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시라이 사토시 지음, 오시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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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출신의 사상가이자 정치학자인 시라이 사토시는 지난 2017년 번역 출간한 '영속패전론'이라는 논저로 유명한데요. 당시에 일본인 학자가 종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직접적으로 패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간단한 이력으로는 1977년생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 학사를 그리고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수여받았는데요. 이후에 이쿠루 상을 비롯 이시바시 탄잔상, 가도카와 재단 예술상을 수상한 바가 있습니다. 제가 그와 관련한 기사를 많이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극우 정치를 지지하는 지식인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에게 약간 민족주의적 의식이 느껴지긴 했지만 크게 우려할 만한 부분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외에는 다소 젊은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공동 저작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출간했고 몇 번의 티비 출연도 감행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2014년에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토론에 출연한 것은 꽤 인상적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글은 원제, "武器としての「資本論」"으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1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시라이 사토시는 글의 서두에서 자신의 전공 분야로서 그동안 연구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연구를 일반 독자들에게 보다 알기 쉽게 소개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는 취지로 밝히고 있었는데요. 전세계 대다수의 국가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기에 일반 시민이 '자본론'에 대한 기본적인 의의나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동안 반공과 그 체제에 따른 연유로 한동안 자본론이 금서로 지정되기도 하였는데요. 저에게는 이러한 지난 역사가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할 수 없다는 반공 정부의 의지로 느껴져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가 역사의 장막으로 사라지는 것보다 인류 문명이 종말을 맞는게 더 빠를 것이라는 금언이 요즘의 시대에 딱 맞는 표현이라고 여겨지는데요. 시라시 사토시의 이 글에서도 당연히 언급되고 있지만, 인간의 삶, 사회 구조, 정치 체제, 국가의 역할 등 인류가 쌓아올린 토대 전부를 오로지 '시장 자유'로 몰고 가는 맹렬한 신자유주의적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거의 부정할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물론 무지의 차원에서인지 현실 무감각의 극치라는 소산에서 나오는 인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혹자들은 신자유주의 자체가 실체가 없는 유령과도 같은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이브리드 자본주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자본주의 시즌 3' 이렇게 불러야 할까요?

