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상복.최은경 옮김 / 어문학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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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너와 나, 두 명의 사사로운 인간이 하는 것이지만 둘의 사랑이 시대의 분위기랄까 풍조를 반영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 사르트르와 보부와르의 사랑처럼.

고다 유키코와 도미오카의 사랑은 철저히 시대와, 그리고 그들이 머물렀던 땅과 함께 한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고 보면, 상당히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유키코는 자신을 오랫동안 겁탈해 온 친척을 피해 타이피스트로 취직하여 인도차이나에 파견된다. (때는 일본이 한창 전쟁을 치르던 1940년대였다) 일신을 걱정해 줄 변변한 가족도 없고, 유키코 자신이 쓰라리게 애석해 했듯이 미모도 아니어서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을 것 같은 여자다. 하지만 인도차이나는 그녀에게 마법을 걸었다. 야생적인 땅에서 그녀는 젋은 매력을 뽐내기 시작했고, 깊은 숲 속에서 근무하고 있던 농림성 관리인 두 남자는 유키코에게 빠지게 된다. 두 남자 중 하나가 유키코와 마지막까지 질긴 사랑을 하게 되는 도미오카다.

이과를 전공한 이 특유의 샤프한 지성과 남자다운 날렵함을 지닌 도미오카는 한편으로는 너무나 평범한 남자였다. 말하자면, 바람 피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일본에 아내가 있었으며 유키코와 연애를 할 때에도 베트남인 하녀와 관계를 가지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유키코로 말하자면 그녀 또한 두 남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외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도차이나의 꿈결같은 연애기간도 끝나고, 패전한 일본의 운명대로 그들 또한 빈털털이로 빈궁한 조국에 돌아가게 된다. 관리를 그만둔 도미오카와 타이피스트를 그만둔 유키코는 그 후 한참을 물질의 빈곤과 영혼의 빈곤에 허덕거리며 가난한 연애를 이어나간다. (여전히 둘 다 바람은 피우고 있다)

유키코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대로, 인도차이나의 풍요로운 자연과 안락함은 두 사람의 사랑도 풍요롭고 안락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패전 후 일본에서의 사랑은 춥고, 배고프고, 원망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들 자신은 조국에 관심도 없건만 너무나 정직하게 조국의 풍경을 대변한다. 가족이 없거나 혹은 가족을 버리고 떠돌아 다니는 부표들의 사랑도 이렇게 시대에 얽매이는 것인가 생각하면 개인의 힘없음이 처량해진다. 모든 상황이 냄비 바닥처럼 졸아붙고 사람들의 마음은 개미처럼 작아지는 상황에서 두 사람 모두 인도차이나의 광활한 자연과 넘치던 과실나무들을 그리워하지만 조국이 사람들을 다른 나라로 파견하던 시기는 이미 지나버렸다. 이들 연애담의 엔딩이 빽빽한 나무로 가득 찬 일본 열도 끝의 작은 섬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마치 인도차이나의 이미테이션같은, 섬나라인 조국에서도 가장 외지고 작은 섬에서의 마지막.

작가 하야시 후미코는 그녀의 대담하기 짝이 없는 데뷔작 '방랑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자전적 일기문학인 '방랑기'에서 하도 소설에는 자신이 없다고 해서 진짜인줄 알았는데 그 후로 갈고 닦았는지 소설도 무지막지하게 잘 쓴다. 나약하고 좀스럽기까지 한 두 주인공의 연애담을 끝까지 읽고 감명받은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묘사 때문일 것이다. 거의 모든 작품이 일본 영화계의 거장인 나루세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읽고 있으면 유키코와 도미오카가 떠돌아 다녔던 곳의 풍경과 여관, 셋방들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하야시 후미코의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기를! (이왕이면 순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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