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만들어내는 수 없이 많은 갈등과 불협화음 등을 보며 중성미자(뉴트리노)를 떠올린다. 레너드 서스킨드가 거의 보이지 않는 입자라 표현한 중성미자는 수광년의 두께에 해당하는 납을 궤도를 휘게 함 없이 통과할 수 있으나 완전히 무(無)가 아닌 입자(레너드 서스킨드 지음 ‘우주의 풍경’ 9, 87 페이지)다.

 

그들은 약한 핵력이라는 밋밋한 이름의 상호작용만 하며(리사 랜들 지음 ‘천국의 문들 두드리며’ 177 페이지) 양성자 지름의 1/ 1,000 정도의 엄청나게 짧은 영역에서만 작용한다.(레너드 서스킨드 지음 ‘우주의 풍경’ 289 페이지)

 

그들은 아주 미미(微微)한 존재여서 1백억 개가 우리 몸을 통과해가도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하게 하지만 태양이 빛을 내게 하는 수소핵융합 반응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김제완 지음 ‘겨우 존재하는 것들’ 22 페이지) 우리가 뉴트리노 같은 존재 양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우리에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는 있다. 우리는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며 좋은 영향력을 행사할 당위를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디뎌야 할 첫 걸음은 아집과 어리석음에 빠진 실존의 부끄러움을 바로 보고 고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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