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꽃잎 속 서정시학 시인선 120
김명리 지음 / 서정시학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김명리 시인의 ‘제비꽃 꽃잎 속’은 다소 특이한 시집이다. 내게 그렇(게 읽힌)다는 의미이다. 구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거의 다 읽었기 때문이다. 정제된 아름다움의 풍성함이 눈길을 떼지 못하게 했다. 요즘 시집들이 대체로 쉽게 읽히지 않는 편인데 비해 쉽게 읽힌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특이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쉽게 읽힌 것에 비해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든 소감을 다듬어 쓰는 것이든 쓸 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이다.


좋은 시이고 이전 시집들에 비해 한층 더 세련된 느낌을 전해주지만 특별히 이야기할 것이 없다. ‘제비꽃 꽃잎 속’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시인의 시집은 ‘적멸의 즐거움’ 단 한 권이다. 나는 물론 ‘적멸의 즐거움’ 리뷰를 쓰지 못했다. 이 시집에서 내가 즐겨 읽는 시는 여럿인데 이 가운데 ‘먼 길’ 같은 시는 외울 때도 무난했고 리듬감이 느껴져 잘 잊히지 않는 좋은 시로 기억한다.


‘적멸의 즐거움’에 실린 시들을 키워드로 나누면 사찰, 여행, 가족, 사찰 여행, 꽃, 물, 계절, 나무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전형적인 서정시의 시어들이 아닌가. 이번 시집은 어떤가. 물소리, 봄날, 꽃, 나무, 새, 가을, 시간, 산그늘, 적소, 가족 등이 주요하게 눈에 띈다. 특기할 것은 당신이란 시어들이 눈길을 끈다는 점이다. ‘적멸의 즐거움’에 당신이란 시어가 들어 있는 시가 ‘사랑의 길’ 한 편이고, 당신으로 바꿔 부를 만한 시가 “맹세는 깨어졌다/ 그해 가을이 다 저물도록/ 오마던 사람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가을 나무의 말’임을 감안하면 주목할 만하다.


오마던 사람을 당신이라 바꿔도 무리는 없다. 이번 시집에서는 당신이란 단어가 어려 군데 눈에 띈다. “삼만 년 전부터 분홍/ 분홍 터번을 두르고/ 무화과를 팔고 있던 당신을 기억해...”(‘분홍 일다‘), “..먼나무를 오래 그리워하면/ 눈이 먼 나무가 될 것 같다/ 나는 당신이라는 먼 나무 곁으로 가지 못했다...”(’먼 나무‘), “...야간성묘객들이 다 돌아갈 때까지/ 밤의 피륙으로 레이스를 뜨며/ 나는 당신을 기다린다..”(’베고니아 화분이 놓였던 자리‘), “..나 어디 있는지 당신이 물어오면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


“당신이 그곳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어요...”(’풍문‘), “..어느 먼 시간 속엔/ 당신이 타고 내가 내리는 기차...”(’잠잠‘), “...단 하루/ 울지 않은 날의 / 메마른 손바닥에서// 당신 냄새,...”(’달의 민박‘), “오늘따라 당신의 거친 턱수염이 조금도 따갑지 않다...”(’먼 입술‘), “우리가 헤어지던 그해 겨울 당신은 내게 향로를 주었다...”(’선물‘) 등이다. ’적멸의 즐거움‘에서 오마던 사람을 당신이라 바꿔 부를 수 있듯 ’제비꽃 꽃잎 속‘에서는 ’꽃잎 장례‘의 ’그대’를 당신이라 바꿔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화창한 봄날’에 나오는 “...나는 그대가 꾼 길고 긴 꿈..”이란 말에서 그대도 당신으로 바꿀 수 있다. 물론 ‘제비꽃 꽃잎 속’과 비교 대상으로 삼은 시집이 단 한 시집이기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래도 덧붙여 리기다 소나무, 두물머리 등의 시어들이 주요하게 재등장했다는 사실은 말하고 싶다. 물론 가장 중요한 단서는 환(幻)이란 단어이다. ‘적멸의 즐거움’의 자서(自序)에서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나의 시들이 더 낮은 포복으로 대지의 숨통에 깃들여져서 자잘한 한 포기의 풀이나 한 떨기의 꽃으로 환(幻)하기를 소망한다.”는. 일반적으로 환생이란 말은 還生으로 쓰고, 幻生으로도 쓴다. 대체(代替) 가능한 말이다, 그렇다면 한 음절의 환(幻), 거기에 하다를 붙여 쓰는 幻하다란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 글자는 변할 환, 헛보일 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변할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幻하다란 시어가 있는 시가 한 편 있다. “.. 또 한세월 벙어리가 꾼 꿈으로 환幻하는지..”(‘그 사이’) 그리고 “환幻인 듯“이란 시어가 두 편 있다.”(‘강물 소리’, ‘꽃잎 장례’) 그렇다면 김명리 시인의 시는 왜 특별히 이야기할 것이 없는가. 표면적으로는 시인이 수행자 같은 시심을 발휘해 평정함 속에 미세히 흔들리는(움직이는) 마음의 결을 드러낸 것을 포착하기 쉽지 않아서이다. 구체화해 말하면 아직 시인의 그런 마음씀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이 내면에서부터 잘 다듬어진 감정으로 바라본 현상들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낸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이런 말을 들려준다. 수없이 찢고 지우고 다시 써내려가는 한 줄의 문장, 잠든 혼을 일깨워 쓰는 한 편의 시...“ 그렇게 전전반측했을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에 근접하는 헤아림과 생각의 숱한 진퇴(進退)를 겪어야 한다. 시인은 그래도 아니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슬픔을 이야기한다.


