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계약 - 루소의 『사회계약』, 그 이후 ㅣ 철학의 정원 79
미셸 세르 지음, 조현수 옮김 / 그린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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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사 연구자인 미셸 세르(1930-2019)의 책이다. 저자 세르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허문 프랑스의 독보적인 통섭 철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식론자)다. 책은 서문, 1부 전쟁, 평화, 2부 자연계약, 3부 과학, 법, 4부 끈과 그 해체로 이루어졌다. 2부 자연계약은 표제작이면서 가장 읽기 쉬운 챕터에 속한다. 저자는 중심과 주변을 전제로 하는 환경이란 말은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반(反)하는 용어이기에, 생태라는 말은 법적 결정을 내릴 수 없기에 적절치 못하다고 말하며 책의 제목이기도 한 자연계약이란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연을 법적 주체가 되는 지위로 올리자고 제안한다. 정치는 세계를 신경 쓰지 않으며 자연과 문화 사이의 오래된 구분 역시 똑같은 배제를 반복하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각오로 이 낡은 관습을 뒤엎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쪽에서는 단단한 과학(경성과학)에 의해 세계가 완전히 뒤바뀌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부드러운 과학(연성과학)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지금 우리의 관습과 경제, 정치를 가능한 한 빨리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재앙을 향해 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논쟁도 암묵적으로 이루어지는 합의를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과거에는 항상 승리자였던 지구가 이제는 피해자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전쟁은 하나의 계약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 역사는 전쟁과 함께 시작된다. 폭력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전쟁이 있고 그 사이에 법적 계약이 존재한다. 저자는 주관적 전쟁과 객관적 폭력을 말한다. 전자는 인간들끼리의 전통적인 갈등과 전쟁을 말한다. 후자는 인간 집단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자 객체인 자연을 향해 가하는 일방적인 파괴와 폭력을 말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객관적 폭력에 대한 법을 발명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인간 세계의 객관적 적(敵)인 세계 자체와 체결해야 할 새로운 계약, 새로운 사전 합의를 말한다. 이것이 곧 자연계약이다. 저자는 인간들의 판(板)을 말한다. 저자의 의도는 이 인간들의 판들이 지구의 지각판들 만큼 물리적으로 지구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을 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인간은 더 이상 어떠한 부피도 없는 한갓 점으로서 허공 속에 삼켜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집합체로서 존재하며 특정한 장소에 갇혀 있는 것을 넘어 거대한 대양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 공간에서 내려다 보아도 포착되는 거대한 판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확장해가고 있다.(67, 68 페이지)

 

저자는 과학의 모든 역사는 나비 한 마리 격인 생각이라는 것에서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결과로 이어지는 극히 낮은 확률의 이 인과관계의 연쇄를 일정하게 만들고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의 근원적인 불확실성과 무작위성에 공포를 느끼고 과학을 통해 인과 관계의 사슬을 꽉 쥐고 우리가 세상을 통제하고자 했다는 확신을 얻고자 했다는 뜻이다. 저자는 우리는 이제 수원지, 우물, 호수로 이루어진 집단과도 같으며 아킬레우스의 작은 강보다 더 거센 물줄기를 이루고 있고 고야의 사막보다도 훨씬 광대한 유동하는 황야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또는 하나의 대양과 같고 단단하면서도 움직임이 있는 하나의 지각판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객관적 폭력의 상황에 놓여 있는 오늘날 이 계약에 서명하는 것 외에는 다른 출구가 없다고 말한다. 과학자들 사이의 계약도 저 오래된 사회계약을 닮아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과학의 역사는 자주 다양한 학술기관이나 법정 판결의 역사와 중첩된다고 말한다.(77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과학으로 인정되는 앎이란 에피스테모-디케로부터 나온다. 이는 지식을 뜻하는 에피스테메와 정의, 심판을 뜻하는 디케라는 말의 합성어다. 과학의 기원은 인간 사회의 기원과 마치 자매처럼 닮아 있다. 일종의 사회계약인 지식의 계약이 앎의 표현들을 상호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이성이 더 이상 아름다움에 대한 생존적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하며 아름다움은 평화를 요구하며 평화는 새로운 계약을 전제로 한다고 덧붙인다.(84 페이지) 신이 죽은 이후 우리에게 남아 있게 된 것은 오직 전쟁뿐이지만 세계 자체가 각 민족이나 나라의 공동체와 자연계약을 맺는 순간 그것은 평화를 위한 이유를 제공해 주게 되고 동시에 우리가 찾아 헤매던 초월성을 부여해 주게 된다. 저자는 농업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권력을 서로 나누어 가진 이들은 자연을 잊었다. 우리 자신이 사상 처음으로 지구 전체에 물리적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고 또한 지구 전체가 이에 대해 우리 인류 전체에 틀림없이 반응하기 시작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비극적이게도 지구를 소홀히 하고 있다.

 

지구를 보존하고 비와 바람이라는 의미에서의 시간을 존중하려면 긴 시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대양의 물이 서로 섞이려면 대략 5천 년이라는 장기적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한 주기가 다 완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단기적 대답과 단기적 해법만을 내어 놓는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대상은 과학과 실천의 가장 큰 대상 즉 지구 - 행성이라는 새로운 자연이다. 저자는 정밀하게 나뉜 전문 분야들 안에서 살아가는 행정관리들, 기자들, 과학자들이 모두 자신들의 권력의 짧은 시간 속에 흠뻑 빠지고 자신들의 좁은 분야들 속에 갇힌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긴 시간의 호흡을 가진 사유를 하는 이들에게 발언권을 주어 보자고 말한다. 지배와 소유 바로 이것이 우리 서구의 이성이 우주를 정복하러 나선 과학과 기술의 여명기에 데카르트가 던진 핵심 개념이다. 우리가 우주를 지배하고 그것을 우리 것이 되도록 만든다는 것, 이것이 산업 발달의 추구와 이른바 순수 과학 양자 모두에 공통적으로 내재하는 그 이면의 철학이다. 이 점에서 그 둘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데카르트식 지배는 과학이 세계에 가하는 객관적 폭력을 잘 조율된 전략으로 전환시킨다. 여기서 우리가 객체들과 맺는 근본적 관계는 전쟁과 소유로 요약된다.(98 페이지)

 

저자는 동물이 배설행위를 함으로써 흔적을 남기고 더럽히며 자신의 영역임을 표시하듯 인간도 배설적 행위로 다른 종들을 내쫓는다고 말한다. 지구는 인간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인간은 지구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는 기생물처럼 세 들어 사는 존재다. 사회계약은 자기 자신 안으로 문을 닫아버린 채 세계를 문밖에 내버려두었다. 사회계약은 사물들의 거대한 세계를 단지 우리가 마음껏 써먹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수동적 대상들의 지위로 격하한 것이다. 인간 이성은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고 외부 자연은 주변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인식과 행위의 주체는 모든 권리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 대상들은 아무런 권리도 부여받지 못했다. 이 대상들은 오늘날까지도 어떤 법적 존엄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과학이 모든 권리를 다 차지하고 있다. 오직 사회적이기만 한 우리의 계약 즉 오직 우리 인간들에게만 초점을 두고 있는 이 계약은 결국 우리 자신의 종의 존속을 위협하는,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위협하는 죽음의 계약이 되고 있다.

 

저자는 [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이”라고 말하는 공로를 세웠지만 동시에 ‘오직 인간만이’라고 생각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예전에 세계는 우리의 주인이었지만 얼마 전까지는 우리의 노예였으며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의 숙주이고 이제는 우리의 공생자다. 저자가 말하는 자연으로의 회귀란 자연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이 계약은 객관적 전쟁 속에서 이루어지는 휴전협정이며 공생의 계약이다. 공생의 권리는 상호성에 의해 정의된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만큼 인간도 자연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자연은 이제 권리의 주체가 된다.

