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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런 바라드 ㅣ 컴북스 이론총서
박신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3년 1월
평점 :
캐런 바라드를 안 것은 박준영의 ‘철학, 개념’을 통해서다. 바라드는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 기반하여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함을 넘어 그릇된 것이라 말했다. 바라드가 제시한 대안은 하이젠베르크의 스승 보어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아닌 보어의 상보성 원리이다. 바라드는 물리학 박사 출신의 철학자다. 신유물론 페미니스트로 분류된다. 바라드는 몸이란 단순히 세계 안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몸과 환경은 내부 작용으로 함께 구성된다는 것이다. 인간 몸을 포함한 모든 몸은 본질적인 경계와 속성을 지니지 않고 내부 - 작용의 개방된 역동성을 통해 특정한 경계와 속성을 획득하게 되는 현상이다.
바라드에게 세계와 우주, 공간성과 시간성도 내부 - 작용의 역동성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현상이다. 바라드는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통해 거듭 재형성된다고 본다. 바라드에게 개방성은 존재론적 비결정성과 직결된다. 바라드는 비결정성이 물질의 존재뿐 아니라 비존재론의 열쇠라고 설명한다. 바라드가 제시한 보어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려는 자연의 일부다. 보어에게 사물은 본질적으로 확정된 경계나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또한 언어는 본질적으로 확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보어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데카르트적 믿음과 뉴턴 물리학의 재현주의에 의문을 제기한다. 보어가 양자이론의 인식론적 의미에 집중하는 데 그쳤다면 바라드는 보어의 통찰에 함축된 중대한 존재론적 차원들을 탐색한다. 보어가, 이미 존재하는 인간 관찰자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인간중심적 한계를 지녔다면 바라드는 보어의 통찰력 안에서 중요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함축을 탐색해 발전시킨다. 바라드는 양자이론이 미시세계뿐 아니라 거시세계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바라드에 따르면 양자물리학의 일반적 관념은 없다.
바라드는 양자물리학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은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물리학이라고 말한다. 이는 물리학은 이미 중립적이지 않으며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바라드는 2007년까지 양자역학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다가 2012년 이후 양자장론을 면밀히 다루기 시작했다. 양자장론으로 확장된 얽힘과 기억, 미결정성과 무한성, 무와 진공에 대한 바라드의 사유는 더욱 심화된다. 바라드는 이런 물리학의 통찰을 바탕으로 윤리, 정의, 역사에 대한 성찰과 전망을 제공한다. 바라드는 양자역학을 일반 독자들에게 이해시킬 언어를 찾느라 이미 충분히 힘들었는데 양자장론을 설명하는 데에는 더욱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바라드에게 실험하기, 이론화하기, 알기, 측정하기, 관찰하기는 모두 물질적인 실천들이며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참여다. 바라드는 보어의 양자이론 외에도 푸코의 담론 - 권력 지식 실천이론,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이론을 또 다른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바라드에게 현상은 관계의 원자다. 이러한 현상들이 현실을 구성한다. 바라드가 만든 내부 - 작용이란 말은 핵심적 개념이다. 이는 얽혀 있는 행위성들의 상호적인 구성을 의미한다. 이는 상호라는 말 대신 내부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세계는 이런 내부 작용의 역동적 과정이며 우주는 내부 작용으로서 계속 생성중이다.
행위적 실재론에서 분리는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의 본질적 특성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차이, 물질화하는 차이다. 바라드에게 존재의 기본 단위는 본질적 경계와 속성을 지닌 독립된 사물이 아니라 현상이다. 현상은 영원히 다시 주름 잡히고 다시 형성된다. 바라드는 개별 행위성이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 - 작용을 통해 창발한다고 설명한다. 행위성들은 개별 요소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 얽힘의 관계 속에서 구별된다. 실험실에서 행하는 측정이 내부 - 작용의 예다.
