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이주, 생존 -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인류는 끊임없이 이동한다
소니아 샤 지음, 성원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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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환경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인류 이야기를 다룬 소니아 샤(Sonia Shah)의 ‘인류, 이주, 생존’은 자연과학적 성찰을 반영한 사회과학적 메시지가 돋보이는 책이다. 저자는 일상적인 것은 정주(定住)가 아니라 이주(移住)이고 이동(移動)이라고 강조한다.

 

문장이 빠르고 메시지에 힘이 있어 읽는 재미가 크다. 가령 “산비탈에 매달린 히말라야 소나무들이 바위 투성이 정상의 상층부에서 갑자기 작아지더니 수목한계선으로 알려진 천연 경계를 만들어냈다. 그 선 위로 가는 폭포가 물길을 남겨놓은 민얼굴의 벼랑이 솟아 있다"(24 페이지) 같은 표현은 문학적으로도 돋보이는 문장이다.

 

사람들은 홍수, 폭풍, 지진 등의 이유 때문에 이동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겪는 폭력과 박해 때문에 나라를 탈출(27 페이지)하고 사막이 확장되고 삼림이 줄어들면서 겪게 된 자포자기의 가난 때문에 이주한다.(53 페이지) 아랍의 봄 역시 유럽으로의 대이동을 촉발했다.(56 페이지) 값싼 농지, 공장 일자리, 사금 광산, 유혈 혁명도 이주를 촉발했다.(123 페이지)

 

저자는 이주가 혼란을 초래한다는 일반적 믿음에 의혹을 품고 전 세계의 이주 경로를 추적했다. 그 결과 생명은 늘 움직인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저자는 인도 서해안 구자라트 주 출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미국인이다. 그의 부모가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은 1965년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1965년 사회보장법을 통해 마련된 노인 및 저소득층 의료보장제도) 시행으로 극심한 의료인력 부족 현상이 빚어지자 미국 정부가 아시아, 아프리카, 남유럽, 동유럽 출신자들에 대한 입국 금지를 되돌린 결과다.(저자는 1969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당시 미국은 우생학의 논리를 근거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유럽, 동유럽 출신자들에게 정신적 결함과 생물학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주자들로 인해 범죄가 늘었다고 할 근거가 없음을 찬찬히 언급한다. 저자는 자연은 변화하지 않고 경직된 질서를 따른다고 본 칼 폴 린네와 자연은 변이 가능하고 역동적이라고 본 조르주 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의 차이를 논한다.

 

린네가 세분파였다면 뷔퐁은 병합파였다. 뷔퐁의 자연관은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고대적 사상을 부활시켰다. 암석의 견고함, 물질의 윤곽, 살아 있는 피조물들의 습관은 근원적으로 변치 않는 물질적 자연을 나타나는 게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전혀 없는, 흐름의 상태를 일시적으로 표현할 뿐이었다. 영속성은 환상이고 실재하는 것은 변화였다.(98, 99 페이지)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말했고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란 없다고 말했다. 파르메니데스는 무(無)는 없고 존재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뷔퐁은 자신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모든 인간은 어디에 살든, 피부색이 어떻든 같은 혈통에서 비롯된 한 가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린네와 뷔퐁은 지구상의 모든 물질과 생명이 위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생각(존재의 거대한 사슬론)을 공유했다.

 

책 중간쯤에 적소(適所) 이야기가 나온다. niche의 번역어인 적소는 야생의 생명이 사는 장소를 말한다.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의미의 중기 프랑스 단어인 nicher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원래 조각상을 넣어두기 위해 움푹 파낸 벽 안의 우묵한 장소(‘벽감; 壁龕’)를 가리켰다. 동물학자들은 야생동물 각각의 적소는 이와 비슷하게 고유하고 독특한 곳 즉 그 장소를 점유한 그 한 종에게 맞춰진 장소일 것이라 생각했다. 각각의 종은 자기만의 자연 공간 속에서 살고 그 주위에는 생물학적 경계가 그어졌다고 본 것이다. 적소는 한 종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이 갖춰진 폐쇄된 장소다.(162, 163 페이지)

 

20세기 동물학자들은 생태계와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생물학적 문화적 다양성의 매개체인 이주를 죽음의 매개체라 생각했다.(169 페이지) 책에는 찰스 엘턴 이야기가 나온다. 1924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동물학을 공부하던 대학생이었던 그는 떼를 지어 북극의 벼랑을 향해 돌진한 뒤 바다로 뛰어들어 죽은 레밍이라는 동물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다. 그는 자연은 언제나 정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지리는 영구불변의 것으로 보았다.

