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 서학의 유입과 조선 후기의 지적 변동
김선희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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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에서 말하는 서학은 철학 및 자연과학, 그리고 종교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어떤 지식인도 서양 지식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동서양의 지적 조우는 예수회의 중국 진출에 따른 결과다. 예수회는 1534년 스페인 출신의 퇴역 군인 이냐시오(1491 - 1556. 스페인)가 파리대학에서 만난 동료들과 함께 결성한 가톨릭 수도회를 말한다. 이들은 이전의 수도회들과 다른 점을 보였다.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고 이교도들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으로 교황의 명령에 따라 미지의 동양 세계로 선교를 위한 여행을 떠난 것이다. 마테오 리치(1552 - 1610. 이탈리아), 아담 샬(1591 - 1666..독일) 등의 친숙한 인물이 모두 예수회 소속이었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번역본으로 서학을 접했다.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수년간 중국어를 배운 뒤 중국 경전을 활용해 서양 지식을 번역한 예수회 회원들의 서학서를 통해 서구 지식을 접한 것이다.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실학자들이 반드시 개혁적이거나 반성리학적 혹은 탈주자학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조선 유학자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비판했다고 알려진 정약용은 성리학의 토대인 이기론의 이론적 함의와 그 영향력을 제한하고자 한 것이지 주희의 학문 전체를 반대한 것도 아니고 성리학의 핵심 주제들과 완전히 다른 이론을 전개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20 페이지) 


다산(茶山) 실학을 성리학과의 단절과 대치로 파악하는 시각을 부정한 한형조 교수(1996년 8월 8일 시사저널 수록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펴낸 한형조 교수’)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종교와 철학, 자연학과 수학, 심지어 음악과 미술 등의 다양한 영역이 뒤섞인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학술 세계, 서학 앞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유학(儒學)으로 서학의 세부들을 평가해 수용하든 배척했다.(22 페이지) 당시 천주교를 종교적으로 수용한 사례도 있지만 그조차도 유학을 완전히 떠났다고 하기 어렵다.(25 페이지) 


15세기 말 인도 항로가 개척되면서 열린 대항해 시대에 따라 포르투갈의 주앙 3세는 포르투갈의 동방 무역의 거점이었던 인도 남부에 동행할 선교사를 교황청에 요청했다. 마테오 리치는 만학도였던 이냐시오가 세운 예수회 대학 출신의 인재였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전통의 유학과 신유학을 스콜라 철학, 스토아 철학 등으로 설명했고 기하학, 수학, 천문학 등을 소개했고 지도, 악기, 자명종 등 발달한 서양 문물을 소개했다. 


아담 샬은 중국에서 뛰어난 천문학자로 활약했다. 아담 샬을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서양 신학, 철학, 자연학을 일방적으로 전한 것이 아니라 중국어와 중국 문화에 대한 학습과 이해를 바탕으로 서양 학문을 중국 지식 체계와 결합하고 절충했다.(39 페이지) 하지만 다른 수도회에서 예수회의 이런 방식을 비판하자 교황청은 예수회의 전교(傳敎) 방식을 공식 금지했다. 이에 따라 청나라도 기독교의 활동을 제한했고 교황청은 제사를 금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교황청의 제사 금지 정책을 따르다가 당국에 적발되어 참형을 당했다.(40 페이지)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의 저자로 유명한 분이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전임자인 루지에리가 쓴 천주실록의 한계와 문제 때문이었다.(43 페이지) 마테오 리치는 Deus라는 기독교 신을 중국어 천주로 번역한 뒤 이를 중국 경전에 등장하는 지고존재인 상제(上帝)라 규정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이 상제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면 기독교의 신을 유일한 신으로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46 페이지) 마테오 리치는 성리학이 고대 유학의 유신론적 전통을 끊고 사람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공격했다. 마테오 리치가 꺼내든 상제라는 개념은 예수회 내부에서 문제가 되었다. 아무도 그들의 신이 사제라는 개념으로 고착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제는 결국 천주로 대체되었다. 


