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끝내고 논문 쓰기만 남았음을 일컫는 ‘all but dissertation’이란 단어를 안 것은 ‘퀀트’라는 책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장을 한참 들여다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니 몇 해 전 한 수레 분량의 책을 고물상에 내다 버릴 때 처분된 것 같다.

정확한 제목이 ‘퀀트, 물리와 금융에 관한 회고’인 ‘퀀트’는 quantitative analyst(정량 분석가) 즉 물리학을 전공하고 증권 또는 금융 회사에서 일하는 전문 인력을 말한다.

저자인 이매뉴얼 더만은 컬럼비아 대학 이론 물리학 박사 출신의 금융 공학자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 보니 나온 지 10년이 넘은 책이다.

당시만 해도 나는 물리학과 금융에 두루 관심을 가졌었다.

각설(却說)하고 에세이를 쓰려 했지만 논문 같다는 평을 들은 한 페친의 사례를 보며 그 분의 타임라인에 ‘all but dissertation이 아니라 all but essay네요.’란 댓글을 달았다.

그 페친이 쓰려 한 것은 경수필(輕隨筆)인 miscellany가 아닌 중수필(重隨筆)인 essay일 것이다. 신상 이야기가 아닌 한자 이야기이니.

나는 요즘 논문, 비평, 문학 작품(시, 소설)은 물론 서평마저 어렵게만 느껴진다. 어렵지 않은 것이 없는 듯 하다.

페친 김정란 교수님의 ‘비어 있는 중심 – 미완의 시학’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글 쓰는 자의 영혼의 결이 환히 드러나,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축제와 같은 글쓰기”란 말이다.

이는 교수님이 쓰기를 원하는 유형의 글이다. 그것들은 조르주 풀레의 형이상학적 비평, 리샤르의 우아하고 섬세한 꼼꼼히 읽기, 얀켈레비치의 가볍고 명랑한, 그러나 너무나 명석한 스토이시즘 등의 글로 교수님은 이런 글들을 흠모한다는 말을 했다.

리샤르는 장 피에르 리샤르인 듯 하다. 얀켈레비치는 장켈레비치라고도 불리는데 2016년 11월 ‘죽음에 대하여’란 책이 번역 출판되었다.

얀(장)켈레비치의 글이 많이 인용된 책으로 김형효 교수의 ‘베르그송의 철학’을 들 수 있다.

이 책에 인용된 얀(장)켈레비치의 여러 말 가운데 ‘새는 날고자 했기 때문에 날개를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날 수 있었다는 말’(‘베르그송의 철학’ 142 페이지)이 가장 인상적이다.

다시 각설(却說)하고 말하자면 에세이가 많이 대접받고 읽혔으면 좋겠다.

인용된 얀(장)켈레비치의 글이 “가볍고 명랑한, 그러나 너무나 명석한 스토이시즘”적 글쓰기인지 모르지만 인상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올해는 프랑스 비평가들의 글에 조금이라도 친숙해지는 시간들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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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박홍규의 호모 크리티쿠스 4
박홍규 지음 / 푸른들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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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교수의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를 읽었습니다. 헤세가 주관적인 영역에 사로잡혀 세상일에 무심한 채 사춘기적 고뇌를 작품화한 작가라는 세평이 잘못되었음을 40세가 다 되어서야 깨달았고 50이 넘어서야 그를 더욱 뜨겁게 좋아하게 되었다는 박홍규 교수의 책입니다.

