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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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청()과 명() 사이에서 현명한 외교를 펼치지 못했던 인조 정권의 실정(失政)을 거울 삼아 반면교사의 지혜를 얻어야 하는 시기다. 최근 최명길 평전을 쓴 한명기 교수의 책은 그런 지혜를 깨닫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조선사 그 가운데 17세기는 지난 216일 남한산성 해설 후 급격히 친근해진 느낌이 든다.

 

병자호란 이전의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광해군과 그를 몰아내고 왕이 된 그의 조카 능양군(인조)의 악연 등 배경 설명이 충분한 책이다. 물론 전황(戰況)도 상세하다. 인조는 반정 후 광해군대의 조선을 금수(禽獸)의 땅으로 규정했다.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언급되어야 마땅하다.

 

요동 수복을 기치로 내세우며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진을 친 장수다. 배후에서 후금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여서 후금은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광해군은 모문룡을 화근으로 여겼다. 후금을 자극해 역공을 초래하는 모문룡 부대에 대한 근심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모문룡은 반색했다.

 

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하고 명을 배신했기에 의거(義擧)했다는 반정 세력들의 주장은 후금과의 대결로 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명은 인조 책봉 카드로 조선을 길들이려 했다. 정당성 없는 정권에 책봉이라는 은혜를 베풀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생긴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봉전지은(封典之恩)이 추가된 것이다. 제후국의 임금으로 책봉해준 은혜를 의미한다.

 

명이 인조를 책봉하기 전까지 인조는 서조선국사(署朝鮮國事)로 불렸다. 임시로 조선의 국사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선으로서는 모문룡을 도와 후금과 싸워야 했다. 기울어가는 명의 궤도 속으로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반정 논공행상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이 일으킨 난은 몇 가지 점에서 기록을 세웠다. 조선에서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이괄은 경복궁 옛 터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인조의 숙부 흥안군(선조의 열 번째 아들)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공주까지 피신했던 인조는 반란이 진압된 후 서울로 돌아와 백성들이 불지른 창경궁 대신 광해군이 막대한 재정을 들여 신축한 경덕궁(후에 경희궁으로 불린)으로 들어갔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이후 역모 사건이 터졌다. 북관대첩의 주인공 정문부(鄭文孚)가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이귀는 인조에 대하 호위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어영군을 새로 창설했다. 이서(李曙)는 총융군(경기지역 병력)을 만들었다. 이서 등은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유사시의 국왕 피신처이자 전략적 거점으로 정비하려고 시도했다. 즉 적군이 침입하면 국왕은 훈련도감과 어영군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세자는 총융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증원군을 받아들여 항전한다는 계획이었다.

 

반정 세력들은 도성과 수도권 방어에만 치중하고 상대적으로 적의 주요 침입로인 평안도와 황해도 방어는 몹시 소홀히 했다. 정권 안보에만 집중하고 국가 안보는 등한시 한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대비해 운영하던 해방(海防)을 중단하면서까지 명의 책봉사 접대에 매달렸다.

 

인조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세 가지 난정을 바로잡겠다며 등장했다. 난정이란 폐모살제, 궁궐 건설 등 과도한 토목공사로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 오랑캐 후금과 화친하여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한 것 등이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민심은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했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은 엄청난 은() 징색(徵索)을 했고 가도의 모문룡 진영은 항상적인 양곡 수탈을 했다. 인조 정권은 친명은 실천했지만 배금은 쉽게 실천하지 못하고 현상유지책을 시행했다. 이 상황에서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모문룡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모문룡 부대를 요즘식으로 말하면 주한명군(駐韓明軍)이라 할 수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막강한 후금과 싸워 요동을 수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명은 가도를 조선과 후금을 견제하는 전략적 거점으로 보았다. 모문룡 부대 즉 모병(毛兵)은 조선이 명을 배반하거나 후금으로 기울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수단이었다. 모문룡은 요동 수복을 표방했지만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모문룡은 명 조정의 실력자 환관 위충현의 비호를 받고 명 황제를 속이고 조선에 온갖 민폐를 끼쳤다. 문제는 명 조정으로부터 모문룡을 감사(監司)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거짓으로 후금을 공격하는 시늉을 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에 큰 민폐를 끼쳤고 후금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인조는 그런 모문룡에게 쓴소리를 하지 못했다.