마르크스가 생전에 제대로 된 돈을 벌어본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가 예견했던 자본주의 혹은 자본제 자체가 인간의 삶을 자본의 종속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의외로 통찰력이 발휘된 것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내 자신조차 상품으로 팔 수 있는 현란한 시대에서 상품 생산과 판매 그리고 숱한 잉여 상품의 확대라는 오늘날 대중 소비사회와 맥락을 같이하는 자본주의적 기본 인식을 과연 우리가 비판 없이 일종의 교조로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모두가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시라이 사토시는 '자본주의'라는 단어보다는 자본제라는 말을 더 선호하고 있었는데요. 자본주의라고 말하면 그 의미가 구체적이 되지 않을 수 있기에 자본제라고 지칭하는 것에 저역시 꽤 긍정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다룬 글 4장의 말미에서, 사토시는 "인간은 자본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그렇죠. 인간은 자본주의의 최적화되어 있다거나 자본주의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이전 포디즘이 인정했던 최소한의 시민과 노동자들의 안전 장치조차 당위로서의 자본 축적이라는 미명하에 사회를 재구조화하게 되었던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인간이 만든 체제 위에 군림하게 됩니다. 제가 그동안 이 신자유주의를 뭔가 다크 판타지의 괴물로 해석될 만큼 그 '악의 선명성'을 자주 읊어대기도 했는데요.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공격을 하거나 비판을 할 수가 없다는 식으로 이 하이브리드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자들의 논리들이 사실상 민주주의가 마땅히 자본주의를 제한할 수 있어야만 하는 정치적 함의를 무력화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 위에 위치할 수 없다는 당위이며,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이념은 다수 시민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시라이 사토시는 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 완화, 경쟁 원리"와 같은 키워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통렬한 해석대로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사고를, 감성을, 감각을 바꿨다"는 주장에 긍정하게 됩니다. 사실 모두가 알다시피 자본이 축적되는 것은 거의 무한대로 작용됩니다. 단순히 개인의 이기심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키고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이런 기존의 담론들과는 명백하게 배치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결국 1980년대 이후 국가 차원에서 배타적 부를 갖고 있는 자들의 더할나위 없는 부의 증대를 용인하고, 그러한 대중 소비사회를 촉진시켜 인간의 삶 자체를 사실상 변질시킨 것에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오 네그리는 "인간의 삶이 노동에 처해졌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로 7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인간의 노동력 제공이 본래의 삶을 위한 것에서 자본주의적 이익에 더 규합되는 쪽으로 왜곡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의 일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체제 자체를 마땅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함에도 사회에 무비판적으로 자본에 봉사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진 상황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저자인 사토시 역시 맹목적인 신자유주의화에 의해 시민이 혁명에 이르는 길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시민의 기본적 권리와 스스로의 삶에 대한 통제를 잃게 만드면서까지 노동력을 쥐어짜면서 고스란히 갖다 바치며 자본에 봉사하는 이러한 체제 자체가 과연 어떠한 공익이 존재하는지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전의 포디즘 체제에서는 그나마 자본주의가 인간성을 갖고 있었다고 단순히 긍정할 수는 없지만 겨우 존재했던 사회경제적 배려조차도 앞선 진술과 같이 시민들에게 휴지조각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시 경제학을 연구하고 있는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시장 논리에 대해 각종 이론을 갖추고 있는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의 맹목성, 그러니까 자본의 축적을 위해서는 어느것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그 희생 논리에 대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이러한 체제가 이끌고 있는 사회가 완전히 파국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체제 전반이 어떤 식으로 시민과 인간의 삶에 더 가혹하게 도움이 되지 않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발달 단계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봉건제가 걸림돌이 되어 러시아의 농노 해방과 같은 일련의 사회 변혁이 이뤄졌던 것은 그것이 얻어 걸린 것이라 할지라도 적당히 의미가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시민의 자아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도 꽤 긍정합니다. 그동안의 기술발전이 시민의 건강과 삶의 개선에 이바지한 것도 충분히 공감이 될 만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과거 역사에서 자본주의가 아무리 중대한 체제적 목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에 도래할지 모르는 고도화 된 AI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듯이, 그것이 우리를 이끄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거세당한 국가 담론의 문제라든지, 복지 국가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시민 안전에 대한 요구가 허버트 스펜서에 의한 것처럼 거부당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이 글 11장에서도 제한없는 자본 축적을 원하는 자본가들과 그 반대에 있는 시민들간에 전쟁이 도래할지도 모르는 것은 사회 체제와 시민 안전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일이 됩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적 제한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과거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승리가 되어야지, 자본주의만의 승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비해 보다 자유롭고 진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찌 철지난 자본론 이야기냐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있을겁니다. 누군가에겐 지금의 세상이 천국과 다름없다는 말의 극한이 뭐 어떤건지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만, 저자인 시라이 사토시가 말하는 우리가 자본론을 알아야하는 그 이유의 이면에는 자본제가 어떤식으로 체제의 우위로서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시민들이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에 의한 인간의 종속이라든지, 성상품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권력 지배, 비대칭적인 계급적 이해와 같은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19세기의 인물의 통찰력으로 살펴보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겁니다. 이에 대해 시라이 사토시도 금세기를 살아보지도 않은 마르크스의 해석과 이해가 지금에도 충분히 의미가 될 수 있다고 긍정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 삼권 분립처럼, 경제권력-정치권력-시민권력이 거의 동일하게 균형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이 날로 거세져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글 중간에, 마땅한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사고를 제압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상품은 애초에 부와 동의어이며 영원한 것으로 취급받게 된다. 이는 아직 상품화 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남김 없이 상품화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 옆에서 서서 능력이 없어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지 못하면 임금이 깎여도 당연하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라고 수긍하는 사람은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에 지배당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자본에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결과 예전에는 반체제 문화의 텃밭으로 인식되던 노동자 계급 문화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이제 노동자가 아닌 태만한 빈곤층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성립해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기 위해서는 ‘구매할 수 있는 노동력‘이 있어야 한다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면 자본주의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수단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에 자본은 노동자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거나 인건비를 삭감하는 형태로 무리하게 잉여가치를 생산하려 한다. 그 부작용이 사회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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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6 0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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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6 0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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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란 무엇인가 - 마스크 시대의 정치학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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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솔링겐 출신으로 대학 강단의 학자일 뿐만 아니라, ZDF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방송을 하고 있는 대중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일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퀼른 대학에서 수학하고, 1997년에 도미해 전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언론 관련 펠로우쉽인 시카고 트리뷴의 아서 에프 번스 펠로우쉽을 수료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문학 관련 글을 비롯,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 생물학적인 관점 및 심리학적인 측면의 논픽션 글을 작업하기도 하였는데요. 본래 그는 철학 주제의 글을 쓰고 있지만, 2009년 봄에 독일 정론지 슈피겔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그의 논픽션 글이 올라왔던 것으로 보아 대중 철학자 혹은 대중 지식인으서의 면모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Von Der Pflicht : Eine Betrachtung"으로 2021년 3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 서두에서 저자인 프레히트는 자신을 "정치에 관심이 많은 철학자"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정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철학자가 과연 진정한 철학자로 불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실 정치와 관련해, 대표적으로 지난 2019년 11월 이후, 선진적이고 존경받을 만한 서구 유럽의 자유 민주주의의 실상이 이 펜데믹 사태로 인해 전세계에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저자 자신과 같은 많은 유럽인들이 이 코로나 사태를, "빌 게이츠와 중국 당국 그리고 거대 제약회사가 담합한 비열한 동맹의 결과"라고 터무니 없이 이를 맹신한 증거가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를 물밑에서 좌지우지 하는 '딥 스테이트'와 같은 그림자 정부의 음모라고 확신하는 이들 유럽인들은 그런 인식화의 과정에서 "보건 사태에 따른 국가의 개입을, 국가 스스로가 시민의 기본권을 영구히 침탈히기 위한 계획"이라 받아들이고 다시 유럽에 파시즘이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한 그 일련의 과신(?)의 과정을 저자가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자인 프레히트가 이 글 2장에서 인정하고 있듯이, 국가는 "시민들에게 있어 자연 상태와 같은 계약 이전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꽤 단호하게 "시민은 국가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는 당위로서 인정되고 있는데요. 이 부분과 맞물려, 조안 C.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에 착안해, 자신의 독일이 이러한 "돌봄 국가"라는 의무에 충실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무론을 먼저 언급합니다. 여기에 시민들의 의무론 또한 마찬가지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일텐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 현재의 전 유럽인들이 정치적으로 "시민이 누려야 할 기본권리"에 대해서만 빠삭하고 반대로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될 의무"에 있어서는 이들이 21세기가 한참 지난 즈음에야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이라고 일침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즉, 소위 자유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던 시민들이 "국가가 헌법을 무력화해서 시민권을 억압하고 이어 독재 국가로 나아갈 것"이라는 제2의 파시즘 도래를 근거없이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사회와 다른 시민들을 위해 지켜야 할 이 "의무"를 망각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한데요. 이처럼 3장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국가에 의한 기본권 제한에 대한 공포'를 먼저 주장하기 이전에, "국가가 시민을 서로로부터 보호하는 데 의무를 다했는가? 그리고 코로나와 비교했을 때 여전히 무시되거나 진지하게 취급받지 않고 있는 다른 위험이나 위기에 대해 국가가 의무를 망각하지 않고 있는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고 저자는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민들이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와 동일한 맥락의 '국가 주도의 시민 보호'를 파시즘의 도래라는 식으로 오판하게 된 연유에는 저자 역시, 자본주의의 재산권 보호나 이익 추구와 같은 매우 기능적인 측면의 강화와 그동안 만연된 시민들의 '자유로운 이기심 추구라'는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큰 영향을 끼친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프레히트 역시 글에서 토크빌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점철된 사회가" 민주주의에 과연 어떠한 파급을 끼칠 것인가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일련의 '토크빌의 딜레마'로 이해되고 있었는데요. 과거 칸트주의적 입장에서 본연의 인간이 어떤 권력이나 정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혁명적인 가치론과 더불어 개인의 자유 역시, "제일 먼저 다른 사람의 권리를 고려하는 것이 먼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더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혹은 좀 더 노골적으로 개념화된 신자유주의가 "무엇보다 자신의 이익 먼저 챙길 것"을 올바른 경제적 인간의 전형으로 규정했기 때문일 겁니다. 또한, 이는 과거 오래된 사회적 가치라는 전통주의적 입장에서 선회해, 포드식 후기 자본주의 그 즈음에, "강자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약자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민족을 최적화한다는 이념이 19세기에 전유럽을 휩쓴 것"은 어쩌면 높은 확률로 허버트 스펜서의 공로일수도 있습니다. 사회진화론과 자본주의의 성공적인 결탁 자체를 사실 누구도 언급하길 꺼려하고 있으나, 결국 신자유주의에 이식된 것은 매우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의 결론에 이르게 되는 5장에서, 저자는 앞선 논증을 간략히, 다음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민주적 시민 의식과 자본주의적으로 배양된 이기심이 단순히 보완 관계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힘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현재의 많은 유럽인들이 '시민의 기본 권리'를 마땅히 쟁취해야만 하는 이기심 정도로 여길수도 있습니다. 시민의 권리는 이기심 따위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어찌됐든 공화주의에 입각한 자유 민주주의의 오래된 뼈대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다른것도 아닌 그들이 주장하는 기본권 즉, "마스크를 안 쓸 권리,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권리, 국가가 시민들의 이성을 존중할 권리" 등이 왜 이슬람 혐오와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를 일삼던 자들에게서 더 많이 나오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저자인 프레히트는 건전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면 시민들의 합리적 이성과 도덕적 분별력을 신뢰해야 한다고 기본적 인식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정치를 시녀로 만들고 나서, 시민의 도덕적 분별력은 18세기보다 더 멀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정치가 시장 근본주의의 보조적 역할로 전락하면서 아마 그즈음부터 정치에 대한 불신과 함께, 개인 이기심의 극대화에 있어 거추장스러운 도덕적 가치를 우리 스스로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현재의 보건 의료에 따른 국가의 개입 선언이 흡사 카를 슈미트식의 헌법의 무력화나 제2의 히틀러를 유럽에 재탄생 시킬것이라는 가정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미 국가의 역할과 기본적인 기능론들이 신자유주의와 같은 시장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무력화 된지 오래이며, 데이비트 코츠의 의견대로 더 많은 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국방비 지출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으로 국가의 역할론 자체가 제한된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1990년대 공산권의 붕괴로 인해 후쿠야마는 그것을 역사의 종언이라고 다소 감격해 했지만, 그의 보수주의적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이후 자유 민주주의의 더 많은 확대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근본주의가 초래된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근 몇년간의 고도화된 네트워크화로 인해, 사실상 국가는 시민들의 적절한 감시에 놓여있다고 여길수도 있을텐데요. 물론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미국 CIA와 같은 안보 당국이 자신들의 임의대로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펜데믹의 출현은 그것조차도 쉽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국가들의 실질적 자원이 현재 보건 관리에 투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시기에 단순히 마스크를 쓰지 않을 권리를 아주 공개적인 정치적 토론에 부쳐야 할지는 그 결론이 명백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앞선 왜곡된 믿음에 대해 로크의 "신념 독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지금과 같은 시기는 무엇보다 시민들의 도덕적 변별력을 부활시켜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즈음에서 편협한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평소에 자주 인용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마지막 호소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손잡고 무덤으로 가기 전에,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야만 한다"