 

우리의 철학이 얼마 전까지 2차대전시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독일의 철학이었던 것처럼 헤세의 데미안도 그런 내력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엽 일본이 극단적인 군국주의하에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할 때 일본에서 많이 읽혀 우리나라에서도 읽힌 책이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물론 저자가 헤세를 완전히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헤세에 공감하는 만큼 회의합니다. 헤세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헤세가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가졌었다는 점입니다. 헤세가 바라본 인도나 중국의 종교는 카스트제도나 봉건제도를 정당화하는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40 페이지)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헤세가 대단히 반사회적인 음양사(陰陽師)나 점쟁이 도사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 화가 나서입니다.(음양사는 천문天文, 역수曆數, 풍수지리 등을 연구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헤세는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아니지만 그가 평생 맞서 싸운 시민적 삶은 자본주의적 삶이고 추구한 예술가의 삶은 반자본주의적 삶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요 논지입니다. 저자는 헤세를 반국가주의적 아나키스트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헤세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흥미로운 내용들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헤세가 스승이나 친구들을 나름으로 이해하면서도 언제나 그들을 뛰어넘으려 했다는 점입니다.(34, 35 페이지)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부처마저 떠났고 세상에 맞서기 위한 반항 체험의 이야기를 펼쳤습니다.(41 페이지)

 

헤세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고뇌를 극복하기보다 고뇌 때문에 죽습니다. 대부분 교양적 시민이 아니라 비교양적인 본능에 충실한 반시민적 인간상을 지향했습니다.(46 페이지) 저자는 전혜린의 헤세 해석을 비판합니다. 헤세 작품에 통틀어 나타나는 주제는 자아로부터의 해방이었고 참된 자아로 가는 길이었으며 이 모토에 그는 끝없이 충실했다는 전혜린의 말에 대해 자아로부터의 해방은 무엇이고 참된 자아는 무엇인가 묻는 것입니다.(47 페이지)

 

그러고 보니 자아로부터의 해방과 참된 자아라는 말은 너무 막연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는 그런 난해한 자아론보다 독일의 현실에 저항하는 개인의 자아, 즉 개성이라는 것이 강조될 수 밖에 없는 억압적인 현실 이해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자는 헤세가 말한 자아란 사회나 역사, 정치 등에 의해 파괴된 자아이지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자아가 아니라고 봅니다. 헤세는 줄곧 규격에 맞추어지지 않은 자연아 개인이었고 그것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50 페이지) 헤세의 제도권 교육은 중 2 중퇴로 끝났고 그 이후 그는 철저히 독학을 했습니다.

 

까닭 모를 외로움이나 알프스를 향한 향수가 아닌 역사나 민족, 대중으로부터 고독을 느낀 헤세는 현 사회를 부정하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었지만 유토피아적 공동체나 아름다운 자연 속의 삶을 강력하게 추구했기에 누구보다 사회적입니다.(53 페이지) 저자는 헤세를 독일문학의 가장 우직한 반항아라 부른 라니츠키를 예로 들며 헤세는 니체의 유일한 제자라 말합니다.(56 페이지)

 

헤세는 니체에 심취했습니다.(87 페이지) 저자는 괴테 이래 독일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고독한 자아성장이라는 주제는 독일사회 특히 교육제도에 대한 고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88 페이지) 헤세는 예수와 톨스토이의 가르침을 따라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같은 삶을 꿈꾸었습니다.(99 페이지)

 

저자는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단순한 청춘의 애가(哀歌)가 아니라 체제 비판 소설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은 가정과 학교와 직장이라는 체제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어느 10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기서 정치와 경제는 구체적인 체제로 등장하지 않지만 10대의 생활을 지배하는 권위주의적인 가정, 학교, 직장은 이미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전제하는 것입니다.(121 페이지)

 

수레바퀴 아래서는 자전적인 소설이자 사회비판적인 작품이었지만 다른 작가들과 같이 1900년 전후에 유행한 학교 소설의 유형을 따른 것입니다.(123 페이지) 저자는 헤세가 역사소설이든 시대소설이든 환상소설이든 그 어떤 픽션도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예 소설가로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57 페이지)

 

이 말에 맞게 저자는 헤세의 작품들 속 인물들의 심리나 상황을 예시하며 헤세의 심리나 상황을 설명합니다. 가령 1910년 작품인 게르트루트에 나오는 나의 내적인 운명은 내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며 달든 쓰든 간에 그것은 당연히 내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책임지려고 생각하는 것이다.”란 구절을 보고 저자는 이처럼 운명을 수용하며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태도는 그 전의 헤세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가졌던 방황이 어느 정도 극복되었음을 보여주지만 작중 두 음악가의 대립은 여전히 헤세 마음의 대립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153 페이지)