 

천계 연간 극심한 당쟁과 환관들의 발호 때문에 명은 무너져갔다. 16193월 명군은 후금을 공격했지만 역습에 휘말려 참패했다. 명청 교체의 분수령이 된 이 전투를 사르후 전투라고 한다. 이 가운데 명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었던 광해군이 파견한 강홍립 휘하의 병력이 패한 전투를 심하(深河) 전투라고 한다.

 

15천 명에 이르는 강홍립 부대는 전투의 대세와 무관한 병력이었다. 영원성 원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누루하치가 죽었다. 161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금(후금)으로 칭하고 칸이 되었다. 훗날 태종이 되어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에게 치욕적 항복을 받아낸 인물이다. 1627년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경제 문제 해결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명 본토를 치기 위해 서진(西進)하려는 데 방해가 되는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누르하치의 죽음으로 추대 형식으로 칸의 위치에 오른 홍타이지는 지위에 걸맞은 권위와 권력을 보여주려 했다. 정묘호란을, 투항한 강홍립이 오랑캐를 부추겨 일으킨 전쟁으로 본 송시열의 견해는 잘못이다.

 

후금이 투항자의 사주(使嗾)에 따라 동병(動兵) 여부를 결정할 만큼 간단한 나라인가? 서인은 정묘호란의 근원적 책임을 광해군과 강홍립에게 돌리고 광해군 정권을 후금과 같은 부류로 매도함으로써 자신들이 처한 명분적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홍은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이 함락되기 직전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장렬히 순국했다.

 

그는 죽기 직전 지휘관이 되어 습진(習陣: 진 치는 훈련)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는 말을 했다. 정권안보를 위해 기찰(譏察)에 혈안이 되었던 반정 세력들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인조는 백성들에게 사과성명을 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터져 항복하고 나서도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잃어버린 10년인 셈이다.

 

정묘호란 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괄의 난이 터지자 공주로 피신했던 것처럼. 후금이 화의(和議)를 제의했다.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후금이 조선과 명의 관계를 용인해준다면 화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자고 한 척화파들의 의견이 있었다.

 

실력을 갖추지도 못하고 비분강개만 하는 모습이라니...어떻든 두 나라는 화의했다. 이괄의 난이 남긴 후유증 등 내정의 난제들을 추스르기에도 여유가 없었던 조선과 배후의 원숭환(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를 타격한)의 위협을 고려하면서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실익을 얻어내는 것이 절실했던 후금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후금은 형의 나라, 조선은 동생의 나라가 되었다.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다른 섬으로 피해 목숨을 보전했다. 모문룡에게 후금군의 머리를 베어 바친 사람들(평안도 지역의 의병, 백성들)이 있었지만 조선 사람들의 수급(首級; 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을 적과 싸워 얻은 것처럼 속여 바친 자들도 있었다.

 

모문룡은 이를 자신의 군공(軍功)이라며 명 조정에 천연덕스럽게 보고했다. 반정 세력들이 오랑캐와 화약을 맺음으로써 반정 명분을 스스로 크게 훼손했다고 찜찜해 하던 차에 명은 후금과의 화의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화의 이후 곳곳에서 역모가 일어났다. 삼레의 유생 이기안은 능양군을 믿을 수 없다. 그가 오래 갈 수 있을까?”란 말을 하기도 했다. 나라는 총체적으로 난국(難局)이었다.

 

인조는 오랑캐 토벌 의지는 대단했지만 구체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1630년 가평군수 유백증은 신은 광해(1575 - 1641)가 죽기 전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란 직격탄을 날렸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극도로 혐오했다. 모문룡은 원숭환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참수(斬首)당한 것이다. 원숭환은 어제 그대를 죽인 것은 조정의 대법을 밝힌 것이고 오늘 그대를 제사함은 동료의 사정(私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뿌렸다.