 

지구는 우리에게 힘과 관계 상호작용이라는 방식으로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 정도면 계약을 맺기에 충분하다. 공생하는 두 존재는 마땅히 서로에게 생명을 빚진 자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따를 것이다.(115 페이지) 저자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에서는 자기들끼리 다투면 내부의 적을 무찌르기 전에 자신들의 배가 난파당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사회계약을 체결한 선원들을 이야기 한다. 저자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점에서 지구도 배와 같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제 정치 지도자는 인문학과 도시의 거리, 그 성벽에서 빠져나와야 하며 물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물들 없는 인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사물들을 매개로 이루어지며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 역시 타인들을 경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바로 이것이 법이 그려내는 더욱 안정적인 공간이다. 저자는 자연계약을 형이상학적인 것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 국지적 전문 영역의 일상적 경계를 특히 물리학의 경계로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연계약 역시 명시적으로 체결되지 않은 가상적 계약이다. 자연에 우호의 손을 내미는 것이 자연계약의 하나일 것이다. 실로 중요한 근본적 계약들은 모두 암묵적인 것으로인 듯 보인다. 자연계약은 이 지구 전체의 관계망과 자연계약 그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연결망을 그것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루도록 연결한다. 저자는 서로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세계를 사랑하라는 것은 물리적 지구 전체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134 페이지) 우리의 두 아버지를, 자연적 아버지와 인간적 아버지, 땅과 이웃을 사랑하라. 인류라는 우리의 인간적 어머니와 지구라는 우리의 자연적 어머니를 사랑하라.

 

저자는 기하학과 물리학에 큰 의미를 둔다. 저자는 기하학을 단순히 도형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하고 소통시키는 방법론으로 본다. 저자의 물리학은 고정된 질서를 다루는 고전역학보다는 변화와 무질서를 다루는 현대물리학에 가깝다. 저자는 모방하는 것은 지배하는 것이고 이긴다는 것은 파괴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모방하는 것이 지배하는 것이란 말은 지식이 모방 욕구로부터 나왔기 때문으로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의 역사는 법정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 과학의 시작의 역사는 적이자 쌍둥이인 두 자매 즉 정의와 정확성, 판단하는(재판하는) 이성과 증명하는 이성의 비극적으로 파란만장한 공동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168 페이지) 저자는 사회과학이 제공하는 정보는 언제까지나 그저 평범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모든 이가 모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는 데 불과하며 자연과학이 제공하는 정보는 계산 가능한 것이며, 그 희귀성에 비례하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지식이라 부른다고 말한다.(175 페이지) 이는 사회과학이란 인간이라는 폐쇄된 울타리에서 말과 글을 주고 받는 재생산에 가깝고 자연과학은 인간 외부의 거대한 실재인 세계와 직접 대화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자유는 제한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자유는 부분적으로 법이 없는 공간들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이 틈으로 자연이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낙사고라스에게는 공공의 문제보다 자연이 더 큰 관심사였다. 아낙사고라스는 태양이 불타고 있다고 말해 고발되었다. 그가 본 태양은 불타는 돌덩이다. 저자는 자연은 도시의 지옥 또는 문화의 지옥이라 말한다. 저자는 자연을 통제하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자연이 보내는 미세한 신호나 소음을 경청하는 자연과학을 사랑한다. 문화는 수천 가지이지만 자연은 단 하나다.

 

저자는 과학과 도덕의 차이도 논한다. 도덕은 명령법으로 쓰이지만 지식은 법처럼 직설법으로 쓰이되 법처럼 수행문적이지는 않다. 저자는 과학들은 그 자신들끼리 서로 분리되고 구분되어 어떤 과학도 자신의 고유 영역 밖에서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관할권의 네트워크를 내적으로 제도화한다고 말한다. 이는 경계 짓기(영역 설정)를 의미한다. 과학의 역사 역시 종교의 역사가 그랬던 것만큼 수많은 추방된 자를 남기고 있다. 처음에는 법이 과학을, 재판에 재판을 거듭하며 압도하지만 과학이 점차 법을 압도한다. 모든 판결이 이성의 빛 아래 재검토되기 때문이다.(203 페이지) 물론 법이 다시 과학을 압도하고, 과학이 다시 법을 압도하는 순환이 계속된다.

 

저자는 우리 인간 자신이 하는 행위로 인해 크게 변모되는 지구를 흔들리는 지구라 부른다.(216 페이지) 저자는 세계가 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가운데 책이 세계로 들어오고 있다는 말을 한다. 세계는 담론과 법에 갇혀 있고 가상이 현실을 잠식하고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저자는 오늘날의 현자(賢者)는 영웅들의 시대의 입법자와 엄밀한 지식으로 무장한 현대의 지식 소유자를 자신의 한 몸 안에 뒤섞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현자는 자연과학에 정통하며 사회과학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사람으로서 보고서보다는 직접적 행동을, 조사나 자료보다는 직접적인 인간 경험을 중요시하며 자연과 사회의 여행자이며 강, 모래, 바람, 바다, 산을 사랑한다. 그는 지구 전체를 걷는 자이며 다양한 몸짓 만큼이나 다양한 풍경을 사랑하며 북서 항로를 홀로 항해하는 탐험가처럼 실증적 지식인 인문학과 섬세하고도 드물게 교차하는 그 장소들을 통과해 간다.

 

그는 무엇보다 지구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사람이다. 진정한 교육은 자기 자신의 유한성을 판단할 줄 아는 신중한 존재를 길러내며 참된 이성의 올바른 지적 전수는 이 존재를 무한한 생성 속으로 내딛도록 만든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근원적 대지는 유한하다. 하지만 이 근원적 대지를 발판으로 출발하는 출항은 어떤 끝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계를 벗어나 이 세계와 비슷한 곳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 이것을 두고 출항한다고 말한다.(247 페이지)

 

저자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끈을 풀고 다시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끈울 묶는다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우리가 출항하는 것은 오로지 끈을 바꾸기 위해서일까?라고 묻는다. 저자가 말하는 바 계약이란 단어는 본래 조여 매는, 끌어당기는 선(線)이다.(254 페이지) 계약이 반드시 언어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밧줄 놀이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밧줄로 이어진 것들끼리는 서로 말없이 이해한다/ 아우른다. 어원적으로 볼 때 그리고 그 본성으로 볼 때 계약은 함께 묶이는 것이다.(263 페이지)

 

저자는 “밧줄은 나를 형식/ 형태들에, 사물들에, 타인들에 묶고 있으며 그러므로 나를 추상에, 세계에, 사회에 입문시키고 있다.”고 말한다.(264 페이지) 저자가 드는 예는 한 행성 또는 다른 행성의 아주 작은 움직임이라도 지체 없이 다른 모든 행성에 영향을 끼치게 되며 이에 대한 이 행성들의 반응 역시 곧 이 첫 번째 행성들에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일련의 상호 제약들의 총체라 한다,

 

저자는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진 이래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멸 가능성을 우리 자신의 힘 안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바 이 소멸의 곡선은 계속 수직 상승하고 있다고 말한다.(293, 294 페이지) 추상적으로 되어버린, 더 이상 직접 체험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현대 인류는 땅에서 발을 떼어내어 기호들을 향해 날아오르고 이미지들과 코드들의 세계를 들락거리면서 도시 속에서 살아가느라 더 이상 삶이나 세계의 사물들과 직접적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 우리 모두는 발이 완전히 땅에서 떨어진 탈영토화된 상태의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저자는 우리는 실로 죽어가는 우리의 늙은 어머니를 위한 어머니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자연에게 그것이 우리에게 주었던 탄생을 되돌려준다는 것의 새로운 의미는 대체 어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 동행의 끈들 너무나도 상호적이어서 탄생이 어느 쪽 방향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결정할 수 없게 되는 이 상호 공생의 끈들이 바로 자연계약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저자의 어조는 묵시적이고 시적이며 은유적이다. 흩어지는 듯 하다가도 의미가 연결되고 어렵게 다가오다가도 친절한 면모를 보이는 어조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책은 약 40년 전에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통합적이고 대안적이고 선구적이다. 깊은 사유의 세계에 초대한 저자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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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9-22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셀 세르..앤날에 입장 총서 시리즈로 만나봤었는데 독특한 과학자같다는 안상이 강했습니다. 19년에 사망하셨네요. 소개 감사합니다. 잊고 있었습니다 오랜시간동안..^^;;

