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윤동주의 삶과 문학 이삭문고 3
고운기 지음 / 산하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윤동주 가족들이 평양으로 이주해간 것은 용정의 공산화 때문이다. 여동생 혜원씨는 남북 단독 정부 수립(1948) 후인 1949년 겨울 종교의 자유를 찾아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검문이 심해 오빠의 유품(사진첩)을 친지에게 맡겼다. 함경북도 남양의 부모를 만나러 가던 친지는 발각을 우려해 차창 밖으로 유품을 버리고 말았다.

 

윤동주가 릿쿄대학에 입학한 것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때였다. 윤동주 시 가운데 '쉽게 씌어진 시'가 있다. 이 시 가운데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란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시인은 신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라는 릴케의 말을 바꾸어 쓴 것이다.(16 페이지)

 

릴케는 신만이 알 수 있는 인생의 비밀스러운 뜻을 시적 감수성으로 찾아내는 시인의 행위를 신에게 저주받을 일이란 역설적 표현으로 설명한 것이다. 나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란 표현을 시인이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편하게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 표현한 것이기보다 즉 시를 쓰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으로 본 것이기보다 철저하지 못한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윤동주의 독립운동과 옥사(獄死)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윤동주가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길을 갔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지역인 간도(間島)는 청나라의 발상지였다. 청이 후에 베이징으로 옮겨감으로써 간도는 빈 곳이 되었다. 간도는 조선과 옛 청나라 사이에 섬처럼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특히 두만강 북쪽을 북간도라 함)

 

우리나라 사람들이 간도에 살게 된 것은 1869년 무렵으로 함경북도 지방에 큰 흉년이 들게되면서부터이다. 간도는 풍수지리의 이점을 갖춘 곳이자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윤동주가 태어난 당시 주소는 중화민국 동북부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이다. 외사촌 김정우(윤동주보다 한 살 어림. 동창생)나 동생 윤일주의 기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교회와 나무이다.

 

학교를 세우고 선생을 물색하는 명동촌에 정재면이란 22세의 청년이 나타난다. 그의 요구 조건은 학생들이 공부할 과목에 기독교 교육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09년의 일이다. 윤동주는 후에 평양 숭실중학, 서울 연희전문, 교토의 도시샤 대학을 다녔다. 모두 기독교 계통의 학교이다.

 

고종사촌 송몽규는 정치적 성향이 강했던 행동 지향적 인물이었다. 문익환은 1932년 윤동주와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중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중퇴한 뒤 1943년 만주 봉천신학교 재학중에는 학병을 거부했고 이 해부터 전도사로 활동했다. 문익환은 윤동주에게 열등감을 가졌고 윤동주는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가졌다.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 세 사람은 특출난 친구들이었다. 문익환은 두 친구를 같은 해(1945)에 한꺼번에 잃고 50년을 더 살다 갔다. 그의 희생정신은 두 친구에 대한 빚을 갚겠다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익환은 중요한 자리에서 윤동주의 시를 암송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윤동주와 그의 시를 알렸다.

 

윤동주는 자신의 작품 아래에 늘 쓴 날짜를 적었다. 저자는 부끄러움을 윤동주의 온 생애를 뒤덮었던 말로 정의한다. 명동소학교는 서숙(書塾)이란 이름으로 소학교와 중학교가 같이 있었다. 윤동주가 속한 학년 전체가 문학적 소양을 갖춘 아이들로 짜여 있었다. 이것이 서로를 부추기는 힘이 되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로부터 졸업생 13명과 함께 김동환의 시집 '국경의 밤'을 선물로 받았다. 이 시집이 어린 윤동주와 친구들의 정서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국경의 밤'은 소외된 국경 지대의 궁핍한 생활상과 식민지 치하의 비정한 현실을 눈물겹게 그린 시집이다.(57 페이지)

 

은진중학교는 용정에, 숭실중학교는 평앙의 학교였다. 윤동주는 살아서 시인으로 데뷔하지 못했다. 윤동주가 남긴 것은 시와 그 시를 쓴 날짜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문인들이 데뷔를 하고 통상적인 문단 생활을 대신하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65 페이지)

 

193519세의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콩트 부문에 당선된다. 이 역시 윤동주에게는 분발(奮發)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김구 선생을 찾아가 교육을 받았다.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동맹 자퇴한다. 신사참배에 항의하는 차원이었다. 이때 송몽규는 독립 운동을 위해 중국 땅을 떠돌고 있었다.