 

1916년 헤세는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습니다. 전쟁의 충격과 포로들을 위한 격무, 막내 아들 마르틴의 중병, 부부관계의 위기 등의 탓이었습니다. 헤세를 심리치료해준 사람은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입니다. 헤세는 랑을 통해 융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자들과의 만남 덕분에 헤세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자신 속에 있던 무의식의 세계는 막연하고 단편적인 것이었으나 정신분석에 의해 그 전모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181 페이지) 저자는 전쟁이 한창인 1916년부터 쓰여진 데미안을 통해 헤세가 강조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란 말을 예시하며 데미안은 무더기 총알받이로 죽는 비인간적인 전쟁에 대한 거부이자 이를 초래한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이지 추상적인 한 인간의 성장사라는 교육학적인 도식에 의해 쓰인 성장소설이 아니라 말합니다.(18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데미안에서 말해진 깨어나야 할 알은 낡은 유럽입니다.(191 페이지) 헤세는 태어날 때부터 종교적이었고 평생 종교적이었지만 그의 종교성은 특정 종단이나 종파와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헤세 안에 종교적 감성이 자리했다는 의미입니다.(219 페이지) 헤세에게 모든 종교는 같았습니다. 그의 그런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싯다르타입니다.(221 페이지)

 

황야의 이리1960년대에 히피 열풍 속에서 인기를 모은 작품으로 유명한데 헤세 소설 중 가장 자서전적인 작품입니다.(234 페이지) 저자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니체류의 아폴론적 인간상과 디오니소스적 인간상의 대비가 아닌 정신과 자연의 불일치가 초래한 체제와 시대의 문제를 풍자한 작품으로 봅니다.(256 페이지)

 

1931년 무렵 헤세는 히틀러에 반대하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하라는 편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과거부터 공산주의를 지지했으나 정당 소속이란 그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파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이 무렵 헤세는 유리알 유희를 쓰기 시작합니다.(274 페이지)

 

1945년 이후 유리알 유희는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와 함께 주목을 받았습니다. 파시즘과 니체를 비판한 파우스트 박사는 문명비판과 근대비판인 동시에 사회현실로부터의 추상화라는 점에서 유리알 유희와 공통점을 보입니다.(275 페이지) ‘유리알 유희2400년경 어느 전기 작가가 자기보다 200년 앞선 시대인 2200년경의 전설적 유리알 유희 명인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를 쓰는 것으로 되어 있는 미래 소설입니다.(280 페이지)

 

헤세는 정신적으로 억압받는 시대에 정신적으로 해방된 가상의 미래를 빌려 그런 정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여 현실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저자는 씁니다.(281 페이지) ‘유리알 유희의 집필 시기는 1931년에서 1943년으로 나치의 집권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

 

유리알 유희에서 주목할 부분은 헤세가 평생 추구한 개인화나 개성화가 그가 속한 집단과 조화를 이루는 이상사회의 묘사 부분입니다. 헤세는 이단을 중시했습니다.(283 페이지) 피타고라스파, 그노시스파, 중세 스콜라 철학...

 

헤세는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혐오하고 자기 책을 통해 고집쟁이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304 페이지) 헤세는 사랑이 없는 독서, 경외감 없는 지식, 따스한 마음이 없는 교육 등을 정신세계에 있어서 최악의 적으로 간주했습니다.(304 페이지) 저자는 헤세에게서 체 게바라를 봅니다. 헤세의 삶과 문학은 개인의 독립선언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입니다.(309 페이지) 헤세는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반항할 것을 주문했습니다.(311 페이지) 저자는 말합니다. 반항하기에 인간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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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성악곡들(칸타타,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b 단조 미사,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승천 오라토리오, 마니피카트, 루터교 미사 등)을 다시 들으며 고향 집에 돌아온 안온한 마음을 느꼈다.

