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다음 세상을 위한 텐 레슨 - 개인의 운명과 세상의 방향을 결정지을 10가지 제언
파리드 자카리아 지음, 권기대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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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뭄바이의 샤이크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파리드 자카리아는 미국의 소위 주류 언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자이자 정치평론가로 일단 그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 좌파나 혹은 정치적 중간 계층에 가까운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예일대학에서 학사를,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게 됩니다. 이후 그가 28세이던 1992년에 '포린 어페어스' 편집장으로 임명되고 동시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겸임 교수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2000년 10월에는 뉴스 위크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게 되는데요. 현재는 CNN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중인데, 파리드 자카리아 GPS가 그것입니다. 또한, 워싱턴 포스트에 매주 유료 칼럼을 기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의 대부분의 경력이 언론과 싱크탱크에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스스로 이런 평론가로서의 삶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바가 분명 있다고 진술했던 것으로 보아 단순히 돈이나 명예 때문에 움직이는 인물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자카리아는 과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 당시 백악관을 강도 높게 비판한 바가 있고 그럼으로 스스로를 '중도주의자'라고 지칭하는 만큼 거의 자유주의적 좌파에 가까운 인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은 원제, "Ten Lesson For A Post-Pandemic World"로 지난 202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자카리아의 이 책은 전세계의 펜데믹 사태 이후, 과연 세계가 어떠한 모습을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통찰을 담은 일종의 광범위한 예측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그의 분석에 따른 현재의 정치경제학적인 비평과 앞으로의 예측을 담은 논증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진술되는 자카리아의 글 자체는 일정 부분 예측의 한계와 근거의 결핍이 적지 않다고 여겨지는데요. 이것이 리버럴적인 중도 좌파의 애매한 정치적 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논점 마다 비판의 강도가 다소 약한 점은 꽤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일단 현재의 미국과 그 주변부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분석으로 시작되는 1장부터 4장은 펜데믹 사태로 여실히 드러난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와 더불어 그것의 비판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극우 포퓰리즘, 도널드 트럼프의 대두 그리고 노골적인 반지성주의 흐름을 꽤 일목요연하게 다루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트럼프와 같은 극단적 포퓰리스트는 기존의 체제 즉, 전문가 정치와 기존의 엘리트 지배체제를 뒤엎기 위해 나섰지만 그는 어떠한 실질적 대안 없이 그저 자신의 인기와 정치적 경력을 위해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도 일종의 왜곡된 수사로 점철된 그를 가리키고 있지만,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는 부패하고 무능력하기 때문에 깨끗한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는 발언으로 큰 표를 얻어냈고, 결국은 이러한 미국 시민들의 표가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자카리아도 거듭 인정하고 있듯이, 펜데믹 초기에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제대로 듣지 않고 (물론 초기라 데이터가 전무하기는 했지만) 마스크 착용 문제부터 엇박자를 놓기 시작했던 당시 워싱턴의 행태는 익히 잘 알려져 있는데요. 기존 체제를 불신하고 이를 개혁하겠다는 미명하에 정권을 잡았던, 트럼프 집권기의 정치가 그런 실질적인 개혁에 나섰는지는 매우 불명확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더 큰 문제는 자카리아가 얼마 안되는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을 동일한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인데요. 하지만 우익 포퓰리즘의 해악성은 제가 보기에는 한 줌도 안되는 좌파 포퓰리즘과는 거의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극우 포퓰리즘이 이민자 배척, 인종주의, 성소수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혐오는 미국 사회에 그나마 있었던 정치적 건전성을 전부 일소하는데 이르게 되었는데요. 이에 대해 제대로 된 평론가라면 이러한 파국을 단순히 정치적 의견의 차이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카리아 역시 스티브 배넌의 예를 들어, 우익 포퓰리즘 정치가 기존의 정치 체제를 아무런 대안 없이 구축의 대상으로 삼았고, 펜데믹 사태의 원인에 대해 숱하게 가짜 뉴스와 음모론으로 도배 되었던 당시 미국의 상황을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기도 한데요. 사실 이러한 전개 과정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익 포퓰리즘과 뒤에서 다루게 될 반지성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 4장은 조너선 하이트를 위시한 '동기를 지닌 추론 motivated reasoning'의 문제와 더 나아가 진실과 사실에 눈을 감고 오로지 '당파적 사고'에 물든 많은 유권자들의 행태를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는데요. 앞선 장에서 인용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비토크라시'가 이와 같은 맥락일겁니다. 이는 상대방의 정치적 발언이나 주장들을 백안시하면서 반대로 오로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 세력이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강고한 외눈박이 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버머스가 강조한 '공론장의 정치'가 미국에서 가히 유명무실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무 평론가들이 레딧 redit의 사례를 들며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여기는 듯 하지만 현실은 안타까울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언론에 몸담고 있는 인물이 자신의 경력을 고려한다면 이런 유권자들의 한계를 다루는 것이 아마도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특히나 극우 포퓰리즘에 가까운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는 유권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 전반에 반지성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전문가들의 조언이나 분석을 귀담아 듣지 않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신들의 '개인적 자유'를 우월적 가치로 놓으면서 말이죠. 저 역시 이러한 계층의 지성과 다소 저학력의 상황을 끄집어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자카리아의 인용대로 지난 브렉시트와 관련된 영국의 첨예한 정치 갈등에 있어서도 많은 저학력자들이 브렉시트를 찬성했다는 증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물론 미국과 영국에서 대학을 비롯한 제도권 교육의 마지막을 개인이 완벽히 수료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노력과 돈이 투입되어야만 합니다. 결국 미국 사회의 이러한 학력의 구분선에 따른 다소 노골적인 계급정치를 물론 완벽하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전문가들의 정치와 그들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인정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줄 필요는 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권의 주장들을 귀담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는 비판적 태도가 뒷받침되어 진실이 아닌 주장과 정치적 이익을 위해 왜곡하는 주장들을 마땅히 걸러낼 수 있어야만 하지만 이것은 미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의 당면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반적으로 자카리아의 논증은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조선 초기 황희의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데요. 