바라드는 기구들(apparatuses)이 단순한 관찰도구가 아니라 물질이 되는 경계 - 그리기 실천이며, 세계의 특정한 물질적 재현이라 본다. 바라드에게 공간적 분리가능성 대신 행위의 분리가능성과 행위적 절단이 객관성을 위한 조건이 된다. 행위적 실재론에서 물질은 고정된 물체가 아니다. 물질은 내부 - 작용하는 생성중인 실질이고, 사물이 아니라 행위이며 행위성의 응결이다. 바라드에게 몸은 물질적 담론적인 현상이다. 다른 모든 몸처럼 인간 신체는 내부 - 작용의 개방된 역동성을 통해 특정한 경계와 속성을 획득하는 현상이다.
인간은 자신이 참여하는 물질적 담론적 실천을 통해 내부- 작용하며 함께 구성되는 주체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인간 주체는 기구의 외부적 관찰자도, 기구의 작동에 개입하는 독립된 주체도 아니며 단순히 기술의 산출물도 아니다. 불가사리의 동족인 거미불가사리는 뇌도 없고 눈도 없지만 전체 골격이 하나의 커다란 눈을 형성하고 있는 동물이다. 거미불가사리의 골격계는 죽 늘어선 마이크로렌즈들, 표면 위에 정렬된 작은 방해석 수정 돔들로 구성되어 있다. 널리 퍼진 신경계의 일부로서 빛을 모으고 집중시키는 이것들은 일종의 합성 눈으로 기능한다.
바라드는 거미불가사리의 시각 시스템이 육체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거미불가사리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눈이다. 그 자체가 시각화하는 기구이며 살아 숨쉬고 변형하는 광학 시스템이다. 거미불가사리는 몸이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거미불가사리는 주변 환경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빛에 반응해 착색을 변화시킬 수 있다.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빠지면 신체 부분을 끊어버리고 다시 재생시킬 수 있다. 이는 육체가 세계 안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며, 사물이 아니라 수행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육체화는 세계 안에 구체적으로 위치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역동적 구체화 속에서 세계의 일부가 되는 문제다. 아는 것은 인식론적인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아는 것은 세계에 대한 특정한 참여이고 존재론적인 수행이다. 우리에게도 아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얽혀 있는 물질적 실천이다. 아는 것은 직접적인 물질적 참여이며 세계의 일부로서 세계와 내부 - 작용하는 실천이다. 바라드에 의하면 기구는 특정한 물질적 담론적 실천이다. 기구는 중요한 차이들을 생산한다. 기구는 물질과 의미를 형성하고 현상을 생산하며 그 일부가 되는 경계 - 만들기 실천이다.
기구는 세계의 물질적 형성/ 역동적인 재형성이다. 기구는 그 자체가 현상이다. 기구는 내재적 경계를 지니지 않고 개방된 실천이다. 기구는 세계 속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성과 공간성, 시간성을 재형성한다. 바라드는 몸 경계가 자명해 보이지만 본질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특정한 신체적 수행의 반복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바라드는 우리가 어떤 가장자리를 자세히 보면 우리가 보는 것은 빛과 어둠 사이의 선명한 경계가 아니라 일련의 빛과 어둠의 띠들 즉 회절 패턴이며 이는 물리광학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한다.
바라드는 도나 해러웨이가 표현했듯 만들어진 신체가 아닌 만들어지는 신체를 이야기한다. 바라드는 어떻게 신체가 세상 안에 자리 잡고 위치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신체가 세계와 함께 또는 세계의 일부로서 구성되는가 즉 세계 안의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존재인가를 논증한다. 바라드는 몸의 물질성에 집중하면서 물질 자체가 얽힘을 수반하며 얽힘이 물질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회절(diffraction)은 바라드가 사용하는 방법론적 접근 방식을 은유하는 중요한 물리적 현실이다. 회절에는 물리학적으로 심오한 암시가 담겨있다. 회절은 파동들이 겹칠 때 결합하고 파동들이 어떤 장애물들과 만날 때 휘어지고 퍼지는 방식과 관련된다. 연못에 던져진 돌이 일으키는 교란이 겹칠 경우 파동들이 서로 간섭한다고 말하고 창조된 패턴은 회절 패턴이라 한다. CD 표면 위의 무지개 효과는 회절 현상이다. 공작 깃털, 나비 날개 위 무지개빛도 회절 효과다. 고전물리학에 따르면 오직 파동만 회절 패턴을 만든다. 입자는 그렇지 않다.
