의 성기를 '음부'라 하지 않고 '보x'라고 지칭하고 심지어 '보슬아치'라는 번역까지 한 것으로 보아 일개 독자로서 역자의 고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대안 우파'를 알트라이트로 지칭하고 있었는데요. 아마도 역자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여겨집니다. 대안 우파 자체가 갖는 의미가 다소 온건하게 보여, 저들이 극우주의자들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망각하기 마련인데요. 다만 알트라이트 역시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데 마찬가지로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원론적인 입장에서 단순한 저의 해석을 언급하는 것 뿐입니다. 오해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온라인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드러낸 여성은 레드필 커뉴니티에 드나드는 남성들로부터 악성 트윗과 이메일을 받게 된다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극우 세력이 고대를 전유한다는 점을 우려한다

이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공간을 침해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이지 의무라고 믿는다

흑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이 인종주의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역사의 모든 여성들이 기만적이고 통제적이고 문란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우리가 여성중심적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양육법이 남성에게 압도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앤드루 앵글린은 한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남성이 다른 인종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다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이 그런다고 하면 화가 난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궁은 곧 우리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야‘라는 문장은 구조적인 성차별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성이 흔히 하는 대답으로, 자신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포스트는 "사회정의의 전사들이 대학을 가장 허접한 이들과 영합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제일 징징거리고 안쓰럽고 멍청한 루저들 말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스토아 철학이 레드필 커뮤니티에 입성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왜곡이 필수적이다. 레드필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국수주의자이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데 반해, 스토아 철학은 세계주의적인 관점을 지향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무소니우스는 스토아철학이 오늘날의 남성계에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질 만한 기본적인 전제를 둔다. 바로 남성이 태생적으로 여성보다 감정 절제를 더 잘한다는 가정이다

레드필 커뮤니티에 드나드는 남성들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덜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이 남성들은 미국의 노예제가 남긴 유산과 그것이 흑인에게 장기적으로 미친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다

레드필 스토아주의자들이 볼 때, 가부장제를 복원하려는 구조적 변화의 시도는 모두에게 이득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여성과 유색인은 비이성적이고 지도를 필요로 하기에, 이성적인 백인 남성이 책임자가 된다면 사회는 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오비디우스는 독자에게 오늘날이라면 성폭력으로 간주될 만한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그에 따르면 성공적인 픽업은 힘을 가진 남성잉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남성의 가치는 높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일련의 전략으로 이루어져 있다

