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트라우마 - 소득 격차와 사회적 지위의 심리적 영향력과 그 이유
리처드 윌킨슨.케이트 피킷 지음, 이은경 옮김, 이강국 감수 / 생각이음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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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정경대 출신으로 노팅엄 의과대의 사회역학, 요크대 초빙 교수 등을 맡으며 불평등과 시민들의 정신 및 신체 건강의 관련성을 연구하고 있는 리처드 윌킨슨과 캠브릿지와 코넬대에서 역학을 전공한 케이트 피킷이 함께 공저로 참여한 ‘불평등 트라우마’를 일독했습니다. 아마도 두 공저자의 이력에 포함되어 있는 이 ‘역학’이라는 학문은 ‘예방의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이 책은 두 공저자의 다른 논저인 ‘평등이 답이다’의 후속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도 보여지는데요. 서문에서 이와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현재 앞서 언급한 ‘평등이 답이다’는 절판이 된 상태로 나오고 있습니다. 원제는 번역된 제목과 약간 관련이 없는 ‘The Inner Level’ 이며 2018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올 3월에 번역 출판이 이뤄졌습니다. 본격적으로 논의에 앞서 번역은 딱히 나무랄데가 없었으며, 따로 감수를 두고 편집에 나선 것으로 보아 출판사의 노력이 적잖게 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우선 이 불평등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식은 개인의 능력의 문제이며, “유능하고 강직한 사람은 위로 올라가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빈곤과 궁핍에 빠지게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는 다소 내면화된 문제를 끄집어 내면서 전자의 문제가 현재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교육 불평등이 초래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양자는 닭과 계란의 문제일 정도로 서로 밀접하고 어느 것이 이 사태의 원인인지 가려내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렇게 일면적인 불평등의 상황을 이 정도로 짚어 보고 나서 책의 논의에 들어가는 것이 개인적으로 필요하다고 느꼈는데요. 이 두 학자의 연구물은 다른 불평등을 다룬 논저들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정신 의학과 인간 본성의 측면에서 오늘날의 불평등이 어떤 식으로 시민들의 건강과 마음의 불안을 초래하고 있는지에 대해 여러 OECD 자료들과 유럽 국가들의 통계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불평등 문제가 사회 불안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이 연구서의 논법처럼 인간 자체의 정신 불안과 자기 혐오, 자기 비하, 굴종적인 의식 등을 초래한다는 결과는 꽤 설득적이고 인간 본연의 근본적인 문제로까지 느껴졌습니다. 더불어 이와 같이 민주주의 체제하에 시장 자유주의가 매우 가파르게 사회 구조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꽤 강제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발전을 연계하여 시장 자유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회 전체에 대한 주입은 개인 능력의 문제라든지, 개인의 수용 여부에 따른 아주 사소한 지엽적인 부분이 절대 아닙니다.

