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균형을 찾는 것의 미덕을 생각한다. 토마스 만 이야기이다. 참으로 오래 전에 읽은 책 ‘마(魔)의 산’을 다시 읽으려 하는 나에게는 아이러니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아이러니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 작가이다.

전업 작가로 활약하기 이전부터 그는 자신의 잉여성(剩餘性)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 출근을 하는 것처럼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으로 아침 9시부터 정오까지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글을 썼다.

토마스 만 자체가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엄격한 부르주아 인물이었던 시의원 아버지의 기질과 몽상적이고 예술가적인 어머니의 기질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려 한 토마스 만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해 불신하다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지지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이로 인해 극우 세력의 공격을 받자 토마스 만은 지금은 이성(理性)이 야수성에 균형을 잡아주어야 할 때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마의 산’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죽음 지향적인 면모를 현실적인 데로 어느 정도 돌려 놓고 시민성과 야수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의도로 쓴 작품이다.

물론 그럼에도 ‘마의 산’의 낭만성과 아이러니한 면모는 매력적이기만 하다. 토마스 만을 만난 지 4년만에 그와 더불어 ‘마산(魔山; 마의 산)’에 올라가 앙드레 지드가 탄복한 대로 비길 데 없는 소설에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말한 한무숙(韓戊淑) 작가가 생각난다.

물론 내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칸트 이야기도 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물(物) 자체는 알 수 없다고 한 자신의 견해가 모든 규범과 윤리의 성립을 저해할 수 있으리라는 우려에 ‘실천이성비판’을 쓴 칸트 이야기이다.

토마스 만은 언어에 대해서도 중요한 견해를 표명했다. 그는 언어는 현실에 상응하는 역동성과 연속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판단, 단정적 표현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점을 작품에 반영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의식의 흐름 소설을 쓴 것 역시 언어에 대한 견해에 기인한다. 그가 뚜렷한 사건 없이 인물들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소설을 쓴 것은 진실은 오직 세부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데에 있다는 생각을 한 결과이다.

한무숙 작가도 의식의 흐름 기법의 소설을 썼다. ‘감정이 있는 심연’이다. 궁금한 것은 한무숙 작가는 어떤 연유로 그런 작품을 썼을까, 하는 것이다. 울프와 비슷하든 아니든 이야기거리가 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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