픽업 아티스트들은 다양한 인종의 테스토스테론 수치, 성기 사이즈, 성격에 대한 고정돤념을 전시한다

"허락을 구하지 말라. 지배적인 태도를 가져라. 당신의 접근을 상대 여성이 거절할 때까지 밀어 붙여라. 허락을 구하지 말라. 여성의 손을 잡아끌어서 당신의 거시기 위에 올려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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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위기 - 북한은 제2의 쿠바가 될 것인가?
안병진 지음 / 모던아카이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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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안병진 교수는 1967년 대구 출생으로 서강대 사회학과 서울대 정치학과를 거쳐, 한나 아렌트와 에릭 홉스봄이 몸 담았던 미국 뉴욕의 사회학 명문 뉴스쿨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는 뉴욕 시립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다 2003년 귀국해 현재 경희사이버대학의 미국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안병진 교수는 최근까지 TV토론 방송을 비롯 시민들을 위한 정치 프로에 간간히 출연해,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린 바가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안 교수가 소위 미국내에서 리버럴이라고 불리우는 좀 더 상식적인 중도와 유사한 지형의 지식인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최근에 안교수의 발언을 담은 기사들을 봐도 민주당쪽에도 쓴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여느 학자들과는 다른 스탠스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안 교수의 활동에 일정 부분 지지하는 편이기도 한데요. 특히 그동안 그가 자신의 여러 논저를 통해, 미국과 한반도를 둘러싼 틀에박힌 정치외교적 해석에 반대하면서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점은 꽤 신선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동일한 제목으로 지난 2018년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미국 외교학계에 극명한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그레이엄 앨리슨을 다소 '순진한 생각의 소유자'로 여기게 만드는 듯한 제목은 단순히 저자가 학계 주류를 관통하는 학자를 폄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런면에서 이 글 2장에서 인용된 딘 러스크의 어느 대학 강연 자리에서 "여러분은 저처럼 유화책과 고립주의의 유혹에 빠지면 안 됩니다"라고 호소하며 눈물까지 보였다는 일화는 실로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2장 전반에서 논증되는 "전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고간 1962년의 13일의 위기"에 피델 카스트로가 뜬금없이 흐루쇼프에게 "최후의 전쟁이 남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삶의 불확실성" 자체를 몸소 깨닫게 만듭니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감행해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는 듯 보이는 카스트로라는 정치인의 존재감은 핵전쟁의 위협이 과연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합니다. 이와 관련해, 안 교수는 여느 정치학자와는 다른 관점으로 글 서두에서 의미심장한 '베두인의 전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칠면조를 훔쳐간 자들이 자신의 딸까지 강간하고야 말았다"는 베두인 족의 교훈은 1962년의 카리브해 쿠바섬에서 초래된 어쩌면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갈 수 있었던 "핵전쟁의 문턱"을 곱씹게 만듭니다. 저자의 고유한 해석대로 이 베두인 전설의 딜레마가 '쿠바 미사일 위기'를 통해, 당시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던 문제와 매우 닮아 있는데요. 역시나 2장 말미에 등장하는 "국가간의 위기는 불완전한 정보에 기반한 상호 오인의 무덤이다"와 일맥상통한다는 부분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중차대한 불확실성을 단순히 그레이엄 앨리슨과 같은 현실주의에 경도된 학자들이 무슨 과학 법칙과도 같은 단순한 논법으로 해석해 마지 않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마치 막 서막이 펼쳐지려고 하는 미중간의 패권 투쟁에도 한치의 어긋남 없이 오버랩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2차 대전의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로 망망대해의 외로운 섬과도 유사한 처지가 된'서베를린'은 미국과 서유럽에 있어 전세계에 자유 체제를 담보하는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려는 의도와 그 목적 자체를 광범위하게 이해하기 위한 원인들 가운데 하나로서, 충분히 근거를 세울 수 있기도 한데요. 당시 케네디 정부에게 있어서 베를린 문제는 매우 중요한 외교적 문제였고, 동시에 소련의 봉쇄 이후에도 미국과 서유럽이 서베를린을 정치적으로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봐도 이 도시의 존재 가치가 얼마나 중대했는지 미뤄 짐작하게 합니다. 이처럼 쿠바섬의 13일 사태에 대한 많은 외교 문서가 각국에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만 흐루쇼프가 그 와중에도 자신들의 행동이 베를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미국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하는데요. 동일하게 3장에서 보여지는 당시 워싱턴은 이러한 소련의 복합적인 도발에 일견 분노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외부에 다소 온건해 보이기까지 한 케네디 대통령이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는 후일담은 막대한 핵무기를 보유한 양국에 의해, 우발적 핵전쟁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됩니다. 물론 혹자들은 터키의 미사일 배치를 언급하며, 흐루쇼프 역시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대변합니다만 냉혹한 전쟁광으로 이해되기까지 하는 르메이가 당시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과 자신의 상관인 케네디 대통령까지 끝내 경멸했던 것으로 보아, 미국의 매파와 소련의 호전광들이 양국에 엄연히 존재하는 위험 요소였으며, 최근 국내 정치인의 주장만큼이나 "대통령의 자리는 전쟁이나 선제 타격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얼마만큼 위기 관리를 잘 해 낼 수 있느냐"를 매번 시험 받는 자리라는 해석이 실로 정확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바로 상반된 이 지점에서 케네디의 정치적 미덕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그에 관한 정치적 호불호의 감정과는 별개로 스스로 패권국의 수장이라는 자존심을 짓밟힌다 하더라도 파국으로 몰고갈 수 있는 핵전쟁을 최종적으로 기피하기로 했던 결심이 포함된 정치적 결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국내외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최근의 북한 미사일 문제의 해법을 위한 '바로미터'로 살펴보고자 하는 사례가 여럿 있었습니다. 안 교수에 의해서도 꽤 훌륭한 논저로 평가받고 있는 마이클 돕스의 논저, "1962"년 또한 국내에서 높은 판매고를 올린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기인한다고 생각됩니다. 돕스의 이 글을 접해본 많은 독자들도 조차도 "설마 핵전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수 있겠어?"라고 당연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강조하고 부분은 북한의 핵문제를 앞선 단순한 논법과 같은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여러 정치적 해결 방안들은 분명 북한의 그것과는 현저히 다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거 카스트로의 이익과 현재 김정은이 추구하는 이익은 그 본질이 꽤 유사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카스트로가 소련 대사를 향해 "최후의 전쟁이 남았다"고 에둘러 말한 것은 자신이 권좌를 차지하고 있는 쿠바가 설사 미국에 의해 잿더미가 되더라도 마치 전세계의 안위 따위는 나는 신경쓰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됩니다. 이 부분은 김정은의 평양 역시 핵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잃을 것이 북한보다 현저하게 많은 중국이 사실상 북한을 후견하고 있는 것은 북한의 미사일을 제거하기 위해 중국이 자신들의 군대를 북한에 투입할 가능성이 희박다는 것과 관련있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은 북한의 핵무기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지 않다고 믿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이처럼 중국은 1962년의 소련보다 더 많은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 정권이고, 무엇보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과거의 소련보다 더 호전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배경들은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 이론들이 쉽게 설명해주지 못하는 부분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인 안교수도 역시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당사자들에게 진지하고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는 것에 이릅니다. 이는 1962년의 케네디 행정부가 선보인 '쿠바에 대한 전면적인 해상봉쇄'와 같은 방법이 항상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점과 최근에 조지 W. 부시가 맹신했던 설익은 '북한붕괴론'과 같은 성급한 예측에 거리를 두는 것으로 북한의 핵무기를 머리 위에 두고 있는 현실에서 악화를 막기 위해 최소한 고려해야 하는 점들을 4장 말미에 몇가지 사례를 들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논의된 안교수의 제안들이 하나같이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북한의 김정은을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외길 낭떠러지로 몰아서는 안되며, 이것이 실패했을 때 벌어지는 핵미사일을 통한 전쟁 뿐만 아니라 재래식 전쟁의 참혹한 댓가 마저도 결국은 전적으로 우리만의 몫이라는 가정입니다.

