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외교는 도덕적인가 - 루스벨트부터 트럼프까지
조지프 나이 지음, 황재호 옮김 / 명인문화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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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새뮤얼 나이 주니어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고 있는 국제정치학자입니다. 그는 현실 정치와 이론 간에 거의 치우치지 않은 많은 경험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학자로서나 혹은 정치인으로서 이러한 균형적인 경험은 유익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프린스턴을 거쳐, 명예로운 로즈 장학금으로 옥스포드에서 수학하고 이후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게 됩니다. 나이는 1964년부터 하버드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여 1985년부터 1990년까지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국제 문제 센터의 이사로 경력을 쌓게 됩니다. 뒤이어 1994년부터 1995년까지 당시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제 안보 담당 차관보를 역임하고, 이후 국부부의 공로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헨리 키신저와 달리 국제정치에서 자유주의적인 해결 방안을 추구하는 학자이자 관료로 알려져 있는데요. 특히, 이 글에서도 간략하게 나오지만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세계에 확장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대외 기조가 자유주의적 정책하에서 국제 무대에서 합의와 신뢰의 구축이라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 다수의 현실주의자들이 공격하는 자유주의적 정책의 성과물이라고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행정부의 도덕적 원칙을 분석해보는 가운데, 조지 W. 부시 시절의 공격적 현실주의적 입장을 천명했던 네오콘의 부류들과 확실히 상반되는 견해를 그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비판과 이러한 인식의 지점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그의 노작을 통해 전공자들과 일반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 보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이의 이 글이 꽤 의미있는 연구물이라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Do Morals Matter? : President and Foreign Policy from FDR to Trump"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최근에 번역된 이 책과 관련해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제본된 책 중간에 3칸의 흑색 표시가 전 페이지에 걸쳐 너무 도드라지게 표시되어 있어서 가편집된 상태의 미완성본을 돈주고 구매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인쇄소의 문제로 추측되는데요. 구매한 입장에서는 다소 불쾌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자인 조지프 나이는 책의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 국제 외교 정책에서의 도덕주의와 관련해, "도덕적 외교 정책은 의도 대 결과의 문제가 아니고, 유럽 계몽주의 전통의 임마누엘 칸트의 입을 빌어, "기본적인 가치들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설사 자유주의적 순진함으로 매도된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도덕적 의무는 인식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외교 정책을 단순히 다른 국가들이 최대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정책과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 글의 7장인 조지 H. W. 부시와 관련된 인식에서. 냉전 시기에 소련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세력균형 상황이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자만심을 제어할 수 있었다"고 언급되는데요. 이처럼 이는 초강대국인 미국의 외교에 있어서 적절한 세력 균형이 자신들의 국익에 부합되었다는 의견입니다. 더욱이 미소 양국 간에 보유한 핵무기로 인한 상호 확증 파괴 (MAD) 가능성이 역설적으로 40여년간의 번영을 이끌어 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전후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 부터 최근의 트럼프의 백악관까지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는 CIA와 특수군을 동원해 여러 국가들의 정치에 개입한 것"은 암울한 역사의 한 단락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결국 어느 정도는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적 기조가 서로 경직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최종 결정권자(이를테면 대통령)의 면밀하고 예민한 감각이 있어야만 할 텐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조지프 나이는 상황 지능과 감성 지능 등을 이용하여, 각 시기의 대통령들의 공과를 꽤 정밀한 객관성으로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우선 나이의 이 글에서 다른 여타 글들과 비교해, 크게 고유성을 갖고 있는 분석이라면, 프랭클린 루스벨트부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까지 각 대통령의 임기내 정책들과 평가에 대해 나름의 '윤리적 성적표'를 제시하고 부분이었습니다. 대표적인 현실주의자들인 조지 케넌과 미어셰이머 혹은 키신저 등과는 저자인 나이와는 조금 구별되는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하지만 나이가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자유주의적 이상주의를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의 국익과 관련해서는 선후의 판단을 들어 무리가 되더라도 미국에게 유익한 결과물을 안긴 정책들에 대해선 긍정하고 있고, 지미 카터와 같은 경우 진솔하고 도덕적인 대통령의 품성과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당시 국제 외교의 여러 이슈들에 있어서 그저 단순히 순진한 측면만 내보인 카터를 어느 정도 비판하면서 논점에 대한 균형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할 지점은 많은 현실주의자들이 공격해 마지않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의 도덕적 원칙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대체로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최소한의 도덕적 원칙을 갖고 있어야만 미국의 정책적 결정에 있어 일종의 국제적 명분을 얻을 수 있다고 저자는 첨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과거 빌 클린턴 대통령의 보스니아 사태와 소말리아에 대한 외교적 무능에 있어 당시 유럽 국가들이 적잖게 그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반증으로 제시할 수도 있는데요. 자유시장이나 민주주의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일정한 원칙을 강조하는 미국의 지도층과 향유된 권력이 이것을 시시때때로 어떠한 원칙 없이 즉흥적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국제 여론과 미국의 동맹국들이 이를 긍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국제 제도와 그러한 원칙들을 조율하고 결정한 미국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비대칭 동맹들이 미국의 정책에 일희일비하고 심지어는 냉전이 시작된 시기에 미국이 과거의 고립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후에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서 당시 한국 전쟁과 같은 공산주의 세력의 도발에 전혀 망설임 없이 최대한 시급하게 개입하게 되었던 진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국 외교사에 있어 가장 중대한 시점으로 여겨지는 베트남 전(戰) 발발과 미국의 참전과 관련해, 케네디 행정부 부터 존슨 그리고 닉슨 시기까지 후에 제한된 국력을 투사할 수밖에 없었던 냉전시기, 더 빠른 베트남 전쟁에서의 탈출이 그만큼 지연된 것은 저자가 판단하기에도 아쉬운 부분으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닉슨 행정부 시기, 헨리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와의 기적적인 회담과 당시 중공에 대한 미국의 대화 의지가 마찬가지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냉전 종식과 꽤 설득력 있게 양자 간의 연계가 글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키신저보다 닉슨이 중공의 개방을 먼저 포착했다는 것은 그만큼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그가 비도덕적인 공작 정치로 자신의 임기를 도중에 끝낼때까지 닉슨은 공산권에 대한 명확한 의지를 갖고 있던 대통령이었습니다. 이처럼 각기 백악관의 주인들에게선 그들의 두드러진 개성 만큼이나 참모를 대하는 태도, 각료에 대한 인선, 국민을 재교육시키는 태도라든지, 여론에 대한 입장 등 선출되고 나서의 통치 스타일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나이는 대통령들에 대한 사생활적인 부분에서부터 출생과 가족 관계의 분석으로 이 행정부의 수반이 어떠한 도덕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박한 시각이 글 전반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이 부분은 이 글의 특징적인 부분이기도 한데요.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당시 존슨 대통령의 비도덕적인 통킹만 사건으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개입은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었습니다. 고립과 개입이라는 미국 외교사의 주요한 국제 정치적 수단으로 제시되고 있는 '과거 윌슨 대통령의 자유주의'와 관련해서도, 이 베트남 전쟁의 성격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갖고 있습니다. 존슨 자신이 주창하는 미국의 '위대한 사회'를 위해 이 베트남 전쟁을 이용했다는 것은 분명 주지된 사실이기도 한데요. 처음에 반대에 입장에 있던 그가 도덕적 원칙을 저버리면서까지 앞선 정치적 술수에 몰입한 것은 그와 미국에 있어 불행한 일이기도 했는데요.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 내의 전반적인 반전 여론을 나이는 거의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1950년대 초반의 '매카시즘의 광풍'과도 같은 심각한 국론 분열을 야기시켰습니다. 적절한 예시인지는 모르겠으나 '레이건이 사뭇 중요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카터는 레이건의 케이스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고 분석하고, 물론 존슨이 카터와는 다른 류의 대통령이었지만 지도자가 최소한의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황이거나, 견실한 참모들의 조언을 제대로 듣지도 않는 경우에서 어떠한 결과가 초래할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가정이지만 베트남 전쟁에서의 보다 이른 탈출이 시도되었다면 이후 냉전의 양상도 그만큼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로널드 레이건과 관련해서도 이 글에서 몇가지 흥미로운 부분이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우선 심각한 정치적 스캔들이었던 이란-콘트라 사건에 있어서 그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닉슨처럼 마땅한 정치적 후과를 받지 않은 것은 일종의 불공평한 일이기도 할텐데요. 이 이란-콘트라 사건을 그의 거대한 업적에 비해 눈곱만큼도 안되는 과오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국내외에 아직도 많기 때문에 이러한 대통령의 비도덕적인 개입을 그저 과업으로 넘어가려는 행태라고 생각됩니다.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역사적으로 큰 기여를 한 로널드 레이건의 업적이야 대단한 것이지만, 콘트라 사건에 연루된 모든 자들에게 사법적 처벌을 회피하게 하는 사면권을 임기 말에 쥐어준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레이건과 관련된 글의 6장에서 레이건이 이 콘트라 사건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을 동의했다고 나이가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 콘트라 사건은 레이건 행정부의 거의 기밀 사항이 아니었던가요. 이 부분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냉전의 종식과 관련해 레이건 특유의 공갈과도 같은 압박으로 소련을 화해의 장으로 나오게 만들고, 대 소련 정책에 대한 그의 실용주의적인 해법은 충분히 긍정적인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칠레와 그레나다, 파나마 등에 불법적으로 개입하고 동티모르를 침략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을 지지한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그러한 외교적 맥락들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미국의 거대한 선명성인 선(善)의 정치와는 사뭇 맞지 않아 보이는데요. 더군다나 조지 H. W. 부시 시절의 파나마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생포하기 위해 주권 국가에 불법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한 당시 행정부의 결정에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인정하는 나이의 진술은 역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미국처럼 사활적 이익을 중요시하는 국가에게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조금 철지난 논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도덕적 관념을 지닌 대통령이 무능한 정책과 무의미한 결단(이를테면 지미 카터 행정부)을 갖고 있었다는 식의 이분법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일 텐데요. 사실 장황하게 글을 썼습니다만, 외교 무대에서 일견 전세계의 일극 국가라 할지라도 도덕적 명분과 본보기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미국과 같은 비대칭 동맹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국가는 자신들의 국익과 다수 동맹들에게 있어서 최소한의 명분을 갖고 국제 체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물론 외교 자체가 독립된 고유한 권리로서 미국이 이를 이끌어 나간다고 공언할 수는 없지만 세계 민주주의의 맏형으로서 정치적 결정과 관련해, 최소한의 도덕적 함의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주의와 자유주의간에 모두가 동의하는 공통된 인식을 서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그것은 민주주의 혹은 인권과 합의 정신 및 국제적 제도에 대한 신뢰 등을 말합니다.