비판적 논증으로 현실의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든 그의 펜 끝이 현재의 자본주의적 문제와 극단주의적 정치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그러한 인상을 받게 했습니다. 물론 제가 그에게 라구람 라잔과 비교하여 그에게 어느 정도의 미래에 대한 통찰을 기대한 부분이 조금 과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글 3장에서, 시장이 정치를 인수한 것과 마찬가지인 작금의 시장 실패와 관련해 펜데믹 상황에서 시장이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인정한 점은 그래도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이 기존의 시장 자유와 맞물려, 펜데믹 초기 대응에 있어 미국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조치'를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몰아가 결국은 막대한 희생을 초래하기도 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자카리아는 한국과 대만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초기 대응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표하는 동시에 자신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이나 싱가포르의 국민들이 자신들의 위치 정보와 같은 사생활을 얼토당토하지 않게 자발적으로 국가에 헌납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대면 체계와 같은 전통적인 동선 추적과 적극적인 관리로 초기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는 그의 관점이 실로 옳은 것이죠. 사실 개인 자유에 대한 강고한 믿음 만큼이나 미국 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이 과신하고 있는 시장 자유에 따른 자본주의적 믿음은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위기 상황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꽤 요지부동이었습니다. 2008년의 위기 때나 최근의 보건 위기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의 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에 대해 자카리아가 지적하는 것은 거의 명확합니다. 시장 자유라는 만능주의는 분명 개선할 필요가 있고,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작은 정부 역시 생각을 이 시점에서는 달리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6장과 7장 가운데, 앞의 6장의 논증 역시 대체로 평이한 논조로 어느 정도 수긍이 될 만하지만,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7장,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질 터'는 글의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최근의 펜데믹 사태가 전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악화시킨 원인이라고 규명하기 보다는 이미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화 이후, 방만한 금융 자본주의에 고삐를 채울 수 없게 되면서 사회경제적 상황은 날로 심각해져 온 점이 좀 더 명확한 사실일겁니다. 단순히 현 사태에 대한 '봉쇄와 개방이라는 대립의 관점'으로는 최근의 우려와 현실의 한계를 전부 해명해 낼 수는 없습니다. 이는 미국 의료계가 직면하게 된 원격 의료의 논의는 본질적으로 원격 의료의 수가가 대면에서 이뤄지는 의료 수가보다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현실적 문제와 더불어 이미 미국 의료계가 완벽한 민영화 상태에 있기에 이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기는 어렵기에, 현재 미국 사회에서 이 '시민들에 대한 실질적 보건 의료 혜택'은 앞으로 갈길이 멀다고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자카리아는 이에 단순히 미국의 의료 복지 체계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펜데믹은 그저 물 밑에 있던 현실을 물 밖으로 끄집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인식하려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현란한 자본주의가 이룩한 미국 내의 계급 고착화는 흑인과 유색인종들이 보다 제한된 의료 접근에 따라 스스로의 생존에 이르는 길이 더욱 어렵게 하는 미국 사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갈길이 아직도 멀었다는 뼈아픈 증거일 것입니다. 더불어 자카리아는 미국 사회의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행태와 그로인한 도덕의 쇠퇴에 대해 그러한 관점에서 비판해 내고 있습니다. 대규모의 펜데믹 상황에서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차이가 모든 시민들에게 마땅히 치료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이러한 문제가 언론이나 혹은 세계에 더욱 드러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세계화에 따른 미국의 경제적 번영이 지속되어야 하고 이러한 자유 질서 체제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상의 그의 제언이 뭔가 힘이 없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미국 사회에 내실을 튼튼하게 만들자는 실질적인 방안을 강구하거나 여러 제안들을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앵무새처럼 법전을 읊는 것처럼 아직도 세계화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은 실로 누구나 할 수 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발언들이 기존의 주장들과 큰 차이가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파는 자유 시장주의를 고집스럽게 주장해 왔다"는 2장의 한 문장과 더불어 "현재의 미국의 문제는 미국의 병이지, 그것이 민주주의의 병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자카리아의 문법이 크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결국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재의 미국의 문제와 세계의 불협화음은 결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극심한 불평등 문제도 여러가지 민주적인 개입으로 충분히 감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그토록 축복으로 강조한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고려한다면 정치권의 의지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달성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문제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미국과 같은 경우는 거의 국체(國體)와도 같은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아마도 기존의 기득권 체제 뿐만 아니라 시민들 일각의 저항도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현재의 우리나라의 경제적 번영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일조한 측면이 분명 있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이러한 세계 체제를 백안시 할 수는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자카리아 역시 분명 이 점을 인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유주의 좌파가 더욱 한계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대다수 리버럴 정치에 대한 비판이 이렇듯 명료하지 않은 정치적 의견에 있는 점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2008년에 오바마 행정부가 월스트리트에 막대한 공적 자금을 투입한 이래로 그 이전의 신자유주의는 변질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럼에도 펜데믹 상황에서 이처럼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와 민주주의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자카리아가 강조했던 '민주주의의 실패는 아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가 현재로선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해 보입니다.


