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는 한 맛이라는 말은 다성(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초의 선사의 말이다. 이 말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저자 호이징하의 시를 짓는 것은 사실상 놀이 기능이라는 말과 연결지으면 어떻게 될까?

 

호이징하의 저 말은 시와 사물은 논리와 인과라는 유대와는 다른 유대로 상호 연관된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시와 놀이의 관계를 차와 놀이의 관계로 확장시킬 수 있겠다. 하지만 잘못이 아닌가 싶다.

 

초의선사는 선과 시와 차는 진지하다는 점에서 하나라 말한 것인 데 비해 호이징하는 시는 진지함 너머에 즉 어린이, 동물, 미개인, 예언자가 속하는 보다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수준, , 매혹, 엑스터시, 웃음의 영역에 존재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호모 루덴스놀이와 시참고)

 

호이징하는 원초적 문화 창조 능력에서 볼 때 시는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탄생한다고 말한다. 그럼 차()는 어떤가? 차는 9년 면벽(面壁) 수행으로 유명한 (선불교의 초대 교조) 달마(達摩) 대사가 좌선 수행의 최대 장애인 혼침(昏沈: 졸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달마가 수행 중 쏟아지는 잠을 해결하기 위해 눈썹을 잘라 던진 것이 차나무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박동춘 지음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108 페이지)

 

요즘 일 때문에 서울에 자주 가는 내게 눈에 많이 띄는 것은 궁궐, 박물관, 도서관, 기념관, 서점 등이 아닌 커피숍이다. 포화 상태가 아닌가 싶은 곳이 커피숍이다. ()은 자연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지리학자 조엘 코트킨의 말(‘도시, 역사를 바꾸다참고)과 포화 상태에 이른 커피숍의 현실을 연결해 신은 자연을 만들었고 커피숍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원불교 여의도 교당에 'coffee 9 sel'(커피 나인 쉘)이 있었다. 아홉 번 구운 죽염(sel은 프랑스어로 소금을 뜻함)을 넣은 커피를 파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원래 커피는 독성 중화를 위해 소금을 넣어 마시던 음료이다.

 

오늘 원불교 여의도 교당에 확인해 보니 영업을 접었다고 한다.(왜 접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내게 나인 쉘이 있으니 다른 커피 숍에 가서 타 마시면 된다. 아메리카노보다 라떼를 더 맛있어 하는 사람들은 결코 가지 않을 곳이 커피 나인 쉘일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지만 나는 필요에 의해 나인 쉘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커피 나인 쉘은 내게 (다른 영업점이 개점하거나 여의도 교당점이 재개업하지 않는 한) 기호(記號)로 남을 곳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7-12-23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0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