 

전쟁 이전 엘턴은 대부분의 종이 각자의 자리에서 지낸다고 생각해 이주자들이 일으키는 생태적 위협에 대해 크게 우려하지 않았으나 군부대가 새로운 수송 기술의 도움을 받아서 유럽을 가로지르자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엘턴은 이동하는 생물을 침략자로,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재난이라고 묘사하기 위해 새로 유입된 종의 가장 파괴적인 면만을 취했고 새로운 종 때문에 발생한 비용만 고려했을뿐 그들을 통해 얻게 된 이익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181 페이지)

 

엘턴은 동물생태학의 창시자이자 생물학의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레밍이 바다로 이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184 페이지) 레밍에 대한 진실이 드러난 것은 생물학자들이 레밍의 영토에서 눈 아래를 들여다보았을 때였다. 알고 보니 레밍은 얼음장 같은 북극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굴을 파고 눈 밑으로 들어가 눈이 녹은 따뜻한 지면과 그 위의 눈이 만들어낸 작은 틈(‘서브니비언 공간; subnivean space’)에서 이끼를 먹고 새끼들을 돌보았다.

 

자살 성향이 있는 레밍의 이주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일련의 오해(다른 사람의 편파적인 책을 보고 주장)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이 대중화된 것은 한 방송국의 의도적 사기(연출, 조작)의 결과였다.(185 페이지) 책에는 앨리효과도 나온다. 클라이드 앨리가 제안한 개념으로 개체가 함께 모여 있을 때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협력이 빚어지고 이는 개체의 생존과 번영에 이익이 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효과다.(217 페이지)

 

다윈은 모든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고 말했지만 이주 자체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과학자들은 아프리카 밖으로의 이주는 사람이 살지 않는 거대한 허허벌판으로의 확산이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고대의 DNA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이 아프리카를 떠나 새로 이주한 땅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은 멸종한 고대인들이 약 180만년전에 아프리카를 떠나 이주해서 우리보다 먼저 거기에 와 있었던 것이다.(253, 254 페이지)

 

우리는 꾸준히 이주자로 살았다.(257 페이지) 대륙별 인구집단을 상징하는 독립적인 가지가 달린 나무 이미지는 대륙별 인구집단이 갈라져서 점점 거리가 생기면서 서로 독립적으로 진화를 거쳤다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유전학자들은 이런 분기(分岐)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 오늘날 대륙별 인구집단이 동질적으로 보이는 것은 같은 조상으로부터 오랫동안 계보가 이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주, 차별화, 다시 뒤섞임이라는 지속적 과정의 일시적 결과일뿐이다.(257 페이지) 인류의 조상은 이주했고 만났고 뒤섞였다가 다시 이주했다.

 

린네는 슬기로운 사람을 의미하는 라틴어를 가지고 인류에게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보다 더 적합한 이름은 호모 미그라티오인지도 모른다. 20세기 대부분 린네의 정착설과 다윈의 장거리 확산 이론이 충돌했지만 갈등은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1970년대에 이 충돌을 해소한 생물지리학 이론인 분단분포론이 나왔다.

 

드 케이로스에 의하면 이 이론은 생물학 버전의 관성을 회복시켰다.(273 페이지) 야생의 생명체는 자기 힘으로 대양이나 산맥, 사막 같은 지리적 경계를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생 생명체가 이동한 것은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조판이 움직인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이주를 부정하는 이론이다.