과거 존 코널리 재무장관은 동맹국들에게 "달러는 우리의 통화이지만, 곧 너희의 문제"라고 발언한 바가 있습니다. 일개 재무장관의 오만함은 둘째치더라도, 그가 언급하는 것은 당면한 국제적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은 기대를 안고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의 실패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혹자는 오바마를 가리켜 "지미 카터보다도 무능한 인사"라고 혹평을 하기도 합니다. 임기 초기에 국민들과 주변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발언을 많이 했던 오바마는 그래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도 많이 비교 되기도 하였습니다. 중동에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그의 임기에서 리비아에 대한 신중한 개입과 자신이 주도하는 미국의 국제 정치가 과연 어떻게 외부에 비쳐질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이 중동의 민주화에 국제사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견 그의 심사숙고가 꽤 신중하게 보였습니다만 중동에서의 민주화 혁명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의 정치적 한계로 보여집니다. 나이의 의견대로 오바마의 독트린 자체가 "멍청한 행동은 하지마라"라고 요약된다면, 이후 그의 무능으로 인해 초래된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탄생은 미국 국내의 정치 상황에서 매우 극심한 정치 불신을 야기시킨 결과물이기도 한데요. 너무나 많은 것을 고려한 나머지 필요한 결정을 적절한 시기에 내리지 못한 그의 우유부단함은 경제적 문제에서 대부분 실패를 맛본 지미 카터와 유사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미국의 평론가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기 자체를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태도 자체가 실로 무의미한 일이다. 그가 평범한 정치인도 아닐 뿐더러, 그의 가슴에 무슨 대의나 선에 대한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정치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언급한 내용이 문득 기억이 났습니다. 저자인 나이의 언급대로 트럼프는 스스로 정치나 국제 외교에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전혀 배울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야말로 처참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 트럼프 행정부의 관료나 측근들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특출나는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짐작대로 자신의 이권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 자신의 딸과 사위 등을 통해 이를 증명시킨 바가 있습니다. 트럼프는 왜곡된 포퓰리즘 정치인이자, 신자유주의에 매우 걸맞는 사익 추구의 완성형 인간으로 당시 미국 정치가 도덕적인 가치에 있어, 엘리트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몰락한 상황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한 국가의 무모한 일방주의 만큼이나 국내 정치에 있어 만연된 개인주의와 사익 추구는 거의 도덕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글 초입에 강조되는 도덕적 원칙과 관련해, 현재 미국은 과도한 자유주의적 담론 등으로 인해 시장 자유를 옹호하는 신자유주의를 제외한다면 대체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담론이 전무한 것은 명백합니다. 그래서 저자인 나이가 "미국 국민들에게는 오로지 신자유주의 뿐이다"라고 언급했던 것인데요. 사실 경제적 자유와 이를 바탕으로 한 신자유주의의 득세가 설사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독성을 제거할 시간은 그들에게 충분히 주어졌다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에 대한 필요한 의지는 거의 전무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과거 네오콘과 신자유주의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미국의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 강요되어 온 그러한 국제 외교 전반이 타협과 원만한 합의를 실종하고 그것을 가속화시키기 위한 국방력 향상과 방산 업체의 이익 증대까지 이런 주도적인 메커니즘이 40년 이상 미국 사회에서 강화된 것은 익히 주지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전반적인 국제 체제가 세계화와 그에 따른 시장 자유를 위해 그동안 산파의 역할을 해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이렇게 고착화된 환경에서 나이는 도덕주의적이고 윤리적인 원칙의 실효성을 앞으로 있을 중국과의 대결과 혹여 있을 국제 무대의 무질서를 제시하며 어쩌면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힘을 외교에 투사할 수 있는 그러한 정책과 수단들에 있어 미국이 필요에 따라 국제 규범을 어기고 일방적인 군사력을 투입하고 주권 국가에 개입한 역사들을 나이와 같은 정치 이론가들이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그의 아이디어는 거의 유명무실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정책적 결과를 세계의 국가들에게 알리면서 미국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 도덕적 원칙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면 차라리 한스 모겐소와 같은 철저한 현실주의 논법을 더 연구하는 것이 미국에게 더 유용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에게 도덕적 원칙은 인간성을 규정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권력의 속성에 있어서도 더 나아가 더 많은 국가들의 원리 원칙에 있어서도 이 도덕은 애써 무시받을 정도로 쓸모 없는 것은 아닐겁니다. 이 부분은 역시 나이도 거듭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인 나이는 좀 더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도덕주의적 원칙을 새롭게 제시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이 글이 미국 외교사의 한 영역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였습니다만 더불어 그만큼 한계도 이처럼 명확하다고 생각되는데요.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게 도덕이 국제정치와 외교에서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유명무실한 가정으로 전락한다면 이것을 초래한 노골적인 힘의 투사를 현실적으로 뒷받침하는 국방력과 정보력 등으로 화살을 돌려야 할까요. 자신들이 보유한 힘 앞에서 절제를 보이지 않고 쉽게 가려고 하는 백악관 수장의 개인적 특성으로 치부하기에는 미국이 가진 힘이 정말 무시무시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무정부 상황의 국제정치를 과연 민주주의적 합의로 나아가는 것을 미국이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먼저 결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민주주의와 도덕은 서로 긴밀히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오바마 행정부를 다룬 글의 8장에서 나이는 "국제금융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그의 조치는 세계적인 공황과 불황을 막은 결정적인 행동이었지만, 실업률이 증가하는 가운데에서 은행들을 살린 것은 대중들의 불만을 야기했다"고 진술하고 있었는데요. 기존의 국제금융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 없이 그저 파급의 측면에서 미온에 방지한 오바마의 결정을 막연하게 존중하며, 한편으론 대중의 불만이라는 언급으로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모양새가 나이의 여러 분석과 평가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었습니다. 오바마가 월 스트리트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국제금융체제가 별반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읽혀져 저는 뭔가 안타까웠는데요. 그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노후 연금 놀이를 했던 CEO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책임이 있는 자들, 어느 누구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을 비평하나 없이 그저 진술로 때우는 것은 심히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대중들이 왜, 어떤 부분에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최소한의 앞뒤 맥락 정도는 삽입해야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가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과테말라, 이란, 그리고 일부 정부들이 전복에 개입했던 외교적 결정들은 윤리적 정당성에 의문을 남겼다