아담 샬은 시헌력의 토대가 된 서양 역법서 ‘숭정역서’를 편찬했고 천문 관측과 역법 제정을 주관하는 흠천감(欽天監)의 책임자로 활약했다.(38 페이지) 역법(曆法; Calendar)은 천체의 운행 등을 바탕으로 한 해의 주기적 시기를 밝히는 방법을 말한다. 중국에서 서양 수학과 천문학을 비롯한 자연학적 지식들이 가장 활발하게 번역되던 시기는 강희제(康熙帝; 1654 - 1722, 재위; 1661 - 1722)가 청을 통치하던 17세기였다.(65 페이지) 


참고로 조선 영조와 정조, 청나라 강희제(순치제의 셋째 아들)와 옹정제(강희제의 넷째 아들)와 건륭제(옹정제의 넷째 아들), 프랑스 루이 14세 등을 하나의 틀로 보는 시각도 있음에 유의하자. 조선에서는 18세기인 영조, 정조 때 성공적으로 정치가 이루어지다가 18세기 말부터 개혁에 실패하고, 19세기에는 민란이 발생하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청나라의 훌륭한 황제들이었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재위한 시기가 18세기 초다. 


건륭제 말기부터 사회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18세기 말인 1796년에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고 19세기부터 청나라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럽도 18세기 초까지 전성기를 이루다가 18세기 말부터 혼란에 빠졌다. 태양왕이라는 루이 14세가 활동한 시기가 18세기 초다. 루이 15세가 루이 14세의 치적을 물려받으며 유럽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루이 16세가 통치한 18세기 말에는 혼란이 발생하고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그 이후 유럽에서는 끊임없이 혁명이 일어났다. 


지구 온도가 주요 변수다. 지구 온도는 16세기 말부터 크게 상승하기 시작해 18세기 중반까지 이어졌고 18세기 말에는 하강하기 시작했다. 기온은 수확량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기온이 올라 따뜻해지면 수확량이 늘고 추워지면 아무리 애를 써도 수확량은 떨어진다.(최성락 지음 ‘말하지 않는 세계사’ 참고) 


강희제의 서학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서학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강렬한 반대였다.(65 페이지) 양광선이란 사람이 아담 샬의 시헌력을 가장 집요하게 반대했다. 서양 역법과 선교사들을 신뢰했던 순치제가 사망하고 일곱 살의 강희제가 즉위해 만주족 출신 신하들의 섭정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을 주도하던 오배(鰲拜)가 양광선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아담 샬, 페르비스트(1623 - 1688. 벨기에) 등 흠천감을 주도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투옥되어 고문 받았고 중국인 조력자들은 사형당했다.(70이 넘은 아담 샬은 고문 후유증으로 이듬 해 사망했다.) 


강희제가 오배의 섭정에서 벗어나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강희제는 페르비스트와 양광선에게 각각 책력을 만들어 대결하게 했다. 양광선이 올바른 대답을 하지 못한 반면 페르비스트의 예측은 정확했다. 양광선은 투옥되었고 페르비스트는 흠천감의 책임자가 되었다.(66 페이지) 예수회와 조선의 첫 만남은 조선에서 파견된 사신인 정두원(鄭斗源)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담 샬이 조선 국왕에게 천리경, 자명종, 화포, 화약 등의 서양 문물과 천문 관련 서학서, 지도 등을 선물한 것이다. 


소현세자(1612 - 1645)도 아담 샬을 만났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에 볼모로 잡혀가서였다. 소현세자는 9년의 볼모 생활을 했고 귀국 2개월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칠극(七克)이란 책이 있다. 마테오 리치와 함께 활약했던 디에고 데 판토하가 쓴 윤리서이다.(칠극이란 교만, 질투, 탐욕, 분노, 식탐, 음욕, 나태 등 기독교에서 모든 죄의 뿌리로 여기는 일곱 가지 죄를 말한다.) 이익, 이벽, 정약용 ,윤지충 등이 이 책을 읽었다. 이익은 이 책의 핵심을 유교의 수양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서학을 이념이나 사변적 원리로서가 아닌 실질적이고 실용적으로 접근했다. 


