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 정리되지 않은 거친 글

지난 화요일(3월 20일) 경기 여주(驪州)에 다녀왔다.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을 찾은 뒤 원효 스님이 창건했다는 신륵사(神勒寺)를 둘러본 미니 일정이었다.

두 곳(능, 사찰) 모두에서 해설을 들었다. 왕릉과 사찰을 하나의 틀로 보려는 내게는 좋은 기회여서 귀기울였다.

능에서는 해설사가 풍수의 조산(祖山)과 안산(案山)을 반대로 설명해 설왕설래가 있었다.

사찰에서 우리는 원효 스님이 그렇게나 많은 사찰을 지었다는 것은 도저히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주고 받았다.

돌아오는 카풀 차 안에서 황** 선생님이 곧 울산 외가에 다녀올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오래 전 간절곶에서 5분 거리, 동해남부선이 지나는 울산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에서 한 8개월 살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8개월이란 지난 2006년 5월부터 2007년 1월까지를 말하고 내가 그곳에서 산 것은 일 때문이었다.

황선생님은 자신의 외가가 신암리와 바로 이웃한 곳이라는 말을 했다. 집에 와 얼마 전 사놓고 못 읽은 책에서 동해남부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었다.

물(勿)자 형국의 땅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자어에서 물(勿)은 무엇인가를 가장 강하게 부정할 때(금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풍수에서 물(勿)자 형국의 명당인 양동에 주산(主山)과 안산 사이를 흐르는 양동천을 따라 경주와 포항을 잇는 동해남부선 부설 계획이 세워진 1938년의 일이다.

그러지 않아도 좁은 마을이 철도 부설로 두 동강이 나게 되어 마을이 발칵 뒤집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무작정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물(勿)자 형국의 땅 아랫 부분을 기차가 지나가게 되면 획이 하나 그어지게 되는 것이고 결국 이는 혈(血)자가 됨으로써 마을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논리를 제시했다.

결국 이 논리는 받아들여져 노선 변경을 이끌어냈다.(함성호 지음 ‘철학으로 읽는 옛집‘ 참고)

지형을 텍스트로 읽은 탁월한 안목이지만 다른 각도로도 볼 수 있다. 경상도 산골에 초하리가 있다. 하는 새우 하(鰕)자이다.

바다와 전혀 관계가 없는 그 마을이 새우 하자를 쓰는 초하리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산의 모양이 새우 같아서이다.

관건은 무엇일까? 풍수든 주역이든 논리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아닐지? 물론 자의적 논리로 현실을 왜곡하고 악용하는 사례가 있었다.
정치적 야심을 풍수로 치장한 사례가 빈번했던 조선이 생각난다.

회퇴변척(晦退辨斥; 남명 조식의 제자 정인홍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배척하기 위해 상소를 올린 사건)의 대상 중 하나였던 회재 이언적은 조선을 주자 중심의 성리학 국가로 만든 주 인물이다.

그는 용(用)자 모양의 집을 짓는 무리수를 두었다. 용(用)은 일(日)과 월(月)을 위아래로 배치한 글자이다. 일(日)과 월(月)을 나란히 쓰면 명당(明堂)이란 말의 그 명(明)자가 된다.

용(用)자 형국의 땅도 명당이다. 하지만 건물을 그런 형태로 짓는 것은 무리수가 아닐 수 없다.

이언적의 무리수는 정치적 좌절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천리를 받들고 사람의 욕심을 극복하라는 대의명분과 달리 속으로는 결국 욕심을 따랐던 성리학자들을 비판한 이지(李摯)를 생각나게 한다.

주자를 따르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호인 회암(晦庵)의 회를 써 회재(晦齋)라는 호를 쓴 이언적의 학문적 성과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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