마찬가지로,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1960년대 이후 전개되어온 깊은 인종적, 이념적, 문화적 분열의 결과가 반영된 것이다

외교정책에 있어 진정한 선택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국의 이익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도덕성이 외교정책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극단적인 현실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미국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정책을 생각할 때, 미국의 대통령들은 선한 가치를 표방하는 것과 함께 이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세계정치의 제도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오늘날 세계정부는 존재하지 않지만, 세계 통치를 위한 어느 정도의 세계 거버넌스 기반이 구축된 상태이나, 국제사회에서의 무정부 상태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강압과 강제력의 수준은 지역적 선택과 권리를 제한하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아이젠하워는 CIA 국장 덜레스가 여러 국가에서 암살 시도를 포함한 은밀한 행동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양극체계의 냉전에서 가능한 한 공산주의 진전을 막아야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플로리다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쿠바에 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베를린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존슨은 ‘위대한 사회‘의 법제화가 자신의 유산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이것 때문에 존슨은 의도적으로 국민들을 기만하고, 전쟁에 대해서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코널리는 동맹국들에게 "달러는 우리의 통화이지만, 곧 너희의 문제"라는 유명한 발언을 했다

레이건은 정말로 냉전을 끝냈는가? 그의 언변과 소련을 압박한 군비 증강은 부분적으로 그 결과에 기여했지만, 레이건의 진정한 기술은 공격적인 수사를 실제적인 협상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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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4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터라이프 2021-09-18 21:40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석 연휴 끝나고 한번 연락 드리겠습니다.
 
분별없는 열정 - 20세기 정치 참여 지식인들의 초상, 개정증보판
마크 릴라 지음, 서유경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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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마크 릴라는 미시간 대학을 졸업하고 후에 하버드 케네디 스쿨을 다니는 동안 저널리즘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후 공공 정책 석사를 수여받고, 1990년에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게 됩니다. 그는 근래 미국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정치학자로 종종 대중매체에도 등장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요. 특히 마크 릴라는 서구 유럽의 계몽주의 연구에 대한 미국 내 권위자이며 동시에 극단주의 정치에 대해 냉엄한 비판을 하고 있는 학자기이도 합니다. 그는 2007년부터 컬럼비아 대학의 인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저명한 언론사들에 꾸준히 자신의 글을 기고하고 있고 철학과 정치학을 동시에 연구했던 지식인으로서 미국 정치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정치적 연구 및 철학적 담론을 분석하는 데 정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원제, "The Reckless Mind : Intellectuals in Politics"로 지난 200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2년 초도 번역을 거쳐 2018년에 개정판을 다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독한 판은 2018년 9월에 나온 개정판입니다.

마크 릴라의 이 글은 뉴욕 서평과 타임스 문학 부록에 수록된 글들을 한데 모아 출간한 것이기도 한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사상적 인물들의 삶의 자취는 1920년부터 파시즘과 그로인한 세계 제2차대전의 발발까지, 당시 근대주의의 극심한 침몰과 사회에 만연된 회의주의와 또한 그런 인간 정신의 종말을 현대에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저 사상가들의 내밀한 인생 역정과 소위 '사상적 휩쓸림'을 통해 객관적으로 분석해 낸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과거 역사의 잔인한 퇴보라 할 수 있는 전체주의와 관련해, 각자가 다른 행보를 보이고 극명한 영향의 일환으로 각기 상이한 해석과 결과를 보이게 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슈미트, 극단적인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발터 벤야민의 비극적 종말, 유쾌한 헤겔주의자였던 프랑스의 이방인 알렉상드르 코제프, 니체주의의 한계에 직면했다고 봐야하는 미셸 푸코 그리고 끝내는 신자유주의까지 해체하려고 들었던 자크 데리다까지 사회학이나 정치학 혹은 철학을 통해 독자들이 한번쯤은 그 이름과 명성을 들어봤을 법한 인물들을 마크 릴라는 그 혼란스런 시대적 과오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창궐한 파시즘의 시대'에 몰입하여 과연 일개 개인으로서 어떠한 삶으로 살았을지 호기심을 곁들이며 상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보면 유럽 대부분이 인간성 말살의 시대에 놓여있었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야스퍼스 그리고 한나 아렌트를 다룬 1장과 히틀러의 나치즘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카를 슈미트의 2장과 삶의 압박과 반대로 깊은 감수성을 가진 발터 벤야민의 비극을 다룬 3장 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웠는데요. '이방인' 알렉상드르 코제프를 다룬 4장은 레오 스트라우스 때문에 좀 더 집중했고 5장인 푸코와 다음 6장인 데리다는 큰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평이하게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철학과 정치를 엄밀히 구분하고자 했던 마르틴 하이데거는 익히 알려진 대로 '반유대주의자'였습니다. 어쩌면 이 사실을 처음 접하는 분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제자였던 한나 아렌트와의 짧은 사랑(초기의 서신 교환의 내용을 보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죠)과 스스로 고유하게 사유한 사상의 성과 측면에서 하이데거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고 느꼈던 카를 야스퍼스가 진심을 다해 평생동안 그와 교류를 해왔던 행적들이 절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저는 하이데거에 대한 야스퍼스의 글들을 통해, 인간 하이데거가 다소 교활하다고 느끼게 되었는데요. 나치에 대한 부역과 관련해 말을 바꾼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치에 대한 스스로의 발언이 후에도 명확하지 않다는 점은 양심에 위반되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회피하려는 의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상을 적잖이 받았습니다. 물론 2장의 주인공이랄 할 수 있는 카를 슈미트에 비하면 하이데거의 이런 태도는 다소 애교로 느껴질만 한데요. 그럼에도 마르틴 하이데거는 당시 철학계에서 형이상학 전반에 분명한 족적을 남긴 대가이며, 근현대의 철학에서 그를 빼놓고서는 시대와 학문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는 한나 아렌트가 스스로 겸허한 '정치 이론가'로 규명하는데 있어 하이데거의 손꼽히는 철학적 업적들이 존재했기에 그녀가 하이데거를 단순한 매료를 넘어 존경했던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범인들과 평범한 여자의 입장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아렌트와 같은 태도는 보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사상적 대가들의 학문적인 성취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소수의 수용자라는 입장에서 하이데거와 아렌트가 유사한 형태가 아닌가 짐작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단순히 이분법이나 선악의 문제가 아닌 '파시즘의 부역'과 관련해 하이데거의 꾸준한 회피 시도는 그가 자신의 평판에 있어서 교활하다고 밖에 볼 수 없었는데요. 마땅한 학문적 성취와 반사회적인 인간으로서의 혹은 정치적인 행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는 통합을 해서 살펴보던 따로 구분을 해보던 간에 확실히 어려운 문제임은 분명합니다.