벤투의스케치북 2026-09-22 12:12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과학, 영화와 만나다
레로이 W. 두벡.수잔 E. 모시어.주디스 E. 보스 지음, 차동우.홍주봉 옮김 / 한승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물리학과 교수 레로이 두벡, 생물학과 교수 수잔 모시어의 [과학, 영화와 만나다]는 물리학과 생물학의 기본 지식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 책이다. 20년 전인 2006년에 나온 책이어서 SF를 공상과학영화라고 번역한 것이 눈에 띈다. 그런데 혹성 탈출이라고는 하지 않고 행성 탈출이라고 해 관심을 갖게 한다. 또한 최초의 과학 소설로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를 소개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공상과학영화, 과학 소설이란 제목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과학 공상 영화라는 단어도 나온다.(129 페이지)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있다. 과학적 가설을 거절할 권리가 있지만 어떤 이론이 기술에 적용되고 나면 거절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살 수 있는 선택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책에서 다룬 영화는 스페이스 오디세이, 블레이드 러너, 지구 최후의 날, 지구 온난화가 오면, 에일리언, 쥐라기 공원 등 다앙하다. 영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물리학, 생물학 지식을 별도의 장에 담았다. 물론 이는 영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지만 영화와 별개로 알아둘 만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뉴턴의 제 3법칙인 작용 반작용의 법칙과 운동량 보존을 위배하는 영화로 [수퍼맨]을 든다. 영화의 끝 부분에서 수퍼맨은 원자폭탄이 폭발해 캘리포니아에 있는 샌안드레이아스 단층이 격렬하게 움직이자 이것을 멈추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감쇄시키려고 수퍼맨은 단층의 일부를 들어 올려 제자리에 놓으려 한다. 암석의 무게는 수백만 톤은 아니더라도 수십만톤은 충분히 된다.

 

만약 수퍼맨이 암석에게 위로 향하는 힘을 작용하면 뉴턴의 제3법칙에 의해 암석은 수퍼맨을 아래로 내리누를 것이다. 그러면 수퍼맨은 서 있는 자리의 암반을 뚫고 박혀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수퍼맨이 얼마나 강한가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서 있는 바위가 그를 누르는 암석 수백만 톤에 해당하는 무게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 수퍼맨이 법칙을 위반한 것은 더 있다. 수퍼맨의 아주 작은 손바닥 면적으로 거대한 단층 암반을 밀면 단층 전체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수퍼맨의 손이 닿은 부분만 뚫리게 된다. 또한 단층을 움직일 만한 에너지가 수퍼맨에게서 나올 때 발생하는 열과 충격파만으로도 주변 환경은 초토화되어야 한다.

 

지구 주위의 궤도를 회전하는 우주비행사들은 자유낙하 하는 기분을 느낀다. 즉 중력이 없는 것처럼 느낀다. 이것은 우주비행사들에게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비행사들을 지구 주위의 궤도에 붙잡아두는데 중력 전체가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주비행사들을 지구 쪽으로 잡아당길 중력이나 그들이 중력이 존재한다고 느낄 만한 여분의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은 흥미롭다. 다른 과학책들을 통해서 안 것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AI는 우주 비행사들이 무중력 상태를 느끼는 것은 우주선과 우주비행사 모두 지구를 향해 똑같은 가속도로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책은 명왕성도 행성으로 소개한다. 명왕성이 행성 지위를 잃은 것은 2006년 8월 24일이다. 책의 원서가 나온 해는 2004년이고, 책이 번역/ 출판된 것은 2006년 8월 24일보다 며칠 전이다. 책 출간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명왕성의 행성 지위 박탈이 결정되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토리노 목록이라는 것이 있다. 형성이나 혜성같은 근(近) 지구 천체가 지구에 충돌할 위험성을 나타내는 기준인 토리노 척도를 의미한다. 토리노 목록이 0이면 그 천체가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별로 없거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충돌한다고 해도 별 피해를 입히지 못함을 의미한다. 토리노 목록이 3이면 1% 이상의 확률로 지구에 충돌할 가능성이 있고 제한된 지역이 파괴될 수도 있다. 토리노 목록이 7이면 넓은 지역에 재앙을 일으킬 정도의 지극히 심각한 위협이 되는 충돌을 의미한다. 토리노 스케일이 10이면 지구 전체에 기후변화를 가져오는 재앙을 일으키는 충돌을 의미한다.

 

태양계 내부에는 발달한 외계 문명이 없다는 점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달의 표면을 걸었고 우주탐사선이 화성과 금성에 착륙했으며 태양계에 속한 대부분의 행성 옆을 통과했다. 지적이든 원시 형태든 어떤 종류의 생명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행성의 대부분은 표면 조건이 너무 나빠서 어떤 형태의 생명체든 생겨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인간이 털이 없는 이유가 바다에서 헤엄치기 유리해서라는 말도 있다. 물론 털이 없는 경우 열이 잘 발산되어서 털을 가진 짐승을 따라잡고 사냥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고대 외계 우주인들이 인류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창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외계의 우주인으로부터 털이 없는 것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내용이 그렇게 쉽게 설명되지는 않은 책이다. 영화에 나오는 과학과 관련된 오류를 설명하는 책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정통 물리학 책, 정통 생물학 책 같다. 책에는 영화의 오류를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과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상식을 지적하는 부분도 있다. 그 하나가 시간 여행에 관한 것이다.

 

"시간 지연이 독자들에게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고 결론짓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것은 맞지만 매우 제한적인 일방통행의 시간 여행만 가능하다. 만약 과학자들이 새로운 동력원과 우주비행사를 보호할 방법을 찾는다면 원칙적으로 우주비행사들을 수천 년 후에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을 미래로 보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시간을 거스르며 돌아와 우리에게 미래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는 여행은 불가능하다. 우주비행사들과 우리의 물리적 접촉은 그들이 목적지로 일진광풍처럼 떠날 때 뿐이다. 승객들이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타임머신을 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172, 173 페이지)

 

저자는 하늘을 시간을 거꾸로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종류의 타임머신으로 정의한다. 지금 하늘에 보이는 사건들은 오래전에 일어난 일인데 바로 지금 우리 눈에 도착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운 별인 센타우르스 자리 알파 별에서 오는 빛은 4.3년 전에 떠난 것으로 저녁 하늘의 그 별을 보면 적어도 4.3년 전을 보는 것이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에 대해서도 저자는 한마디 한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미래로부터 추가의 물질이 갑자기 과거로 더해지기 때문에 에너지 보존에 위배된다. 과거가 물질의 형태로 에너지를 얻으면 미래는 그만큼 에너지를 잃는다. 간단히 말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과학과 논리의 지식에 근거하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175 페이지) 일반적으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불가능함을 예로 들 때 할아버지의 역설 같은 인과율의 오류를 들지만 우주 전체의 질량과 에너지의 총량이 변한다는 물리법칙을 예로 든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8장 열, 온도, 열역학에서 눈에 띄는 구절은 "온도는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나 분자의 전체 운동에너지가 아니라 평균 운동에너지를 측정하는 척도다. 그래서 끓는 물 10kg은 끓는 물 1kg 보다 분자 운동에너지를 10배 더 많이 갖는다. 하지만 두 경우에 물 분자 하나의 평균 운동에너지는 모두 같기 때문에 온도가 동일하다."는 구절이다.(207 페이지)

 

대부분의 물질이 식으면 수축하는 일반적인 규칙의 한 가지 예외가 물이다. 약 4°C 때 부피가 가장 작다. 그래서 물은 그 온도에서 밀도가 가장 크다. 온도가 이보다 더 낮거나 높으면 주어진 양의 물은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4°C의 물보다 밀도가 작아진다. 열은 두 물체 사이의 온도 차이 때문에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에너지가 이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온실효과는 수증기나 이산화탄소, 지구의 대기에 들어 있는 다른 기체에 의해 촉진되는 지구온난화를 일컫는 말이다.

 

자연적인 온실 효과에 기인한 온도 상승이 없었다면 지구의 날씨는 지금보다 15°C 정도 낮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는 많은 생물체가 살아남기에 너무 추운 날씨이다. 대기권이 얇아서 실질적으로 온실 효과가 없는 화성 표면의 평균 온도는 영하 60°C다. 온실 효과라는 명칭은 유리로 지은 온실 내부에서도 온도가 상승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붙여졌다.