그의 성악곡들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통곡하는 장면을 담은 마태 수난곡 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의미의 ‘Erbarne dich, mein Gott’ 같은 슬픈 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중 ‘준비하라 시온이여, 경건한 마음으로’란 뜻의 ‘Bereite dich, Zion, mit zärtlichen Trieben’ 같은 역동적인 곡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오늘 월간 ‘현대시‘ 측에 요청해 고옥주 시인의 ’청령포(淸泠浦) 일기‘를 이메일로 받았다. 슬프다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통렬(痛烈)하다고 해야 맞을 ‘Erbarne dich, mein Gott’를 듣고 있는 중에 요청한 시가 왔다.

요청한 건이 그렇게 빨리 해결될 줄 몰랐다. “..슬픔이 너무 무거워/ 작은 새는 산을 넘지 못한다/ 남은 시간이 얼마일까..”란 부분과 베드로의 고통의 고백 부분이 겹치니 배가(倍加)되는 어떤 아우라가 느껴졌다.

지금껏 5천번은 들었을 ‘하느님 우편에 앉으신 주(主)’란 의미의 ‘qui sedes ad dextram patris’(b 단조 미사 중 알토 아리아)를 비롯 바흐의 성악곡들은 최고이다.

올해는 바흐 성악곡들을 많이 들을 생각이다. 슬픔과 역동이라 했지만 그 두 정조(情調)에 포괄되지 않는 다양한 느낌을 찾아 공부하듯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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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힘 - 공부의 시작과 끝, 논문 쓰기의 모든 것
김기란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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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강사이자 연극 평론가인 김기란의 논문의 힘은 순전히 저자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쓴 책이다. 저자는 1999년 독일 유학을 준비하면서 독일 대학에 제출했던 연구서가 반려된 당혹감을 털어놓는다. 논문의 목적이 불분명하고 논문의 주제가 너무 포괄적이라는 이유를 제시받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논리적 글쓰기이다. “대학의 강의는 논리적 글쓰기 능력을 전제로 진행된다.”(8 페이지), “논리적 글쓰기를 반복적으로 연습함으로써 논문이라는 글쓰기도 가능해진다.“(1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텍스트의 객관적 이해와 이해된 것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정확한 요약 능력,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분석 능력, 그리고 이 둘을 자신의 논점과 매개시키는 통합적 인식 능력 곧 메타적 인식 능력이다.(12 페이지)

 

논문은 사회공동체에서 공유되어야 할 공공재이다.(19 페이지) 저자는 논문을 쉽게 쓸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지만 화려한 필력이 없어도 그 장르적 본질과 특성을 익히면 성취할 수 있는 것이 학술논문이라고 말한다.(21 페이지)

 

논문 작성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 표절 여부에 대한 이해이다. 표절 여부는 주석(註釋)의 규정된 형식, 인용된 분량, 표현의 유사성, 내용과 아이디어 차원의 유사성 여부 등을 통해 판단된다.(26 페이지) 저자는 머리의 생각이 펜까지 이르는 길은 너무도 멀다고 한 독일 비평가,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 - 1781)의 한탄을 인용하며 생각한 것을 정확하게 글로 옮겨내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표현은 서툴지만 내용은 훌륭하다거나 형식 때문에 내용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했다는 말은 최소한 논문 글쓰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28, 29 페이지) 저자는 논문의 형식은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교조적 태도를 문제삼는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름으로 인해 구성되는 정보의 배열 형식이 수없이 다양하기 때문이다.(2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구성 방식 자체가 사유 방식이다.(30 페이지)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치밀한 계획이 요구된다. 당연히 논문 작성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작성자 자신이다. ”조언의 내용을 반영하되 자신의 글을 성찰하며 논문의 주제를 전개하는 것은 오롯이 논문을 집필하는 사람의 몫이며 책임이다.”(31 페이지)

 