이에 반해, 카를 슈미트는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자유주의를 혐오하면서, 그 이면에 자유주의에 전도된 자본주의가 인간 사회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을 특별히 전제하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그는 여러 사람에 의해 자신의 결단주의가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대략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치에 부역하는 것을 정당화 시킵니다. 앞선 하이데거가 성공적인 나치의 이론을 설파하는 이론가로서 잠정적으로 실패했다고 봐야한다면 여기 카를 슈미트는 완전히 반대의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히틀러의 정치적 예외 현상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이를 엄정한 결단으로 봤던 슈미트는 생애 말년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저자는 "2차대전이 끝난 뒤 슈미트는 비굴한 인생을 살았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자기연민으로 가득한 비망록에 개인적인 울분을 토로했다"고 덧붙이고 있었는데요. 슈미트의 사상을 옹호했던 레오 스트라우스와 "대화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독일인"이라고 밝혔던 알렉상드르 코제프를 제외한다면 그의 생애 말년은 외로운 섬과도 같았다 볼 수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좌파와 우파, 모두에 의해 그의 사상이 주목받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양쪽의 적극적인 연구와 인용은 60년전 전까지만 해도 다소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 다수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엄중한 결단이 때론 필요할 수 있다는 그의 핵심적인 주장들이 지금의 시대에는 상당히 거부감이 있는 논법임에도 혁명의 준하는 어떠한 심각한 비상 상황을 설정해 해석하고, 자유주의의 전반적인 위기가 도래할 시에 그의 이론들을 되짚어 나가며, 민주주의의 나아갈 방향을 역설적으로 제시받을 수 있다는 부분은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저는 자본주의의 오판을 경고하는 데 있어도 카를 슈미트의 글이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방만한 개인주의를 배경으로 오늘날 비판없는 자본주의의 융성이 바로 슈미트의 일침을 가할 지점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우려스러운 부분은 극단주의 정치의 시발점인 극우주의자들이 민주주의 토대를 '결단주의'적으로 해체하기 위해 이론적인 측면에서 슈미트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이론의 오용이라고 해야할까요. 아니면 해석의 문제라고 해야할까요.

어린 시절, 한나 아렌트 짧은 글을 통해 잠시 발터 벤야민의 비극적인 종말을 접했던 저는 다시금 마크 릴라의 글을 보며, 벤야민의 행적에 거듭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벤야민이 영국에 있던 전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과거 빈곤했던 그가 창피를 무릅쓰고 전처의 하숙집에 머물렀음에도 왜 영국으로 오라는 재차 권유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지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러한 상황은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개인의 불행을 넘어 역사의 참혹함이라고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들때 여러모로 후원을 했던 아도르노에 대해 그 호의는 충분히 고마운 부분이지만, 학문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복잡한 관계였던 두 사람의 행적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 복잡한 심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스스로가 학문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충돌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철회하거나 절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양심의 문제를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있어 어려운 문제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애인을 만나러 간 모스크바에 만연된 스탈린주의를 그토록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던 그가 시대의 대안으로 받아들이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라는 판단이 듭니다. 이미 자유와 역사의 진보라는 대안에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명확하게 밝혀진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끝으로, 20세기에 등장했던 이데올로기들이 개인의 삶과 그 개인들의 의지조차도 무시하고 강요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정치와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충분히 분석되고 비판되어야 하는 것이 일종의 당위라고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면 개인들의 평범한 삶을 얼마나 충분히 보장할 수 있겠느냐가 정치의 선결 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대의를 갖고 있지 않아도 자유롭게 또한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이 국가와 제도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을 망각한 슈미트의 '적과 아'의 개념은 마찬가지로 히틀러에 의해 전 유럽을 지옥으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멀쩡한 얼굴로 웹상에서 '반유대주의'를 외치는 자들도 이와 비슷한 사고라고 여겨지느데요. '무지의 죄'는 절대로 처벌되어선 안된다는 관념을 차치하더라도 저자인 마크 릴라가 언급하는 지난 세기 동안의 '지식인의 책임'이 무의미한 용어가 되었다고 진술하는 것에 지금의 현실과 당시의 역사가 비극적으로 맞물려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등장하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수준 낮은 지식인들을 그렇게 경멸했던 것일까요. 고차원적인 지식과 사유를 만들어낸다고 믿는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책무는 별로 관심이 없는 시대는 과연 어떻게 귀결될지 몹시 궁금해지는 저녁입니다.



-본문 37페이지에 대괄호 하나가 홀로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47페이지에 띄어쓰기가 잘못된 문장이 있었습니다. 개정판을 내면서 이렇게 수정을 안한건 조금 믿겨지기가 어려웠습니다.

-마크 릴라는 나치 독일의 시기에 슈미트가 '도덕의 최저점'에 있었다고 꽤 비판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상가들을 경애하는 많은 이들이 계속해서 그 사람들의 정치적 분별없음을 무시하거나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도 그들을 선정하는 중요하는 고려사항이었다

이제 이 여인(한나 아렌트)은 마침내 한 사람에게만 "확고부동의 헌신"을 바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하이데거는 죄의식을 토로하면서도 자신의 연구 작업을 위해서 (당분간)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아렌트를 설득했다

하이데거는 유대인 동료들과 모든 관계를 청산했는데, 그중에는 스승인 에드문드 후설도 들어 있었다

야스퍼스는 친구고 아렌트는 연인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하이데거가 자력으로 진정한 의미의 ‘철학함‘을 재생시킨 사상가임을 굳게 믿고 경애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에서 나치즘과 관련된 주제는 하이데거가 1950년 3월에 스스로 언급할 때까지 완전히 배제되었다