 

윤동주의 평양 시절(숭실중학교)은 짧게 끝났다. 소득이 있었으니 바로 정지용 시인을 만난 것이다. 물론 실제 만남이 아니라 정지용 시집과의 만남이었다. 정지용은 김억, 김소월, 한용운으로 이어지던 한국 현대 시단에 현대시다운 현대시를 처음 쓴 시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85 페이지)

 

윤동주는 정지용 시를 읽음으로써 시가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느꼈을 수 있다. 윤동주는 동요 시인 강소천(1915 -1963)을 만나기도 했다. 윤동주는 이상의 시에도 관심을 보였고 백석(1912 - 1996)의 시집 '사슴', 김영랑의 '영랑 시집'을 필사하기도 했다. 1938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다.

 

윤동주가 다닌 연희전문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였기에 거의 유일하게 조선어 교육이 살아 있었다. 저자는 오늘날의 윤동주를 있게 한 두 사람을 고르라면 송몽규, 정병욱이라 말한다.(112 페이지)

 

윤동주보다 먼저 문학에 재능을 보인 송몽규는 정작 다른 길을 갔지만 윤동주로 하여금 자신의 길 전부를 문학에 걸게 했고 정병욱은 윤동주 시의 충실한 조언자였고 윤동주가 증정한 자필 시집을 해방이 될 때까지 자기 집 장독대에 묻어 끝까지 지켜내 윤동주와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저자는 송몽규를 지혜의 보살이자 계기를 마련해주는 문수보살에, 정병욱을 위로의 보살이자 완성의 보살인 관음보살에 비유한다.(112 페이지) 윤동주는 정병욱과 함께 서대문구 누상동 에서 자취를 하기도 했다.(누상동, 부암동 등은 후에 서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되었다.)

 

마광수 교수는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우물을 시인의 감성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즉 한 포기 꽃을 통해서도 우주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시인의 감성이라고 한다면 윤동주는 시인다운 감수성으로 우물이라는 작은 공간을 통해 대자연과 우주를 지켜보고 있다고.(129 페이지)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할 무렵 자비를 들여 시집을 내려 했을 때 완성된 원고의 첫 작품이 '자화상'이었다. 이 시는 습작기를 마친 윤동주가 이룬 첫 성과라 할 수 있다. 윤동주는 기독교 신앙에 회의하기도 했다. 윤동주는 '바람이 불어'에서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고 썼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란 구절이 있는 '서시'는 윤동주가 붙인 제목이 아니다. 이 시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격의 짧은 시이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오늘날의 비자에 해당하는 도항증명(渡航證明)을 발급받아야 했다. 이를 위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동주는 서류 제출 5일 전에 '참회록'을 썼다. 윤동주는 이 시가 쓰인 종이 여백에 글씨를 썼는데 그것은 도항증명, 비애금물(悲哀禁物)이었다. 저자는 정병욱의 호 백영(白影)이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에서 따온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쉽게 씌어진 시'를 윤동주가 남긴 최대의 명편이라 칭한다.(158 페이지) 송몽규의 조카인 소설가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에서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란 구절이 있는 ''을 윤동주가 생애 처음 다가온 사랑에게 바쳤으리라 짐작한다.(161 페이지)

 

윤동주는 일본에서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에게 시를 써 보냈다. 후에 경향신문 기자가 된 강처중은 그 가운데 한 편인 '쉽게 씌어진 시'를 경향신문에 싣는다. 저자는 윤동주를 오로지 민족주의적 순교의 시인으로만 말한다면 본디 제 모습을 일그러뜨릴 수 있지만 살아가는 일 자체가 가시밭길이요 올무로 뒤덮인 벌판에서 제 나라 말로 끝내 시를 쓰는 일에 생을 바치기로 하였다면 그것만으로도 죽음을 담보로 한 민족운동이었다고 말한다.(173 페이지)

 

윤동주의 부친과 당숙은 송몽규로부터 정체 불명의 주사(注射) 이야기를 들었다.(182 페이지) 윤동주 가족은 윤동주 묘에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글을 새겼다. 처음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순간이다. 송몽규의 혐의는 스스로 문학자가 되어 지도적 지위에 서서 민족적 계몽 운동에 몸 바칠 것을 윤동주와 협의했다는 것이다. 문학 평론가의 유려한 해석이 돋보이는 책,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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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0 1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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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0 1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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