 

온실 효과에 의한 온난화와 유황에 의한 냉각화가 있다. 보면 인간이 생산한 낮은 고도에 머무르는 유황 방출물은 수일 또는 수주일 이내에 지구로 다시 떨어진다. 대부분의 온실 기체는 수백 년 동안에 걸쳐서 대기에 남아 있으므로 온실 효과에 의한 온난화가 결국 유황에 의한 냉각화를 넘어설 것이다. 온실 기체는 하루에 24시간 동안 지구를 덥히지만 유황은 단지 햇빛이 쪼이는 낮에만 지구를 냉각시킨다.(247 페이지)

 

이산화황은 물에 잘 녹고 반응이 빠른 시한부 기체다. 이산화탄소는 반응하지 않고 버티는 끈질긴 기체다. 많은 영화가 지구온난화에 대한 개념을 다룬다. 화산이 분출하면 이산화탄소가 이산화황보다 1.5배에서 수배 더 많이 나온다. 이는 화석연료를 연소시키는 경우와 비슷하다. 화석연료를 태울 때든 화산이 분출할 때든 이산화황보다 이산화탄소가 더 많이 나오는 이유는 지구와 생명체를 구성하는 원소의 근본적인 양과 과학적 특성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탄소를 기본 골격으로 하여 만들어진다. 황은 부수적인 원소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탄소를 기반으로 하는 것은 탄소의 압도적인 결합력 때문이다. 탄소는 최외곽 전자 수가 네 개이다. 이를 쉽게 결합의 손이 네 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탄소는 스스로 또는 다른 원소들과 결합하여 무궁무진한 형태를 만들 수 있다. 탄소와 탄소 사이의 결합은 매우 단단하고 안정적이어서 생명체의 몸을 구성하는 데 적합하다. 탄소는 양도 충분하다.

 

규소도 최외곽 전자가 네 개다. 규소는 원자가 커 결합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복잡한 사슬 구조를 만들기 어렵다. 탄소는 호흡을 통해 기체인 이산화탄소를 내보낼 수 있지만 규소는 산소와 결합하면 단단한 이산화규소(모래/ 유리)가 되어 몸 밖으로 배출하기가 치명적으로 어렵다.

 

과학에서 어떤 이론이 설(說)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뒷받침되는 많은 증거가 있어야 한다. 다윈이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간했을 때 그는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엄청나게 많은 양의 관찰 결과를 제시했고 그 이후에도 과학자들에 의하여 많은 양의 관찰 결과가 다윈의 가설을 지지해 줌으로써 진화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지질학자들은 생물체가 생존한 모든 지옥에서 많은 날씨의 변화가 있었음을 충분한 증거를 근거로 단언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지역의 날씨 변화가 심할수록 그 지역에서 더 많은 종류의 생물체의 흔적이 발견되곤 한다. 멸종이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현재도 인류는 생물체의 멸종을 경험하고 있고 이를 우려하고 있다. 인류에 의해 발생한 멸종은 단 수백년 만에 일어났다는 것이 특징이다. 과거의 대멸종이 수백만 년에 걸쳐 진행된 것과는 극명하게 비교된다.(358 페이지)

 

영화 [쥐라기 공원]은 공룡시대를 관람자가 더욱 실감나게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특수효과를 사용했다. 이 영화에서의 공룡은 너무나 진짜 같아서 관람객들은 시간차 여행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다. 자료에 의하면 공룡은 약 2억 3천만 년 전에 지구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해 약 6,500만년 전에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이 시기는 지질학적으로 백악기가 끝나고 신생대 3기가 시작되는 기간이었고 따라서 KPg 경계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제시된 조류와 공룡의 관계는 실제로 많은 화석 자료에 근거한 과학적 가설이다. 조류 골격의 특징을 가지는 공룡 화석이 반복적으로 발견됨으로써 공룡이 조류의 조상이라는 가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물리학과 생물학에 대한 차원 높은 지식을 제공한 후 저자들은 영화를 차례차례 하나씩 소개한다. 촬영 또는 제작 스태프들을 이야기하고 줄거리를 이야기한다. 꽤 상세하다. 특수효과를 이야기하고 원작 해설을 언급한다. 참고문헌도 언급한다.

 

책을 읽으며 지질 또는 지구과학을 소재로 한 영화는 별로 없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단테스 피크, 더 코어, 샌 안드레아스, 더 웨이브, 백두산, 투모로우, 트위스터, 인터스텔라, 돈 룩 업 등이 있다. 본문에 나온 수퍼맨은 제작 년도가 책이 나오기 전인 1978년이고, 샌안드레아스는 책이 나온 해보다 후인 2015년에 나왔다.

 

두 영화는 샌 안드레아스 단층을 소재로 한 영화다. 두 영화는 많은 차이가 난다. 전자가 과학에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 수퍼맨은 지질학적 단층을 수퍼맨의 위대함과 힘을 증명하기 위한 무대로 사용했고 샌안드레아스는 역동적인 지구의 움직임 자체를 인류가 마주해야 할 거대한 자연재해로 보게 만든다. 수퍼맨이 만들어진 시기는 판구조론이 정립된 후이다. 수퍼맨의 원작 만화는 1938년 작품이다. 이렇듯 [과학, 영화와 만나다]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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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8월 18일 아이슬란드 오크예퀴들(Okjökull) 빙하 장례식이 열렸다. 녹아 사라진 얼음 조각을 애도하는 자리를 넘어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후변화로 인해 소멸한 자연을 향해 치러진 공식 장례식이자 전 세계에 보내는 강력한 경고였다. 과학적으로 빙하는 자체 무게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두께(약 40~50m 이상)를 유지해야 하는데 오크예퀴들은 2014년 이미 자격을 잃고 '사망 판정'을 받았다.

 

"오크(Ok)는 아이슬란드에서 처음으로 빙하의 지위를 잃은 빙하입니다. 앞으로 200년 동안 우리의 모든 빙하가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 기념비는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알고 있음을 기록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행동했는지 여부는 오직 당신(미래 세대)만이 알 것입니다."

 

오크예퀴들 빙하 추모비에 새겨진 이 '미래로 보내는 편지'의 추모 글을 쓴 사람은 아이슬란드의 유명 작가이자 시인, 환경운동가인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Andri Snær Magnason; 1973 - )이다. 작가는 오크예퀴들 장례식 이후인 2019년에 나온 [시간과 물에 대하여]에서 “2014년 어느 날 아이슬란드의 한 빙하가 사라졌다.”고 썼다.

 

마그나손은 ”우리는 신문에서 빙하 해빙, 기록적 고온, 해수 산성화, 배출가스 증가 같은 머리기사 제목을 보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안다고 여긴다. 과학자들이 옳다면 이 단어들은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그 어떤 사건보다 심각하다. 우리가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이 단어들은 우리의 행동과 결정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이 의미들의 99퍼센트는 백색잡음으로 흩어져버린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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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여 안녕 - 기후 위기 최전선에 선 여성학자의 경이로운 지구 탐험기
제마 워덤 지음, 박아람 옮김 / 문학수첩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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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氷河)란 말에서 하(河)는 강물을 의미하는 글자다. 이 단어가 들어 있는 것은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마치 강물처럼 아주 느리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빙하는 거대한 자신의 무게에 눌려 얼음 결정들이 변형되면서 산비탈을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간다. 이는 빙하가 커다란 압력을 받으면 부피가 작은 물이 되기에 영하(1~2도)에서도 녹아 미끄러지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빙하는 조용하고 수동적이며 죽어 있는 것 같지만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측정한 결과를 보면 빙하기에 확장되었다가 대기 중 탄소 농도가 높아지면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가장 민감하고 동적인 자연이다. 

 

빙하빙(glacier ice)은 빙하를 이루는 얼음을 의미한다. 빙하빙은 깊은 곳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아 빙하 가장자리로 밀려나오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압축되면서 기포가 전부 빠져나간 얼음이 흡수하지 못하는 색이 푸른 색이어서 푸른 색을 띤다. 빙하학자(박사)이자 모험가이자 작가인 제마 워덤(Jemma Wadham)은 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고 있는 현실을 주지시킨다. 빙하가 녹아 후퇴한 자리에는 거대한 호수들이 수없이 많이 생겨난다. 이를 빙하호(Glacial Lake)라고 부른다. 