-프레히트의 이 글은 특히, 4장 "시민의 의무와 탈도덕화"가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번 펜데믹 사태로 인한 국가의 전방위적인 보건 개입에 대해 과거 '복지국가로의 함의'로 이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데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대처조차도 본래대로 저들은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어합니다.  

자유주의 국가는 한편으론 자신이 시민에게 보장한 자유가 내적으로, 그러니까 개인의 도덕적 실체와 사회적 동질성을 통해 적절히 조절될 때에만 존속할 수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그런 서사적 모티브의 단골손님은 독재에 대한 꿈이다. 정치인들은 늘 독재를 꿈꾼다는 것이다

하필 네오 나치와 제국 시민 같은 파시스트들과 나란히 행진하면서 파시즘을 경고하는 것도 어리석은 자기 모순이 아니라 비상한 시대적 명령이다

도덕적 행동은 항상 타인의 권리는 지키는 일과 맥락이 닿아있다. 그에 대한 핵심적 인식은 19세기의 빌헬름 폰 훔볼트나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명확히 표현되었다

강자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약자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민족을 최적화한다는 이념은 19세기 후반에 강력히 대두되었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제기되어야 할 물음은 국가가 약자 보호의 조치를 통해 시민의 일상적인 삶에 개입하고 기본권을 일시적, 부분적으로 제한할 권리가 있느냐, 혹은 그럴 의무가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암울한 시대에 누구도 특정 목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원칙은 한마디로 혁명적이었다

따라서 코로나19에 대한 국가 대응이 적절했느냐의 물음은 두 가지 측면에서 던져질 수 있다. 첫째, 시민을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고, 그와 동시에 시민을 서로로부터 보호하는 데 국가는 의무를 다했는가? 둘째, 코로나와 비교할 때 여전히 무시되거나 진지하게 취급받지 않고 있는 다른 위험이나 위기에 대해서는 국가가 의무를 망각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런 진실에 매몰된 분노는 5G 통신탑을 불태우는 행동으로까지 나아간다. 코로나19가 5G 전파에서 생성되거나 전파를 통해 확산된다는 음모론에 사로잡힌 영국인들이 벌인 행동이다