다만 이익은 천주교를 황당무계한 종교로 보았다. 천당과 지옥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칠정산내편‘,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 등을 저술한 김담(金淡; 1416 - 1464)이 주도한 세종시대의 조선 과학(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사대부 출신 신하들의 권력이 국왕을 능가하는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가 되면서 붕당정치 속에서 권력 투쟁이 심화됨으로써 눈부신 과학적 성취를 계승하지 못했다. 


다행히 영, 정조 시대에 부흥의 노력이 기울어졌다. 서학중원설(西學中原說)이란 것이 있다. 서학의 기원이 본래 중국에 있었다는 설이다. 조선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서명응, 홍양호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정조의 스승 서명응(서유구의 할아버지)은 자신의 지적 자산을 모두 동원해 서양 천문학적 지식들이 중국 전통의 천문 역법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92 페이지) 조선 지식인들은 비교적 거부감 없이 서양 천문학을 받아들였다. 서양인들을 직접 대면하는 일 없이 책이라는 중립적 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들의 학술을 수용했기 때문이다.(94 페이지) 


남인 계열의 학술적 경향 안에서 성호 이익은 평생 퇴계를 학문과 삶의 지향으로 삼아 존숭(尊崇)했다. 부친의 유배지에서 태어나 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큰 형 이잠(李潛)이 장살(杖殺) 당하는 비극을 겪은 남인(南人) 이익은 평생 이황을 존숭(尊崇)했지만 이황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서학을 연구했다. 이익은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서 귀신을 지나치게 믿는다는 점이 문제일뿐 서양 선비들의 학문 전체를 폐기할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익은 천주, 천당지옥설 등 현실 세계를 초과하는 종교적 측면들을 제외한다면 서학을 학술적 차원으로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103 페이지) 이익에게 기술 진보와 활용이 중요했을 뿐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단(異端)의 글이라도 옳으면 취할 뿐이라 말했다. 그는 유학과는 다르지만 마테오 리치의 학문적 수준과 도덕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를 성인이라 불렀다. 


성호는 조선에서 도통의 중심인 퇴계를 평생 흠모하며 퇴계의 철학과 삶을 배우기를 바랐지만 퇴계를 떠나지 않고도 얼마든지 외부의 지적 자원을 활용해 유학을 넓히고 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106 페이지) 이익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뇌주설(腦主說) 즉 뇌가 기억의 주체임을 주장하는 학설을 받아들였다. 이익은 인간의 마음 즉 인식과 감정 같은 정신적 작용을 리(理)나 성(性)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성리학과 다른 경로를 밟았다.(108, 109 페이지) 


이익은 천주실의에 등장하는 세 가지 영혼(식물의 혼인 ’생혼; 生魂’, 동물의 혼인 ‘각혼; 覺魂‘, 인간의 혼인 ’영혼; 靈魂’)을 생장, 지각, 의리의 마음으로 규정했다. 식물은 생혼만 있고 동물은 생혼과 각혼이 있고 인간은 생혼, 각혼, 영혼이 있다. 이익은 다른 유학자들과 달리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잘라내고 자신의 실용적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선택과 운용의 능력을 자신했다.(123 페이지) 이익은 세상을 구제하려 한다는 예수회 회원들의 의도와 진심을 믿었다. 


이익의 서학 연구는 학파를 셋으로 분기시켰다. 친서파로 분류되는 녹암 권철신과 이가환, 이벽, 정약용, 이승훈 계열, 중도 우파 성향을 보이는 정산 이병휴 계열, 적통으로 인정받는 안정복, 신후담 계열이다. 정조는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을 보고 받았으나 중인인 김범우만 귀양보냈다. 정조는 유학이 바로 서면 사교(邪敎)는 자연히 없어질 것이라 낙관했다. 하지만 유생들 사이에서는 척사(斥邪)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안정복 등은 남인 전체를 향한 외부의 공격과 의심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중심으로 회귀하려고 한 것이리라. 이벽, 정약용 등은 자연학이나 수학, 기술의 측면이 아니라 종교적 혹은 철학적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학 - 천주학을 신앙으로 수용하거나 철학적 관심으로 연구했다. 젊은 시절 정약용은 그의 삶에서 정조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인물을 만난다. 그에게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난 문을 열어 준 이벽이다. 서학서를 통해 독자적으로 서학을 연구했던 이벽은 1783년 이승훈이 서장관으로 파견된 아버지 이동욱울 따라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서양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도록 권유한다.(154 페이지) 