 

분단분포론에 의하면 원숭이가 신세계 종과 구세계 종으로 나뉜 것은 대서양이 열림에 따라 타의에 의해 갈라진 결과다. 하지만 분자생물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 숱한 장거리 이동이 있었다.(286, 287 페이지) 야생생물은 과학자들이 규정한 경계를 상습적으로 넘어서 돌아다닌다.(289 페이지) 그간 과학자들은 동물들이 생리적으로 얼마나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지 과소평가했다.

 

위치 이동은 침략생물학자들이 예측한 규모로 일어나지 않으며 새로운 종의 유입은 생물다양성을 향상시킨다. 변화가 진행될 때마다 움직이는 종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이런 기회가 도래했을 때 이주자들이 왔다. 자연이 언제나 경계를 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300 페이지) 엘턴을 비롯한 생물학자들은 이주자를 자살 성향이 있는 좀비이자 가차 없는 침략자로 일축했으나 이주자의 행동을 제대로 검토해본 적도 없고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깊이 들여다본 적도 없다.

 

이주자들은 태어난 서식지의 익숙한 편안함을 뒤로하고 미지의 장소로 떠난다. 눈 덮인 산을 돌아디니는 늑대에게 왜 어디로 가는지 물어볼 수는 없지만 인간의 이주 열망을 간접적으로 탐구할 수는 있다.(314 페이지) 호모 사피엔스는 이주자의 왕이다. 고고학자 데스몬드 클락은 최초의 이주는 인간이 야생동물을 따라가다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317 페이지)

 

저자는 이주 패턴을 구직의 산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318 페이지) 기후 변화가 아프리카 밖으로의 이동을 추동했을 것이라는 이론도 있다. 저자는 이주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의 시기에 강력해지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319 페이지) 저자는 사막이었다가 거주 가능한 녹색 회랑으로 바뀐 곳을 찾아 이주하는 것을 예로 든다.

 

하와이대학교의 컴퓨터 모델 전문가들이 지구 궤도 변화에 따른 기후 변화가 아프리카를 떠나는 인간 이동의 파동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은 주목할 일이다.(320 페이지) 야생의 생명이 그렇듯 이주가 인간의 몸 안에 암호화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인간의 몸도 주위 환경에 따라 발달방식이 바뀐다. 자궁 안에서의 흔들림과 뒤척임 패턴이 우리의 지문의 고랑과 이랑을 결정한다.(325 페이지)

 

인간의 몸은 고정성보다 유동성이 더 크다. 정적이고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동성이 없는 생명체에게는 환경에 따른 변형 가능성이 진화하지 않는다. 우리의 몸은 변형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329 페이지) 인간의 역사라는 폭넓은 관점에 의하면 우리는 각자가 사는 모든 장소에서 아프리카를 떠나온 이주자다.

 

몇 세대에 걸쳐 꾸준히 그곳에 거주했다는 이유로 토착민과 이주자를 가르는 것은 자의적이다.(335 페이지) 과거에는 한 장소에 붙박힌 채 살았다는 신화가 증발하자 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질문이 등장한다. 사람들이 어째서 이주하는가 묻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주가 어째서 공포를 촉발하는가 묻는 것이다.(363 페이지) 이동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이주는 위기가 아니라 해법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늘 이동을 꿈꾼다.

 

책을 쓰기 위해 생물지리학, 유전학, 인류학, 과학사에 이르는 방대한 분야의 학자들에게서 전문지식을 빌려왔다고 말하는 저자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에서 반이주 과학의 증거를 발굴하려면 깊이 파고들어야 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주를 반대하는 수사(修辭)와 정책이 전면으로 솟구쳐 오르면서 필요했던 증거가 매일같이 뉴스에 등장함으로써 기대가 어긋나 기술적으로는 쓰기가 한결 쉬워졌지만 심리적으로는 무척 힘들었다고 말한다.(383 페이지)

 

실존적 문제, 인류사회학적 성과, 자연과학적 지식들을 적절히 어우러진 '인류, 이주, 생존'은 강한 의지가 반영된 역작이다. 재독할 가치가 있는 책으로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총해 식물의 천이(遷移)에 대해 공부할 동인을 제공받았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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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11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1-09-11 15:13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2021-09-11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1-09-12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