형식과 내용이 모두 중요함을 강조한 저자는 읽기와 쓰기에 대해서도 같은 통합적 방식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읽기 활동만 두드러진 학술논문은 논점이나 독창성이 결여된 글이 되기 쉽고 쓰기 활동만 있는 학술논문은 독단적이며 논증이 부족한 폐쇄적인 글이 되기 쉽다.“(34 페이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위험하고 생각하기만 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허망하다(사이불학즉태 학이불사즉망学而不思则罔死而不学则殆)는 공자의 말을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자신의 관점(생각)이 주체적으로 정립되지 않으면 수집한 정보를 처리할 수 없고 정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문제해결의 방향을 제시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35 페이지) ”완벽한 학술논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논문에서 제기된 문제는 학술적 공론장에서 공유되는 가운데 보완되며 완전성을 지향해 나아간다.“(36 페이지)

 

논문은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글이다.(42 페이지) 논문은 수학의 기본 계산법처럼 논리적인 형식화에 한정되는 활동이 아니라 열려 있는 창의적인 활동이다. 저자는 논문은 단순한 작문 실력만으로는 부족한 글이지만 작문 실력이 부족해도 써볼 수 있는 글이라 말한다.(43 페이지)

 

논문의 창의성은 나의 생각을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 연구의 논의들을 수렴하고 종합하며 한발 나아가는 데에서 찾을 수 있고 여기에 전통적으로 논증을 유지하기 위해 준수해온 규정과 형식들을 반영하면 논문은 구성될 수 있다.(43 페이지)

 

저자는 주제와 화제의 차이를 설명한다. 내용 구성 요소에서 화제가 A라면 주제는 AB(주장, 논점, 관점, 입장)이고 글의 내용에서 화제는 대상 A에 대한 정보라면 주제는 대상 A에 대한 주장, 논점, 관점, 입장이다. 글의 형식에서 화제는 설명문이고 주제는 논()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 A가 아니라 대상 AB(주장, 논점, 관점, 입장)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는 것이다.

 

저자는 수집된 정보는 지식과 달리 언제든지 새로운 정보가 등장하면 대체될 수 있지만 지식은 수집된 정보를 판단하는 인식적 활동, 선택의 관점, 그런 관점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적 전략을 통해 구성된다고 말한다. 동일한 정보도 서로 다른 지식으로 구성될 수 있으며 정보가 다양하게 지식으로 매개될 때 정보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53 페이지)

 

저자는 논문의 본질은 윤리성에 있다고 말한다. 논문이 정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구성하는 것이고, 대상에 대한 정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의문을 논증하는 것이라면 논문의 윤리적 성격은 이미 전제된 것이다.(55 페이지) 중요한 것은 정보를 그대로 옮겨 적기보다 자신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판한 후 자신의 표현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논문을 쓰는 첫 걸음은 주제 확정이다. 저자는 주제를 정할 때 필요한 질문을 제시한다. 내가 수행할 수 있는 주제인가, 주제가 해결 가능한 의문과 질문을 담고 있는가, 주제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는가 등이다.

 

자신의 연구주제가 A를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자신의 연구주제가 A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킨다, A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수집, 정리한다, A에 대한 문제적 현상을 설명한다, A에 대한 논쟁거리를 다시 논의하게 한다, A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실험한다 등 중 하나에 해당하면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75, 76 페이지)

 

선행 연구 검토도 중요하다. 그것은 나의 연구 주제를 확정하는 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98 페이지) 읽기 자체는 분석적 사고를 강화시켜주거나 창의적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창의적 능력은 스스로가 선행 연구와 적극적으로 씨름하는 가운데 생겨날 수 있다. 유치한 질문이라도 자신의 질문을 만들고 던져봄으로써 선행 연구를 평가함과 동시에 자신의 문제의식을 구체화할 수 있다.(107 페이지)

 

선행 연구 검토는 개별적 논문 각각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는 것에서 나아가 분석한 후 종합적 선행 논문들을 나의 논점의 맥락으로 끌어들이는 행동이다.(112 페이지) 논리적 연관 속에서 구체화되는 정보를 일정한 사유 형식을 통해 지식으로 구축하는 학술 논문에서 논문의 전체 계획을 보여주는 설계도인 서론은 논문 작성에서 가증 많은 시간이 할애되는 핵심적인 부분으로 실제 서론이 구성되면 논문의 반 이상을 썼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126 페이지)

 

아무리 세밀하고 구체적인 서론을 계획했다 해도 본론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면서 예상치 못했던 논리적 틈새를 발견할 수 있다.(127 페이지) 서론은 주제로부터 확장된다. 주제의 형식은 A(연구대상)B(관점, 시각, 문제제기)이다.