“불평등이 클수록 최상층에 있는 사람은 대단히 중요하고 최하층에 가까운 사람은 거의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거의 필연적으로 증가한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미국의 도금시대부터 개인의 사리사욕 추구를 전면적인 자유의 문제로 여기게 되면서 이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하고자 사회진화학과 진화심리학 등이 여기에 가세했습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나고 각 개개인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14세기 이후 휴머니즘과 계몽주의를 통해 인간의 기본권을 중요한 가치로 삼아 역사의 진보를 거의 과거로 회귀시켜 버리는 반사회적 입장과도 같습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오랜 역사를 통해 이룩했던 인류의 민주주의 가치와 평등 사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소하게는 정신적인 문제와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을 만들어내고 사회구조적으로는 사회 불안과 긴장, 갈등, 계급적 지배 체제를 심화시키는 요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토대의 논증 과정을 이 책은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시민들 모두가 우리의 현재 상황에 대한 면밀한 인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또한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사례들중에 미국에서 불평등이 심화된 지역이 지난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한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은 이 불평등이 하위 계층을 오도하는 포퓰리즘의 양태로 나아갔고, “도널드 트럼프는 소득 불평등이 심각한 주에서 더 높은 지지를 얻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소득 불평등이 포퓰리즘 대두의 원인으로 지목 받았다”는 결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 각 사회가 평등의 문제에 좀 더 골몰하고 평등적인 사회가 곧 나은 사회라는 도식을 매우 겸허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이 평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유독 현실을 도외시한 도덕 이상주의적 접근이라는 가치이론적 폄하가 만연했는데요. 더 이러한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좀 더 실천적인 태도와 행동의 전환이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불평등이 만든 물질주의와 소비 지상주의와 관련해서도 “물질주의는 인간이 타고난 소유욕의 징후가 아니라 불평등으로 심화된 지위 경쟁에서 자극을 받아 타인에게 자신의 자존감을 알리는 아주 기이한 소통 형태”로서 이것이 시민 사회에 만연됨으로서 불평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가리고 경제적 만능의 태도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책은 이러한 논증 과정을 통해 ‘이기심, 소유욕, 자기중심주의, 출세주의 등을 반사회적 경향’이라고 단언하고 더 나아가서는 ‘지배적 위계체제’를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이 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가 바로 이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자 한 것이며, 모든 시민을 ‘불평등에 의한 지위 불안’에 빠트림으로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결국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불평등으로 인한 시민의 정치 참여가 더욱 약화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영속성을 해친다는 것을 필히 유념해야 될 것입니다.

주를 포함한 글의 내용이 400여페이지가 넘는 이 연구는 시민들 자체의 건강을 악화시키는 불평등을 다루면서 이 논증 과정 만으로도 꽤 높은 설득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존의 교육 불평등을 비롯한 사회와 경제적 및 소득 불평등에 관한 연구는 요근래 계속 되고 있지만 애초에 앞선 언급과 같은 접근을 보이는 논저는 거의 이 책이 유일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번역 작업과 함께 고정된 책의 제목이 다소 이해 안되실 수도 있지만 책을 전부 일독하시면 글의 목적과 제목이 동일함을 파악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어떤 사례와 주장은 논란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크게 봤을때는 글의 일관된 논점을 해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 격차의 영향력을 인식하기 어려운 이유는 지위 격차나 어떤 사람의 사회 계층을 드러내는 표지가 실제보다 더 근본적으로 사람들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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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의심의 정치학
마이클 오크쇼트 지음, 박동천 옮김 / 모티브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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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으로 영미 학계에 전후시기 위대한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마이클 오크쇼트는 캠브리지와 런던정경대에서 강의하고 특히 헤겔의 관념론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사상가이자 학자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는 냉전시기의 당시 영국 대처 정부와도 거리를 둘 만큼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있었는데요. 