나치는 슈미트가 히틀러의 행위에 사법적 지위를 부여하리라는 희망을 품은 게 분명한데, 결국 실망하지 않았다

슈미트는 히틀러의 처신이 ‘그 자체로 지고한 정의‘라고 주장하는 악명 높고 영향력이 있는 글을 발표했다

슈미트는 바이마르공화국 정치의 혼돈은 자유주의자들 스스로 극우와 극좌 노선에 선 적들과 충돌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거의 200년 동안 자유주의 사상의 주창자들은 슈미트 같은 반대자들과 대치해 왔다

코제브와 스트라우스는 고대 철학과 근대의 ‘지혜‘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우리가 정치적으로 사유하며 살아가는 방향을 찾는 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했다

어째서 때때로 모호하고 늘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던 사상가의 저서와 발언이, 20세기 지식인이 살아온 삶의 지형에서 이미 하나의 기념물이 되어버린 뒤에도 그렇듯 강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아마 가장 중요한 이유는 푸코를 찬양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푸코는 단순히 저자 이상의 다른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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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의 시대 - 페미니즘은 끝났다는 모함에 관하여
크리스틴 J. 앤더슨 지음, 김청아.이덕균 옮김 / 나름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휴스턴 다운타운 대학 (UHD)의 인종 연구 센터의 심리학 교수이자 연구원인 크리스틴 J. 앤더슨은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UC 산타크루즈)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양성 평등과 사회 심리학 및 여성 심리학 등을 연구해 오고 있는데요. 그녀는 아직까진 해당 연구에서 신진 학자로 알려져 있고, 스스로 여성학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팔로우수가 이제 220명이 넘는 그녀의 트위터에도 잠시 방문을 해보기도 했는데요. 다만, 위키 백과에서도 저자에 대한 자료가 등재되어 있지 않고 웹 상에서도 특별한 정보가 나오지 않아 저자에 대한 소개는 아무래도 이정도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원제 "Modern Misogyny : Anti-Femnisim In A Post-Feminism Era"로 지난 2015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쉽지 않은 논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매끄러운 번역을 해주신 두 분의 역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번역된 글의 부제인 "페미니즘은 끝났다"는 것에 대한 반론이 이 글의 주요한 논점이 아니라, "그동안 여성들의 권리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도달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전통적인 성역할과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외모 치장과 전통적인 순종허는 여성상을 추구할 것"을 주장하는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한 매우 상세한 반론이라 할 수 있겟습니다. 바로 1장과 2장이 그런 내용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준비되어 있는데요. 먼저, 저자가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포스트 페미니즘과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저역시 저자인 앤더슨의 논증을 통해 이해한, 그녀의 주장이 매우 설득력이 높다고 여겨졌습니다. 1장 도입에서, 저자는 "포스트 페미니즘은 특히 198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널리 퍼진 신자유주의와 잘 어울린다"고 언급하고 이는 다음 2장에서 논증될 "9.11 테러 이후 신자유주의가 교묘하게 공공 분야의 지출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 시민들의 권리를 축소하고, 고통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과거 전통주의적인 여성성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포스트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는 발을 맞춰왔다고 요약되고 있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여성주의 운동 자체가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적 이념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며, 이를 확대해보면 결국 여성들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이해와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관념체계 자체가 우리의 민주주의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포스트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여성들의 전통적인 성역할에의 복귀와 강요는 앞선 진술대로 신자유주의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요. 2장에서 상세하게 논증되고 있는 '비상 상황'에서, "전쟁 기간의 시민권은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사치가 된다"는 언급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즉, 이 부분에서 신자유주의는 진보주의 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이 당시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신보수주의(네오콘)와 결합이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될만 합니다. 일전에 데이비드 코츠의 주장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은 유독 국가의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 대해서 만큼은 매우 관대한 편인데요. 아마도 이 지점에서 네오콘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의 야합이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더불어, 이미 1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포스트 페미니즘과 연결되는지 저자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약하시키고 신자유주의의 금과옥조인 이윤, 사유화, 개인주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시장을 중시하는 문화를 일상생활 전반에 뿌리는 내리는 것, 복지 '개혁'(빈곤층 지원 축소)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이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 덕을 볼 수 있는 일종의 소비자 시민권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특권 혹은 특권층에 관한 부분은 4장, 남성의 종말과 소년의 위기에서 다루고 있는데요. 그것은 "강한 특권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온갖 좋은 것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시장 자유라는 명목으로 시민 절대 다수에게 강요했던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실상은 특권층과 기득권 계급 및 엘리트들을 위한 비타협적 관념 체계로 이는 민주주의적 이념인 평등에 반하는 것이고,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계급 정치를 용인하지 않는 기본적인 골자를 위해하는 것으로 그동안 평범한 노동자들마저 이런 논리에 세뇌되어 왔다는 것이 그동안의 수많은 연구로 밝혀진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페미니즘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 자체는 좀 더 사회적 맥락에서 여성들의 권리에 대해 이해하고, 인종을 가리지 않는 여성 전체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자도 3장에서 '남성 혐오'를 내포하고 있는 극단주의와 극단주의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대체로 3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페미니즘 운동을 하고 있는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에 대해 대체로 '중립적인 인식' 갖고 있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또한, "페미니즘의 주장에 동의하는 많은 여성은 페미니즘이 부정적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칭하길 꺼린다고 알려져 있다"는 진술은 페미니즘 운동 자체가 얼마나 외부에서 왜곡해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요. 사실 페미니즘은 소년 시절부터 주입되는 '남성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강요' 방지한다는 점에서 남성들에게 유익하고 아무 이유 없이 대다수 여성을 적대시하는 분위기를 이성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충분히 기여를 할 수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여러 주장들 가운데 주의깊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높은 교육을 받고 인정을 받는 성공한 여성들조차도 심지어 남성들의 연애 요구와 섹스 요구에 응해야만 한다는 포스트 페미니즘의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이미 여성들의 권리가 충분히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 전통주의적인 여성성에 여성들은 집중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성이었는데요. 전반적으로 현재 미국에서 일고 있는 "남성이 원하는 연애를 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적대감"이 이것에 기반한다고 생각됩니다. 첨단 과학의 발달과 합리적인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현재의 세기에 아직도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이토록 무시하는 행태가 있다는 것이 실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하였습니다. 과거처럼 여성들이 익히 알면서도 고분고분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남성들이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종래처럼 여성들과 성소수자들, 유색 여성들의 권리를 '백인 여성들의 권리' 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만인이 긍정하는 인권법과 사회 체제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인데요.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극단적인 혐오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지 작금의 시점은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선, 유색 인종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대해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 글 1장과 2장에서 꽤 논의되고 있는 사항이 있는데요.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이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이들을 백인 여성들 만큼이나 사회에서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미국 사회에서 인종주의적 편견은 아직도 타파되지 않은 상황이고, 4천만이 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도를 넘는 태도와 선입견은 아직도 여전한 편입니다. 더 심한 말로,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을 소위 '창녀' 취급을 하면서, 반대로 백인 여성의 인권은 예외로 취급한다든지, 고학력 전문직 백인 여성들의 권리와 그렇지 않은 서비스 직종과 '파트 타임 잡'에 있는 여성들의 인권을 예외취급하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포스트 페미니즘의 노골적인 구분법입니다. 이는 제도권 교육을 받은 많은 미국 남성들에 의해서도 이러한 시각을 볼 수 있기도 한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여성, 즉 능력있고 사회에 귀감이 되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대부분 미움을 받는다"는 분석을 하고 있는 5장에서는 남성들에 대해 대체로 고분고분 하지 않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에 대한 원초적인 반감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높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남성을 혐오하거나 남성과의 연애를 회의적으로 볼 것이라는 일부 주장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남성들의 보살핌을 받는 존재들이라는 인식 아래, 좀 더 남성들에게 고분고분해질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광범위하게 오랫동안 진행된 민주적 사회에서 과연 이러한 왜곡된 가치 체계들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인가는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남녀간의 입장차이나 어떤 대결 구도에 집중해 이를 일종의 중화하고 개변시키는 어떤 당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남녀 평등의 기본 가치와 사회적 약자와 성소수자, 인종소수자들에 대한 권리 문제는 염연히 민주주의가 마땅히 보장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과 한 묶음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처음 글 도입부에서 저자는 포스트 페미니즘이 여성의 몸을 성애화하고 대상화 하고 있다고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거의 벗다시피 한 여성의 몸을 즐기는 것이 다시금 괜찮은 일이 되어버린 상황"을 스스로 반성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1장에서 하이힐을 신고 추는 '폴댄스'의 사회적 의미와 더불어 "자신의 몸을 과시할 준비가 돼 있는 여성은 누구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에 많은 젊은 여성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는 저자의 놀라운 언급이 있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몸을 성상품화하고 이를 확대시키는 것이 여성들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즉 몸이라도 팔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득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념과 동시에 포스트 페미니즘이 그러한 상황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국제적 패션 브랜드들이 강간이 묘사되는 사진 구도와 여성의 눈빛을 흐릿하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것으로 묘사해, 성적 대상화를 하고 있는 광고들의 본질이 바로 오늘날 소비 자본주의의 속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이처럼 뿌리깊은 반페미니즘에 대한 사회경제적 맥락과 그것을 조장하는 포스트 페미니즘을 분석한 이 글의 통찰은 충분히 높은 설득력을 갖고 있다 생각되었습니다.