양자물리학은 어떤 상황 아래서는 물질도 회절 패턴을 만든다고 말한다. 단지 빛뿐 아니라 물질은 어떤 상황들에서는 입자 행동을 나타내고 다른 상황에서는 파동 행동을 나타낸다. 이를 파동 - 입자 이중성 역설이라 한다. 인식론과 방법론에서 반영(reflection)과 회절(differection)은 서로 대조되는 광학적 은유다. 해러웨이는 회절을 반영이라는 낡은 은유에의 대안으로 제안한다. 반영과 회절은 공히 광학적 현상이지만 반영은 반사하기와 동일성에 대한 것인 데 반해 회절은 차이의 패턴들에 주목한다.
과학적 사실주의는 과학적 지식이 물리적 실재를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믿는다. 사회적 구성주의자들은 지식을 자연보다는 문화의 반영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반영성은 세계를 멀리 떨어져서 본다. 반영성은 반복적인 모방일뿐이다. 반영적 방법론은 원본과 일치하는 복사물, 사물을 왜곡 없이 반영하는 언어를 믿는다. 회절적 방법론에서 내부와 외부의 절대적 분리는 없으며 주체와 객체는 미리 존재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내부 - 작용을 통해 창발한다. 바라드에게 회절 패턴은 경계의 비본질적인 본성, 경계의 반복적인 재형성, 차이들의 얽힘을 의미한다.
회절은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유기체와 비유기체, 인식론과 존재론 사이의 본질적 분리가능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현상이다. 회절은 경계의 확장성과 영속성의 한계를 표시한다. 회절은 사소한 차이들을 존중하는 방법론이다. 바라드에게는 시간과 공간도 현상이다. 시간과 공간은 내부 - 작용으로 생산된다. 우리는 우주의 물질적 생성의 행위자적 일부이므로 우리가 실행에 참여하는 절단이 중요하다. 바라드는 내부 - 작용이 언제나 특정한 배제를 수반하며, 배제는 결정론의 가능성을 저지해 열린 미래의 조건을 제공한다고 강조한다.
내부 - 작용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반복적으로 재구성한다. 가능성들은 가만히 정지해 있지 않는다. 가능성들은 그 실현 속에서 좁혀지지 않으므로 지금은 배제되었지만 가능했을 수도 있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열린다. 가능성들은 재구성되고 재구성하고 있다. 우리는 우주의 중간에서 만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우주와 교섭하고 우주와 의견을 조율하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책임지는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바라드는 세계 자체가 매우 퀴어하다고 주장한다. 바라드는 만약 자연 그 자체가 퀴어라면 어떨까?라고 질문하면서 퀴어란 자연/ 문화 이분법을 포함해 정체성과 이분법에 대한 급진적인 문제 제기라고 논한다. 바라드에게 퀴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고정되지 않고 살아서 변화하는 유기체, 욕망하는 급진적인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스 베이지밀은 우주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욱 퀴어하다는 진화생물학자 홀데인의 유명한 말로 시작하며 세계는 각양각색의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 생물들로 가득하다고 쓴다.
번개도 퀴어하다. 번개가 치기 전 지상과 하늘 사이에서 흥미로운 소통, 일종의 더듬거리는 수다가 벌어진다. 하늘에서 스텝리더라는 최초의 몸짓이 뻗어져 나오면 땅은 스스로 위쪽을 향하는 신호로 반응한다. 하늘로부터의 스텝리더가 땅에서 10~100미터 안에 있을 때 땅은 이제 그곳에 거대한 과잉 전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땅 위의 어떤 사물들이 스텝리더를 향해 작은 흐름들을 내보냄으로써 응답한다. 바라드는 “이 하늘과 땅 사이 소통의 교환 속에서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알게 되기도 전에 이러한 상호 교환이 일어날까? 어떻게 알게 되기도 전에 이러한 상호 교환이 일어날까? 어떻게 땅은 자신의 미래 대화자를 향해 활동하게 될까? 송신자가 전송을 하는 순간에 아직 특정되지 않는 수신자에게 메시지를 전송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는다.