이 ‘신념과 의심의 정치학’이라는 일종의 정치철학적 논저 역시 그의 이러한 사상적 본질과 궤를 같이 하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정치철학적 주제와 질문들이 ‘권력은 과연 누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쓰여져야 하는가’와 유사한 일종의 인간 본연의 정치 사상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사후 발견된 이 글의 논고가 출판이 되지 않고 지인들의 손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어쩌면 그의 고민을 짐작할 만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Politics Of Faith And The Politics of Scepticism’으로 1996년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지난 2015년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책 제목과 동일하게 오크쇼트는 ‘신념의 정치학’과 ‘의심의 정치학’을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접근으로 해석해 양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독자들은 이 두 주제가 다소 대립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는데요. 논증이 이어지는 책 중반부에 “의심 정치를 단순히 신념 정치의 반대로만 보는 것은 불완전한 이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 먼저 신념 정치 혹은 신념의 정치학의 태동은 아마도 12세기 중반 십자군 전쟁이 별 소득 없이 종료 되고 난 이후의 근대 유럽의 태동이 시작되었던 시점부터 15세기 말 16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유럽 각국의 정부들은 신민들의 활동과 운명을 통제할 권력을 획득해 나간 시기로 저자는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단어들 중 가장 빈도수가 높은 것이 ‘모호성’과 ‘다스림’입니다. 전자의 모호성은 정치철학을 넘어 인간 본질의 근원, 사물의 이치 등이 단순한 어휘로 설명되는 것은 어려운 부분이며, 동시에 정치에 있어서도 이 모호성이 행위와 이념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해 왔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아마도 오크쇼트가 헤겔의 관념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저의 이러한 해석을 차치하더라도 정치의 본질이 다소 모호하게 나타나는 것은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스림’과 관련해서도 오크쇼트는 권력에 대한 주권의 개념 및 앞선 신민들에 대한 통제력과 관련하여 이 다스림을 해석하고 있고, 전반적으로 통제, 개입, 조절 등의 의미들과 맞닿은 이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논증 과정에서 ‘신념의 정치학’은 일종의 인간 완성의 형태로 정치를 바라보는 듯 하며, 행위자와 피행위자와의 경계라든지 일반적인 정치적 이념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내세워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인간 완성의 형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떠한 높은 가치 등으로 이 신념의 정치학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프랜시스 베이컨을 이 관념의 사도이자 생부로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의심의 정치학’은 도덕적 회의주의를 기반으로 루소의 공화주의가 태동하는 시기 이전부터 오늘날 대의적 정부들의 견제, 분립, 대응 등의 가치관과 공유하는 형태의 정치로 나타납니다. 정치를 명백히 회의적인 것으로 인식했던 홉스와 스피노자를 필두로 앞선 베이컨의 대항마로 존 로크를 대칭시키고 있습니다. “도덕적 승인이나 거부는 정부의 직무에 속하지 않는다”는 보편적 대의에서 의심의 정치학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명백하게 보입니다. “올바르다고 간주되는 단일한 행동 유형을 신민에게 강요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 여기는 발상을 중세적 사고”라고 밝히는 부분에서도 의심의 정치학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앞선 신념의 정치학이 종교적인 부분과도 연관이 있다면 이 의심의 정치학은 종교적 및 도덕적인 가치에는 일정 부분 선을 긋고 있습니다. 더욱이 기계적 장치와 유사하게 권력 분립 또한 전체를 지탱하는 부속으로 여기는 등 의심의 정치 자체는 꽤 억측과 이상적이고 낙관적인 현실을 배제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배제라기 보다는 객관성을 제일의 가치로 해석한다고 봐야하겠죠. 즉 기계 공장의 필수적인 부품들이 전체적인 균형과 운동성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법치주의라든지, 분립, 시민, 정부 등을 하나의 균일한 정치적 부속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 의심의 정치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오크쇼트는 이 신념의 정치학과 의심의 정치학 모두 자기 파괴적 속성을 갖고 있으며, 의심의 정치학은 신념의 정치학과는 달리 그 파괴성이 명백하지는 않지만 자기 파괴를 네메시스로 치환시키고 이들중 하나만이 홀로 득세하는 것이 양가적인 측면에서도 좋지 못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회의적 스타일의 정치학은 결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이 의심의 정치학이 신념의 정치학과 다른 점이라고 전제합니다. 결국 이 양자의 정치학은 서로 꽤 합리적으로 균형있게 존재해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는데요. 저자가 이 합리성을 생전에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결론에 이르러 밝히고 있는 ‘균형자’의 개념은 실로 절묘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정치철학 및 정치학에서 이 ‘균형자’의 개념은 쓸모가 많을 것으로 파악되는데요. 플라톤의 중용을 기반으로 ‘지식과 판단을 갈구하는’ 이 균형자들의 범람이 시민 사회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 전반에 ‘논쟁은 있지만 증오는 없는’ 실용적인 가치를 추구하는데 조력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의심의 정치학에서도 다루는 관행의 면모를 어떤 식으로 일신해야 될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며 신념과 의심, 양자의 가치를 어떻게 균형적으로 이뤄 나갈지에 대한 현실적인 방안이 모색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전부 일독하고 나서 찬찬히 오크쇼트의 일생을 설명한 기록들을 웹에서 검색해 보았는데요. 한때 노동당 정부를 비판한 것이나 대처 정부와 거리를 두고 라스키의 후임으로 런던정경대에 임용된 것으로 봐도 그의 사상적 삶이 얼마나 치열했을까 잠시 가늠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이 나오게 되었고, 자기 확신의 태도 보다는 좀 더 스스로에게 객관적이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 시대의 많은 정치인들이 이 책을 손에 쥐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해보게 되었습니다.