약자 보호를 위한 국가의 보건 조치에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과도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뵈켄푀르테가 국가 운영에 필수적이라고 했던 <개인의 도덕적 실체>는 오늘날 상황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민주적 시민 의식과 자본주의적으로 배양된 이기심이 단순히 보완 관계가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힘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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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0 1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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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0 1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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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0 23: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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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19: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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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의 취약성 -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로빈 디앤젤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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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진 디앤젤로는 미국내에서 '백인성'연구로 저명한 학자이자, 인종주의에 대한 백인들의 모호성 및 묵인에 대한 문제를 다룬 '백인의 취약성' 등을 고안한 사회학자입니다. 그녀는 1991년 미국 시애틀 대학에서 역사학 학위를 받은 뒤, 2004년 워싱턴 대학에서 다문화 교육과 관련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게 됩니다. 노동자 계급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 오히려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밝힌 그녀는 현재 워싱턴 대학의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점차 확대되고 있는 다양성 교육과 관련해, 미국의 인종주의가 과거에 비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한편, 그녀는 이러한 연유에 미국 건국 이후부터 백인 남성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백인 계급의 이익이라는 사회적 관념이 제도화되었고 이것의 근본이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쯤에서 보면 역설적이게도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에 대한 세계인의 이미지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모두가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주제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White Fragility"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흔히 미국은 개념적으로 다원화된 국가이며, 이러한 체제를 견고한 민주주의가 뒷받침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뉴스와 그외 여러 논저들로 미국 사회가 심각한 인종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거의 모두가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이 글의 저자는 이러한 인종적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이 현재 다수 백인들에게 있다고 전제하고, 일부 극우주의자들과 인종주의자들 혹은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의해 일반적인 정치 무대 위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로 인해 견고하게 내면화되어 있는 인종주의가 꿈쩍도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현재의 사회가 다수 백인들에게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는 인식하에 지금도 인종 문제가 나아지고 있다는 터무니 없는 믿음과 백인은 대부분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하에 그럼에도 자신들은 이미 인종주의를 제도적 차원에서 내면화하고 있는 실정에서 이 인종주의 자체를 자의든 타의든 언급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저자는 '백인의 취약성'으로 해석하는데 글 전반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피터 칼레로의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흑인들이 직업적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등의 백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은 상당히 뿌리 깊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는 백인 엘리트들이 규정하고 확대시킨 '백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될 권리'와 관련해, 건국의 아버지들조차도 과거의 타성에 젖어 인종의 차이에 있어서 백인이 더 우월하다는 관념을 내재화시킨 결과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데요. 그러면서 다수 백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와 그것을 바탕으로 고도화 되어 심지어 이데올로기화 된 '능력주의'에 있어, 흑인들이 스스로를 교육하지 않고 성공하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고 믿고 있는 백인들의 그러한 관념체계는 저자의 언급대로 일종의 '암묵적 편향'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즉, 미국 사회가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상황은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다수 백인들의 가치 체계가 바로 앞선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데요. 뭐 이것을 단순한 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제 자체의 무결점성을 비롯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 체제 자체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타고난 재능이 없거나 자격이 없거나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진술과 이것이 작동시키는 건 "불평등한 체제로서 인종주의를 감추는 이데올로기로 작용되어 왔다"는 것을 저자 스스로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가진 부로 상위권에 속해 있는 계층의 일원들이 지금의 체제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인식이고, 백인 다수들이 미국 사회 체제의 일면들이 그렇게 나쁘다는 것이냐로 반문하게 되는 진정한 연유일 겁니다.

과거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노예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벌였던 정치적 로비라든지, "흑인이 마땅히 노예에 처해져야 한다" - 개인적으로 이 문장을 쓰면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삶이 노동에 처해졌다"는 문장이 떠올라 혼자 웃고 말았습니다 - 는 당위를 만들어내기 위해 당시 노예주들이 노력했다는 것은 꽤 유명하기도 한데요. 이처럼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역사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지금에야 여러 매스컴을 통해, 노골적인 인종주의 편견을 가진 백인은 나쁜 백인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흑인들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하며 비웃는 것에 대해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경우처럼 사회학자인 저자가 논하고 있는대로 다수의 백인들은 인종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즉, 저자의 의견대로 백인이 흑인과 같은 유색인들의 입장에서 미국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 인종적 편견을 포착하고 그것이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백인들 스스로 인정하고 개선시켜 나가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바로 이 부분에 있어 '백인의 취약성'이라는 사회적 언어가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글 초입에서 이미 "우리에게 편향이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그런 편향을 검증하거나 바로 잡지 않게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다수의 흑인들이 있는 장소나 거리에 갈때 백인들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고 합니다. 이것은 학교-교도소라는 파이프라인을 타고 상대적으로 더 많이 수감되어 있는 흑인사회의 현실, 자신이 멕시코계 라티노일 경우 백인에 비해 더 많은 형량을 받게 되는 현재의 미국 사법 시스템의 문제로 봤을 때, 이러한 암묵적 편향은 미국 사회에 지대하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물론 어처구니 없는 "백인은 인종주의적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대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순진한 백인'이라는 논법으로 이 인종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과거에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은 누구보다 인종주의적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과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는데요. 다른 인종에 비해 확연한 교육의 기회와 고용의 인센티브 더불어 사회 진출의 우위라는 측면에서 백인들이 누리고 있는 권리는 매우 지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에야 이런 현실에 눈을 감고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티파티'들이 있기도 합니다만 저자의 강조대로 미국 사회 체제 전반이 제도적으로 인종주의적 편견을 강화시켜왔고, 진지하고 현명한 백인은 이 인종 문제를 결코 입밖으로 내뱉지 않는다는 일종의 금언이 현재 대부분의 백인들이 내면화시킨 상황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청담동과 대치동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의 부동산 문제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제도화된 권리를 누리고 있는 자들이 반대편에 있는 상황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꺼내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은 그런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정색하며 언급하는 것이현재 일개 시민으로서의 백인들의 기본적인 관념 체계라 보여집니다.

