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適者) 생존이 아니라 적소(適所) 생존이다.“... 환경생태학자 박지형의 스피노자의 거미의 결론이다. 이 말을 듣고 내가 생각한 것은 풍수다. 잘 모르지만 풍수는 명당을 찾는 풍수가 있고 아픈 몸에 뜸을 뜨거나 침을 놓듯 명당이 아닌 곳에 숲을 조성하거나 절을 세워 좋은 땅을 만드는 비보(裨補) 풍수가 있다.

 

명당을 찾는 풍수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산송(山訟)이 빈번했던 조선이 대표적이다.(산송은 분묘: 墳墓나 그 주변의 산지를 놓고 벌이는 소송을 말한다.) 조상을 좋은 곳에 모셔 복을 받으려는 후손들 사이에서 좋은 묘자리를 놓고 다툼이 심했다. 영조는 요즘 상소의 십중팔구는 산송이라는 탄식을 했을 정도다.

 

좋은 묘자리에 대한 욕심은 사대부들과 일반 백성들 뿐 아니라 왕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할아버지인 세종을 좋은 자리로 천장(遷葬)하기 위해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큰아들을 불러 묘자리를 양보하라고 우회적으로 압력을 가한 예종(睿宗)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박지형은 서로 다른 부리를 가지고 갈라파고스 섬에 공존하는 여러 종의 핀치 새들, 각기 다른 계절에 꽃을 피우며 어울려 사는 식물들을 공존의 예로 제시한다. 박지형은 생태학이 생물과 환경에 대한 탐구라면 스피노자는 그런 생태적 관계를 제대로 인식한 뛰어난 생태학자라고 말한다.

 

박지형은 들뢰즈가 스피노자가 파리를 잡아먹는 거미를 보며 죽음이라는 환원 불가능한 외재성에 대해 사색했을 거라 추측했다고 말한다.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이를 죽이게 되지만, 사는 동안에 포식자와 피식자 간에 어떤 억압적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지영은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언급한 거미에 대해 설명한다. 들뢰즈는 거미가 가장 철학적인 동물이라고 말했다. 들뢰즈에 의하면 우리가 발견해야 할 진실은 오로지 비자발적으로만 우리에게 찾아온다.

 

우리는 거미처럼 사유해야만 한다. 아무것도 보지도 자각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자처럼, 우리가 발견해야 할 진실에 대해 아무것도 미리 알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계획을 세울 수도 없는 자처럼, 그리하여 사소하게 던져진 기호를 유일한 단서로 삼아 온몸을 던져 해독(解讀)해야만 하는 자처럼, 스파이처럼, 경찰처럼, 질투에 빠진 연인처럼, 미친 사람처럼...그러한 자의 신체를 기관 없는 신체라 부른 것이다.(신지영 지음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5 7 페이지)

 

내게 생태학은 낯설지 않다. 아니 낯설지 않은 정도여서는 안 되고 정통해야 하는 학문이다. 신승철은 스피노자가 거머리나 벌레가 서로 엉켜 싸우는 장면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한다. 동물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지금 여기의 무의식 밖에 없다. 신승철은 스피노자는 어떤 점에서 역사의 흐름과 같은 장기기억이 아닌 동물과 같은 단기 기억을 가진 존재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해법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의식이 욕망과 사랑의 흐름을 타고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가가 더 중요하기에 스피노자의 구도에서는 역사적 무의식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역사적 무의식은 욕망의 방향성이기 때문이다.(’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88, 89 페이지) 신승철은 근대의 사상에 기반을 둔 지구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인간이든 모두가 고통의 질서를 지나 치료의 수술대에 올라가 있다고 말한다.(‘에코소피’ 317 페이지)

 

습지 해설사 수업(受業)을 앞두고 있는 나는 지질학의 고위평탄면과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에 나오는 고원(高原; plateau)을 하나로 꿰는 작업을 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다. 먼저 생태학의 일선에 선 책들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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