 

빙하와 함께 있으면 마치 친구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린란드, 남극대륙, 스발바르, 칠레 파타고니아, 페루 안데스, 히말라야 등 전 세계 극지와 고산지대의 빙하를 가는 원정대를 25회 이상 이끌었다. 저자는 이를 통해 빙하 밑바닥에 수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고 빙하가 녹으면서 바다로 보내는 풍부한 영양소(철분, 인 등)가 해양 플랑크톤을 키우고 지구의 기후를 조절하는 중요한 기작임을 밝혀냈다. 

 

빙하(Glacier)와 해빙(海氷; sea ice)은 구별된다. 빙하는 육지의 거대한 얼음 강이고, 해빙은 바다 자체가 얼어붙은 얼음판이다. 빙하는 산에서 녹은 물이 다시 얼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녹지 않고 쌓인 눈이 자신의 무게에 짓눌려 단단한 얼음(빙하빙)으로 변한 것이다. 빙하가 바다로 밀려 내려오다 부러져 바다에 떠다니는 조각을 빙산(Iceberg)이라고 부른다. 이 역시 민물 얼음이다. 

 

해빙은 육지와 상관없이 극지방의 차가운 바닷물 표면이 영하의 기온 때문에 직접 얼어붙은 것으로 소금기가 있어서 0℃가 아닌 보통 영하 1.8℃ 이하에서 얼기 시작한다. 얼음은 유동 속도가 빠를수록 하나의 몸체로 이동하기 어려워 크레바스와 빙폭(氷瀑)이 만들어진다. 지질학에서는 크레바스를 얼음이라는 암석에 가해진 인장 응력(Tensional Stress, 잡아당기는 힘)에 의한 취성 파괴(Brittle Failure)로 분석한다. 크레바스는 빙하가 현재 어떤 지형 위를, 얼마나 빠른 속도로, 어떤 힘을 받으며 흐르고 있는가를 표면에 그대로 찍어내는 지질학적 지문이다. 

 

빙하는 얼음 결정의 변형(완전히 단단한 고체 상태를 유지한 채 연성 변형), 얼음의 미끄러짐(압력으로 빙하가 녹는 경우), 빙하 아래 퇴적물의 변형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이동한다. 이를 어떤 빙하는 기어가고(creep; 얼음 결정 변형만 일어나는 경우), 어떤 빙하는 걸어가고(얼음 결정 변형과 활동성 이동이 일어나는 경우), 어떤 빙하는 전력질주(얼음 결정이 변형되고 지반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동시에 그 아래 퇴적물이 변형되는 경우)한다. 과학계에서는 빙하가 고체 상태로 움직일 때 빙하를 일종의 '고온 변성암'처럼 취급한다. 즉 바위가 열과 압력을 받아 휘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로 보는 것이다. 

 

빙하의 최상부(0~50m 깊이)는 압력이 낮아 단단하고 부서지기 쉬운 취성 영역(Brittle zone)이다. 이곳에서는 얼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깨져서 크레바스를 만든다. 반면 50m보다 깊은 곳은 위에 쌓인 엄청난 얼음 무게로 인해 가해지는 압력(정수압)이 매우 높다. 이 깊이에서는 얼음 입자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깨지는 대신 연성 영역(Ductile zone)으로 거동하게 된다. 

 

압력에 의해 얼음이 녹아 물처럼 흐르는가(기저 미끄러짐/압력 융해), 고체 상태로 유연하게 늘어나는가(연성 변형)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얼음의 온도와 압력의 크기다. 압력이 가해지더라도 얼음이 녹는점에 도달하지 못하면 얼음은 고체 상태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영구적인 형태 변형을 일으킨다. 얼음의 온도가 압력 융해점보다 훨씬 낮은 영하 수십 도 상태(한랭 빙하)이거나 압력이 고르게 분산되어 특정 지점에 압력이 집중되지 않을 때다.

 

빙하는 내부 온도와 바닥면(기저부)의 상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열 체제(Thermal Regime)로 분류된다. 온난 빙하와 한랭 빙하다. 빙하의 거대한 무게는 바닥면에 엄청난 압력을 가한다. 물은 압력이 높아지면 0℃보다 낮은 온도에서도 녹는 성질(압력 융점)을 가지고 있다. 온난 빙하는 두꺼운 얼음의 압력과 지구 내부에서 올라오는 지열 덕분에 바닥면의 얼음이 녹아 얇은 수막(물층)을 형성하게 된다. 이 물이 윤활유 역할을 하면서 빙하가 지반에 붙지 않고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게 만든다.

 

다시 말해 빙하는 바닥 지반(암반)에 단단히 얼어붙은 채 움직이는 빙하(한랭 빙하)와 지반에 얼어붙지 않고 그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빙하(온난 빙하)로 나뉜다. 빙하를 바라보았을 때 주변에 물이 콸콸 흐르고, 얼음 겉면에 흙돌더미가 잔뜩 섞여 있으며 표면이 거칠게 찢어져 있다면 육안으로도 지반에 붙지 않고 미끄러지는 온난 빙하임을 알아챌 수 있다. 한랭 빙하가 거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움직임이 매우 적으며 전 세계에서 가장 느리게 이동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물이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의사과학인 워터 메모리 가설(감정이나 정보를 물이 기억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빙하와 환경 과학 관점에서 물이 지구의 역사와 환경 변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다. 1) 수천~수만 년 동안 얼어붙은 빙하(얼음 상태의 물)는 그 당시의 대기 성분, 이산화탄소 농도, 화산재 등의 정보를 그대로 가두어 보존한다. 즉, 물이 과거 지구 환경의 '기억'을 품고 있는 셈이다. 2)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늘어나 물이 산성화되거나, 도로의 염분, 화학물질 등이 녹아들어 유입되면 물은 그 성분 변화(총용존고형물 등)를 고스란히 담아낸다.(과학자들은 이를 센서로 측정해 낼 수 있다. 3) 빙하 아래 녹은 물(융빙수)이 단순한 무생물이 아니라 미생물이 가득한 활발한 생태계이며, 바다로 흘러가며 영양분과 탄소를 전달하는 지구의 생명줄 역할을 한다.

 

저자는 현장 탐사는 결코 연구가 주요 목적이 아니라는 것, 주요 목적은 생존이고 운이 좋다면 연구를 겸할 수 있을뿐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빙하 아래의 생명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빙하 아래에는 빛이 닿지 않는다. 부서진 암석과 물이 있을뿐이다. 그렇다면 이 깊고 어두운 지하 세계에서 생물이 생존할 수 있을까?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다시 황철석에 들어 있는 철과 황으로 눈을 돌렸다.

 

두 원소 모두 수십억 년 전 태곳적부터 지구상에 존재했다. 과학자들은 고대 지구에서 빛 대신 화학 에너지를 사용하는 화학합성 영양 생물이라는 미생물이 번성했다고 보고 있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화학반응은 에너지를 방출하며 일부 미생물은 그것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빙하 밑에서 황철석이 산소와 반응한다면 암석의 황은 산화 반응을 통해 황산염으로 전환되고 여기서 생성되는 에너지로 미생물이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미생물이 암석을 소비하면 생존한다는 뜻이다.

 

눈과 빙하의 차이가 있다. 눈의 재료인 얼음 결정 자체는 사실 물처럼 투명하지만 눈송이들은 매우 복잡한 육각 결정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사이사이에 무수히 많은 공기 방울이 갇혀 있다. 햇빛(백색광)이 눈 표면에 닿으면 빛은 얼음 결정과 공기 방울의 수많은 경계면에 부딪히며 모든 방향으로 무작위로 튕겨 나가는 난반사(산란)를 일으킨다. 가시광선의 모든 색(빨강~보라)이 흡수될 틈도 없이 고스란히 튕겨 나와 합쳐지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가장 밝은 색인 흰색으로 보인다.

 

빙하는 수천~수만 년 동안 눈이 계속 쌓이면서 엄청난 무게로 압축되어 만들어진 얼음이다. 이 강한 압력 때문에 얼음 속에 있던 공기 방울들이 대부분 밖으로 빠져나가고 매우 밀도가 높고 투명한 거대 얼음 결정만 남은 것이다. 공기 방울(반사 유발자)이 사라진 빽빽한 빙하 조직은 빛을 즉시 튕겨내지 않고 얼음 깊숙한 곳까지 통과시킨다. 물(H₂O) 분자는 본질적으로 파장이 긴 붉은색 계열(빨강, 주황, 노랑)의 빛을 잘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햇빛이 두꺼운 빙하 내부를 길게 통과하는 동안 붉은빛은 얼음에 모두 흡수되어 사라지고 파장이 짧아 흡수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푸른빛 계열만 빙하 내부에서 산란되어 밖으로 빠져나오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신비로운 푸른색으로 보인다.