끝으로 이 책은 사회학적인 논증과 더불어 르포르타주와 같은 여러 사례들이 뒷받침되어 있는 꽤 견실한 글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현재 미국의 개인주의적이고 능력주의적인 맹신 혹은 이데올로기화가 사회적으로 내면화되어 있어 이 인종주의 문제 조차도 개인적 문제로 축소시킬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다수 시민의 평등과 안녕을 강조하는 정치 이념으로서 세계 민주주의의 제일 국가라고 여겨지는 미국이 '백인 우월주의 국가'로 그려지는 것은 실로 미국에 각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일개 한국인으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저 역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절대선에 근접한 것이라고 세뇌를 받았기에 내심 관련 서적들을 접했으면서도 실제 미국 사회를 겪어본 것이 아니기에 그저 긴가민가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근래 미국 사회의 단면이 꽤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 조차 제대로 보장할 수 없는 미국의 현실은 실로 씁쓸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엉뚱한 소리겠지만 한편으론 이래서 미국인들이 평등을 좋아하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국제 사회에 미국이 부르짖는 인권의 개념은 지금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주의와 관련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 글 말미에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주의는 개개인의 성공을 막는 근본적인 장애물 따위는 없으며 실패는 사회 구조의 결과가 아니라 개성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백인은 우리의 인종 프레임에 관해 숙고하기를 유독 힘들어하는데, 인종적 관점을 갖는 것은 곧 편향되는 것이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믿음은 우리의 편향을 보호할 뿐인데, 우리에게 편향이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그런 편향을 검증하거나 바로 잡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지배 계급은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국 가난한 백인 노동 계급에 완전한 백인 지위를 부여했다. 가난한 백인이 자신들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갖게 되면 더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덜 집중할 터였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체제로서의 인종주의를 감추는 이데올로기들은 아마도 가장 강력한 인종적 구속력일 텐데, 일단 인종 위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나면 설령 우리에게 불리하다 해도 자연스럽 의심하기 어려운 처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인성을 백인이라는 존재의 모든 측면 - 단순한 신체적 차이를 넘어 사회에서 백인으로 규정된다는 것의 의미와 그에 따른 물질적 이첨과 관련이 있는 측면들 - 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백인 인종 프레임의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백인이 문화와 성취의 면에서 우월한 존재로, 유색인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성과의 면에서 제대로 백인보다 떨어지는 존재로 여겨진다. 또 국가를 운영하는 능력에서 유색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진다

흑인을 범죄와 연관짓는 백인의 굳은 확신은 현실을 왜곡하고 역사상 흑인과 백인 사이에 존재해온 위협의 실제 방향을 뒤집는다

그렇더라도 나는 인종주의에 기반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종주의의 구속력에 영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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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위한 인간
에리히 프롬 지음, 강주헌 옮김 / 나무생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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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젤리히만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태생의 독일계 유태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후에 학문적으로 동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유태인으로 알려졌고, 더불어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자신의 사회심리학에 융합해 해당 학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본디 그는 프랑크푸르크 대학에서 법철학을 전공하려 하였으나, 바로 2년 뒤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사회학으로 진로를 바꾸게 됩니다. 이후 나치 독일이 자신의 모국을 철저하게 장악하자 유태인이었던 그는 스위스 제네바로 옮겼으며, 1934년에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또한 자신의 삶에 있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게 됩니다. 앞서 짤막하게 언급한대로 프롬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분석적으로 개괄해 자신의 고유한 학문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데요. 뿐만 아니라 당시 각광을 받고 있던 허버트 스펜서의 '윤리학 원리'를 탐독했고, 프로이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허버트 스펜서 사상과 관련한 일종의 비판적 수용을 거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대의 허버트 스펜서와 히틀러의 나치라는 존재는 개인적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히틀러가 허버트 스펜서를 탐독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기도 합니다. 저도 다른 분들처럼 학부 시절에 무슨 유행처럼 에리히 프롬의 글을 찾아 읽기도 했습니다만 한나 아렌트처럼 전체주의의 연원을 알고 싶어했고 또한 시대의 어두운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나치즘에서 어떻게 하면 학문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에리히 프롬 역시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그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역시 그런 맥락에 있는 글이고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그와 같은 인식적 궤에 놓여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1947년 원제, "Man For Himself"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에 대한 약간의 개인적 소회라면, 예전 1980년대에 나온 그의 국내 해적판 판본을 여러 출판사 판으로 헌책방에서 주구장창 구입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제 서가에도 '에리히 프롬 섹션'을 만들어도 될 만큼 많은 해적판(?)이 쌓여 있는데요. 지금과 같은 합법적인 저작권 시대에 그런 출판물이 있었다는 것을 현재의 나이 어린 분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겠지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으로서 프롬은 그와 같은 인식하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꽤 면밀한 작업의 소산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언급하는대로 부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part 2 이기도 합니다만 그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는 상대주의적 윤리를 비롯한 철학과 심리학 및 역사학을 망라하는 저자의 논증적 나레이션과 더불어 과거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적 역사에 기반해 상대적으로 진정한 인간의 행복과 쾌락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이것에 대한 배경으로 철학과 역사학이 사회심리학과 만나 앞선 주제를 규명하는 데 지면이 할애되고 있었습니다. 즉, 이러한 가운데 윤리학의 역사적 맥락에서 '권위주의적 윤리'와 '인본주의적 윤리'를 비교 분석하며 양자를 단순히 대립적인 인식물로 보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성을 거부'하는 당위로 이 양자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게 되는 여러 연구와 역사적 배경에서 어떻게 서로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즉, 글 4장에서 '양심'과 '죄의식'이라는 주제로 권위주의적 윤리와 인본주의적 윤리를 매개로 그러한 대립되는 윤리적 맥락이 과연 인간에게 있어 어떠한 본질로 나타나게 되는지 서술하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거의 강요되기까지 하는 양심의 문제가 프롬은 권위주의 자체에 기반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와 더불어 인간을 불편하게 만드는 죄의식과도 뚜렷하게 연관 지으면서, 그동안 인간은 스스로의 본성에 입각한 양심을 거스리게 되는 경우에 사회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을 갖지 못하게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해 저자는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등하게 되는 양심의 문제, 깊은 죄의식의 발현은 다시금 강조하지만 사회의 일방적인 권위주의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것을 과연 인간 본성의 양심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에 대해 프롬은 회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이 1947년에 쓰여진 것을 감안한다면, 나치 독일에 의해 조직적으로 인간의 이기심, 이익, 행복 및 쾌락 등이 전체주의 시기에 분쇄되어 왔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프롬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계보를 잇는 학자여서가 아니라 전체주의에 대한 뼛속 깊은 각인이 내재되어 있고 기존의 건전한 공동체주의와 그러한 인식이 분명 사회에 필요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 및 이기심의 추구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글을 읽지 않아도 선선히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1장 중간에 프롬은 "아직도 개인의 이기심 추구라는 인식과 그에 따른 행위 추구 자체가 제한되어 있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는데요. 이것을 거창하게 사회적 진보라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인류의 지성사라는 측면에서 전체주의라는 굴절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이를 통해 거듭 강조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프롬은 글의 4장 초입에서 이 '이기심'을 꽤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앞선 1장의 성격의 역동적 측면이라는 여러 지향적인 분석과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이기심의 인간'을 단순히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이기심의 본질을 인간의 본성에서 마땅히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기는 힙듭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한가지 프롬의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하느님의 도구가 아니라 경제 기구와 국가의 도구가 되었고, 하느님의 도구라는 역할이 아니라 산업 발전을 위한 도구라는 역할을 받아들였다"고 이와 같은 이기심의 논증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이와 함께 '단순히 소유하는 것, 소유의 문제'를 뒤이어 쾌락과 관련해 비교 분석하고 있긴 하지만 학문적 엄숙주의를 경계한 프롬의 입장에서 아마도 그가 찾으려고 했던 인간 본성의 이기심이 후에 현대 사회에서 오로지 경제적 이기심의 한 방편으로 왜곡되어 확산되었던 것을 아마도 예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데요. 이러한 저의 예측은 마지막 종교에 관한 논증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멀지 않은 사회에서 종교적 쇠퇴가 '더 빠른 자본주의의 확대'로 벌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면 그가 짓는 표정이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본질적으로 이 이기심과 관련해, 프롬은 인간이 오로지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으며, 자신의 이기심을 스스로 배려하지 않고 남을 위해 고려하고 신경쓰는 행위 자체가 본연의 인간 모습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내 이기심을 스스로 제한시켜 남을 배려하고 타인의 기분을 위해 행동하는 것 자체가 진정한 이타와 이기의 어느 한쪽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점이 일견 타당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너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너에게 최선인 것을 목표로 행동하라.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이다"라고 프롬은 인용하면서 그에 기반한 자기 중심주의가 보편적 행복의 기초라는 생각에서 나아가 경쟁 사회의 기본 원칙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고 에둘러 인정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기조에서 모두가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한데요. 공동체주의의 선을 갖다가 다수의 시민들은 적절하게 행동하라고 가르침을 내리고, 반면에 막대한 자원을 가진 자들의 이기심은 충분히 충족하는게 소위 '낙수 효과'와 견고한 사회적 토대를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요즘의 원리원칙이 허버트 스펜서가 윤리에 있어서 상대주의의 길을 놓았다는 프롬의 명백한 결론과 다소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졌습니다.

