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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 ㅣ Trans & Cross 2
콜린 크라우치 지음, 유강은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영국 워릭 대학의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저명한 사회학자로 알려진 콜린 크라우치의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를 일독했습니다. 크라우치는 크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포스트민주주의로 유명한데요. 얼마전에 서평을 쓴 ‘포스트 민주주의’를 읽고 나서 신자유주의를 다룬 이 책을 너무나 구하고 싶었는데요. 마침 절판된 상태라 개인 중고 거래를 제외하면 딱히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전에 운좋게 제 손에 들어왔고, 천천히 정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원제는 The Stange Non-Death of Neoliberalism 이며, 지난 2011년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2년 소개되었는데요. 앞서 언급해드렸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시중에서 책을 구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모쪼록 재간행이 이뤄지길 빌어 봅니다.
우선 크라우치의의 이 책이 관통하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은 “민주주의는 측정 가능한 단일 지표를 제공하는 이윤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과 “신자유주의는 기업과 국가의 긴밀한 관계를 전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의 정치경제적 유산에서 놀라울 정도로 이탈한다”는 설명입니다. 후자의 설명과 관련하여 이 책 1장에서 저자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는데요. 사실상 2차대전 당시 자유주의가 국가와 대결하던 배경과 과정이 현재의 신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르며, 폭넓은 시민 자유가 좌파와 연계되어 있다면, 신자유주의는 기업과 자유 시장 체제에서 광범위한 이익을 얻는 이들의 가치 체계로 진화 내지는 왜곡되어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이와 관련된 많은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대공황 시기의 루즈벨트 정부의 “무산자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가” 많은 자본가와 기업가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 일반적으로 합리적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며 이러한 경제적인 관념이 점차 견제 없는 지배 이념이 되어왔던 것이 루즈벨트와 케인즈를 관으로 내몰면서 초래했던 그 과정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못함은 자명한 것이고, 전통적으로 공리주의적 배경을 갖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사회사상적 배경이 신자유주의의 이론으로 배격당하고 심지어는 공리주의적 기준을 철지난 계몽주의로 공격하는 일까지 등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와 자유 시장 문제를 근본적인 측면에서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즉 2장부터 4장까지가 이러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시장의 특징과 많은 경제학자들이 입을 닫고 있는 시장의 실패에 대해, 그리고 이런 자유 시장 체제에 대한 결과론이 모든 시장 참여자들의 이익이 아니라 ‘거대 기업의 이익’으로 나타났다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의 융합에 대한 시도와 가능성을 매우 비판하고 있고, “시장에서 거대 기업은 자신들만 혜택을 누리게 만들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인식과 더불어 시장의 진입 장벽을 따로 논하지 않더라도 여기에 집중하는 참여자들이 매번 합리적일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기조와 입장을 같이하고 뒤이어 이어진 미국 행정부의 경제적 정책의 이론적 기반이 된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시카고대 경제학파의 주장과 사상에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점이 지배하는 정치화한 경제의 정치적 함의를 전혀 다루지 못한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요. 밀턴 프리드먼의 다음과 같은 말도 그 한계가 명백합니다. “기업에게는 주주 가치 극대화 이외는 어떠한 의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사회적 목표를 결정할 권리도 전혀 없다”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애초에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실행되기 전에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이러한 신사조가 등장하고 기업이 점차 힘을 갖게 될 때 ‘정치적 다원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중도 좌파 및 진보 세력의 궤멸이 정치적 다원주의라는 이상을 유감스럽게도 뒷받침하지 못하고 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도 이 신자유주의적 기조는 더욱 강화되어 왔습니다. 글 초입에 신자유주의가 쇠퇴하기는 커녕 더 강화되는 것으로 결론이 난 연유에는 “고삐풀린 경쟁이 금융 시장 자체를 깎아 먹는 상황임에도” 대마불사적 입장의 ‘이익은 자신들에게, 손해는 사회에게 맡기는’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사회와 시민을 담보로 잡는 무참한 사익추구와 금융인들의 광범위한 도덕적 해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시장이 어떠헌 규제나 견제 장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으나, 국가와 사회를 담보로 잡는 이 이익화에 대한 어떠한 규제적 장치가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건전한 경제 체계에도 일절 도움이 안되는 이기심이겠죠. 마찬가지로 제가 몇번이나 언급했듯이, 2008년 이후에 정권을 잡은 오바마 행정부가 금융 위기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단 한 명도 기소하지 않은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 시장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기존의 ‘국가-시장-기업’ 의 3자 관계에서 새롭게 ‘시민사회’를 결합시켜 4자 관계로 확대시켜야 하며 이와 관련해 7장에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찍이 ‘급진적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학자들이 시민들의 역할과 다양한 토론과 논쟁이 수반된 좀 더 강화된 시민사회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집단 지성과 관련해서도, 또한 광범위한 정치 참여가 용이해진 오늘날의 SNS과 같은 소셜미디어의 발달을 보더라도 이러한 명제가 쉽게 도달할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만 점차 자본주의적 소비 지상주의에 노출되고 만연된 정치적 불신에 직면한 시민들이 과연 옳은 과정으로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쉽게 단언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회경제적 기득권들과 명목상은 이를 지지하는 척 하는 우파 정치인들에 의해 ‘시민-민주주의’의 중요한 도식이 계속 옅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도 간혹 엿볼 수 있지만 앞으로도 신자유주의가 중요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고 이를 견제할 건전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거대한 경제 불평등의 시기에 시민이 자신들이 손수 맡아서 해야 될 정치적 책임을 과연 마땅히 해낼 수 있을지 실로 많은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라우치의 이 책은 다시금 이러한 상황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새삼 곰곰히 생각해보게 하는 유익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밝히지만 어서 빨리 재출간이 이뤄지길 간절히 빌어 봅니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가 일종의 희생양으로서 시장에 결합된다 혹은 결합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