‘분홍 일다’, ‘제비꽃 꽃잎 속’, ‘산벚나무의 시간’ 등 시집에 수록된 첫 세 편에서 슬픔이란 단어를 연이어 만날 수 있다. 이 밖에 ‘이 화창한 봄날’, ‘달의 동심원의 뒤편’, ‘맨드라미’,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 ‘낙원의 풍경’, ‘러시안 룰렛’, ‘일월日月을 거쳐’, ‘꽃잎 장례’ 등에 슬픔이란 단어를 만나게 된다. 슬픔이란 단어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단어들로 슬픔을 표현한 시들을 헤아리면 더 많은 목록을 기록할 수 있다.


울음이란 말, 메나리 조(調)라는 말, 눈물이라는 말, 눈물방울이란 말, 울먹이는 것들, 비명이란 말 등이다. ‘꽃보다 작은 꽃’에 나오는 ‘어룽거리’다란 단어도 슬픔 또는 눈물과 상응하는 시어이다. ‘비의 고래’에 나오는 눈시울이란 말은 어떤가. 이 말은 눈 언저리를 뜻하지만 눈시울이 젖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등의 용법을 통해 알 수 있듯 슬픔, 눈물 등을 표현하는 말이다.


‘꽃밭의 시학’에서 시인은 ”...참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리듯이 피는 꽃도 있다..“고 말한다. ‘눈의 무게’에서는 ”..눈물로 변해서 흘러 다니는 새들의 발자국..“이란 말을 한다. 물론 이 시에는 ”...분통을 터뜨리듯이 피는 꽃..”이란 구절도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이다. 이 시에 함께 들어 있는 “..팔순의 어머니/ 주름진 눈가에/ 가물가물 분홍 물살 이는데...”라는 구절 역시 슬픔, 눈물 등을 표현한 구절이다.


시인은 ‘키쿠치의 집’에서 “..무단횡단하고 싶은 마음의 세찬 빗방울들..”이란 말을 한다. ‘눈의 무게’에서는 “,..눈물로 변해서 흘러 다니는 새들의 발자국..”이란 말을 한다. ‘북인도의 달’에서 시인은 “..흙 빛깔의 해 그림자는/ 엷고 푸른 사리를 두른 여인의/ 눈물 괸 검은 눈 속에서 물결인 듯 출렁이고 있다..”는 말을 한다. ‘두물머리 시월’에서는 “.. 길의 서쪽부터 일제히 파랑 이는 저녁의 물살..”이란 말을 한다.


‘입동’에서는 “..궂은 일 없어도 누가 울면/ 흥건히 따라 울고 싶은 입동”이란 말을 한다. ‘러시안 룰렛’에서는 “..너는 무수히 실금 간 내 유골항아리를 들고/ 나는 슬픔을 총알처럼 또 한 발 장전해놓고”란 말을 한다. ‘시간의 흰 그림자들’에서는 “..링거액 반 쯤 찬 겨울하늘 속으로/ 한 덩이 매지구름이 단단히 뭉쳤다 흩어지는 것/ 우리들 둘러싼 시간의 입자들이/ 무수히 방울지고 출렁이는 순간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는 “건기의 밤하늘에도 움푹 팬 물웅덩이가 있네... 사금파리 같은 검은등뻐꾸기 울음소리 여태도 그 속에서 맴돌고 있네/....한 슬픔 떠나보내기 무섭게 뒤이은 슬픔들 흔들흔들 몰/ 려오네 물에도 젖지 않는 저 작은 슬픔들이 와서, 소스라/ 치게 놀란,....// 쏟아지기 직전의 물웅덩이 속에는..../ 물 잔뜩 머금은 구름 그림자가...” 등의 시어로 그야말로 잘 묘사된 슬픔의 촉촉한 정서를 드러낸 시로 읽힌다.