-8장 이후의 자라키라의 논증이 다소 산만한 부분이 있는데요. 일단 세계화에 따른 자유주의의 질서가 무조건적으로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내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펜데믹 상황에서 국가간의 민주주의에 대한 격차가 여실히 잘 드러났다고 생각하는데요. 현재 미국 내부에서 자유주의적 시장 경제에 대한 강고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치부하는 것은 미국의 우월성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꽤나 고민이 됩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한가지 단초로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은 과거 많은 백인들이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의 주인이 됨으로써, 현재 미국에는 흑백갈등이 실제로는 심각하지 않다는 식의 이상한 관점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정치가 극단주의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별다른 자각이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오히려 문화적인 측면에서 우파 쪽으로 움직였다. 경제적 불안은 문화적 불안을 낳았고, 이민자들을 향한 적대감과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우익의 포퓰리즘이 서구 전역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미국을 정의하는 것이 "민간 부문의 풍요로움과 공공 부문의 누추함"이라고 썼는데, 이는 미국의 균열에 대한 가장 훌륭한 묘사였다

이 같은 정부의 문제는 미국의 병이지, 민주주의의 병이 아니다. 다른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아주 효율적으로 이번 펜데믹에 대처했다

그 실패가 세계 최강국의 좀 더 폭넓은 약점을 드러내는 것일까? 그렇다, 확실히 그것은 미국이 지닌 특정한 취약성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영국은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국내 기관들을 수척하게 만들었고, 이제 보리스 존슨 총리에 이르러서는 전문가를 깔보고 관료들을 극심한 회의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포퓰리스트 리더의 지배를 받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상대 정파의 정책이나 주장을 무조건 거부하는 정치 행태를 "비토크라시 vetocracy"라고 불렀는데, 미국이 바로 이런 비토크라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국은 태생적으로 국가주의 반대를 신봉하는 나라다. 우파는 정부가 필요로 하는 자금을 줄임으로써 국가주의에 덤벼든다

"특히 공중 보건 서비스와 인프라스트럭처 그리고/혹은 집단 기간 시설이 형편없이 뒤떨어진 나라, 예를 들자면 미국 같은 나라에서 유학중이라면"

어쩌면 시장이 정치 자체를 아예 인수해 버렸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일지 모른다.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은 1993년에 쓴 에세이에서 거의 모든 국가가 왜 순수히 시장 주도로 국가 조직을 만들지 않고 국가에 큼직한 역할을 맡기기로 했는지 설명했다. 사회에는 가령 정치인들과 시민들의 투표처럼 사람들이 시장의 힘에 좌우되지 않도록 떼어 놓고 싶어 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고 그는 지적했다

번영하는 나라, 민주주의적이고 안전하며 훌륭하게 통치되는 나라, 부패의 정도가 아주 낮은 상상 속의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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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3-25 0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라디오님께서 권해주신, 멍크 디베이트를 활자화한 책에서 짧게 접한 분인데, 베터라이프님 덕분에 이 분의 지향(?), 활동까지 조금 더 알아갑니다. 고맙습니다.

베터라이프 2022-03-25 21:14   좋아요 2 | URL
오 얄라님이 저의 서재에 왔다가셨군요 ㅜㅜ 이제서야 봤네요. 넘 늦게봐서 죄송합니다. 저 위의 부족한 서평이 제대로 담지 못한 게 있다면 (아주 많겠지만요 ㅋㅋ) 자카리아가 스스로 견고한 민주주의자라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보다 민주주의의 믿음을 갖고 있었어요. 아직은 이 세계에 희망은 있겠지요. 그렇게 믿고 싶네요. 하여튼 오랜만에 와 주신 거 감사해요 ^^ 아 그리고 멍크 디베이트 말씀하시니까 알겠네요. 중국과 관련한 토론에 자카리아가 참여했었죠.
 