 

흔히 논문은 주제 찾기, 연구계획서 쓰기, 초고 집필, 피드백 받아 수정하기 등의 순서로 집필된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순차적 과정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위의 과정들이 피드백을 통해 순환적으로 반영되어 조금씩 진행된다, 초고를 집필하면서 연구주제와 연구방법을 재점검해야 하기도 하고 연구대상을 구체적으로 한정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목차의 항목을 재배치하기도 하고 어떤 항목은 삭제해야 하기도 한다. 초고 집필과 함께 서론과 목차의 내용을 다시 조정하는 일은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누구나 여러 번 겪을 수 있는 일이다.(161 페이지)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 만큼 완벽한 논문은 이 세상에 없다. 어떤 논문이든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부분이 있다. 비판을 통해 보완해야 할 내용을 함께 질문하고 성찰하며 탐구해나가는 것, 이것이 논문이다.(182 페이지) 인용은 편의에 따른, 단순한 내용 옮겨 적기가 아니라 엄격한 판단과 비판적 시각이 요구되는 행위이다.(184 페이지) 모든 인용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원본의 출처를 검증하라.(184 페이지)

 

요약 인용이라 하여 원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글을 인용한 후 인용된 내용에 출처를 밝혔다 해도 유사한 혹은 동일한 표현과 어휘를 일정량 이상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 표절의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199 페이지)

 

문장의 미덕은 간결하고 정확하면서도 쉬운 표현에서 찾을 수 있으며 논문의 문장 역시 이러한 미덕을 요구받는다.(219 페이지) 논문의 문장이 간결하고 쉽다는 것은 개념적 어휘나 논문의 내용이 쉽다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이자 생각의 구조인 문장구조가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220 페이지)

 

논문은 화려한 수사(修辭)를 통해 생각을 포장하는 글이 아니라 오히려 수사를 벗어내어 현상, 사실, 주장 등의 차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글이다.(227 페이지) 저자가 제시하는 논문이 요구하는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필요한 사항은 이렇다.

 

1) 숫자가 등장하는 통계 내용은 조건과 함께 정확하게 제시한다. 2) 주장과 관련된 내용은 동사의 어미를 명확하게 마무리한다. 3) 주어와 목적어처럼 문장의 내용 전달에 필요한 요소는 생략해서는 안 된다. 4) 주어와 서술어는 구체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5) 문장 간 연관관계가 정확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6) ‘-, -거나, ()’ 등의 등위 접속사로 문장을 연결할 경우 연결되는 두 부분이 동일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7) 두 줄 이상의 긴 문장은 피하고 한 문장에는 하나의 내용을 담아 기술한다. 8) 내용 전달을 방해하는 불필요하고 어려운 표현은 정리한다. 9) 단정적이거나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10) 사물 주어와 의인화된 표현을 피한다 등이다.

 

저자는 논문은 성찰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만 인문학적 정신의 구현일 수 있다고 말한다.(248 페이지) 저자는 여전히 논문을 쓰고 있지만 자신 역시 오류 투성이의 부끄러운 논문을 쓴 적이 있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논문은 평생 진행 중인 텍스트라 말하는 저자의 글을 접하며 논문을 쓰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써야 할 글이 논문이라 생각한다.

