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위한 인간
에리히 프롬 지음, 강주헌 옮김 / 나무생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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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젤리히만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태생의 독일계 유태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후에 학문적으로 동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유태인으로 알려졌고, 더불어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자신의 사회심리학에 융합해 해당 학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본디 그는 프랑크푸르크 대학에서 법철학을 전공하려 하였으나, 바로 2년 뒤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사회학으로 진로를 바꾸게 됩니다. 이후 나치 독일이 자신의 모국을 철저하게 장악하자 유태인이었던 그는 스위스 제네바로 옮겼으며, 1934년에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또한 자신의 삶에 있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게 됩니다. 앞서 짤막하게 언급한대로 프롬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분석적으로 개괄해 자신의 고유한 학문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데요. 뿐만 아니라 당시 각광을 받고 있던 허버트 스펜서의 '윤리학 원리'를 탐독했고, 프로이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허버트 스펜서 사상과 관련한 일종의 비판적 수용을 거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대의 허버트 스펜서와 히틀러의 나치라는 존재는 개인적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히틀러가 허버트 스펜서를 탐독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기도 합니다. 저도 다른 분들처럼 학부 시절에 무슨 유행처럼 에리히 프롬의 글을 찾아 읽기도 했습니다만 한나 아렌트처럼 전체주의의 연원을 알고 싶어했고 또한 시대의 어두운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나치즘에서 어떻게 하면 학문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에리히 프롬 역시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그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역시 그런 맥락에 있는 글이고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그와 같은 인식적 궤에 놓여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1947년 원제, "Man For Himself"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에 대한 약간의 개인적 소회라면, 예전 1980년대에 나온 그의 국내 해적판 판본을 여러 출판사 판으로 헌책방에서 주구장창 구입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제 서가에도 '에리히 프롬 섹션'을 만들어도 될 만큼 많은 해적판(?)이 쌓여 있는데요. 지금과 같은 합법적인 저작권 시대에 그런 출판물이 있었다는 것을 현재의 나이 어린 분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겠지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으로서 프롬은 그와 같은 인식하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꽤 면밀한 작업의 소산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언급하는대로 부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part 2 이기도 합니다만 그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는 상대주의적 윤리를 비롯한 철학과 심리학 및 역사학을 망라하는 저자의 논증적 나레이션과 더불어 과거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적 역사에 기반해 상대적으로 진정한 인간의 행복과 쾌락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이것에 대한 배경으로 철학과 역사학이 사회심리학과 만나 앞선 주제를 규명하는 데 지면이 할애되고 있었습니다. 즉, 이러한 가운데 윤리학의 역사적 맥락에서 '권위주의적 윤리'와 '인본주의적 윤리'를 비교 분석하며 양자를 단순히 대립적인 인식물로 보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성을 거부'하는 당위로 이 양자가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게 되는 여러 연구와 역사적 배경에서 어떻게 서로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즉, 글 4장에서 '양심'과 '죄의식'이라는 주제로 권위주의적 윤리와 인본주의적 윤리를 매개로 그러한 대립되는 윤리적 맥락이 과연 인간에게 있어 어떠한 본질로 나타나게 되는지 서술하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거의 강요되기까지 하는 양심의 문제가 프롬은 권위주의 자체에 기반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와 더불어 