인싸를 죽여라 - 온라인 극우주의, 혐오와 조롱으로 결집하는 정치 감수성의 탄생
앤절라 네이글 지음, 김내훈 옮김 / 오월의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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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안젤라 네이글은 커뮤니케이션학 학자이자 논픽션 작가로 최근에 대안 우파 alt-right 및 인셀 incel 연구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중입니다. 특히 그녀는 친 샌더스적인 좌파로서 기존 우파와 리버럴의 다소 안일하고 타협적이었던 문화정치에 상당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을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리처드 스펜서가 주도한 대안우파에 대한 해박한 분석과 따른 비판에 있는데요. 뒤에 계속 논증하겠지만 이 대안우파가 인종차별주의 및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하고 더 나아가 기존의 남녀간 가부장적 갈등을 넘어 반페미니즘과 사실상 여성의 지위를 계몽주의 시기 이전으로 돌리려고 하는 반지성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기까지 합니다. 최근 5~6년간 이들의 대두는 극우 포퓰리즘과 다름없이 이러한 '분노의 정치'를 확대하여 도널드 트럼프를 주류 정치에 등장시키는 혁혁한 공(?)을 쌓았습니다. 네이글의 이 책은 온라인 상에서의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결코 관심을 두지 말아야할 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 그리고 이슬람 혐오을 포함한 이민자 배척, 여성 혐오, 반페미니즘 운동 등을 내세우면서 어떻게 온라인에서 음지가 아닌 양지로의 조직화를 이루었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Kill All Nomies"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번역된 책 제목과 관련해, 다소 정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여기서 인싸는 일반적인 nomie 를 가리키는데요. nomie의 의미는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을 하면서 건전한 인간관계를 통해 주류 관습이라든지 문화 전반을 향유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에 약간의 인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인정하는 보편적인 삶을 영위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인싸를 죽이자는 대안우파들은 인터넷에서 가히 사회 전체를 향해 '트롤링'을 하는 동시에, 자신들과는 완전 다른 삶의 지향을 갖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이들이 진정으로 눈을 뜨지 못하고, 소위 매트릭스의 상황에서 노예가 되고 있다는 식의 상상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과장론을 바탕으로 체제 전반을 거부하는 것이죠. 그래서 인싸를 죽이자는 것은 대안우파들이 기존의 체제를 전복시켜 순수 백인 남자들이 주도하는 체제로 바꿔야한다는 내용을 은연중에 담고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네이글의 이 책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리처드 스펜서(대안우파의 소위 매파적 인물)나 트럼프주의 우파의 정치를 대변하는 '브라이트바트'에 실명으로 글을 기고 하고 있는 마일로 이아노풀로스의 사례가 대안우파의 실상을 드러낸다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들을 통칭하는 대안우파 alt-right 라는 용어조차 개인적으로는 저들의 근본적인 해악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들은 파시즘에 기반한 극우 포퓰리즘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그에 걸맞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해 보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넷상으로 두터운 팬 층을 확보하고 있는 대안우파는 기존의 보수 정치가 그 힘을 다했다고 선언하고 자신들이 보수주의의 정치적 제3지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공공연하게 홍보하고 있는데요. 앞서 네이글의 분석을 통해 저들의 본질을 간략하게 나마 소개했는데요. 이를 좀 더 풀어본다면 대부분의 대안우파들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백인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더불어 이슬람을 비롯한 유색 인종들을 배척하는데 이릅니다. 다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페미니즘과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깡그리 거부하며 이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보수에 대해 좀 더 논의를 해본다면, 원래 전통적인 보수주의는 에드먼드 버크식의 기독교 보수주의에 기반한 사회와 이를 지탱하는 건강한 가족주의가 주가 됩니다. 동시에 문란하고 방만한 문화들을 비판하고 사회의 건강한 토대를 지키려고 하는 그러한 정치적 감수성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보수주의는 시장 자유 자본주의를 맹렬히 지지하는데 이르렀고 그에 반해 도덕주의를 교묘한 언설로 피해가면서 지금 시점에서는 과거의 보수주의와 달리 극심하게 변질되었습니다. 과거 보수주의에서 도덕주의적 가치관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이것이 유명무실해 진지는 꽤 오래되었죠. 그래서 현재의 보수는 본질적으로 엘리트 기득권의 권리와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가운데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다루는 형태로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일전에 노엄 촘스키는 현재 미국에 "진정한 보수는 없다"고 주장했는데요. 그의 말은 이를 명확히 뒷받침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진술한대로 기존의 정치로서의 보수는 노골적인 자기 이익화가 진행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표면적에 불과할지라도 PC, 즉 정치적 올바름을 대놓고 적대하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적 가치 아래서 표현의 자유가 '정치적 올바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지금의 자본주의적 보수주의에서도 여러 진지한 의견이 나올 정도인데요. 그렇다고 보수 정치가 이 PC를 노골적으로 폄훼하거나 백안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상반되게 대안 우파들은 이 PC를 극도로 혐오하는 중이죠. 아마도 이들은 "밖에 나가서 여자들을 강간하고 싶다"는 말들을 표현의 자유 안에 들어간다 여기는 모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논증이라고 볼 수 있는 6장, "페미니즘이 세상을 망친다"에서 남성 정치와 관련한 대안 우파들 가운데 한 사람인 폴 엘람이 사회적으로 명백한 범죄라고 할 수 있는 '강간'에 대한 발언은 아주 심각한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를 다소 요약해보자면, '당할 여자가 당한 것'이라는 그의 논법이 정상인의 범주에서는 결코 환영받을 수 없다고 볼 수 있는데요. 강간 당할 여자, 혹은 강간 문화와 같은 논법들이 남자의 권익 확대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하위 문화 내지, 지향들이 반문화적이자 반사회적인 행태와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PC의 정치적 의미와 과도한 존재론에 대해 물론 이견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자를 강간하고 싶다는 저러한 범죄적 발언이 화자들 자체가 극도의 남성우월론에 젖은 채로 폭력적으로 발현되고, 심지어 여자들이 남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원인으로 강간의 당위성을 찾는 저들의 발언을 과연 기존의 우리 사회가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오히려 여러분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대안우파의 정치적 본질과 관련해, 글 4장 말미에서는, "대안우파는 무언가를 하겠다는 약속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부숴버리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더 많다."는 저자의 규명은 저들이 자신의 입으로 정치적 대안을 외치며 강조하고 있지만 실상은 알맹이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일겁니다. 거의 파시즘과 다름 없는 엄청난 주장들을 노골적으로 외치면서도 근간에는 일반 남성들의 분노를 양분 삼아 결국 기존 정치 무대에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등장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즉, 여러 언론이나 심지어 학계에서 저들을 극우 포퓰리스트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만약 미국 정치에서 대놓고 저들을 포용할 수 있다면 저들의 본질은 극우 파시스트와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스티브 배넌의 사례는 실질적 증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디 우리는 지난 양차대전의 잿더미에서 정치와 민주주의를 어렵사리 지켜낸 바가 있습니다. 계몽주의를 그저 철지난 관념으로 몰아 부치고 인간 다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정신을 차려야한다" "너희들은 좌파의 음모에 빠져있다",혹은 "페미니즘이 너희들의 권리를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라고 증오의 문법을 아무런 이성의 작용 없이, 기존의 정치 무대에 소리 높여 표출하는 것이 과연 이 사회에 어떠한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입니다. 저는 이쯤에서 존 듀이를 인용하여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분별력이 필요할 때라고 제언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저 저들의 방만한 트롤링은 둘째치더라도 일반적인 여성주의 작가나 온건한 페미니즘 사상가를 온라인 상에서 공격해, 신상을 털어 심지어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는 행동이 어떻게 남성 권익을 신장시키는 방편인지, 진정으로 저들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처럼 노골적인 대안우파적 논법이나 저들의 얼토당토하지 않는 주장에 다소 생소한 독자들은 우리의 현실에서는 쉽게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텐데요. 최근 우리의 대선에서도 저런 현상을 노골적으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혹자들은 트럼프와 같은 말도 안 되는 포퓰리스트가 한국에서 출현하기는 정치 지형상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우리도 이미 극우와 보수의 구분자체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희망적인 전망을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민주주의가 조만간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한데요. 펜데믹의 상황이 정치 전반을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이런 인터넷 기업이 마땅히 저 밑의 음지에 있어야 할 자들을 양지로 끌어올린 매개가 된 것은 더욱 우리의 정치 전망을 어둡게 만든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순수 백인들이 주도하여 이룩한 문명의 미래가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는 식의 대안우파들의 가증스런 논법은 파시즘과 아주 절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저들을 정당한 정치세력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비자발적 독신이라는 인셀들이 평범한 여성들에게 극도의 분노와 증오를 표출하는 것도 대안우파의 하위 문화적 현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대안우파라는 용어는 로마제국을 참고해 미국 백인 민족국가와 범국가적 백인 제국의 건설을 주장하는 리처드 스펜서 같은 인물이 대표하는 노골적인 백인분리주의와 백인 민족주의 운동 및 온라인 하위문화의 새로운 물결만을 가리킨다