다음 인간의 쾌락과 행복에 관련해, 프롬은 스피노자와 예전 그리스 철학에서 인식의 근원을 찾고 있었지만, 큰 부분에서 여전히 허버트 스펜서의 사상을 단초로 삼고 있었습니다. 허버트 스펜서 역시 스스로 학문의 본질에서 엄숙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 '인간의 쾌락에 대한 종교의 개입'을 마뜩잖아 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스펜서의 입을 통해 분석하는 프롬의 쾌락론은 꽤 노골적입니다. 쾌락의 본질에서 '섹스의 결핍'라는 결과를 언급하는 것도 그 이해를 떠나 약간 놀랍기도 이것보다 자유와 행복을 논박하면서 쾌락을 부인하는 것 자체가 선함의 증거라고 주장하기 쉬워졌다고 말하는 것은 이보다 더 놀랍기도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생리적인 욕구에 속하는 '섹스'가 일반적인 남녀간의 이성애적인 측면에서 어느 일방이 노골적으로 원한다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동반되는 것이 섹스이기도 하기 때문에 단순히 쾌락적인 측면에서 마냥 양자가 동일한 이해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진술상 아주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기만하게 되는 측면에서의 사랑" 뿐만 아니라 "순수한 타인과의 사랑"도 분명 사회에 존재하고 사랑 전부를 객관화된 분석물로서 학문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철학적인 측면에서도 내 자신에 대한 사랑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사랑도 중요하고, 루소가 은연중에 강조했던 인간이 고립된 존재로서의 사회적 자각이 수반될 수 있다 하더라도 평범하고 또한, 프롬이 싫어하는 표현인 '보편적인'인 인간에겐 매우 필요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을 허버트 스펜서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쾌락과 사랑을 적절하게 분리하여 이것을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객관화 시킬 수 있는 문제인지는 꽤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논하는 인본주의적 윤리관의 비판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향한 사랑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기본적으로 모순"이라는 진술에 대해 이를 선택론에 입장에서 주장한 심리학이 있냐고 반문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쾌락과 사랑의 문제는 도식적으로 분리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존재합니다. 이처럼 그가 스펜서의 영향을 받은 부분들은 조금 아쉽기도 했는데요. 물론 프로이트가 온전히 그의 학문적 기반이지만 사회심리학 자체가 스펜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사회를 규정하는 윤리적 문제에서 상대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개변적인 윤리주의자들이 그만큼 인간의 본성 문제를 학문적으로 복잡하게 만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글이 쓰여진 1940년대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저변이 확대되었다고 볼 수 없는 프롬의 사회심리학의 논저는 저에게도 이기심과 양심 그리고 죄의식에 대한 부분에서 생각할 거리를 남겨 놓았습니다. 인간 본성이 보편적일 수가 없다는 것은 각각의 개인들이 고유한 주체이자 주관화 된 존재여서 더욱 그럴 것입니다. 현재에는 이기심의 문제 자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다방면의 의견으로 학문적인 토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이기심이 과연 '평등한 이기심'인지는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더욱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글에서 프롬이 간략하게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공동체주의가 현대 사회에서 법으로만 강제되어 거의 무력화 되었다고 봐야하기 때문에 이는 어쩌면 다음 세기의 학자들의 손에 넘겨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사회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프롬의 글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의 지식을 섭렵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대의적으로는 프롬도 인본주의적 사회의 실현을 강조했지만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 그를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로 몰고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분별력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롬의 이 책은 C. 라이트 밀스의 평전에서 인용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유로부터의 도피' part 2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프롬은 평등의 관념에 대해 다소 공격적이었는데요. 민주주의 역시 평등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이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프롬은 '시장이라는 동등한 조건'이라는 것을 당시에 너무 믿고 있었는데요. 시장이 어떻게 인본주의와 연결되는지는 대략 감이 잡히기도 했습니다만 지식도 일종의 상품이자 인간도 동일하게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그는 대단히 자유로운 인식으로 판단하는 듯 했습니다. 