인간을 불편하게 만드는 죄의식과도 뚜렷하게 연관 지으면서, 그동안 인간은 스스로의 본성에 입각한 양심을 거스리게 되는 경우에 사회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을 갖지 못하게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해 저자는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등하게 되는 양심의 문제, 깊은 죄의식의 발현은 다시금 강조하지만 사회의 일방적인 권위주의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것을 과연 인간 본성의 양심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에 대해 프롬은 회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이 1947년에 쓰여진 것을 감안한다면, 나치 독일에 의해 조직적으로 인간의 이기심, 이익, 행복 및 쾌락 등이 전체주의 시기에 분쇄되어 왔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프롬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계보를 잇는 학자여서가 아니라 전체주의에 대한 뼛속 깊은 각인이 내재되어 있고 기존의 건전한 공동체주의와 그러한 인식이 분명 사회에 필요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 및 이기심의 추구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글을 읽지 않아도 선선히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1장 중간에 프롬은 "아직도 개인의 이기심 추구라는 인식과 그에 따른 행위 추구 자체가 제한되어 있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는데요. 이것을 거창하게 사회적 진보라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인류의 지성사라는 측면에서 전체주의라는 굴절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이를 통해 거듭 강조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프롬은 글의 4장 초입에서 이 '이기심'을 꽤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앞선 1장의 성격의 역동적 측면이라는 여러 지향적인 분석과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이기심의 인간'을 단순히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이기심의 본질을 인간의 본성에서 마땅히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기는 힙듭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한가지 프롬의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하느님의 도구가 아니라 경제 기구와 국가의 도구가 되었고, 하느님의 도구라는 역할이 아니라 산업 발전을 위한 도구라는 역할을 받아들였다"고 이와 같은 이기심의 논증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이와 함께 '단순히 소유하는 것, 소유의 문제'를 뒤이어 쾌락과 관련해 비교 분석하고 있긴 하지만 학문적 엄숙주의를 경계한 프롬의 입장에서 아마도 그가 찾으려고 했던 인간 본성의 이기심이 후에 현대 사회에서 오로지 경제적 이기심의 한 방편으로 왜곡되어 확산되었던 것을 아마도 예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데요. 이러한 저의 예측은 마지막 종교에 관한 논증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멀지 않은 사회에서 종교적 쇠퇴가 '더 빠른 자본주의의 확대'로 벌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면 그가 짓는 표정이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본질적으로 이 이기심과 관련해, 프롬은 인간이 오로지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으며, 자신의 이기심을 스스로 배려하지 않고 남을 위해 고려하고 신경쓰는 행위 자체가 본연의 인간 모습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내 이기심을 스스로 제한시켜 남을 배려하고 타인의 기분을 위해 행동하는 것 자체가 진정한 이타와 이기의 어느 한쪽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점이 일견 타당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너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너에게 최선인 것을 목표로 행동하라.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이다"라고 프롬은 인용하면서 그에 기반한 자기 중심주의가 보편적 행복의 기초라는 생각에서 나아가 경쟁 사회의 기본 원칙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고 에둘러 인정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기조에서 모두가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한데요. 공동체주의의 선을 갖다가 다수의 시민들은 적절하게 행동하라고 가르침을 내리고, 반면에 막대한 자원을 가진 자들의 이기심은 충분히 충족하는게 소위 '낙수 효과'와 견고한 사회적 토대를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요즘의 원리원칙이 허버트 스펜서가 윤리에 있어서 상대주의의 길을 놓았다는 프롬의 명백한 결론과 다소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졌습니다.