대안우파라는 이름이 시사하듯 이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득권 우파 보수주의자들을 대체하는 대안 세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서구 남성성의 쇠퇴를 우려하며 몇몇은 ‘자신의길을가는남자들 Men Going Their Own Way, MGTOW‘와 같은 남성분리주의를 옹호하는 한편, 어떤 이들은 보다 공격적인 사회다원주의적 관점으로 픽업 아티스트의 기예로서의 ‘여자사냥‘을 권장한다

이러한 반페미니스트 진영을 주 이용자로 삼는 게임들은 대체로 전쟁과 폭력, 테크놀로지를 미화했다

이들은 또한 자유지상주의와 권위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극단주의를 지양하고 사회질서와 공공선을 중심으로 하는 버크주의의 점잖은 품격과는 거리를 두고 대처주의의 가혹함을 추구하며 극우 사상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레이건과 대처 집권기에 봤던 것처럼 노동조합을 궤멸할 수만 있다면 안정된 공동체나 가족의 가치를 파괴하는 정책일지라도 언제나 환영이었다

오늘날 대안우파의 서구 문명 쇠락에 대한 집착은 유구한 보수주의 사상에 기원하는데, 이들이 주로 참고하는 문헌은 로마제국 몰락의 원인을 성적 퇴폐에서 찾는 18세기 에드워드 기번의 저서 ‘로마제국 쇠망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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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그 너머 - 우리의 정치 미래를 상상하다
지지 파파차리시 지음, 이상원 옮김 / 뜰book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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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파파차리시는 그리스 테살로니카 출신으로 미국 메사추세츠 사우스 해들리에 위치한 사립 인문대학인 마운트 홀리요크 대학을 졸업하고 오하이오 주에 있는 켄트 주립대학에서 석사를 마지막으로 공립 연구 대학인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뉴미디어와 정치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그녀는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의 디지털 미디어와 그에 따른 정치 변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며, 흔히 기술 발전에 따른 민주주의 변화 가능성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녀 역시 마누엘 카스텔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시대에서의 시민 연대와 반대로 디지털 미디어에 의해 촉발된 사회 운동에 대해 명확한 한계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기도 한데요. 아마도 이는 시민들의 정치 변화에 대한 요구가 시민들 스스로의 정서적 관계와 공감대가 일정 부분 결여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일전에 한나 아렌트가 "틈새 연대"의 중요성을 중요시했던 점과 일맥상통한다 여겨집니다. 바로 여기의 이 글도 그녀의 앞선 연구와 맞닿아 있는 논저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원제, "After Democracy : Imagining Our Poltitical Future"로 지난 202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22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아마도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일반적인 학자라면 특히나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할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이 글은 일반적인 학문적 논저와는 약간 다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체류했던 적지 않은 국가의 시민들과 인터뷰의 형식으로 오늘날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취합하고 정리한 일종의 '르포르타주'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분석은 이미 시민들도 지금의 민주주의적 한계에 대해 매우 공감하고 있었으며, 특히 각국의 엘리트들이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통제하려는 숨겨진 시도나 그러한 의혹들에 대해서도 각국의 시민들이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많은 시민들은 선출된 권력과 자신들이 직접적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수단을 원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명확한 목적에 있어 이 글의 4장, "권력은 지닌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쉽게 그 의미가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생각됩니다.

이곳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 스스로의 고유한 해석과 여러 아이디어들이 잘 소개되어 있기도 한데요. 저는 그중에 저자가 보인 민주주의의 가장 명료한 해석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모두 평등하게 자유롭다는 것을 보증한다"는 문장이 제겐 크게 와닿았습니다. 그렇죠. 보유한 돈이나 남보다 월등한 권력으로 사람의 자유가 차등이 되어선 안될 겁니다. 일부 계층에서 주구장창 외치는 자유와 자유주의가 과연 저런 의미인지는 지금 현실에선 극히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다시 돌아와, 앞선 장(章)들에서는 비슷한 이해로 자본주의하에 민주주의가 스스로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우려스러운 점이기도 했습니다만 그것보다 정치인들을 포함해 무려 시민들까지 평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다소 소극적인 관점을 보이고 있는 것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가면 갈수록 약화된 지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신자유주의의 이행에서 특히 평등은 경제 엘리트들과 기득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거부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평등을 백안시하고 부정적인 이데올로기의 덧칠을 수십 년 간 지속적으로 해온 결과, 시민 모두가 평등을 그저 사회주의의 산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엄밀히 따져 보면 민주주의에서 자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평등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 2장에서, "대부분의 민주주의는 순수한 민주주의라기보다는 타협적인 형태"라는 말이 이토록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인데요. 이 부분의 논증은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로도 읽히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에 의한 정치적 균질화'가 기득권 엘리트들에 의해 진행되면서 사실상 민주주의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된 연유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저들에 의해 "일반적인 정치는 시장에 해롭다", "인간은 마땅히 자신의 이기심을 우선할 권리가 있다" 라든지 이를 통한 시장 원리의 우월성을 공공성의 정치보다도 더 우선하기에 이른 것이죠. 마찬가지로 저자 역시 오늘날의 '공공성의 쇠퇴'가 민주주의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된 현대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생각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각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모국의 정치 상황과는 관계없이 모두가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보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자와 인터뷰에 응한 중국인조차도 말입니다. 앞선 부분과 관계있는 비판이기도 합니다만 오늘날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들이 다양하지 않다는 점과 더불어 글 3장에서도, "우리의 선택 능력은 점점 더 제한받고 있다"고 여실히 비판하고 있는데요. 사실 시민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좀 더 충실하고 윤택하게 영위하여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아레테 arete, 즉 행복하고 덕 있는 삶의 이상적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개인이라면 누구가 원하는 마땅한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흡사 존 듀이의 여러 주장들과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과거 시대의 일부 계층에게만 주어진 제한적인 민주주의가 계몽주의와 공화주의적 관념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현재에는 각 시민들의 "발언권과 평등"이 반민주주의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기득권과 정치경제 엘리트들에 의해, 소위 조정되고 적절하게 제한되어 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인용하기도 했습니다만 기득권들이 입으로 주장하는 민주주의와 일반 시민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그런 측면에서 아주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어쩌면 저 정치 엘리트들이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면에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선 작금의 사회 체계가 급격한 변화를 추인하지 않아야만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왜곡된 보수주의가 시민들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적절히 제동을 가하는 것이 이런 연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와 비슷한 연유로 현재 모국의 정치적 상황을 강하게 일침한 한 미국인은 이미 국내 정치가 수많은 로비스트들과 기업에 의해 반세기 이상 유린되어 있고 미국의 민주주의가 여러 국가들의 민주주의에 비교당하는 상황이라고 한탄합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의 이행, 그리고 그로 인한 무분별한 시장 자유에 대한 함의가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와 건전하게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생각됩니다. 심지어 2008년의 월스트리트에 대한 막대한 공적 자금의 투하는 정말 일반적인 민주주의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대마불사 too big to fail 의 논리, 어떻게 이런 것이 민주주의적 가치와 맞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민주주의의 정상화를 위한 5장 말미의 10가지 제안은 시민 모두가 어느 정도 새겨들을 만하다 생각되는데요. 물론 이러한 결론은 저자 나름의 정치적 숙고의 결과물일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여기 인터뷰들의 훌륭한 의견들로 탄생한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정치적 실효성과 언론의 정상화 그리고 시민들의 지속적 정치적 관심 등은 민주주의에서 선언적인 주장들로 끝나서는 안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존 듀이가 강조한대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시민이 마땅히 현실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부분인데, 오랜 시간 자본주의는 시민들의 이러한 정치적 역할에 매우 부정적인 시각들을 주입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일전에 질베르 리스트가 경제와 경제학에 대해 비판한 부분이 이러한 맥락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여기에 슘페터의 논증을 더한다면, 자본주의 시장에서 독점적 이익을 더욱 갈구하는 기업들의 욕망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좋지 않은 결과는 민주주의 체제에 해가 될 수 있다 보는 것이 일견 타당합니다. 즉, 현재 우리의 정치 내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결과물들이 전세계적으로 '무늬만 흉내내는 민주주의'의 일종의 단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과잉된 민주주의'를 지금도 주장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현실인데, 실상은 이들의 주장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겠죠.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적인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인터넷 환경에서의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포퓰리스트들과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더욱 왜곡된 것은 여기에 이익만 얻으려는 인터넷 기업의 행태와 맞물려, 많은 시민들에게 전혀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는 점도 현재의 민주주의가 어떤 위기에 놓여 있는지 가늠하게 합니다.