노랑가오리의 신경수용 세포 역시 역설적인 소통의 사례다. 노랑가오리의 신경수용기 세포는 신비로운 투시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메시지가 언제 자신들에게 보내질지 예측할 수 있다. 바라드는 원자보다 더 퀴어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원자의 본성과 정체성은 비결정성 자체다. 바라드는 모든 몸은 세계의 반복적 내부 - 작용을 통해서 물질화되며 물질성의 본질 자체가 얽힘이라고 본다. 바라드는 우리가 외부의 타자를 만짐으로써 타자와 맺는 관계성뿐 아니라 자기 몸을 스스로 만짐으로써 내부의 타자들 즉 우리 몸을 지나쳐간 수많은 다른 존재들에 대해 깨닫게 되는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라드에게 책임이란 응답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라드는 페미니즘을 물리학에 가져오는 만큼 물리학에 페미니즘을 가져옴으로써 사회 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바라드는 느끼고 욕망하고 경험하는 것은 인간 의식만의 고유 특성이나 능력이 아니라고 말하며 물질은 느끼고 대화하고 고통받고 욕망하고 갈망하며 기억한다는 견해가 페미니즘적 참여임을 강조한다. 바라드는 우리 존재가 물려받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로질러 무수한 타자들과 관계 맺고 있으므로 타자에 대한 책임은 무한히 확장하고 도래할 진정한 정의를 향한 노력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과 죽음은 둘이라고 하기도, 하나라고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바라드는 양자 얽힘을 묘사하기에 하나는 너무 적고 둘은 너무 많으며 사이 개념이 새롭게 사유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바라드는 시간과 장소, 존재의 경계들이 결정되더라도 고정된 것은 아니며 현존하지 않는 타자성일지라도 없어진 것은 아니며 언제나 되돌아오고 도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라드는 산타크루즈의 해변을 산책하며 “지금 여기에 다수가, 그 특수성 안에 무한성이 응축되어 있다. 각 모래알과 흙 한 줌은 시공간을 가로질러 회절하고 얽혀 있다. 책임지는 것,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관통하는 시공간물질의 두터운 얽힘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라드는 양자장론에 따라 텅 빈 공간은 전혀 비어 있지 않으며 무(無)는 무한한 풍부함이라고 강조한다. 바라드는 양자물리학이 공간적 회절을 넘어서 시간적 회절의 가능성도 연다고 설명한다. 시간적 회절은 비결정성 원리의 결과로서 한 주어진 독립체는 다른 시간들의 중첩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입자가 비결정적으로 여러 번 가령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공존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바라드는 모든 이론화는 정치적이며 물리학과 정치는 언제나 이미 서로를 통과해 나아간다고 설명한다. 바라드는 과학은 중립적이지 않기에 어떤 양자물리학 통찰도 무비판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바라드는 자신의 양자물리학에 대한 행위적 실재론 해석 역시 정치적 물리학이라고 밝힌다. 바라드는 어떤 물리학인가, 누구의 물리학인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바라드에게 시학이란 기존 표현 양식에 따라 측정된 어떤 표현불가능성에 직면할 때 표현을 향한 계속되는 열망과 관련이 있다. 바라드에 의하면 시위자들은 경찰과 직면할 때는 얼음처럼 단단해지고 도시의 협소한 거리를 통해 탈출할 때는 물처럼 유동적이 되고 갑작스러운 군중 시위를 위해서 이슬처럼 모이며 체포를 피하고 또 다른 날 싸우기 위해서 안개처럼 흩어진다. 바라드는 양자물리학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독립체를 사이의 관계가 아닌 관계성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개인들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다르게 생각하려는 것이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