“정치에서 극단을 한번 껴안은 사람들은 오로지 극단의 정치만을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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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 Trans & Cross 2
콜린 크라우치 지음, 유강은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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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워릭 대학의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저명한 사회학자로 알려진 콜린 크라우치의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를 일독했습니다. 크라우치는 크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포스트민주주의로 유명한데요. 얼마전에 서평을 쓴 ‘포스트 민주주의’를 읽고 나서 신자유주의를 다룬 이 책을 너무나 구하고 싶었는데요. 마침 절판된 상태라 개인 중고 거래를 제외하면 딱히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전에 운좋게 제 손에 들어왔고, 천천히 정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원제는 The Stange Non-Death of Neoliberalism 이며, 지난 2011년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2년 소개되었는데요. 앞서 언급해드렸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시중에서 책을 구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모쪼록 재간행이 이뤄지길 빌어 봅니다.

우선 크라우치의의 이 책이 관통하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은 “민주주의는 측정 가능한 단일 지표를 제공하는 이윤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과 “신자유주의는 기업과 국가의 긴밀한 관계를 전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의 정치경제적 유산에서 놀라울 정도로 이탈한다”는 설명입니다. 후자의 설명과 관련하여 이 책 1장에서 저자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는데요. 사실상 2차대전 당시 자유주의가 국가와 대결하던 배경과 과정이 현재의 신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르며, 폭넓은 시민 자유가 좌파와 연계되어 있다면, 신자유주의는 기업과 자유 시장 체제에서 광범위한 이익을 얻는 이들의 가치 체계로 진화 내지는 왜곡되어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이와 관련된 많은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대공황 시기의 루즈벨트 정부의 “무산자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가” 많은 자본가와 기업가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 일반적으로 합리적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며 이러한 경제적인 관념이 점차 견제 없는 지배 이념이 되어왔던 것이 루즈벨트와 케인즈를 관으로 내몰면서 초래했던 그 과정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못함은 자명한 것이고, 전통적으로 공리주의적 배경을 갖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사회사상적 배경이 신자유주의의 이론으로 배격당하고 심지어는 공리주의적 기준을 철지난 계몽주의로 공격하는 일까지 등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와 자유 시장 문제를 근본적인 측면에서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즉 2장부터 4장까지가 이러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시장의 특징과 많은 경제학자들이 입을 닫고 있는 시장의 실패에 대해, 그리고 이런 자유 시장 체제에 대한 결과론이 모든 시장 참여자들의 이익이 아니라 ‘거대 기업의 이익’으로 나타났다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의 융합에 대한 시도와 가능성을 매우 비판하고 있고, “시장에서 거대 기업은 자신들만 혜택을 누리게 만들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인식과 더불어 시장의 진입 장벽을 따로 논하지 않더라도 여기에 집중하는 참여자들이 매번 합리적일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기조와 입장을 같이하고 뒤이어 이어진 미국 행정부의 경제적 정책의 이론적 기반이 된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시카고대 경제학파의 주장과 사상에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점이 지배하는 정치화한 경제의 정치적 함의를 전혀 다루지 못한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요. 