미국과의 평화협상이 어찌하여 시간 끌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사실상의 답변을 담고 있는 4장은 북한 핵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매번 워싱턴의 주인이 바뀔때마다 벌어지는 일관되지 않은 국제외교적 정책과 특히 쿠바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 정치와는 거리가 먼 권위주의 국가들을 대화 상대로 조차 취급받지 못하게 만드는 미국의 혐오감정과 자신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중남미 아메리카에 대한 그동안의 놀라우리 만큼 비열했던 CIA를 통한 공작 정치의 유산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과거 미국의 이러한 '공작과 작전'들은 이것을 면밀히 연구한 미국의 적성국들에 의해 미국에 대한 신뢰를 답보하기 어려운 요인으로 치부됩니다. 여기에는 제2차 이라크 전쟁을 위해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수행한 '후세인이 각종 생화확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허위 주장이 나중에 어떠한 평가를 받았는지 고려해 보면 저들이 어떤식으로 교훈을 얻었는지 대략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러한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쿠바와 북한 등에 있어 미국이 신뢰를 주지 못하는 결과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닉슨의 '미치광이 전략'과 같은 오인의 문제는 단순히 우스개 소리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엄연히 현재까지도 미국내에 각종 외교적 현안에 있어 군사적 개입을 주장하는 매파가 존재하고 있고, 국내 정치 전반에 있어 상당 부분 해를 끼치는 '기독교적 근본주의'가 미국에서 나날이 영역을 넓히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대로 행정부와 양당의 엄연히 구분되는 정책 때문만으로는 반자유주의 국가와의 신뢰와 평화 문제의 딜레마를 이해하기란 다소 어려운 법입니다. 여기에서 거듭 논의되는 북한 정권의 문제는 만약 중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저 핵무기 만으로 북한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웠을것이라 추측됩니다. 그만큼 북한의 문제는 쿠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잡한 요소가 잔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글의 대단원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러 제언들 가운데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대화 창구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점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우리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이며, 적대국에 준하는 국가와의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군사적 개입에 대한 손쉬운 유혹에 있어 세계 패권을 갖고 있는 유일무이의 민주주의 정부가 오로지 자신들의 국익만을 위해 이를 방편으로 삼는 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도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일례를 통해 핵확산 원칙을 스스로 어기는 선례를 만들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란과 북한의 핵보유 시도는 전세계에 미국의 국제외교적 정책에 의문을 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통해 알게된 한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 정보 당국이 파키스탄의 핵 물리학자 압둘 카디드 칸과 북한의 핵무기 커넥션을 오래전에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연유에는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뭔가 음모론으로 읽혀지기도 했습니다만 과거 이삼성 교수의 논저에도 이와 같은 부분이 언급되었기에 충분히 숙고해볼 만한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미 여러 글들을 통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그와 같은 우려가 전혀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님을 입증했던 바가 있는데요. 예를들어 도널드 럼스펠드와 딕 체니가 군산복합체와 관련 깊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글의 여러 교훈들 가운데 제가 극명하게 느낀 점은, "일개 국가의 위신이 세계를 파멸로 이끌게 되는 핵전쟁의 참혹한 결과물보다 명백하게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일부 정치인들의 끝모를 당위였습니다.   



베를린 대전략 가설에서도 드러났지만 케네디와 같은 리버럴 엘리트는 합리적 사고와 이를 근거로 한 설득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카리브해 위기의 책임을 소련과 쿠바의 군사모험주의 탓이라고 하는 우파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 탓이라고 하는 촘스키 같은 좌파의 시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1962년 소련의 쿠바 미사일 철수에 충격을 받은 김일성은 강대국에 대한 배신감을 키우면서 자주 노선과 핵무기 개벌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인지심라학적 개념 중 국제정치학에서 널리 알려진 개념인 오인은 위기 사례 분석에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다. 로버트 자비스는 "부정확한 추론, 결과에 대한 계산 착오, 정책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에 대한 판단 착오"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오인이 의사결정에서 중여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쿠바 미사일을 둘러싼 위기의 핵심 교훈은 앨리슨의 주장과 같은 전쟁을 각오하는 태도의 중요성이 아니라 강압 전략이 우발적 전쟁의 가능성과 얼마나 맞닿아있는가다

로버트 케네디의 자작극 제안은 후에 린든 존슨 행정부가 베트남 침공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작한 통킹만 사건 당시 미국 리버럴이 보여준 비윤리성이 예외적이라기보다는 통상적이라는 점을 시사해준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평화적 해법에 대한 흐루쇼프의 답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신‘인 핵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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