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가/사회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가 타계 했다. 1926년 생 작가의 죽음. 내가 아끼는 그의 책은 ‘벤투의 스케치북‘. 벤투는 스피노자를 말한다. 위키피디아 등에는 그의 풀 네임을 바뤼흐 스피노자라 쓰고 있는데 알다시피 그는 유대교에서 파문된 후 바뤼흐를 버리고 라틴어 베네딕투스로 바꾸었다.

그러니 바람직한 명명은 존 버거의 책 제목인 ‘벤투의 스케치북‘임을 알 수 있다.(벤투는 포르투갈 버전) 사람들은 그가 내일 지구가 망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마틴 루터의 말이다.

물론 이는 베네딕투스로 이름을 바꾼 스피노자를, 유대식 이름인 바뤼흐라 부르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다. 하기야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의 가르침대로 슬픔이 멈추도록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슬픔의 원인을 이해하면 슬픔은 정념이기를 즉 슬픔이기를 멈춘다고 말했다.(‘에티카‘ 5부 정리 18 주석) 그리고 덧붙이자면 ˝...글을 쓴다는 것/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기대 없이,/ 하도록 돼 있는 일을 하는 것...˝이란 시 (2016년 4월 발간 ‘곡면의 힘‘ 수록 서동욱 시인의 ‘스피노자‘)를 기억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드로잉을 즐겼고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지만 발견된 그림은 없다. 존 버거는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드로잉을 시작할 때마다 우리는 그때만의 서로 다른 희망을 가지며 매번 드로잉은 예측할 수 없는 그때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드로잉은 비슷한 상상력의 작동으로 시작된다고 말했다.

존 버거가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이끌어가는 어딘가 또는 그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자신과 벤투가 공유했다는 인식에 기반해 그 점을 설명해낸 것이다.

버거의 다른 책인‘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문제의식과도 공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버거는 이 책에서 제도화된 암묵적 전제들과 다른 새로운 시각을 요구했다.

조용미 시인의 ‘나의 다른 이름들‘의 한 구절을 본다. ˝나는 내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으로 똘똘 뭉친 이 진실/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오늘도 내 속에 적절히 숨어서 내가 아닐 가능성을 엄밀/하게 엿본다˝ 같은 구절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구절들이다. 존 버거의 죽음을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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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7-01-03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타깝습니다. ‘벤투의 스케치북‘ 궁금했던 궁금증 푸네요. 애도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03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의 죽음이지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