이승훈은 북경에서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조선 최초였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이벽은 주변 남인들에게 서교에 관한 자신의 공부와 체험을 전하며 주도적으로 서학서에 대한 토론을 이끈 것으로 보인다.(156, 157 페이지) 이벽은 남인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권철신에게 적극적으로 입교를 권했다. 이 과정에서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이 먼저 이벽을 따라 천주교로 향했다. 


정약용은 23세였던 1784년 여름 정조가 초계문신에게 내준 중용에 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이벽을 찾았다. 이벽과의 만남은 처음부터 천주실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중용을 새롭게 해석할 학술적 자원으로 서학이라는 새로운 지식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벽은 태극이 만 가지 이치의 근본이 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벽은 태극은 감괘와 리괘 즉 음과 양의 결합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벽의 주장은 마테오 리치의 주장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테오 리치에게 태극은 기독교의 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반드시 반박해야 하는 개념이었다.(159 페이지) 


이벽의 논리는 정약용에게 이어진다. 마테오 리치는 리(理)에 인격성이 없음을 집중 공격했다. 정약용은 기는 스스로 존재하지만 리는 기에 의지한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리에는 인격성이 없기에 만물을 주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리를 부정하고 배제한 자리에 고대 유학에 등장하는 상제라는 개념을 내세웠다.(162 페이지) 정약용은 인격성이 있는 상제는 리와 달리 인간을 도덕적으로 각성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점은 상제가 고대 유학의 개념이란 점이다. 물론 정약용이 내세운 상제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각성시키는 존재이지 인간에게 경배와 신앙을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정약용은 인간에 대한 기존 논의로는 사회의 타락과 혼돈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65 페이지) 정약용은 성(性; 개별적인 것들의 본성)이 리(理)가 아니라(성즉리의 부정) 기호(嗜好)로 보았다. 정약용은 성을 리로, 심을 기로 규정하는 이론을 부정했다. 


정약용은 기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눈앞의 쾌락을 따르는 것과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다. 정약용은 리를 사변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일종의 도덕적 방기라고 보았다. 정약용은 인간의 대체는 성이 아니라 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맹자의 성선설을 수용한다. 정약용은 인간에게 선을 향하는 도덕적 본성이 내재되어 있음에도 그 실천에 실패하는 것은 객관적 상황 즉 세(勢)가 인간을 방해하기 때문이라 보고 그를 위해 스스로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인 자주지권을 제안했다. 


정약용은 인간이 도덕적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도심과 인심의 싸움에서 도심이 이기기 때문으로 여기서 스스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인 자주지권이 개입한다고 보았다. 이벽과 정약용의 관심은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그래서 신의 인격과 신에 대한 숭배로 나아가는 서학과 갈라질 수밖에 없다.(179 페이지) 몇몇 유학자들이 천문학을 연구하고 역법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연학이나 기술에 대한 관점이라기보다 성리학의 이론 체계 위에서 더욱 사변적이고 이론적으로 개별 지식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185 페이지) 