-포스트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의 야합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사회를 균질화시키고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노골적인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절대 잘못되지 않았다는 믿음과 그러한 배경 가운데 자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담론이 마땅히 시민 다수가 따라야만 한다는 그들만의 당위를 완전무결성과 같은 것으로 주장함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판단은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적인 거부가 사회내에서 좌파의 몰락 내지는 유명무실화를 추구했던 지난 40여년간의 신자유주의자들의 행적과 구조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특히 198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서 널리 퍼진 신자유주의와 잘 어울린다

반대로 포스트 페미니즘은 마치 모든 여성이 백인 중간계급 아니면 상류계급 이성애 여성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시장을 중시하는 문화를 일상생활 전반에 뿌리내리는 것, 복지 ‘개혁‘(빈곤층 지원 축소)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이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 덕을 볼 수 있는 일종의 소비자 시민권을 장려하는 것이다

개인주의 경향은 자아도취, 비대한 자아, 특권 의식,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나르시시즘에 관한 심리학 연구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광고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석한 결과, 슬프게도 현대 여성들이 10년이나 20년 전보다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더 가까이 수용하고, 불쾌함을 덜 느낀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자신의 몸을 과시할 준비가 돼 있는 여성은 누구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에 젊은 여성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을 약화시키고 신자유주의의 금과옥조인 이윤, 사유화, 개인주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필수요소라 할 수 있다

(군에서) 남성의 성적 접근을 거부한 여성 병사들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발당했고 동성애 행위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페미니스트를 "남자 까는 여자"라고 부르는 것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문자 그대로 폭력을 당하는 시스템의 문제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대신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 때문에 남자들의 기분이 상하는 것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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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미드나이트
릴리 브룩스돌턴 지음, 이수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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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릴리 브룩스돌턴은 미국 버몬트 주 출신으로 메사추세츠 애머스트 대학을 거쳐 포틀랜드 주립대에서 예술 석사라고 할 수 있는 MFA를 수여 받았습니다. 몇몇의 습작을 제외한다면 2016년, 랜덤하우스에서 출판한 '굿모닝 미드나이트'가 첫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이후 조지 클루니가 감독해 동명의 영화화가 진행된 바가 있습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를 감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Good Morning, Midnight"로 지난 2016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넷플릭스를 통해 조지 클루니가 연출을 맡은 동명의 영화를 접하게 되었는데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아무것도 못한 채, 꼼짝없이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청을 마치고 나서 불현듯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웹을 열어 영화를 검색해 보니 원작이 존재했다는 것을 발견했고, 다급한 나머지 알라딘에 책 주문을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소설의 서평을 쓰는 것도 제법 오랜만인 듯 싶습니다.

영화에서는 지구가 어떠한 전쟁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으로 언급되지만 책을 일독하고 보니, 뭔가 '시간의 패러독스'와 같은 현상이 잠정적으로 동시간대의 인물이라 볼 수 없는 어거스틴과 아이리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 지구 위에 떠있는 인공위성들이 먹통이 된다든지, 에테르에서 전혀 지구에서 방출되는 전파가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여느 아포칼립스 소설들에서 보여지는 핵전쟁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소설의 축이 되는 이 시간 왜곡 현상에 대한 배경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주인공인 어거스틴은 스스로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에 있어서 오만하고 자기 멋대로인 인물이었습니다.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자신이 살아온 그동안의 삶에 대해 회한을 느끼면서 점차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데요. "그는 사랑에 대해 북극곰 만큼 아는 게 없었다"는 다소 황당한 문장에 그의 사람에 대한 태도를 짐작할 만합니다. 교제를 하고 있던 여자친구에게 낙태를 권유하다 그녀가 들어주지 않자 어딘지도 모를 남반구로 도피한 것은 작가가 여성이어서 저런 극단적인 남성성을 마련했던 것이 아닌가 잠깐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가 아이리스라는 소녀와의 짧은 동거를 통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느끼지 못했던 사랑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점은 앞선 인물 설정이 나중에는 얼마간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지식의 수준으로 평가하는'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에게 있어 아무래도 타인과의 관계 특히, 가까운 이성과 지근의 사람과 불협화음이 날 수밖에 없는 여지를 배제할 수 없을 텐데요. 자신의 딸을 낳은 진이 후에 '아빠는 큰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라고 회고하는 것은 이렇게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다 생각됩니다. 여자들을 오로지 섹스의 대상으로 여기고 자신의 기분과 의도대로 관계를 제멋대로 끌고 간 그가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평생 열망해 마지 않았던 대상이 바로 우주였다는 점이 얼마간 이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작가의 의도된 이름(나중에 중요한 이름이 밝혀지므로 이것은 성입니다)인, '설리'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녀는 일찍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훌륭히 성장했고, 끝내는 목성과 갈리레오 위성들의 탐사를 맡은 '에테르'호의 대원이기도 합니다. 전 남편인 잭에게서 어린 딸 '루시'를 키우고 있는 그녀는 이번 임무를 결정하는 데 있어 어린 딸의 존재가 큰 난관이기도 했습니다. 원래 주변을 세심히 살피는 설리는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던 중에 에테르에 수신되던 통신이 끊기고 나서, 심리적 혼란을 느끼는 대원들의 심리 변화에 민감해 하고, 데비와 같은 가까운 이의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등의 다감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적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전해준 천문학 책을 보면서 꿈을 키우기도 했는데요. 아버지에 대한 어떤 원망이나 분노라기 보다는 부성애를 느껴보지 못한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연민이 담겨있는 문장이 보이기도 했는데요. 물론 재혼한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산후통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그녀의 삶 자체가 대체로 무난했다고 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전 남편 잭과의 이혼이 그런 와중에 있던 불행한 결과물이라고 선뜻 판단할 여지는 없지만 그로인해 자신보다 주변을 더 챙기게 되는 인물로 읽혀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어거스틴과 아이리스, 설리와 하퍼와 같이 스토리상 주요한 축인, 이들의 뭔가 운명적인 관계로 인해, 발생되는 감정과 이들의 내면의 변화를 포함한 묘사들이 꽤 훌륭하다고 느껴졌는데요. 책 뒤에 나오는 역자의 후기로 이 글을 단순히 지구 종말에 대한 어떤 기록 정도로 여기는 것은 이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아서 클라크와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을 등장시켜 뭔가 SF의 외투를 입고 있지만, 사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인생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갑자기 다가온 사랑으로 깨닫는 내면의 변화, 그리고 여자 작가에 의해 그려지는 부성애에 대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마크 트웨인이 인간은 때론 고독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을지라도 우리가 관계를 맺는 사람이 없어서는 그 스스로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꽤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가족간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혹은 주변 사람들간의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무리 엄청난 사회적 명성과 직업적 성취를 쌓는다 할지라도 그가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온전히 해내는 고독한 성찰 만큼이나 타인과의 관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가 마치 제게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이런 느낌을 더 상세하게 쓰기 위해 글의 구조와 스토리 라인에 있어서 좀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만 상당히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저의 알량한 글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일단 저는 영화를 먼저 접하고 이 소설을 일독하게 되었는데요. 책과 영화를 전부 소화하고 나서, 속으로는 꽤 애석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원작 소설을 먼저 읽고 나서 영화를 보시는 것 추천드려 봅니다. 이렇게 순서를 정해 접하시고 나면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렸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143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트럼프 카드의 ♠를 스페이드라 부르는 것은 검색만 해봐도 아는 것을 '스페이스'로 표기한 것은 뭔가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그 어원을 따져봐도 스페이스라는 단어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소녀 아이리스에 대한 인물 묘사와 행동거지, 말투,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작가의 묘사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랑에 대해 저 북극곰만큼도 아는 게 없었다