-여기에 많이 인용되는 여러 논저들과 사상가들 중에 특히, 한나 아렌트와 샹탈 무페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은 하루 빨리 재간행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 역시 그전부터 너무나 애타게 재간행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시민들의 이러한 희망을 악용한다. 포퓰리즘은 공허한 약속을 한다. 그리하여 희망과 순환이 이어진다

예를 들어 증오발언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이지 인터넷이 아니다. 그럼에도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은 증오 행동을 눈에 더 잘 띄게 하고 그에 따라 더 쉽게 전파되도록 만든다

민주주의의 현재 상태가 많은 부분에서 내 연구의 동력이 되었다. 정치 이론가 샹탈 무페가 언급했듯이, 민주주의의 역설은 대중 사회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기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선거는 해킹당하고, 포퓰리즘은 디지털로 확산되고, 증오발언이 온라인에 횡행하고, 온란인에서 활성화 된 운동이 오프라인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인터넷은 우리를 하나로 묶지만 동시에 서로 멀리 떨어뜨린다고 말이다

장 자크 루소는 무관심한 시민이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위협한다고 불평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평등과 자유를 한꺼번에 떠올리곤 하지만 대화를 하다보면 이 두 개념이 서로를 제약할 때가 많다는 점을 깨닫는다

게다가 풍성한 자유는 더 풍성한 다원화를 이끌지만, 반드시 더 좋은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지만, 이러한 정의는 우리가 인정하거나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민주주의를 경제와 연결 짓는다

시민들은 많은 일들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질곡 속에서 언제나 삶을 영위해 왔다

우리는 자기 운명의 주인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 능력은 점점 더 제한받고 있다

일반 대중의 길은 신나면서도 위험하다. 그것이 많은 이들의 소망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신나지만, 다수의 의지가 쉽게 이용당할 수 있고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망성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헤게모니는 민주주의 정권에서든 비민주주의 정권에서든 엘리트가 타인에 대해 권력을 주장하고 보유할 수 있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의 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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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X파일 - 검찰공화국을 꿈꾸는 윤석열 탐사 리포트
열린공감TV 취재팀 지음 / 열린공감TV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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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제가 540여편의 서평을 쓴 이래로, 여기 이 글은 계속 써오던 방식으로 빈 공간을 채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구입해, 두 번을 정독했습니다. 회사로 배송이 되자마자 단숨에 읽기 시작했는데요. 물론 대선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개표 방송을 보면서 한 번 더 읽게 되었습니다. 

글 서두에서 필자는 "기자는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자"라고 밝힙니다. 아마도 우리의 많은 기자들이 이러한 생각들을 뭐 한번 쯤은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은 이 따위 책에 들어가 있는 내용들은 황색 언론의 그것과 같다고 치부할 수도 있을겁니다. 그런데 사건의 연도와 날짜 그리고 월 일, 더군다나 특정한 시간까지, 배경이 되는 시점이 이토록 면밀하고 상세해서 이것을 전부 거짓이라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예상으로는 검찰이 대통령 당선인을 수사하기란 아마도 어려울 것입니다. 몇 건은 지금 법원에서 심리중이기도 한데 뭐 그게 뜻대로 되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중 저에게는 가장 충격이었던 것이 이명박 대통령의 BBK 특검이었는데요. 가슴이 먹먹한 걸 떠나서 소름끼치고 두렵더군요.

뿐만 아니라 이 글은 우리 나라 최상위 기득권들의 사적 이익 추구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들의 카르텔화는 조금 과장을 보태서 말한다면 거의 사법 거래에 준하는 일들을 지연과 학연을 통해 자기들끼리 끈끈하게 챙겨주는 것으로 나오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검찰과 같은 권력이 어떻게 사적 권력화가 되었는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과 관련된 내용이 공개적으로 해명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나 힘든 일이 되겠죠.