다음 인간의 쾌락과 행복에 관련해, 프롬은 스피노자와 예전 그리스 철학에서 인식의 근원을 찾고 있었지만, 큰 부분에서 여전히 허버트 스펜서의 사상을 단초로 삼고 있었습니다. 허버트 스펜서 역시 스스로 학문의 본질에서 엄숙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 '인간의 쾌락에 대한 종교의 개입'을 마뜩잖아 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스펜서의 입을 통해 분석하는 프롬의 쾌락론은 꽤 노골적입니다. 쾌락의 본질에서 '섹스의 결핍'라는 결과를 언급하는 것도 그 이해를 떠나 약간 놀랍기도 이것보다 자유와 행복을 논박하면서 쾌락을 부인하는 것 자체가 선함의 증거라고 주장하기 쉬워졌다고 말하는 것은 이보다 더 놀랍기도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생리적인 욕구에 속하는 '섹스'가 일반적인 남녀간의 이성애적인 측면에서 어느 일방이 노골적으로 원한다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동반되는 것이 섹스이기도 하기 때문에 단순히 쾌락적인 측면에서 마냥 양자가 동일한 이해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진술상 아주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기만하게 되는 측면에서의 사랑" 뿐만 아니라 "순수한 타인과의 사랑"도 분명 사회에 존재하고 사랑 전부를 객관화된 분석물로서 학문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철학적인 측면에서도 내 자신에 대한 사랑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사랑도 중요하고, 루소가 은연중에 강조했던 인간이 고립된 존재로서의 사회적 자각이 수반될 수 있다 하더라도 평범하고 또한, 프롬이 싫어하는 표현인 '보편적인'인 인간에겐 매우 필요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을 허버트 스펜서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쾌락과 사랑을 적절하게 분리하여 이것을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객관화 시킬 수 있는 문제인지는 꽤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논하는 인본주의적 윤리관의 비판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향한 사랑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기본적으로 모순"이라는 진술에 대해 이를 선택론에 입장에서 주장한 심리학이 있냐고 반문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쾌락과 사랑의 문제는 도식적으로 분리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존재합니다. 이처럼 그가 스펜서의 영향을 받은 부분들은 조금 아쉽기도 했는데요. 물론 프로이트가 온전히 그의 학문적 기반이지만 사회심리학 자체가 스펜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사회를 규정하는 윤리적 문제에서 상대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개변적인 윤리주의자들이 그만큼 인간의 본성 문제를 학문적으로 복잡하게 만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글이 쓰여진 1940년대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저변이 확대되었다고 볼 수 없는 프롬의 사회심리학의 논저는 저에게도 이기심과 양심 그리고 죄의식에 대한 부분에서 생각할 거리를 남겨 놓았습니다. 인간 본성이 보편적일 수가 없다는 것은 각각의 개인들이 고유한 주체이자 주관화 된 존재여서 더욱 그럴 것입니다. 현재에는 이기심의 문제 자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다방면의 의견으로 학문적인 토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이기심이 과연 '평등한 이기심'인지는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더욱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글에서 프롬이 간략하게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공동체주의가 현대 사회에서 법으로만 강제되어 거의 무력화 되었다고 봐야하기 때문에 이는 어쩌면 다음 세기의 학자들의 손에 넘겨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사회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프롬의 글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의 지식을 섭렵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대의적으로는 프롬도 인본주의적 사회의 실현을 강조했지만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 그를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로 몰고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분별력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롬의 이 책은 C. 라이트 밀스의 평전에서 인용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유로부터의 도피' part 2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주의의 영향 때문인지 프롬은 평등의 관념에 대해 다소 공격적이었는데요. 민주주의 역시 평등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이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프롬은 '시장이라는 동등한 조건'이라는 것을 당시에 너무 믿고 있었는데요. 시장이 어떻게 인본주의와 연결되는지는 대략 감이 잡히기도 했습니다만 지식도 일종의 상품이자 인간도 동일하게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그는 대단히 자유로운 인식으로 판단하는 듯 했습니다. 


현대 문화는 이기심(selfishness)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인간이 모순을 인지하고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을 방해받는다면, 모순의 존재 자체가 부인되어야 한다

듀이는 수단과 목적의 상관관계를 강조했고, 이 사살은 합리주의적 윤리학의 발전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의 행위는 타고난 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수행할 때마다, 또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삶이 불안정하고 고단할 것이다

평등은 개개인의 특유성을 개발하는 조건이 되기는커녕 개성의 멸절을 뜻하고, 시장 지향의 특징인 몰아 selflessness를 뜻한다

비이기심이라는 이데올로기에는 엘리트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국민을 기만합으로써 착취와 조작을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 감춰져 있다

인간은 자유를 억압받으면 본능적으로 자신에게도 원망의 화살을 돌린다는 니체의 주장이 옳다는 걸 프로이트는 설득력 있게 입증해 보였다

죄책감이 의존성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고, 권위주의적 윤리가 인류의 역사에서 맡은 사회적 기능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양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양심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양심의 상ㅇ대적인 무용성이라는 문제가 생겨난 것일 수 있다

쾌락 원칙을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체계적으로 다룬 허버트 스펜서의 윤리학 원리는 쾌락의 심도 있는 연구를 위한 최적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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