 

빙하와 구별해야 할 것이 빙상이다. 빙하는 높은 산이나 고위도 지역에서 눈이 쌓여 다져진 얼음이 자체 무게로 천천히 흐르는 모든 얼음 덩어리를 지칭하며 빙상은 그 가운데서 면적이 5만 km²를 넘는 대륙 규모의 초대형 빙하를 말한다. 빙하 구혈(moulin; 溝穴)은 빙하 표면에 수직으로 뚫린 거대한 원통형 구멍으로 표면이 녹은 물이 빙하 바닥까지 흘러 들어가게 만드는 통로로 작용한다. moulin은 방앗간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방앗간의 물레방아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떻게 빙하 탐사와 같이 힘든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목표가 리더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실패했다면 다시 시도해라. 다시 실패해라. 더 낮게 실패하라"는 사무엘 베케트의 구절을 인용한다.(11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남극 대륙은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거대한 황무지다. 지금껏 인류가 뿌리내리지 못한 유일한 땅, 우리의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미지의 땅으로 세계 지도에는 인간이 살 수 없는 흰색 공백으로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170cm 키에 체중이 54kg에 불과한 자신은 극한의 활동을 즐길 만큼 튼튼해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꽤 체력이 강인한 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남극대륙에서 발견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표면의 대기 온도가 무려 섭씨 영하 80도에 달하는데도 남극 빙상 하부의 상당 부분이 젖어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166 페이지) 압력이 상당하면 부피가 작은 액체가 되려는 물의 성질로 인한 것, 지구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약간의 열과 빙하 저면의 암석 위로 얼음이 이동할 때 발생하는 마찰열 등이 두루 작용한 경우다.

 

2015년 파리 협정을 통해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들이 지구의 평균 온도를 산업화 이전 시대와 비교해 섭씨 2° 이상, 이상적으로는 1.5° 이상 올리지 않겠다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협약은 빙상이나 영구 동토층이 녹을 때 메테인이 야기하는 추가적인 온난화를 고려하지 않은 수치다. 빙상 아래 갇혀 있는 메테인 하이드레이트가 방출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를 감안하면 우리는 화석연료 배출량을 훨씬 더 많이 줄여야만 온난화를 파리 협정에서 약속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177 페이지) 흥미로운 점은 남극 깊은 곳에 메테인 하이드레이트가 숨어 있다고 해도 대기로 빠져나오기 전에 덜 해로운 이산화탄소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이다. 빙상 밑에 서식하는 다른 미생물군은 메테인을 이산화탄소로 전환하여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저자는 매일 빙하로 건너 가는 길에 마치 연못에 잔물결이 펴지듯 조이스 빙하 앞으로 퍼져나간 울퉁불퉁한 빙퇴석 지대를 지나갔다고 말한다. 이 빙퇴석들은 이제는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지만 과거에 빙하 주둥이가 전진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빙퇴석(moraine)은 빙하가 이동하면서 산과 계곡을 깎아내고 운반해온 바위, 자갈, 흙 등이 빙하가 녹은 자리에 그대로 쌓여 만들어진 언덕이나 지형을 말한다.

 

저자는 자신이 파타고니아에 간 이유는 기후와 얼음, 물이 복잡하게 얽힌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서였지만 그것만으로는 2016년 한겨울에 슈테펜 빙하 언저리에 소박한 텐트 안에서 오돌오돌 떨며 밤을 지새운 연유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뒤로 저자는 자주 자문해 보았다고 한다. 자신이 파타고니아를 찾은 것일까? 아니면 파타고니아가 나를 부른 것일까?(193 페이지)

 

저자는 글로프(GLOF)라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글로프는 빙하호 범람(Glacier Lake Outburst Flood)의 줄임말이다. 최근 일어난 히말라야 빙하 붕괴에 의한 네팔 대홍수가 하나의 예다. 저자는 자신의 모든 빙하 탐사가 그랬듯 파타고니아에 간 것도 답을 찾기 위해서였지만 자신이 찾은 답은 더 많은 의문을 낳았다고 말한다.(217, 218 페이지)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이라는 뜻의 히마와 거처라는 뜻의 알라야가 합쳐진 이름이며 서로 교차하는 세계의 산맥인 힌두쿠시, 카라코람, 히말라야를 모두 포함하기도 한다. 히말라야와 그 일대의 산맥은 북극과 남극을 제외하고 지구상에서 빙하가 가장 넓게 분포한 지역이어서 제3의 극지라 불리기도 한다. 그린란드와 남극대륙은 높게 솟은 봉우리와 골짜기를 거대한 빙상이 모조리 뒤덮고 있지만 히말라야 산맥에는 5만 개 이상의 곡빙하가 최대 해발 8849m 높이에 이르는 높은 봉우리들에서 슬금슬금 내려오고 있다.

 

이 곡빙하들은 이 지역의 중요한 자원, 가장 기본적인 자원을 동결 상태로 저장하는 아시아의 급수탑이다. 히말라야의 빙하들은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며 운동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 겨울에 빙체 위에 내린 눈을 가둬놓는 빙하가 있는가 하면 여름 몬순에 물을 가두는 빙하도 있고 초타 시그리처럼 여름과 겨울에 모두 물을 가두는 빙하도 있다. 육지에서 종결되는 빙하도 있고 호수로 혀를 내밀고 있는 빙하도 있다. 알프스의 많은 빙하와 달리 히말라야 빙하들은 표면이 매우 지저분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진 거친 암석이 층층이 쌓여 있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이곳의 빙하들은 3,000km 이상을 아우르는 산계에 걸쳐 있기 때문에 혹독한 날씨와 물자 수송을 감수하며 히말라야 빙하들을 탐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233 페이지)

 

히말라야에는 암설(巖屑)이 많다. 히말라야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침식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암설보다 훨씬 작게 쪼개진 것을 암분(巖粉)이라 한다. 저자는 빙하와 샘이 정화와 생명 잉태의 힘을 가진 살아 있는 여신의 영역이라는 발상을 더없이 매력적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은 이런 믿음을 배척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2013년 여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일주일 뒤 어머니와 기막힌 대화를 나눴다고 말한다. 당시 저자는 슬픔에 잠긴 채로 어둑한 어느 영매의 방에 앉아 있었다. 달콤하고 진한 향냄새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저자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영매에게는 보이는 영혼이 나타나 자신이 저자의 어머니라며 실제 어머니의 이름을 말했고 어머니의 병명과 마지막에 느낀 감정도 정확히 묘사했다. 심지어 저자가 어머니의 결혼반지를 끼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저자는 사람이 죽으면 실제로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곳을 나왔다고 말한다. 저자는 파키스탄 카라코람 북부의 길기트 발티스탄이라는 지역을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많은 이들이 빙하를 살아 있는 존재로 간주하고 성별로 구분하기도 한다. 어둡고 느리게 이동하며 물을 거의 내주지 않는 빙하(암설 덮인 빙하)는 남성이고 흰색이나 푸른색으로 빛나고 많은 물을 내주는 빙하(깨끗한 빙하)는 여성이다.

 

저자는 현장 탐사를 할 때 극심한 불편도 잘 참아내는 습성으로 병을 키워 뇌종양 수술을 받기도 했다. 저자는 자신이 다룬 빙하들은 자신이 빙하 연구를 시작한 25년 전(2019년 기준)부터 지금까지 주변 대기와 바다의 온난화 수준, 그리고 각각의 특성 및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하나같이 계속해서 줄고 있다고 말한다. 2019년 8월 기후변화로 소멸 위기에 처한 첫 아이슬란드 빙하인 오크예퀴들의 장례식이 열렸다. 오크 화산의 빙하라는 뜻을 가진 오크예퀴들은 기후 위기로 지난 10년간 90% 이상이 녹아내려 2014년에 공식적으로 빙하의 지위를 잃었다. 슬픔으로 대해야 할 상징적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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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과 불의 탄생, 인류는 어떻게 극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았는가 - 빙하와 화산을 통해 지적인 생명체의 기원을 추적한다
그레이엄 실즈 지음, 성소희 옮김, 최덕근 감수 / 웨일북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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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따져보는 것이라 말하는 그레이엄 실즈의 책이다. 지질학자이자 동위원소 전문가인 저자가 바라보는 지질학은 궁극의 미해결 사건이다. 지질학 탐정은 마치 사건을 과학적으로 수사하듯 무자비한 시간에 갉아 먹히고 남은 몇 안 되는 자그마한 퍼즐 조각에서 증거를 모아 종합한다. 저자는 최초의 동물 조상은 얼음에서 태어나 불의 품에 안겨서 자랐고 암석의 풍화작용에서 에너지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는 눈덩이 지구 이론과 관련 있는 말이다.