어거스틴은 그 무엇보다 지능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었다

천문대 밖의 세상은 조용하고 텅 비어 있었다. 그 여자들도 죽었을 것이다. 논문들은 잿더미가 되고 강연장과 천문대들도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추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불안한 미래에 사로잡혀, 설리가 말을 걸어도 온전한 현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동반자를 원한 적이 없었다. 다른 생명을 돌보겠다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특히나 지금, 그의 생명이 끝나가는 이때에 말이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여기에 있었고 어거스틴도 그랬다. 그들은 함께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거스틴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대부분을 투명 망토를 뒤집어 쓴 사람처럼 보냈다. 조용하고 똑똑하고 조심스러운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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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05 2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의 서평에 감사드립니다
SF를 예전에 읽고 싶다 생각해서 화재 감시원 읽고 좀 좌절하고 다시 읽지 않았는데,
이 책으로 다시 열어 볼까합니다.
산소 발견 이전에 연소를 설명했던 에테르가 등장하니 또 관심이 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

베터라이프 2021-09-07 20:3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초딩님 ^^ 이 소설에서 우주는 두 인물을 연결시켜주는 매개라고 여겨지네요. sf소설이 가미되긴 했지만 본질은 내면과 관계의 화해를 담은 글이 아닌가 싶어요. 아 너무 스포한 것 같네요 ^^; 하여튼 초딩님의 서평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는 소설 전문(?)이 아니라서 많이 읽은 분들의 서평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구요!
 