 

논리적 사고, 논리적 쓰기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논문이 아닌 글쓰기에도 저자의 조언들은 참고할 부분들이 많다. 논문의 문장이 간결하고 쉽다는 것은 개념적 어휘나 논문의 내용이 쉽다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이자 생각의 구조인 문장구조가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 중요한 것은 정보를 그대로 옮겨 적기보다 자신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판한 후 자신의 표현으로 기술하는 것이라는 말.

 

논문은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글이라는 말, 논문의 창의성은 나의 생각을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 연구의 논의들을 수렴하고 종합하며 한발 나아가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 등을 더할 수 있겠다. 인용 방법에 대한 지침도 유용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논문 쓰기에 대한 책이 굳이 아니어도 다른 좋은 글쓰기 지침서들을 찾아 읽어야겠다. 물론 쉽고 부드럽게 제시된 논문 쓰기 지침서를 찾아보고 싶다. 저자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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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제어(獺祭魚)란 수달이 고기를 잡아 제사를 지내듯 늘어놓는다는 의미의 말이다.

비유적으로는 글을 짓는 사람이 많은 참고서적을 좌우에 어수선하게 늘어놓는 것을 뜻한다.

종묘(宗廟)의 소목제(昭穆制)를 보고 달제어란 말을 생각하게 된다. 불경(不敬)일지도 모르겠다.
소목제(昭穆制)는 신위(神位) 및 묘실(廟室)을 배치하는 순서에 대한 규정이다.

소목(昭穆)에서 소(昭)는 원래 존경하다, 밝다는 뜻이었고, 목(穆)은 순종하다, 어둡다는 뜻이었다. 소는 좌(左)의 의미, 목은 우(右)의 의미이다.

왜 밝음과 어두움으로 대비되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중앙의 시조를 중심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왕들의 신주를 받아들여 정전이나 영녕전에 배치하는 것이 달제어란 단어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문화해설 공부에서 달제어라 할 현상이 나타난다. 능이든 종묘든 궁이든 공부할 때 그런 제도들의 뿌리가 되는 중국의 제도나 의례에 관한 규정들을 번역, 설명한 책들을 참고하는(늘어놓는) 것이다.

신병주 교수의 ‘조선왕실의 왕릉조성‘, 이현진 교수의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한국고전번역원 기획의 ‘종묘의궤 1, 2‘, 이현진, 강문식의 ‘종묘와 사직‘, 임석재 교수의 ‘예(禮)로 지은 경복궁‘, 근원 김용준의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 등을 늘어놓고 있는 내 모습이 바로 달제어라 할 수 있다.

학식도 미천(微賤)하고 영민하지도 못한 내가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 스타일의 책보다 이런 책들을 선호하는 것은 그 책들이 근본(根本) 또는 시원(始原)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 책들을 공부하지 않고 대중적인 책들을 공부하는 것은 순서가 잘못되었다. 사정을 잘 모르거나 급할 때는 대중적인 책들을 공부하는 것이 맞지만 어느 정도 익숙하고 적응된 상태라면 논문들이나 논문을 수정, 보완한 책들을 찾아 읽을 필요가 있다.

언급한 ‘조선후기 종묘전례 연구‘도 연구자 이현진(李賢珍)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수정, 보완서이다.(이 분은 후에 ‘종묘와 사직‘이라는 비교적 쉬운 책을 썼다.)

‘조선 후기 종묘전례 연구‘에는 한문이 참 많이 나온다. ‘종묘(宗廟)‘식으로 한글과 한자를 병기한 것이 아니라 宗廟식으로 쓴 많은 한자들이 불편을 가중시킨다.

翼室, 移祔, 祧遷, 追諡, 享祀, 獻議, 殿謁, 褒贈, 虞主, 練主, 祥主, 親盡, 遞遷, 禫祭...

그건 그렇고 중도에 포기하고 싶어 두 차례나 지도교수를 찾았었다는 저자는 학위논문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전공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한다.

나를 포함해 지금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이현진 교수처럼 후에 선택을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참 좋겠다.

* 어제 대화중 미처 제시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역사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후대의 관점이나 가치관의 변화, 새로운 사료의 발견 등에 따라 변하는 생물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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