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 프랑스 현대문학선 2 프랑스 현대문학선 2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 세계사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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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있다. 그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제국 중의 하나를 다스렸다. 그 제국은 넓은만큼 오만했고, 어떤 가치가 있었으며, 그래서 후세에까지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 제국이 한창 전성기를 맞아 뻗어나가고, 가장 화려한 인물들을 배출한 후 휴식기에 접어들었을 때, 안정을 취해야 하는 제국을 현명하게 다스린 지도자. 이 회상록의 주인공인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다.

작가가 있다. 그는 거의 이천년 전의 한 위대한 인간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위대함 또한 완성해나갔다. 20대에 처음 쓰기를 시도하여, 포기하다가, 다시 시작하고, 포기하고, 완전한 결심하에 매달려 50대에 이르러 완성한 책 한 권. 이천년 전의 황제가 20년 동안 제국을 다스리면서 황제로서의 위대함을 완성했다면, 이 작가는 20년 동안 책 한 권에 매달리면서 작가로서의 위대함을 완성했다. 역시 황제에 도전할 정도의 오만함을 가진 이는 예술가밖에 없는가.

양자인 마르쿠스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되는 이 회상록은 철학자가 됐을 수도 있었을 한 남자가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그 권력의 자리에서 남은 생을 보내며 황제의 의무를 완성하기까지 내면에 새겨진 기록이다. 일종의 생에 대한 본능으로, 삶에 대한 의지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신분에 대한 의무감으로 한발 한발 완성해 간 황제의 자리.

유르스나르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하드리아누스는 현명한 만큼 현실적이고, 관대한 만큼 냉정하며, 자상하고, 준열하다. 원래 제국의 현제쯤 되면 이렇게 완벽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만큼. 하기야 원래 다비드상의 모델이 다비드만큼 아름다웠겠는가. 비너스상의 모델이 비너스만큼 황홀했겠는가. 유르스나르의 펜을 거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조각가의 손을 거친 다비드상만큼 훌륭해졌고, 더 완벽해졌다. 역사의 인간은 역사의 이상이 되었다.

완벽한 인간을 묘사했는데도 지리멸렬하지 않은 것은, 그 인간이 직면한 '실존'이 주는 공감 때문이다. 삶에 대처하는 자세랄까, 자기 삶을 정비해나가는 것은 어부나 황제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황제로서 자기 삶을 정비했을 뿐. "이 남자가 만일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지 못했고, 로마 제국의 경계를 쇄신시키지 못했더라면, 나는 그의 개인적인 행복과 불행에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 '일기'와 '회상록'의 차이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유르스나르는 왜 제목이 '하드리아누스의 일기'가 아니고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이냐는 질문에 대해 작가노트에 이렇게 기록했다. "행동하는 남자는 일기쓰는 법이 거의 없다는 걸 사람들은 잊고 있다. 거의 언제나 후에 가서 무위의 시절 깊숙이서, 그 사람은 기억을 되살리고, 쓰고, 그리고 아주 자주 놀란다." 성공만 했다하면 자서전과 어록을 남발하는 요즘 유명인사들이 들었으면 좋을법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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