밀턴 프리드먼의 다음과 같은 말도 그 한계가 명백합니다. “기업에게는 주주 가치 극대화 이외는 어떠한 의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사회적 목표를 결정할 권리도 전혀 없다”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애초에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실행되기 전에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이러한 신사조가 등장하고 기업이 점차 힘을 갖게 될 때 ‘정치적 다원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중도 좌파 및 진보 세력의 궤멸이 정치적 다원주의라는 이상을 유감스럽게도 뒷받침하지 못하고 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도 이 신자유주의적 기조는 더욱 강화되어 왔습니다. 글 초입에 신자유주의가 쇠퇴하기는 커녕 더 강화되는 것으로 결론이 난 연유에는 “고삐풀린 경쟁이 금융 시장 자체를 깎아 먹는 상황임에도” 대마불사적 입장의 ‘이익은 자신들에게, 손해는 사회에게 맡기는’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사회와 시민을 담보로 잡는 무참한 사익추구와 금융인들의 광범위한 도덕적 해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시장이 어떠헌 규제나 견제 장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으나, 국가와 사회를 담보로 잡는 이 이익화에 대한 어떠한 규제적 장치가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건전한 경제 체계에도 일절 도움이 안되는 이기심이겠죠. 마찬가지로 제가 몇번이나 언급했듯이, 2008년 이후에 정권을 잡은 오바마 행정부가 금융 위기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단 한 명도 기소하지 않은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 시장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기존의 ‘국가-시장-기업’ 의 3자 관계에서 새롭게 ‘시민사회’를 결합시켜 4자 관계로 확대시켜야 하며 이와 관련해 7장에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찍이 ‘급진적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학자들이 시민들의 역할과 다양한 토론과 논쟁이 수반된 좀 더 강화된 시민사회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집단 지성과 관련해서도, 또한 광범위한 정치 참여가 용이해진 오늘날의 SNS과 같은 소셜미디어의 발달을 보더라도 이러한 명제가 쉽게 도달할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만 점차 자본주의적 소비 지상주의에 노출되고 만연된 정치적 불신에 직면한 시민들이 과연 옳은 과정으로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쉽게 단언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회경제적 기득권들과 명목상은 이를 지지하는 척 하는 우파 정치인들에 의해 ‘시민-민주주의’의 중요한 도식이 계속 옅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도 간혹 엿볼 수 있지만 앞으로도 신자유주의가 중요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고 이를 견제할 건전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거대한 경제 불평등의 시기에 시민이 자신들이 손수 맡아서 해야 될 정치적 책임을 과연 마땅히 해낼 수 있을지 실로 많은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라우치의 이 책은 다시금 이러한 상황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새삼 곰곰히 생각해보게 하는 유익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밝히지만 어서 빨리 재출간이 이뤄지길 간절히 빌어 봅니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가 일종의 희생양으로서 시장에 결합된다 혹은 결합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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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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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가이 스탠딩은 영국 런던대학의 SOAS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교수이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BIEN)의 공동창립자이자 현재 명예공동의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특히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안정 노동자 계급을 일컫는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연구로 명성이 알려져 있습니다. 저자인 그가 몸담고 있는 BIEN의 기본소득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아마도 이 책에 있다고 봐야 할텐데요. 2017년에 ‘Basic Income’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지난 2018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단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는 일전에 클리포드 H. 