 

약 7억 년 전 지구는 적도까지 모두 얼어붙는 빙하기인 눈덩이 지구 시절을 겪었다. 저자는 눈덩이 지구 이야기를 하며 소중한 동일과정설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동일과정설은 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의 말은 동일과정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동일과정설을 잠시 보류하라는 것은 현재에는 눈덩이 지구 같은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음(陰; 마이너스)의 피드백이 없었다. 지구는 스스로 기후를 조절하는 음의 피드백 즉 안정화 작용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가령 지구는 더워지면 암석의 풍화작용이 활발해져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기온을 낮추고, 추워지면 풍화작용이 느려져 이산화탄소가 다시 쌓여 따뜻해진다. 그러나 선캄브리아 시대에는 이 마이너스 피드백 시스템이 고장나 얼음이 햇빛을 반사해 지구를 얼게 했다. 이를 현재의 지구 온난화에 적용하면 어떨까? 지구가 더워지면 비가 많이 내리고 화학 반응이 빨라져 암석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바다 저편으로 격리하는 천연 에어컨 시스템이 가동한다.

 

하지만 현재 인간에 의해 가속화되는 온난화를 막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시간 규모의 차이 때문이다. 천연 에어컨 시스템은 수십만 년이 걸리고 인간의 작용은 수십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일어났다. 저자는 믿어지지 않는 상황을 상상하려면 현재는 과거를 열쇠라는 지질학의 전통적 주문을 버리고 레슬리 폴스 하틀리(1895-1972)가 1953년에 발표한 소설 [중개자; The Go-Between] 속의 유명한 대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과거는 외국이다. 과거에서는 사람들이 다르게 산다."라는 말이다.(92 페이지)

 

빙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물이 얼음 속에 갇혀서 바다는 염분 함량이 높고 얼음장처럼 차갑고 밀도가 극도로 높은 성질을 보였을 것이다. 지질학자들에게 7억 년 전 지구는 얼음으로 뒤덮이고 바다에 철이 가득한, 완전히 다른 규칙으로 작동하던 외국인 셈이다. 동일과정설의 제창자가 살았던 시대는 7억 년 전 지구 상황이 밝혀지기 전이었다. 7억 년 전 지구 상황이 밝혀진 것은 1990년대 이후다.

 

학계는 덮개 돌로스톤이 전 지구적으로 빙하가 후퇴하던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뒤늦게 합의했다. 이 합의 내용은 덮개 돌로스톤이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시간을 표시하는 존재이기에 층서학계의 귀중한 보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97 페이지) 덮개 돌로스톤은 눈덩이 지구의 얼음이 녹아내린 직후 바다 전체에 탄산염 성분이 과포화되어 수천 년에서 수만 년이라는 지질학적 시간 단위에서는 짧은 시간에 급격히 침전되어 형성되었다.

 

덮개 돌로스톤은 7억 년 전과 6억 3,500만 년 전 전(全) 지구의 얼음이 동시에 녹으면서 아프리카, 북미, 남미, 아시아, 호주까지 전 세계 모든 바다 밑바닥에 동시에 깔렸다. 저자는 석고를 강조한다. 석고는 지구가 얼어붙었다가 녹아내린 격변의 흔적이자 대기에 산소를 채우고 동물의 뼈를 만들어낸 타임 캡슐이다.

 

화산활동으로 이산화탄소가 쌓여 빙하가 순식간에 녹아내리자 지구는 엄청나게 뜨겁고 습한 기후로 변했다. 이때 격렬한 풍화작용으로 암석 속의 칼슘이 대거 바다로 흘러 들어 황산염과 결합해 거대한 석고 퇴적층을 만들었다. 석고층은 지구가 극단적인 추위에서 극단적인 더위로 급격히 변했음을 보여주는 지질학적 증거다. 7억 년 전 눈덩이 지구의 증거는 적도에서 발견된 빙하 퇴적암, 빙하가 떨어뜨린 이국적인 바위, 7억 년 전 퇴적층에서 발견된 호상철광층 등이다.

 

퇴적암은 층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두께의 수평층으로 발견된다. 퇴적층마다 위쪽으로 갈수록 입자가 작아지는 상향 세립화(upward fining)가 나타난다. 상향 세립화는 퇴적물을 운반하던 물이나 바람의 에너지가 시간이 지나면 따라 점점 약해질 때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지질학자는 변호사처럼 정황 증거를 바탕으로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말한다. 자백은 전혀 없고 결정적 증거는 거의 없지만 전 세계의 과학자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개연성이라는 저울을 써서 증거를 숙고한다고 말한다.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한다고 해서 학자들의 해석이 하나로 모이지는 않는다. 가설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통합된 상황 증거의 힘이다.(57 페이지) 지질학에서는 지질 도에 표시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암석의 묶음을 층(formation)이라고 부른다. 보통 층의 이름은 처음 밝혀진 장소를 따서 짓는다. 덮개 돌로스톤은 돌로마이트라는 광물로 이루어진 퇴적암층이다.

 

전 지구적 빙하기가 끝난 후 빙하 퇴적층 바로 위에 모자처럼 얹혀서 형성된 백운암 지층을 말한다. 빙하 퇴적층은 빙하에 의해 한데 모인 돌과 진흙 등이 빙하가 녹으면서 땅에 쌓여 만들어진 규칙없이 어지러운 지층을 의미한다. 덮개 돌로스톤은 그 지층 위에 형성된 칼로 자른 듯 매끈하고 깨끗한 탄산염 바위층이다. 최근에 빙하가 녹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빙하 시대를 살고 있다.

 

이탈리아 북동부에 돌로미티 산맥이 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지질학자이자 광물학자인 데오다 돌로미외가 이탈리아 산맥을 여행하던 중 일반 석회암처럼 생겼지만 산에 반응하는 속도가 다른 특이한 탄산염 바위를 발견하고 샘플을 채취했다. 마그네숨 성분으로 인해 산에 강하다는 의미다. 돌로미외가 탄산염 바위를 발견한 산맥이 돌로미티라고 명명되었다. 눈덩이 지구 가설은 얼음이 지구 전체를 뒤덮은 탓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렀고 마침내 온실 효과가 완전히 얼어붙은 행성의 높은 알베도를 극복했다고 말한다.

 

지구가 얼음으로 덮이면 증발이 일어나지 않아 비가 내리지 않는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빗물에 녹아 내리면 육지의 규산염 광물을 화학적으로 녹이게 되고 칼슘 이온과 탄산 이온이 결합해 바다로 흘러가 탄산염이 되어 갇히는데 비가 내리지 않으니 이산화탄소 농도가 계속 올라가고 화산활동으로 이산화탄소가 계속 증가해 농도가 극단에 이른 것이다. 결국 눈덩이 지구를 끝낸 요인은 눈덩이 지구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

 

전 지구적인 빙하 작용의 존재를 확실하게 밝히려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지구 물리학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 열대 지역이 얼음으로 덮였다는 정황 증거가 상당히 많이 쌓이자 크리오스진기의 빙하기를 향한 관심이 마침내 부활했다. 이 부활을 이끈 주역은 지구의 과거 자기장에 관한 연구였다. 이 연구는 저위도의 빙하 작용이 그토록 파멸적이었던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 눈덩이 지구 가설로 이어졌다.