끝으로, 이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글을 쓰기 위해 저 역시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아마도 저열한 자기 변명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전에 대학 후배가 저와 진탕 술을 마시고 나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지요. "우리나라에서 특히 진보는 반공주의의 영향으로 지금도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자신의 발언이 진정한 양심에서 비롯되지 못하고 내면의 자기 검열을 무조건 거치게 된다. 하지만 보수는 그런 것이 일절 없다."


훗날 박현정 대표는 ‘많은 사람이 가진 위선의 민낯을 보았다. 악인도 싫지만 착한 척, 국가의 국민을 위하는 척, 예술에 몰두하는 척, 인권을 내세우며 언갖 화려한 표정과 제스처를 동원하고 뒤로는 온통 자기 욕심밖에 없는 위선자들의 모습은 정말 가증스러웠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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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관계, 그 숙명의 역사 - 주재우의 지략지계
주재우 지음 / 경계(도서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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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희대 중국어과 교수로 재직중인 주재우 교수는 미국 동부 코네티컷 주의 예술학교로 유명한 웨슬리언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이후 북경대의 국제관계학원에서 석박사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미 브루킹스 연구소의 방문학자를 거쳐, 국내에서 중국 정치와 중국 관련 외교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만큼 중국과의 외교 및 북한 문제와 관련해 전문가로서의 의견을 여러 지면을 통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의 '한국인을 위한 미중관계사'를 인상 깊게 일독했는데요. 한국전쟁과 냉전시기를 거쳐, 특히 1972년의 미중 수교와 관련한 정치적 배경과 그에 따른 저자의 분석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 역사에 있어, 파키스탄 핵물리학자 압둘 카디드 칸의 존재를 저자인 주교수를 통해 인지하게 되었는데요. 당시의 그런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는 다소 충격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커넥션의 실체 또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학자로서 그리고 현재의 한반도 문제에 면밀한 자각을 갖고 있는 지식인으로서 관련 학계의 중요한 학자들 가운데에서도 훌륭한 학자라고 여겨집니다. 그의 이 글은 최근인, 2022년 2월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자인 주교수는 앞으로의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와 그리고 미국이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한 가지 전제를 언급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미국이 싫든 좋든 이제 북한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을 협상의 대전제로 삼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국과 북한의 여러 입장차이와 서로 간의 몰이해를 다룬 3장의 '진정한 북한의 개혁 개방문제'와도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즉, 미국은 북한의 개방에 대한 대내외적인 선언을 선결 조건으로 보고 있으나, 이것은 흡사 과거의 서방세계가 중국을 개방으로 이끈다면 중국의 국내 정치에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의 필요성과 그 이행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다소 헛된 기대와도 유사해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결국은 신자유주의가 베이징 컨센서스를 탄생시키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가 작금의 중국을 만드는데 일조한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이끈 것과 전자는 어쩌면 유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더군다나 다음 4장에서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는 곧 북한 비핵화로 국한"하는데 반해, 중국이 말하는 범위는 "한반도 전체를 포괄"한다는 저자의 분석에서 이런 외교적 함의의 간극과 각 행위자들의 정치적 동상이몽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겠는데요. 마찬가지로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들이 무분별하게 북한 붕괴론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당시 한국 정부에도 이를 조장시켜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금쪽 같은 시간을 그냥 흘려버린 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자의 이 글은, 과거 미국과 북한의 끝 모를 협상에서의 지나친 소모전과 거의 다름없는 역사의 기록을 꽤 면밀하게 자료로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북한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북쪽의 정권이 일반 국가들의 외교 관념으로는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는 것과 이 글에서 어느 정도 그 실체를 밝히고 있는 소위 '통미봉남'이라는 김씨 일가의 전략적 노선이 그저 허무맹랑한 논법이라는 식으로 치부하는 다수의 국내 진보세력에게 나름의 자각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북한의 김씨 일가가 그토록 주장하는 미국에 의한 자신들의 안보 보장'의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냉정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얼마 전에 서평을 쓴 라종일 교수의 글도 그렇거니와 북한은 거의 확실하게 핵 강국으로서, 미국으로부터 '핵보유국'의 인장을 받고 싶어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로 이 핵보유국 지위를 통해 미국과 '제대로 된' 협상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겠죠. 다만, 이와 관련해 제가 아쉽게 생각했던 부분은 과거 조지 H. W. 부시 정권의 한반도 핵무기 철수가 너무 성급하게 이뤄지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물론 당시의 정치 외교적인 상황을 저자의 상세한 분석을 통해 그 정치적 배경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서독과 동독이 통일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체코와 동독을 향하고 있던 미국의 핵무기를 철수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그러한 맥락에서 남한에 있던 핵무기까지 미 본토로 철수시켰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무엇보다 남한에 핵무기가 없다는 것을 북한에게 '핵포기를 요구하기 위한 정당한 명분'으로서 필요했던 것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행으로 어느 정도 국내의 안보 불안을 초래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그와 관련한 미국의 후속 조치도 있었지만 이는 중요하게 중국측을 향한 미국의 요구로서 "우리가 남한의 핵무기를 철수시켰는데 너희는 평양에 마땅히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것을 종용해야만 한다"는 것으로서 불행하게도 이는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는 4장과 5장에서 진술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핵은 중국에게는 그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증거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중국이 북한의 김씨 일가가 소유한 핵무기를 언제든지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와 관련해 실질적으로 우려스러운 상황은 동북부 지역에 북한 유사시 상황에 투입될 군대를 국경 가까이에 주둔시키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저자가 이 글에서 단언하는대로 북한의 핵탄두는 그들의 장거리 미사일과 함께 미국에게는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핵탄두를 미국 서해안까지 실어 나를 수 있는 장거리 ICBM의 개발에 그치지 않고 외화 벌이를 위해 중단거리 미사일을 각국에 밀수출한 사례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북한 간의 수교 협상에서도 중요한 지렛대로 작용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최근까지 북한의 불법적인 미사일 수출이 국제 사회에 의해 적절하게 제한되고 있다고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파키스탄의 핵탄두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핵탄두 역시 테러 단체나 핵무기를 너무나 원하는 이란과 같은 나라에 흘러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문제를 미국 CIA가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겠지만 어느 누가 이러한 일들이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다른 걸 다 차치하더라도 이 문제 하나만 가지고도 미국과 일본이 북한의 핵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마땅히 자신들의 안보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안보가 달려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죠. 진짜 막말로 평양의 김씨 정권이 그러한 참혹한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는 어떠한 정치적 보장도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맞닥뜨릴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불안한 정치적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미국이 북한의 급변 사태 개입 작전을 계획대로 실천하려면 필히 극복해야 할 내부적 장애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미 연방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벌어질 모종의 유사 사태에 관련하여 의회로부터 어떠한 작전권이나 명령권, 출전권도 부여받지 못했다"는 의미인데요. 이 부분은 저자의 어떤 망상이 아니라 실제로 조약의 문구가 그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부득 이 부분과 관련된 인터뷰는 아니겠지만 얼마 전에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만과 한국을 건드릴 시에 기필코 우리의 반응을 보게 될 것"이라는 그의 매우 강도 높은 발언을 접한 기억이 나는데요.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와 미국 간의 동맹이 대표적인 비대칭 동맹 관계로서, 유독 요 근래에 미국이 중국과의 마찰에서 우리 한반도가 중요한 입지적 조건을 갖고 있다는 것을 꺠닫게 된 이후로, 저들에게는 국익과 관련해 새삼 중요한 곳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역외 균형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평택에 있는 미군 기지는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생각합니다. 물론 혹여 북한이나 다른 국가에 의한 한반도 침략 상황에 있어 미 의회가 사탕이나 빨면서 시간을 때우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유사시에 미국 의회가 미 본토의 65만 지원군을 재빠르게 승인하게 될지 걱정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안전 장치로서 최소한의 법리적 검토나 예비 조치가 있으면 좋겠지만 이것도 결국은 닥쳐봐야 아는 것입니다. 미국의 핵우산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여러 서평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미국이 LA와 샌프란시스코가 핵무기에 의한 지옥이 될 것을 감수하고 서울의 핵공격에 대한 반격을 자신들의 핵무기로 실행할 수 있을지는 마찬가지로 닥쳐봐야 알 수 있는 일이겠죠. 다만, 미국이 단언하고 있는 동맹국들에 대한 안보 보장이 휴지 조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들 역시 최소한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있을 겁니다.  

