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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부인의 직업 ㅣ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18
조지 버나드 쇼 지음, 정경숙 옮김 / 동인(이성모)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워렌 집안에는 네 명의 딸들이 있었다. 둘은 가난하고 선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고, 둘은 미모를 이용해 영악하게 살아서 성공했다. 딸 둘은 노동자이자 노동자의 아내였고, 다른 딸 둘은 고급창녀였다. 빅토리아조의 가난한 여성에게 카드는 두 개. 노동자 아니면 창녀. 원래 인생에는 선택권이 많지 않은 법이니까. 더구나 19세기 여성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대학에 여성을 위한 문이 열리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전문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공한 워렌 부인의 딸 비비 워렌은 그런 신여성 중의 한 명이다. 그녀는 대학교육으로 지식과 당당함을 얻었고, 천성적으로 자존심이 강하며 야망이 크다.
비비의 어머니 워렌 부인은 웃음과 애교를 팔아 돈을 벌고 딸을 공부시켰지만 자신에 대한 털끝만큼의 자책이나 부끄러움도 없다. 그녀는 밑바닥에서 노동만 하다 병으로 죽은 두 자매를 비판하며 그렇게 비참하고 가난한 삶을 산 것은 요령 없고 부끄러운 짓이라고 말한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성공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베푸는 은총이다. 세상은 남자의 비위를 맞추고 몸을 팔면서 돈을 버는 것을 천대하지만 매춘부는 보통 여성이 남편 한 사람에게 한 것을 여러 남자에게 하는 것 뿐이다. 이것은 자립하지 못한 여성의 결혼은 사랑이란 눈속임으로 가려진 또 하나의 매춘일 뿐이라는 버나드 쇼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듯 영리하고 영악한 워렌 부인이지만 차마 딸에게만은 자신의 직업을 말하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하나뿐인 혈육에게까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영악한 한편으로 눈물 많은 워렌 부인에게는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워렌 부인의 딸 비비에게는 그런 망설임조차 없다. 그녀는 어머니의 당당함을 인정하면서도 이미 충분한 돈을 벌었는데도 그런 직업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어머니를 경멸한다. 비비는 지적인 만큼이나 차가워서 한심한 어머니와 철없는 애인, 추근대는 갑부, 신사적인 예술가를 모두 자신의 인생에서 거부할 수 있다. 그녀에게는 결혼도 가족도 필요 없고, 열중할 수 있는 일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 비비는 너무 그럴듯하게 도식적이고, 편하게 창조된 소설 속의 인물이다. 자로 그린 듯한 이집트 미술품같다. 기성의 모든 유혹을 거부하고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비비. '어떠어떠한 인물'이 아닌 '어떠어떠해야 하는' 당위적이고 계몽적인 인물로 설정된 비비. 훌륭하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인물은 문학 속에서는 별 감동과 설득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초기 작품에서 약간은 서툰 인물을 창조해낸 쇼지만 다행히 그의 인정사정없는 유머만은 서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비비보다 약하고 이중적인 워렌 부인과 나머지 인물들에 의해 표현된다. 사실 이집트 미술을 볼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과장되게 표현된 주인공 주변의 작지만 풍부한 엑스트라들 때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