더글러스의 ‘사회신용’과 피터 반스의 ‘우리의 당연한 권리, 시민 배당’ 등 이 두 권의 책에 대한 서평을 작성한 바가 있습니다. 역시 기본소득과 시민배당에 관한 주제였는데요. 다만 가이 스탠딩의 이 책은 좀 더 자세한 논의와 상세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를 꽤 많이 준비를 했고, 논리들이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도 알기 쉽게 일목요연하고, 번역도 제법 훌륭하다고 여겨집니다. 여러모로 기본소득에 대한 최신의 정보를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기본소득을 중요하고 강조하는 논리로서, “공화주의적 자유”를 먼저 꼽고 있습니다. 이 공화주의적 자유란 “힘있는 사람들의 선택이 다른 이들의 선택을 가로 막지 못하도록 정부가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 점은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논리인데요. 저자는 이에 “우파는 공화주의적 자유의 전통에 대립하는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를 자유에 부여하고, 이것은 노골적인 권위주의 보다 위험한데, 그 이유는 부당하고 조작적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수많은 우파들이 자신들의 자유 보장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대체로 타협이 불가능한 절대주의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허버트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진화론자들과 다윈의 진화론을 과격하게 인식해 도금 시대에 포드와 카네기와 같은 부자들의 더 많은 부를 쌓게 되는 이론적 근거가 되어 왔습니다. 우파의 자유지상주의는 상대적으로 정치경제적 권력에 가깝고 투사할 수 있는 각종의 영향력을 가진 자들의 이데올로기 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일반적인 시민들의 자유는 바로 앞선 ‘공화주의적 자유’이며 이것은 명백하게 힘있는 자들과 노골적인 권력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공리주의적 자유가 더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기본소득 또한 이러한 공리주의적 이론에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은 “현재의 경제 정책과 사회 정이 지탱할 수 없는 불평등과 불의를 낳는다는 인식을 부분적으로 반영한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급진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정치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지위를 보장 받기 위해 기본 소득은 받아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또한 기본 소득을 통한 자신들의 시민적 공통 의식과 공감대를 더욱 함양할 수 있으며, 추측하건대, 이것 자체만으로도 민주주의의 발전 요소가 될 것입니다. 루소와 토크빌은 바로 이러한 인식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많은 사상가들이 이러한 연관성을 지지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이 책의 3장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기본소득이 저자가 단언하는대로 ‘민주화의 도구’라면 우리 시민은 단순하게 도덕적 해이나 과거 레이건이 왜곡한 ‘복지여왕’과 같은 왜곡에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도덕적 해이’는 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의 소위 입안자들과 원인 제공자들이 미국 당국에 의해 아무런 기소도 당하지 않고 유야무야 했던 것으로 이들 금융 엘리트들의 도덕적 해이가 어떠했는지 비교가 가능할 것입니다. 토크빌이 공화주의에 있어서 다수에 의한 폭압을 걱정하고 우려했다면, 이 금융 시스템을 이용해 사회의 절대 다수에 피해를 끼치고 책임을 지지 않는 이 소수의 금융인들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려야 할지는 매우 자명합니다.

저자인 가이 스탠딩도 이들 금융 엘리트들과 이들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있는 부유층들에 대한 예를 들며, 과연 이 보수적 부자들과 이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이 다수의 시민들이 ‘실질적인 이익’을 얻을 기본소득을 거부할 권리가 있을지에 대해서 일관되게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사실 경제 성장이라는 이유로 이 기본소득에 대한 시기상조나 재원 문제가 나오고 있는데요. 