끝으로, 그동안 미국 정치권에서 몇 번이나 북한 선제 타격론이 나왔던 것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과거 클린턴도 그러했고 도널드 트럼프도 한 때는 이를 검토하다가 제2차 한국전쟁 개전 시에 발생할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보고 이 카드를 접게 되었는데요. 이와 관련해, 최근에도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북한 문제에 있어 군사적인 옵션을 먼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부분은 이러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언제까지 북한의 핵탄두를 미국이 용납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문제이며, 한반도는 직접적인 국지전 카드 하나만으로도 주변국이 참전하는 확전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에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근래 들어 대만에서의 위기는 더욱 한반도 정세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런 북한이 핵 개발 자체에 있어 스스로가 이미 잘 인지하고 있듯이, 대내외에 자신들의 핵무기 문제에 따른 지역 내의 광범위한 안보 문제가 향후에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저는 이러한 불확실한 환경 때문에라도 더욱 북한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남북한 간의 전쟁은 누가 승리하던 간에 한민족 스스로에게는 거의 민족의 종말에 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위기 상황에서 김정은에게 전혀 살 구멍을 만들어주지 않게 되어 그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서울과 도쿄에 핵탄두를 투하하고 마는 비극적 결말을 미연에 방지하는 노력을 모든 이해당사자국들이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북한 내부의 군 강경파들에게 어떠한 명분도 주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그렇다고 우리와 미국이 김정은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하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오로지 한반도를 파멸에 이르게 할 비극적 전쟁을 함께 막아보자는 것이죠. 이와는 반대로 국내에 치킨 호크와 다름없는 정치인들의 위험한 언동이 이 같은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지 저로서는 계속 의문이 드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또한, 글 말미에 저자가 단언하는 만큼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북중 관계를 좀 더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몇 번을 반복해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우리의 외교 당국자들이 겸허히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이 글에서 보이는 여러 정치적 수사들 가운데 4장에서 등장하는 "북한의 행태는 세계의 불안을 갉아먹으며 부단히 몸집을 키워갔다"는 표현이 실로 마음에 와 닿는다고 느꼈는데요. 이것은 거의 반박할 수가 없는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평양은 무엇보다 주한 미군 철수 문제만큼은 미국 정부와 직접적인 협상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북미 수교라는 과제가 미 행정부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결코 아니라는 데 있었다

반대로 미국의 정계와 사회 지도층 사이에는 북한이 전형적인 공산 국가로서 기만과 무책임한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에 대화의 결과 차원에서 그들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마지막으로 1991년에 김일성 주석이 신년사에서 독일식 흡수 통일을 막기 위해서는 핵무기 개발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동원해 온 외교적, 평화적 노력은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이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해 미국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그러한 지정학적 고려에서 출발한다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는 곧 북한 비핵화‘로 국한하는데 반해, 중국이 말하는 범위는 한반도 전체를 포괄한다

무엇보다 중국은 신의주의 관광 개발 계획이 불쾌했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 급변사태 개입 작전을 계획대로 실천하려면 필히 극복해야 할 내부적 장애가 있다. 바로 미 의회의 승인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벌어질 모종의 유사 사태에 관련하여 미 대통령은 의회로부터 어떠한 작전권잉나 명령권, 출전권도 부여받지 못했다

다시 말해 상기한 결의안이 대통령과 의회의 의굔 불일치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한반도 유사시 미국이 즉각 개입할 수 있는 소지는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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