 

황경원은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단한 은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해준 이여송에 못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원숭환은 홍타이지의 계략에 말려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후금군은 광거문 전투에서 원숭환에게 패했지만 마방태감 양춘과 왕성덕을 포로로 잡았다. 이 둘을 감금해 놓은 방 바로 옆에서 홍타이지의 부하 고홍중과 포승선이 밀담을 나누었다. 원숭환이 이미 홍타이지와 몰래 약속하여 북경을 탈취하기로 했고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의도적 연출이었다. 고홍중과 포승선은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고 양춘과 왕성덕을 풀어주었다. 양춘과 왕성덕 두 환관은 부리나케 자금성으로 달려가 숭정제에게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옆방에서 들은 사실을 고했다. 원숭환이 오랑캐를 사주하여 북경으로 끌어들였고 원숭환이 병력을 이끌고 북경 옆 통주에 이를 때까지 후금군과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19살의 숭정제는 대국을 보는 눈이 없어 홍타이지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원숭환은 책형(磔刑)을 당했다. 이는 동림당과 엄당의 격렬한 상쟁과 복수가 배경에 깔린 사건이다. 원숭환이 처형당한 뒤 명은 자멸의 길로 확실히 들어섰다. 원숭환을 제거하는 반간계를 구상하고 실행한 주체들은 이신(貳身)들이었다. 명에서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하여 벼슬했던 한족 출신 신료들이다.

 

홍타이지는 이신들을 우대하고 중용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제도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활용했다. 이신들은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신들까지 포용한 홍타이지는 탁월했고 사람과 대국을 볼 줄 몰랐던 숭정제는 어리석었다. 지도자의 국량(局量) 차이가 후금과 명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다.

 

원숭환은 모문령을 제거한 뒤 조선에 편지를 보내 모문룡 처단의 전말을 설명하고 모문룡과 부하들이 조선에 끼친 커다란 피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병력을 동원해 같이 후금과 싸우자고 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조선에 간절히 바란 것은 무역이었다. 명이 자신들에게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아우국 조선과의 교역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과의 교역에 소극적이었다. 후금이 조선에 요구한 물자 가운데 서적들도 있었다. 조선은 후금에 사서를 비롯 춘추, 주역, 예기, 통감, 사략 등을 넘겨주었다. 당시 후금은 홍타이지가 한인 신료들을 적극적으로 임용하고 문치에 입각한 국가 체제를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인조는 원종 추숭 문제로 10년을 싸웠다. 국력을 갉아먹은 사건이었다. 1633년 모문룡 휘하에 있던 공경(孔耿: 공유덕, 경중명)이 전함과 수군을 이끌고 후금으로 귀순하자 조선은 그들을 추격하던 명군에게 군량과 군수 물자를 제공하고 병력을 압록강 부근으로 파견했다. 163612월 홍타이지는 조선이 공경의 귀순을 저지하려고 후금과 적대한 것을 병자호란 도발의 주요 명분으로 제시했다.

 

1619년 명을 도와 후금을 공격한 것(심하전투 참전)이 후금에 정묘호란을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로부터 조선은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같은 일을 되풀이한 것이다. 조선은 후금이 보유한 수군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후금은 1631년 보낸 국서에서 우리가 쳐들어가면 너희는 보나마나 섬으로 도망칠 것이라 조롱했다.

 

후금은 공경의 귀순을 계기로 전함과 수군까지 갖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는 원종의 부묘(祔廟)를 밀어붙이느라 오버했다. 강학년은 인조에게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고 비난했다. 이괄의 난 때 백성들 가운데 서울을 떠나는 인조의 가마를 뒤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로 민심 이반을 통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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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20-03-03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꽤 재미있는 책이죠. 2권을 기다리게 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0-03-03 20:25   좋아요 0 | URL
아.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