 

눈덩이 지구 가설을 제기한 조 커쉬빙크는 행성 전체가 얼음으로 덮인 후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고 추측했다. 증가한 알베도가 불러온 효과는 온실가스가 수백만 년 동안 점진적으로 축적되어야만 상승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113 페이지) 저자는 요즘 우리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지구 온난화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지만 온실 효과 자체는 본래 해롭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는 단어의 뜻이 너무도 명백해서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화석연료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탄소 배출과 흡수를 연결하는 고리는 화학적 풍화작용이다. 탄산염 암석의 풍화도 탄산염 퇴적으로 이어지지만 규산염 암석의 풍화와 똑같은 효과를 내지는 않는다. 따뜻한 환경에서는 이산화탄소의 용해도가 낮아진다.

 

탄산염 퇴적은 오직 규산염 풍화와 연계될 때만 이산화탄소의 순 흡수원이 된다. 전 지구가 얼음으로 뒤덮였다는 사실을 증명할 퇴적학, 지구 물리학적 증거는 이제 압도적으로 많다. 저자는 규산염 풍화작용과 장기적 탄소 순환은 천천히 정상 상태를 회복했다고 말하며 훈훈한 해안과 얼어붙은 불모지가 정말로 나란히 존재했다고 설명한다.(126 페이지)

 

다이아믹타이트와 텍토닉 멜란지가 있다. 외관상 매우 흡사하지만 전자는 퇴적작용의 산물이고 후자는 지각변동의 산물이다. 아주 오래된 퇴적암의 연대를 충분히 정확하게 밝히는 일은 매우 어렵다. 여기서 충분히 정확하다는 말은 오차 정도가 100만 년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제일 나은 방법은 화석이나 동위 원소 함량을 바탕으로 상대적 연대를 구하는 것이다.

 

대상에 포함된 방사성 동위원소의 반감기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다면 방사성 붕괴를 활용해서 연대를 측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퇴적물에는 이 방법을 적용할 수 없다. 퇴적물을 이루는 성분은 훨씬 더 오래된 암석이 풍화된 후 강물에 실려 바다로 운반된 쇄설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로의 양을 대응 시켜볼 수 있는 독립적 붕괴 계열이 세 개 있는 덕분에 연대를 극도로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요즘에는 수억 년 전에 발생한 사건이라도 오차범위를 단 수만 년 이내로 좁혀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로 독립적인 세 개의 붕괴 계열은 우라늄 238, 우라늄 235, 토륨 232다. 지구의 나이를 측정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지르콘이라는 단단한 모래 알갱이가 있다. 이 알갱이가 처음 만들어질 때 우라늄 238, 우라늄 235, 토륨 232라는 방사성 원소가 우연히 함께 갇히게 된다. 이들은 각기 독립적이다.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다. 저자는 우리가 전 지구적인 빙하 작용처럼 터무니없이 혼란스러운 현상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마침내 과거를 진정으로 다른 장소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동일과정설이라는 신성한 신조를 버린다면 새롭고 흥미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말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지구 기온이 이처럼 급락했을까? 혹시 눈덩이 지구 시기가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저자는 자주 현재가 과거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선캄브리아 시대 지구 시스템을 이해하는데 현대의 탄소 순환을 적용해야 할까? 신원생대의 탄소 순환이 오늘날의 탄소 순환과 비슷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빙하 작용이 없던 기간이라고 해도 당시에 탄소 순환이 현재와 비슷할까? 먼 과거에도 생물권에서 탄소의 체류 시간이 고작 10만 년이었다고 굳게 믿을 수 있을까?

 

크리오스진기 빙하기는 생명체 진화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물론 확실한 동물 화석은 크리오스진기 이후에 형성된 암석에서만 발견되며 초기 생명체는 대부분 미생물이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이어진 빙하기는 생명을 앗아가는 재앙이 아니라 이후에 복잡한 생명체가 출현하는 기틀이 되었다. 캐나다의 지질학자 레지널드 달리는 빈약한 암석 기록을 비난하는 대신 선캄브리아 시대의 동물이 몸에 화석이 될 만한 단단한 부분이 없어져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고 보았다.

 

요즘은 캄브리아기가 가장 오래된 삼엽충보다 2천만 년 먼저 시작되었다고 본다. 대기에는 GOE(Great Oxygen Event)를 통해 23억 년 전에 처음 산소가 공급되었고 해양에는 5억 7천만 년 전 신원생대 산소 발생 사건이 일어났다. 현무암의 높은 인 함량이 해양을 비옥하게 하고 유기물 매장을 촉진해서 한랭화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가설이 있다. 궁극적으로 인산염은 화학적 풍화작용으로 생겨난다. 그러므로 눈덩이 지구 이후처럼 풍화 속도가 높았던 시기는 인 생산이 대폭 늘어난 시기와 일치하리라고 당연히 예상할 수 있다.(275 페이지)

 

눈덩이 지구 이후에 풍화 속도가 빨랐던 것은 눈덩이 지구를 끝낸 초온실 효과 때문이다. 저자는 생명체의 급작스러운 확산(다윈의 딜레마)이 조산운동과 산소 모두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293 페이지) 조산 운동은 대기 및 해양의 산소 농도를 급격히 높이는 기폭제가 되며 이로 인해 확보된 풍부한 산소가 생명체의 폭발적인 진화와 확산을 이끌었다. 지구 시스템은 태양 에너지와 판구조운동에 의해 변해왔다. 새로운 생태 기회에 가장 적합한 생명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기후변화와 해양 무산소 조건이 결합해 생물 진화를 되돌려 놓는 바람에 대량 멸종 사건이 생길 때마다 동물은 무수히 타격을 입었다. 23억 년 전 GOE 이후 지구가 변화하고 이런 재앙이 벌어지는 데에는 황 순환과 여러 피드백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빙하 작용은 동물이 진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환경을 마련했다. 화산활동은 지구의 온실 담요를 두껍게 만들어서 눈덩이를 녹였다. 계속되는 풍화작용 덕분에 바다에 영양소와 산소가 풍부해졌고 생명체가 이를 무기로 군비 확장 경쟁에 나선 끝에 캄브리아기 생명 대폭발이 일어났다.

 

저자는 우리가 탄 차를 여기까지 안내한 존재는 얼음이었을지 몰라도 그 차의 운전대를 잡은 존재는 태고의 불이었다고 말한다.(364 페이지)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지식의 발전은 우연한 천재성과 운 좋은 발견에 달린 데다가 가끔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뒤로 물러서 기도 하지만 지식이 나아가는 궤도는 무작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식에는 방향이 있다. 괜히 과학 진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생물 진화는 우연과 우발적 사고에 의지하며 눈덩이 지구나 대량 멸종 같은 명백한 좌절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지식과 마찬가지로 더 커다란 복잡성을 향한 외길을 꿋꿋하게 걸어간다. 저자는 크리오스진기의 빙하기는 동물이 더 진화하는 데 필수적이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진정한 생물 재앙은 영하의 기온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환경에 적응한 생명체가 느닷없이 극단적으로 다른 기후를 만났을 때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생명체는 크리오스진기의 얼어붙은 환경에서 확실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생명체의 에너지 대사가 거의 멈추는 수준으로 아주 느려졌을 테니 당시 지구가 생명체의 이상적인 환경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게다가 전 지구를 뒤덮은 빙하에서 벗어나려면 화산활동이 일어나야 했는데 판구조운동이 생명체가 있는 행성에서 지속될 수 있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면 화산활동은 생물이 절대 통제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길은 판구조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수많은 지질학자가 지각변동에는 액체 상태의 물이 윤활유로 작용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판구조 운동이 일어난 결과 최초의 높은 산맥이 솟아오르고 오늘날과 비슷한 암석 순환이 시작되었다. 물이 암석과 상호작용해서 수소를 배출하는 과정을 사문석화 작용이라고 한다. 저자는 "대사 반응은 폭포 가장자리에서 회오리치는 소용돌이와 비슷하다. 갓 만들어져 엔트로피가 낮은 오아시스인 소용돌이는 에너지를 방출하는 부모인 폭포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반대로 폭포는 더 정교하게 구성된 자식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생명체도 마찬가지다."란 말을 한다.

 

동물은 얼음에서 태어나 석고 염분에서 나온 산소 덕분에 번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를 점점 더 많이 생산하는 대사의 진화와 더 커지고 복잡해진 생물권을 지탱한 주인공은 펄펄 끓는 화산에서 배출된 이산화탄소의 양과 타오르는 태양에서 연료를 공급받은 산화력이 갈수록 증가한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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