현대 문화는 이기심(selfishness)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인간이 모순을 인지하고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을 방해받는다면, 모순의 존재 자체가 부인되어야 한다

듀이는 수단과 목적의 상관관계를 강조했고, 이 사살은 합리주의적 윤리학의 발전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의 행위는 타고난 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수행할 때마다, 또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삶이 불안정하고 고단할 것이다

평등은 개개인의 특유성을 개발하는 조건이 되기는커녕 개성의 멸절을 뜻하고, 시장 지향의 특징인 몰아 selflessness를 뜻한다

비이기심이라는 이데올로기에는 엘리트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국민을 기만합으로써 착취와 조작을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 감춰져 있다

인간은 자유를 억압받으면 본능적으로 자신에게도 원망의 화살을 돌린다는 니체의 주장이 옳다는 걸 프로이트는 설득력 있게 입증해 보였다

죄책감이 의존성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고, 권위주의적 윤리가 인류의 역사에서 맡은 사회적 기능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양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양심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양심의 상ㅇ대적인 무용성이라는 문제가 생겨난 것일 수 있다

쾌락 원칙을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체계적으로 다룬 허버트 스펜서의 윤리학 원리는 쾌락의 심도 있는 연구를 위한 최적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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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도 잘 모르는 미국 선거 이야기 한겨레지식문고 2
L. 샌디 메이젤 지음, 정의길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루이스 샌디 매이젤 (혹은 마이셀) 은 1971년부터 미국 메인 주에 소재한 콜비 대학의 정치학 교수로서, 콜비 대학의 골드파브 공공 및 시민 참여 센터의 창립이사 (2003~2012)로 활동한 바가 있습니다. 특히, 미국 정당과 선거를 포함한 17권의 논저를 쓴 연구자이기도 한데요. 이와 달리 그의 색다른 경력에는 1978년에 메인주 의회 예비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어 출마한 이력도 갖고 있습니다. 1989년에는 올해의 메인 주 교수를 수상받을 정도로 여러 다른 이력들을 포함해 꽤 인정을 받은 학자라도 볼 수 있겠는데요. 콜비 대학의 홈페이지에 가보니 현재는 교수를 은퇴하고 여러 언론사 기고와 집필활동에 매진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A Very Short Introduction : American Political Parties And Elections"로 20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지난 2010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책은 절판되었습니다.