불안의 사회학 -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가
하인츠 부데 지음, 이미옥 옮김 / 동녘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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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일 보윈켈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인츠 부데는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사회학, 철학 그리고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1986년에 동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이후 독일 함부르크 사회연구소의 연구 조교로 일하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로파 대학 비아드리나에서 석좌 교수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96년에는 코넬 대학의 방문 학자를 거쳐 현재는 카셀 대학에서 거시 사회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로 세대 연구와 기업가 논리 등을 연구하면서 독일 사회가 미래에 나아갈 길을 학자로서 제시하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원제. "Gesellschaft de Angst"로 201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부데의 이 책은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정신적인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에까지 과거 안정적으로 우리의 삶을 책임졌던 '복지 국가 담론'이 신자유주의에 철회되면서 그 와중에 분화된 엘리트 계급과 중산층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약한 사람들의 각각의 불안을 많은 인용과 그를 뒷받침 하는 주장 등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독일 특유의 직설적인 분위기 답게 부데가 쓴 이 글의 어조는 합리적이라는 말을 넘어 곳곳에 냉정한 판단이 들어가 있었는데요. 특히, 포괄적으로 3장부터 6장까지 등장하는 '능력주의'와 불안과의 관계를 으레 짐작되는 단순한 인과의 문제로 서술하지 않고, 불가피한 능력주의가 주도하는 사회 자체의 현실을 진술하는 데 좀 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저자 특유의 냉소적인 표현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예를들어 우리의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8장에서는 소위 제어되지 않는 금융 시장 이데올로기를 빗대면서, "의심스러우면서 많은 돈으로 구제해줘야만 하는 체제를 위해 중요한 은행들과 정부가 시민들에게 따르길 강요하는 시장과 동일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우리의 폐부를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개인의 원초적인 불안을 다루고 있는 1장과 2장에서는 남녀간에 존재하는 '애정'에 대해 부데는 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마치 "연인과 섹스를 막 끝낸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방금 전의 격정적인 몸의 대화'를 쉽게 잊기 마련이라고 강조합니다. 남녀가 사랑으로 연결된 연인 사이의 관계 조차도 근원적인 불안을 야기시키며, 반대로 오로지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간에 관계에서만 이런 불안을 회피할 수 있다고 저자는 보는 듯 했습니다. 아무리 다양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심리적인 불안은 제거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여자가 연인으로서 만나려 하는 남성들 가운데, "자신보다 교육을 덜 받은 남성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 현실"은 그런 명확한 개인의 선택은 일견 불안에 빠질 가능성을 회피하는 목적이 있다고 여기는 듯 했는데요. 물론 부데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물건을 고르는 것과는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설사 합리적이고 마땅한 선택으로 누군가를 만난다 하더라도 본인 스스로가 통제력을 잃게 되어 나타나는 불안을 잠정적으로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토록 고도화 된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원칙적으로 개인들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여기에 나날이 강요되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체화시킨 능력주의의 사회에서 계급 전반이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요약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관점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는 이 글 5장에서 "엄연히 30년간의 신자유주의 시기에 부가가치의 우선 순위의 변화로 각국들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고 언급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현실적인 가치를 나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글 전반에 논의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하에서의 '능력주의'는 성공이 있으면 반드시 실패가 있고, 양지가 있으면 무조건 그늘이 있는 것과 같은 상반된 인식으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20세기의 전체주의가 미연에 발생할 수 있는 첨예한 계급 갈등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는 저자의 요상한 해석을 조금 틀어보자면, 복지 국가의 담론도 역시 마찬가지로 계급 갈등의 문제를 (의도했던 안했던 간에) 방지하는 것에 기여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자도 토마스 프랭크를 인용하면서 사회 최상급 그룹에 부여하는 상여금과 관련해 이러한 시스템을 마냥 긍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승자독식' 세계에 살면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 사람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다고 회의적으로 표명하고 있는데요. 이는 경제적으로 중간 계급 이하의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계 문제로 인해 시스템 자체를 성찰하기 위한 시간이 부족한 것이며, 어느 정도는 이러한 강요된 사회에서 체념하며 지내는 것이 현상황을 해석하는 설득력있는 주장 일겁니다. 따라서, 저자가 단언하는대로 "사람들은 승자독식사회를 무자비하게 최고 엘리트들만 선별하는 자본주의 일면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것이라 받아들 수 있다"고 보면서 "이렇게 사회 전체가 경쟁을 하도록 부추기면 사회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예상외로 우려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듯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일종의 노스탤지어와 연결되기도 하는데요. 반대로 5장에서, "국가가 세금으로 중산층의 돈을 탈탈털고 있다"는 국가에 대한 다소 냉소적인 평가는 부데가 과연 어떠한 입장을 지지하고 비판하는지에 대해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인용들이 계급과 사회 내부의 불안에 대한 관점을 좀 더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양가적인 측면을 언급하며 진술하고 있는 것이, 단순히 글의 기법에서 일관된 논지에 포함될 수 있느냐가 쟁점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자수성가한 소위 엘리트 계층에 대한 3장의 논증은 '승자독식'과 '능력주의'에 기반한 개인들의 노력과 성취라는 부분에 있어 어떤 가치 판단을 하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내의 눈들을 신경쓸 수밖에 없는 소수 엘리트들의 불안감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이 엘리트들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좀 더 냉혹하고 교활해져 더 많은 이익을 거두려 하는 욕망"에 빠질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이 부분에 대한 도덕적 관념의 실종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에 일정 부분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 승자독식과 능력주의를 역으로 해석해보면 이러한 견고한 기조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부의 우위에 있는 자들이 "자본주의가 원래 이런 것이고 개인의 이익 추구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사회에 대한 철지난 책임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오로지 저들의 문제일 뿐이다"라고 하는 기형적이고 반사회적인 인식을 아무렇지 않게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저자가 앞선 능력주의를 불가피한 자본주의적 사회화 과정에 비롯된 현실 인식으로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진 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마땅히 도태되어야만 한다는 인식"은 인간이 그동안 쌓아온 인문주의와 역사적 진보를 깡그리 휴지통에 처박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인식에 대해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이익과 능력주의를 강조하며 마땅한 사회적 부조를 제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해 왔는데요. 후쿠야마의 언급대로 이들은 어떠한 도덕적 양심이나 갈등으로 자신들의 내면이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은 내심 소름끼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자본주의가 인간성의 부분에서 구조적인 모순을 갖고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데요. 그런면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포획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처럼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엘리트들의 최소한의 도덕적 책무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저들이 스스로의 불안감 때문에 차라리 간교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선택지를 손에 쥔 것도 앞선 진술들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이들 엘리트들의 성공에 사회적 자원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는 저자의 인식대로라면 엘리트들의 불안 문제를 일방적으로 곡해할 필요는 없지만 일대 다수의 대결 논법으로 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부분은 약간 우려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에 반해 5장에서 중산층의 불안과 다음 6장의 사회적 약자들의 불안과 관련한 논증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었는데요. 사회 안전망이 없기 때문에 개인들이 언제나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평가와 시장 자유주의적 이행으로 인해, "개인의 능력과 공동체적 연대감이라는 정신을 중산층이 공유했던 시대는 사라진 게 분명하다"는 서술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일은 아마도 이런 중산층 정신을 꽤 중요하게 여겼던 국가로 볼 수 있을텐데요. 어느 정도 사회적인 재분배의 해법이 필요하지만 이것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 뭔가 철지난 문제로 치부해 공격하는 사회적 행위들이 그동안 너무나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것들을 전부 신자유주의자들의 음모론으로 몰아갈 수는 없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동안 사회에서 공익과 공공의 의미가 배척당해 온 것은 거의 확실하다 생각됩니다. 다만, 저자가 갖고 있는 국가와 정부가 초래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인식이 다소 일관되지 않은 부분은 독자들이 감안해서 읽어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지는데요. 그리고 8장에서는 금융 자본주의로 인한 불안과 관련해, 아마 다수가 이를 증오하기도 하였으나, 그 부분과는 별개로 2008년의 경제 붕괴가 어느 정도 필요했을 수도 있다는 저자의 판단은 다음 논증을 통해 일정 부분 공감을 할 수 있었는데요. 그런 결과로 막대한 공적 자금이 시장에 투입되었지만 어떻게 보면 최악의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기에 사회 전반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카지노 자본주의에 의한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과 사회 구성원들의 불만이 이익 극대화를 위한 구조적 문제로 진정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서도 불확실하다고 판단됩니다. 다른 어떠한 불안들 보다도 이 금융 자본주의의 불안이야 말로 다시금 체제 전반의 위험성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명백히 현재의 자본주의가 이를 해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런 문제를 제기할라치면 왜곡된 자들에 의해 반자본주의자라는 낙인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극우주의자들이 반대의 세력을 풀조차 남지 않도록 제거하기 위한 실현될 수 없는 욕망과 다름없는 것으로 불안의 문재를 떠나서 건전한 비판도 꺼내들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해 종내에는 사회를 병들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개인들의 다원화 된 사회에서 어쩌면 각 개인들이 느끼는 불안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엘리트들과 중간 계급 및 사회적 약자가 처한 입장이 다 다르고 어떤 문제에 대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 또한 각자가 다 상이합니다. 또한, 이러한 분화를 만들게 한 자본주의적인 불안 또한 시민 각각이 느끼는 부분이 분명 다를 것입니다. 다만, 일부 계층에게 주도되어 진행된 세계화와 이를 통한 신자유주의적 담론들이 일정 부분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저자인 부데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가 일정 부분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사회를 시장이 주도하게 만들고 이기심이 만연된 비인간성의 왜곡된 구조를 더욱 고착화 시켰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선언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적인 동반자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이런 고차원의 자본주의적 매커니즘이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를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토록 현 시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많은 불안들이 개인의 다원화의 양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이후 변화된 자본주의적 담론이 사회 전반을 보다 변화시켜 왔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가 현재의 번영을 이끌었다고 보는 관점도 적지 않겠지만 반대로 심각한 부의 불평등 문제를 최소한의 논의조차 막아버리고 있는 자본주의의 무결성 논리도 큰 문제인 것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세기 중후반에 발전했던 복지국가는, 현대 사회를 전례 없이 통합시켰다

결국 알고 보면 우리가 헌신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타인이 바로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서 중산층이 줄고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게걸스러운 국가가 세금을 통해서 중산층의 주머니를 탈탈 털고 있으며, 그래서 중산층은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롭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듯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주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다

사람들은 ‘승자독식사회‘를 무자비하게 최고 엘리트들만 선별하는 자본주의의 일면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것이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때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중산층과 하층이 매우 날선 대치를 했고, 그야말로 모두에게 불확실한 시기였다. 그 때문에 20세기의 전체주의는 폭동이나 전쟁과 같은 거시적 폭력과 일상의 폭력으로 미래에 계급 갈등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내쫓고자 했다

노동조합과 정당을 욕하고 국가가 약탈을 일삼는 정치인들의 손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들은 항상 있었다

무엇보다 사회적 지위를 많이 고려하는데, 사회적 지위는 지식이라는 무형의 가치와 의미라는 상징 자본으로 그 가치를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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