스탠딩은 국가의 가처분 소득과 재원 마련에 대한 여러 루트를 소개하면서 최소한의 ‘시민배당’과 같은 원리로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위스의 직접투표와 같은 이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찾기 위한 정치적 실험들도 충분히 가능하고 현재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와 인도, 이란과 같은 개도국들의 사례를 들며 그 기본 효과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유럽의 이민자와 난민 문제로 인한 이 기본소득의 범주 안에 있는 해당 시민들의 규정 문제가 논란이 되어 온 점을 제외하면, 미국과 같은 경우에도 단순한 복지 차원에서의 한계적 지원 말고 기본소득의 제공과 함께 워크페어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투입하면 그 성공 가능성이 더욱 올라갈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결국 시민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확률을 더욱 높이고, 위험하고 어려운 낮은 급여의 일자리에 내쫓기는 문제 등을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충분한 효과를 기본소득이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재원과 관련하여 선결 과제라 볼 수 있는 증세의 문제도 부유층에 대한 금융거래세를 강화하고 세금 탈루 목적으로 벌이고 있는 조세피난처에 자금을 숨기는 등의 불법적인 문제를 해당 정부가 강력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득권과 부유층의 이득을 몸소 방어하고 있는 이 우파들이 정말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신념을 보인다면 다수의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앞선 불법적인 행태에 대해 스스로 먼저 자정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법에 의한 평등과 법에 의한 지배를 공유하고 있다면, 자신들이 민주주의 제도하에 고립되고 불침의 ‘과두제’의 우두머리들이 되지 않겠다는 양심고백이 필요하겠죠. 이러한 점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민주주의적 결사의 자유가 시장의 가치와 자유시장체제를 해칠 수도 있다는 이유로 1980년대부터 사실상 제한되어 왔다는 것을 저자가 끄집어 냄으로써 시민 대다수의 우려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가 비열한 행동을 할 경우 시민들 사이에서 비열함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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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주의 좌파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다윈의 대답 시리즈 2
피터 싱어 지음, 최정규 옮김 / 이음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피터 싱어는 호주 출신으로 세계적인 생태윤리학자이면서 공리주의를 기초로 한 인간의 도덕체계를 정립하여 전반적인 사회 불평등 문제를 다루고 2012년에는 이러한 학문적 연구와 활동을 바탕으로 호주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훈장의 주인공이 된 바가 있습니다. 인간 본성의 이해를 결여한 좌파를 비판한 이 ‘다윈주의 좌파’는 원제인 ‘Darwinian Left : Politics, Evolution and Cooperaton’ 으로 지난 2000년 출판 되었습니다. 국내에는 같은해 출판된 구판이 새롭게 2011년 개정판으로 출간된 것으로 보입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자리를 빌어 한가지 고백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지난날 저는 허버트 스펜서의 ‘개인 대 국가’에 대해 서평을 작성한 바가 있는데요. 피터 싱어의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앞에서 언급해 드린 스펜서의 글의 이해를 돕는 약간의 보론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저 역시 이와 관련하여 약간의 도움을 받았는데요. 일단 이 부분을 밝히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피터 싱어가 쓴 이 책의 취지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스펜서를 비롯한 우파적 사회진화론자들에 의해 사회 도태와 더 많은 경쟁이 선이라는 가치 체계로 당시의 거대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으나 반대로 좌파는 인간 본성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임에도 이 본성이 변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이것과 연관이 높은 다윈주의를 배척하고, ‘인간의 사회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바로 좌파의 모든 것’인데 이념과 행동주의와 관련하여 동시에 실패해 왔다는 것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윈주의를 좌파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그 이론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피터 싱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요체입니다. 즉, “인간 본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다윈주의적 사고가 좌파로부터 배척당한 게 아닌가” 하는 저자의 추측도 담겨져 있습니다.