우선 샌디 메이젤의 이 책은 얇은 팜플렛과 같은 소책자로 현재의 미국 선거제도 및 양당 제도와 관련해, 일반인들을 위해 꽤 명료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역시 그 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미국 연방 대통령 선거에서의 선거 인단 제도를 위해 이 글을 고르게 되었는데요. 매이젤의 이 책이 아주 전문적인 정치 논저라고는 볼 수 없지만 평소에 미국 선거 제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원하는 분들께는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조금 이른 결론이기도 하지만 메이젤이 이 책의 말미에 이르러 의미심장하게도 현재 미국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피력하면서 얼마간 선거인단 제도의 개혁을 포함한 제도 개혁이 있어야 믿고 있었습니다. 이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현재까지 왜, 미국 정치 제도하에서 아직도 그와 같은 선거인단 제도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몇가지 원인들을 인식하게 된 것은 마찬가지로 일독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글의 1장에서 저자는 지금의 선거인단 제도에 대해, "선거인단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자신들이 직면했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했다"는 개인적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다수가 소수의 권리를 억압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깊게 본 것이 그들이었고, 영국 정치와 자신들에게 건전한 공화주의 맥락으로서 이러한 미국의 제도적 기틀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겁니다. 사실 그동안 여러 보수적인 미국 학자들에 의해, 전통적인 제도적 측면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라는 이유만으로 오래된 선거 제도에 대한 일말의 개선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헌법을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하는 일도 있었지만, 연방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인단 제도 만큼은 그동안 여러 여론들이 있었음에도 개선의 의지를 갖기가 다소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미국 의회제 내에서의 특별한 제도인 상원제도와 맞물린 선거인단 제도가 소수 주(state)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이유이기도 한데요. 사실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상원보다 더 문제가 있는 것은 하원의 선출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글 6장에서는 "하원의원 선거에는 거의 경쟁이 없다. 2006년 선거를 포함해 지난 30년간 선거 때마다 재출마한 현직 의원의 90퍼센트 이상이 재선해 성공했다"고 언급되고 있는데요. 이렇게 기존의 권력이 고착화되어 있는것이 자신들의 민주주의에 과연 이로울 것인가에 대해 짐작해 보건대 거의 회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많은 미국인들이 희화화해 마지 않는 현재 일본의 자민당이 주도하는 의회 민주주의가 실상 자신들의 하원과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측면은 아이러니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일각의 보수주의적인 시각에서 기존의 시스템을 잘 유지하는 것도 충분히 공감을 살 만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효율적인 측면"에서 특히나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표시의 실효적인 관심사를 수렴해, 정치인들과 정당인들은 마땅히 이를 수용해 제도의 누수된 부분을 개선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요. 하지만 이 글 1장과 2장을 거치며 논증되는 소위 미국 정당 정치의 연원이 과거 정치에서 "엘리트들의 부업"이라는 것과 지역 내의 보스들이 해당 정치를 좌지우지 해왔다는 측면으로 지금도 상원을 저명한 정치 가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오랫동안 독점하고 있는 실정은 민주주의의 효율적이고 다원적인 범주 바깥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즉, 정치 제도에 대한 개선과 기존의 제도 유지라는 양자의 대결이 민의의 수렴이라는 대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정치의 이득 추구'라는 측면에 거의 메몰되어 있는 것이 현재 미국 정치의 심각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저자는 현재의 정당 정치와 이익 단체가 거의 상명하복과 다름없는 매커니즘을 갖고 있는 것을 건조하게 진술하고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을 공생관계로 밀착하는 양자간의 관계가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것은 모두가 짐작할 만합니다. 이는 5장에서 미국 선거 내에, 연방 정부 보조금인 하드 머니 (Hard Money)와 일종의 사적 모금액이라고 볼 수 있는 소프트 머니(Soft money)의 격차가 정치 신인들이 등장하기 여려운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꾸준히 연방 정부의 보조금이 증액되어 왔지만 아직도 후보자들에 따라 비대칭적인 막대한 소프트 머니의 존재 여부는 미국 선거판 뿐만 아니라 미국의 민주주의의 시적 이익화된 측면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정치를 본업이라고 봐도 무방한 정당인들과 그들의 밑에서 경력을 쌓으려는 여타 신진들이 기존의 시스템에 순응하면서 강고한 제도하에서 자신들의 개혁 성향을 잃게 되는 것은 현 상황에서 미국 선거 제도의 최소한의 개선 필요성은 차고 넘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미국 대선에 출마한 힐러리 클린턴의 경우, 미국의 각 주에 이미 구성되어 있던 남편인 빌 클린턴의 선거 조직을 이어받고 이로 인해 다른 민주당 내의 정치 신인들보다 더 수월하게 선거를 치뤘던 것은 본선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참신한 주자들의 의지를 꺾는 것으로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예비 선거 도중에도 과거 빌 클린턴의 사례와 같이 당 지도부의 소위 과감한 선택을 수락하는 식의 밀실 정치가 미국 정당 정치내에서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우려스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미국 양당 제도의 어두운 측면이 바로 이 부분을 뜻한다고 생각되는데요. 결국 현재에 민주당 혹은 공화당 지지가 아닌 무당파가 거의 40%가 넘는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양당 제도의 꽃이라는 국가에서 무당파가 저런 수치로 나온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 불신의 문제라고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대선에서 선거 인단을 뽑는 주 투표에서, 자신들이 월등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주에는 당의 관심과 정치적 지원이 전무하고 치열한 경합주에 대해선 막대한 물량과 인력을 투입하는 양태는 미국 정치가 도저히 건전해 보일 수 없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미국 대선 자체가 승자 독식의 일종의 치킨 게임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기존의 정치 기득권들이 현재의 시스템을 바꾸는 것에 대한 부정적이라는 의견과 이를 통해 거의 새로운 얼굴들의 정치 입문을 막고 또한, 시민의 정치적 요구를 이익 단체들의 사적 이익보다 부차적인 문제가 된 것은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큰형이라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과연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찰할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 지형상 다수의 남부 백인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및 다수의 히스패닉 계열의 지지를 받고 있는 공화당과 소수의 유대인들과 근로 노동자들, 그리고 흑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민주당의 이 양당 체제는 단순히 기득권 정치의 돌이킬 수 없는 강고함을 넘어 어떻게 민주주의의 실효적인 측면에서 최소한의 변화마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데요. 그동안 정치학계 내에서 이런 미국의 양당 제도가 민주주의 하에서 비용을 그리 많이 지출하지 않는 효율적이고 더불어 국가 전체를 소모적인 정쟁에 빠트리지 않는 최소한의 장치를 갖고 있는 정치라고 여겨왔는데요. 사실 이 부분에서 중요하게 비판해야 할 부분은 소위 튼튼한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불신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 선거 제도의 플레이어들이 이러한 정치 불신을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입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정치는 자신들만이 참여하고, 시민들은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라는 극단적인 모토라고 이해됩니다. 그래서 이들이 오히려 중도층의 주장과 요구에 귀를 귀울이면서 기존의 정치를 개선시켜 나가는 것도 제도 자체를 개선시킬 수 있는 의지를 미연에 막아왔던 것도 사실인데요. 또한, 선거인단 제도의 개혁과 관련해, "일반 투표의 득표수에 비례해 선거인단 투표를 나눠주는 방식"이 기존의 미국 대선에서의 직접 선거 보다는 크게 거부감이 적은 방안일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강하게 맞물려, 인구 수가 적은 주들의 권리를 어떻게 하면 다른 방식으로 보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도높은 고려와 현재의 상하원 제도를 민주주의의 진정한 효율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하면 실용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미국의 민주주의가 자유 진영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고 이를 바탕으로 각 국에서 경제적 번영을 추동했던 것은 분명 미국의 직간접적인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미국인들 스스로 기존의 가치 체계가 과연 현재에도 유효한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개선시킬 의지를 갖는 것이 미국 정치 뿐만 아니라 전세계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문 86페이지의 '사회화'는 앞뒤 맥락으로 봤을 때, 사익화가 맞는 표현 같은데요. 원서를 보지 못해 국문 번역으로 추측해 본 점은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존의 선거인단 제도를 지지하고 있는 계층들 가운데, 미국 내에 히스패닉과 같은 소수 인종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 유지를 위해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는 인구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주들도 유사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저자가 인식하고 있는 미국 정치의 나레이션이 꽤 객관적이고, 소위 미국 만세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아서 미국 정치 시스템에 대한 한계점이라든지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서 일반 독자들이 꽤 객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재간행 이야기 들려오지 않는 이 책을 광고나 하려고 쓰는 글은 아니지만 다른 분들의 느낌과는 달리 기본적인 번역도 크게 나쁘지 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양당제는 일단 성립되기만 하면 자신들의 계속적인 지배를 보장하는 추가적인 대책들을 강구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군소정당과 그 후보에게 현저한 불이익을 주는 선거운동 비용 제도이다

특정 선거에 자원을 집중한다는 당의 결정은 이익단체에도 그 선거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신호이다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의원내각제의 정치인들과 달리 당 정강에 충실하지는 않지만, 당 정강은 유권자의 입장에서 정당들을 규정짓는 좋은 방식이다

가톨릭 교도는 민주당의 정치연대에서도 거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공화당 정치 연대에서도 민주당원의 30퍼센트에 이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흑인은 전체 민주당원의 30퍼센트에 이르나, 공화당에서는 1퍼센트 남짓이다

특정 당이 지배하는 지역의 공직자는 여러 당이 경쟁하는 지역의 공직자보다 논쟁적인 이슈에서 더 당파적이고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선출 공직자(특히 그의 동료 공화당 주지사들) 등 각 당 지도자, 아버지의 선거 운동 지지자, 텍사스 부유층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부시는 첫 예비선거 투표가 있기도 전에 7,0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작은 주에는 두 명의 상원의원 수만큼 선거인단을 그대로 배분해 약간의 혜택을 주는 현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되, 일반 투표의 득표수에 비례해 선거인단 투표를 나눠 갖는 것이 최선의 제도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에 집중한다는 전략적 함의는 무언인가? 2000년과 2004년 격전지 주에 살고 있던 미국인은 대통령 후보와 러닝 메이트, 그들의 부인, 대리인들의 방문을 질리도록 받았다. 다른 35개 주에 살던 미국인은 그런 선거운동 방문을 거의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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