슬픔은 침묵으로 마음 속에서만 일렁이기도 한다. 시인은 “..나는 다만 늙은 산벚나무 꽃그늘 아래/ 진액(津液)이 다한 거름으로 누웠다..”는 말을 한다.(‘내 생애의 백 년 후’) “...나 생겨나기 전의 까마득한 어느 봄/ 날이 꽃 없는 꽃줄기마다 선득선득 고여오는 것만 같다..“는 표현(‘봄날 저녁’)도 슬픔이 고여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부풀어오르는’, ‘비등하는’, ‘일렁거린다’ 등의 시어도 모두 슬픔의 동선을 표현한 것이다.


시집 전체가 슬픔을 표현하는 ‘흐름’의 어휘로 채색되었다. 슬픔으로 일렁이지만 다듬어진, 정련(精練)된 채로이기에 넘치지 않는다. 애이불비(哀而不悲)라고 할까? 주목되는 것은 ‘늦은 독서’란 시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그러고 보면 내 모든 독서는/ 갈수기(渴水期)의 냇바닥처럼 낮고 메마르고..“란 말을 한다. 촉촉함과 일렁임이 만발한 곳에서 건조함을 표현한 드문 시이다.


시인은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에서는 ”건기의 밤하늘에도 움푹 팬 물웅덩이가 있네....“란 말을 한다. ‘달의 민박’에서는 ”..단 하루/ 울지 않은 날의/ 메마른 손바닥에서.,..“란 말을 한다. ‘가을빛 속으로’에 나오는 ‘메마른 목숨 끝’이란 시어와 함께 이 시들은 건조함을 표현하는 몇 되지 않는 시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마름과 젖음은 순환한다는 점이다.


이 진리를 표현하는 시어들이 있다. 한 사물의 일시적인 상황을 묘사한 시를 포함해 그렇다. ‘오므리고 펼치고 잠기며/ 천천히 다시 시작하는 구름들’, ‘찬찬히 오므렸다 펴는’, ‘팽창하고 수축하는’, ‘오므리고 펼치고 서리고 꺾으며/ 물보라로 단단해진 저 환한 달무리’, ‘오방색으로 일렁이고/ 흩어지는 저녁 잔광’, ‘살아서 천 년, 시들어서 천 년/ 쓰러져서도 천 년을 산다 하는/ 호양나무 뿌리를 적시러’, ‘한 슬픔 떠나보내기 무섭게 뒤이은 슬픔들 흔들흔들 몰/ 려오네’, ‘끝없이 펼쳤다 오므렸다 하네’, ‘꽃 핀 고사목처럼 갸우뚱 부풀어 오르는 봄밤/ 낡은 상앗대로 간신히 괴어 논/ 꽃 피는 밤의 무게에 활처럼 휘면서 번지면서/ 모든 슬픔을 그 속에


지닌/ 품속에 지녀온 날카로운 비수를/ 가만히,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총상 꽃차례로 모였다 흩어지는 저 꽃잎들’, ‘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왔단다 누군가는/ 그 사이 태어나고/ 어느 새 누군가 죽었다는 부고가/ 이따금씩 날아들었단다’, ‘물방울이 뼈에 맺혔다 하느니 솔찮게 풀어졌다 하/ 느니’ 등이다. 이런 영고(榮枯)의 변화는 자신의 시가 자잘한 한 포기의 풀이나 한 떨기의 꽃으로 幻하기를 바란다는 시인의 바람과 상응하고 또 그런 변화를 표현한다.


전문을 소개할 시를 고르라면 나는 ‘물그림자’를 들 것이다.


목백일홍 꽃가지 끝에
한숨처럼 빈 방 늘어간다
텅 빈 꽃 그림자 흰 그늘 속으로
길 잃은 듯 벌 나비 간간히 날아들지만
향기에 이끌리는 양방향 향적만이
날것들의 길은 아닐 것이다
하늘 가득히 오연한 물소리
스카이라인을 뭉개는
물의 무수한 혓바늘들
한 나무의 나뭇잎이 지구중력을 벗어나는
순간의 격통을 나는 느낀다
천기를 짐작할 수 없는 미연未然의 나날들
어스름이 물의 숙박부에
무루無漏라고 제 이름을 적고
나보다 앞서 빈 방에 든다 빈 방이 부푼다
저 골짜기에 피어오른 이내가
이 골짜기에서 피어오른 이내를 서서히 감싸 안는다


슬픔과 거리가 있는, 힘이 느껴지는 시이다. 속도감이 느껴지는 통쾌한 시이다. 무루라는 단어도 마음에 든다. 無漏는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번뇌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이다. “저 골짜기에 피어오른 이내가/ 이 골짜기에서 피어오른 이내를 서서히 감싸 안는다”는 표현은 포용 상생 등을 생각하게 한다. 물의 숙박부란 표현은 재미있다. 하늘 가득히 오연한 물소리란 구절이 눈길을 끈다. 슬픔의 전체를 이기고 함께 조화로운 시어이고 시이다. 아름다운 흐름이 감지되는 시이다. 쓸 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 글, 이만 줄여야겠다. 오독(誤讀)이 아니기를, 오독이라면 배울 것이 있는 오독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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