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남편 외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정명자 외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흔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영혼의 괴물들'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들만 봐도 세상의 불완전함과 자신의 불완전함, 세상의 고뇌와 자신의 고뇌를 구분하지 않는 신경질적인 정열가들의 사색과 극단적인 행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건 어떨까?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정점을 맞는 '혼의 리얼리즘'의 줄기와 더불어 인간의 속물성을 풍자하는 골계미와 익살스럽기까지 한 희비극 소설의 줄기도 있다는 사실은.

그 중 하나가 <영원한 남편>이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같은 작품이 흥미롭다면, 그리고 독자의 사색과 탐구를 자극함으로써 그들과 일체과 되어 고민하게 한다면, <영원한 남편>같은 작품에서는 연극처럼 재미있고 테크닉을 갈고 닦은 이야기꾼 도스토예프스키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영원한 남편>은 엉뚱한 곳에서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며 <아저씨의 꿈>, <스뻬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악어>를 통해 추구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도 중 하나가 만개한 작품이다. 이들 '두 번째 줄기'의 특징은 인간의 속물성을 여러 가지 비유와 촌철살인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아내 나딸리야의 간통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남편 빠벨 빠블로비치와 나딸리야의 애인이었던 벨차니노프. 벨차니노프가 그들을 떠난 후에는 만날 리가 없었던 두 남자는 나딸리야가 죽은 후, 백야의 더운 날씨 속에서 극적으로 해후하게 된다. 벨차니노프는 빠벨 빠블로비치를 비웃으면서도 켕기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고, 빠벨 빠블로비치는 벨차니노프의 정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를 한결같이 존경하고 있다. 과연 정말로 몰랐을까? 아내가 죽은 후 발견된 편지함에 가득했던 아내의 애인들 편지 중에는 벨차니노프의 것이 없었을까? 오, 모를 일이다! 일이 어떻게 꼬일지.

여기에 나딸리야와 빠벨 빠블로비치의 딸인 리자, 하지만 나딸리야와 벨차니노프의 딸로 추정되는 어린 딸 리자가 개입되고, 나딸리야의 또 다른 애인이었던 바가우또프가 죽으면서 갈등의 타래는 더욱 것잡을 수 없이 얽힌다. 빠벨 빠블로비치는 벨차니노프를 증오하고 있는가, 존경하고 있는가? 벨차니노프는 리자를 사랑함으로써 정말 새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벨차니포를 향한 빠벨 빠블로비치의 키스가 본심인가, 칼질이 본심인가? 빠벨 빠블로비치는 두 번째 결혼을 통해서도 '영원한 남편(아내의 간통을 영원히 모르는 남편을 가리키는 벨차니노프의 정의)'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인간이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속물이 되어버리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빠벨 빠블로비치의 칠칠맞음과 16세 소녀와의 두 번째 결혼을 향한 무모한 시도, 벨차니노프의 뻔뻔함과 인간성에 대한 불성실은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어떻게 해야 온전한 인간으로 행동하는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희비극이다. 소설에서는 너무 일찍 사라졌지만 여러 애인을 거느리고도 자신을 현모양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딸리야 부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세 사람의 딸 리자는, 그렇기 때문에 오래 살 수 없는 여리고 순수한 창조물이었다.

나딸리야 부인처럼 요절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모습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똑같은 모습으로 지속될 것이다. (몇 년 뒤 기차에서 마주친 그들의 모습을 보라!) 이 소설을 비판한 당대의 비평가 중 하나는 중점을 어디다 두고 읽어야 할지, 희극으로 봐야할지 비극으로 봐야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남편>은 훌륭한 소설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 비평가의 삶은 어땠을지, 그 비평을 쓴 날에도 모순되는 행동으로 자괴감에 빠지지는 않았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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