이익을 비롯한 17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책으로 서양 학문을 접했다면 18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연행(燕行)을 통해 서양인을 직접 대면했다. 18세기 선비들이 주장한 북학에 서학도 포함되었다. 홍대용은 천원지방설을 비판했다. 만물에 둥근 것은 있으나 모난 것은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홍대용, 이덕무, 박지원 등에게 중요한 것은 실생활에 유용한 기술들이었지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가 아니었다. 연행으로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천주당(天主堂) 방문이었다.(203 페이지)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천주당은 조선인들이 경험한 문화적 충돌과 교류의 중심 역할을 했다. 남당, 동당, 북당, 서당 등이다. 마테오 리치가 지은 남당은 북경 내 천주관 중 중심 역할을 했고 예수회가 자리잡던 곳이자 홍대용이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다. 서학 - 천주학에 대한 갈등과 의심이 증폭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충격을 입은 사람들이 정약용과 그의 일가들이었다. 조선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정약용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었고 조선에서 천주교도를 보호하고 천주교를 확산시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조선을 공격하라는 내용의 밀서를 중국 천주교회측에 보내다가 적발되어 조선을 큰 충격에 빠지게 한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 사위였다. 천주교를 접하고 제사를 폐하고 위패를 불태워 참수당한 진산(지금의 충청도 지역인 전라도 진산) 사건의 주인공 윤지충은 외가쪽 6촌이었다.(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종사촌이었다.) 진산 사건으로 남인에 대한 노론의 견제가 공식화되었다. 


정조가 승하하자 정국이 요동쳤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이익 문하의 남인 소장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승훈, 정약종 등은 참수당했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 당했고 정약용은 지금의 포항 지역인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전남 강진으로 옮겨갔다.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정약용의 앞길이 막힌 것은 서학 자체의 위험성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견제 때문이다. 조선에 유학에 위협이 될 실질적 이단은 없었다. 당연히 서학은 전래 초기부터 이단으로 낙인 찍히지 않았다. 


정학(正學)이 밝으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그친다는 생각을 가졌던 정조에게 서학 - 천주학에 접촉한 남인들을 징계하는 일이나 소품체의 패관잡기를 막고 순수한 고문을 회복한다는 문체반정이나 궁극적으로 동일한 목적과 명분의 일이었다.(219 페이지) 더 나아가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정조에게는 남인의 인재들이 필요했다. 서학 - 천주학이 정치적 갈등의 핵이 되기 이전에 정조는 노론으로 기울어진 정국의 균형을 잡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학문적 자질을 정국에 활용하기 위해 남인의 소장학자였던 이가환과 정약용 같은 인재를 등용해 신임했다. 


정조와 남인 소장학자들의 매개가 된 것은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었다.(220 페이지) 양명학이나 불교는 유학의 입장에서 이단이었지만 그런 학문을 한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거나 사형을 당한 경우는 없었다.(222 페이지) 채제공은 서학을 불교 서적과 대동소이하다고 보며 서학을 한다는 것이 정치적 탄압의 명분이 될 것을 우려했다. 채제공도 정학이 바로 서면 서학은 소멸할 것이라 보았다. 


당시 백성들이 급격히 천주교로 향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세도 정치 등 조선 내정의 실패와 사회적 불안에 있었지만 상층부는 이런 자신들의 모순을 보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일부 지식인들의 사특한 행위에 모든 문제의 원인을 돌렸다.(229 페이지) ‘양아치새끼들’이란 시를 쓴 윤기(1741 - 1826)는 천주가 상제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를 인격적 존재로 추앙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보았다.(235 페이지) 


앞에서 17세기 지식인들과 18세기 지식인들의 차이를 설명했지만 18세기와 19세기 지식인들의 차이도 중요하게 거론되어야 하리라. 19세기 지식인들은 서학이 아니라 서양을 대면해야 했다.(243 페이지) 그들이 경험한 것은 중국과 조선을 옥죄며 다가오는 강력한 타자, 전쟁에서 중국을 압도한 막강한 무력의 소유자, 조선 앞바다에서 만날 수 있는 목전의 힘으로서의 서양이었다.(250 페이지) 


저자는 조선 지식인들 중 일부가 서학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이들의 사상적 지향을 쉽게 근대성이라는 틀에 넣고 평가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라 말한다.(275 페이지) 정약용의 경우 상당히 근대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구상하고 기획한 세계는 현재의 관점에서 매우 중세적인 왕도 국가 그 자체였다. 이들은 모호하거나 미완성인 자기 사유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낯선 사유에 자극을 받았고 이를 자기 전통에 비추어 보았을 것이다.(27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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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1-03-26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저자의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도 정말 좋습니다 ㅎㅎ

벤투의스케치북 2021-03-26 11:54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읽어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