일찍이 다윈주의에 대해 많은 사상가들이 사회적 약자를 도태시키고 마땅히 강자가 그 승리를 취한다는 관점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될 수 있음을 예측한 바가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받아들인 사람이 허버트 스펜서입니다. 제가 그의 논저 ‘개인 대 국가’에서 다뤘던 것처럼 전반적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도태를 광범위하게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거대한 기업가들과 부유층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정당화 시키는 논리로서 각광을 받아 왔고, 오늘날에도 그런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자들과 우파들에 의해 스펜서는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의 좌파는 이기적 인간의 본성을 포함한 본성 자체의 아주 치밀하고 철저한 이해를 선행해야 한다고 싱어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점이 선결되어야 다음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고 밝힙니다. 사실 다른 측면으로 본다면 ‘이 우파들이 다윈의 논의를 자기들 것으로 만들 동안 너희 좌파들은 대체 무엇을 했느냐’로 바꿔 생각해 볼수도 있을텐데요. 앞서 제가 요약한 바대로 좌파는 사람들의 모든 고통을 절감하고 덜어낼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것은 버트란드 러셀이 밝힌 ‘진보주의 및 좌파의 선명성’으로 어떻게 보면 원초적인 양심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일전에 다른 책의 서평을 통해 ‘신자유주의자들은 타인의 고통에 별반 관심이 없다’는 인식을 깨우친 바가 있습니다. 많은 우파들의 가치 체계가 경쟁과 개인들의 이기심 및 이익 추구가 선이라는 관점하에 불평등과 사회 하위층들의 삶의 고단함 등을 애써 무시한 바가 있고, 전반적으로 이러한 우파들의 이러한 가치관념적 기조가 1970년대 이후 루즈벨트와 케인즈의 사회 협력적 정책이 뒤안길로 사라지며 신자유주의가 대세가 되면서 강력한 사회 가치적 주장이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제 다시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로 관심을 돌릴때다’와 같은 주장들이 어이없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피터 싱어는 “사회적 지위상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인간 사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라고 전제하고, 이것은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항상 있어 왔다고 주장합니다. 과거 프랑스 혁명을 통한 나폴레옹의 짧은 신분 개혁이나 귀족 제도를 일소한 지금에도 항상 이것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계급 위상이 등장했고 이점은 앞으로도 증명될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주장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회 계급적 인식의 날것’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바로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이것을 최소화 시키고 좀 더 다수의 이익에 수렴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바로 좌파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강력한 원리로서 작동하는 고착화한 체계를 견제하는 좌파 스스로의 ‘말하고 시비거는 양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주의적 관점에 너무 경도되어 있다는 점도 명백한 패착이라고 볼 수 있겠죠. 더욱이 저자는 시장의 경쟁에 대한 관점에서도 다수를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공리주의에 입각해서 보더라도 중상층 계급에서의 부의 증가가 극빈층에게 돌아갈 삶의 처참함을 보상할 수 있을 정도로 큰지 의심스럽다”라고 판단하며 글의 후반인 협력과 협조의 문제에서도 “부와 권력에서의 불평등이 커지면 그만큼 상호 부조를 할 유인이 없어지게 된다”면서 현실적인 측면의 인식과 고려를 하면서도 반대의 대안을 위한 필요성을 모색하는 등의 노력을 이 글을 통해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또 “약자, 빈자 그리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섬으로써 좌파가 가졌던 전통적 가치를 (다시금) 옹호해야 하며, 다만 어떤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이들에게 혜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곰곰이 연구해야만 한다”고 당위성과 그 노력을 좌파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전체적으로 좌파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거품을 뺀 좌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유토피아적 사고를 버리고 실제로 어떤 것이 성취 가능한지에 대한 냉철한 현실적 비전으로 대체할 것”으로 결론내고 있습니다. 피터 싱어의 이 말은 진보주의와 좌파에 있는 많은 이들이 깊게 새겨야 하는 것으로 저는 느껴졌습니다.

오늘날까지 민주주의는 자유 시장경제라는 측면의 동반자를 데리고 발전해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양가적 측면에서 이 자유 시장경제적 입장 또한 어두운 면을 초래해 왔는데요. 민주주의의 균형과 견제의 원리로서 노골적인 정치 투쟁이 아니라면 정치 세력의 좌우파의 균형적인 사회 이론적 경합이 사실상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좌파가 시대착오적인 주장으로 스스로 당면한 역할론을 걷어참으로써 전세계적인 민주주의 체제가 오로지 ‘자유’의 날개 하나 만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죠. 이제 다시 ‘평등’의 문제를 되살리고, 이러한 역할을 좌파가 자임함으로 많은 시민의 지지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피터 싱어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쓸만한 이론적 체계를 이 책을 통해 좌파들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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