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 인류의 본질과 기원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13
칼 세이건, 앤 드루얀 지음, 김동광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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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작가 알렉스 헤일리가 1976년 발표한 <뿌리 Roots:The Saga of American Family>는 당시 미국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졌습니다. 아프리카에 살고 있던 헤일리의 선조는 노예상인에게 붙들려 신대륙으로 끌려오는 동안 그리고 정착하기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삶을 살아왔다고 하는데, 헤일리가 외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선조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가계를 거꾸로 뒤쫓아 정리한 <뿌리>는 훌륭한 혈통학적 연구보고서입니다. 우리나라는 족보라는 기록문서를 통해서 뿌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민자로 구성된 미국사회에서 가족의 뿌리에 대한 기록을 유지하는 집안은 그리 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먼지 냄새가 날 것 같은 족보와 가계의 뿌리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생뚱맞아 보일 것 있습니다만 최근에 크게 주목받고 있는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보니 불과 얼마 전에 다윈의 제안으로 인류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던 진화론이 발전해온 발자취를 뒤쫓은 최재천교수님의 <다윈지능>을 소개한 바도 있었습니다.


최재천교수님은 ‘진화론, 그 간결미’라고 제목을 붙인 첫 장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에 나온 “그처럼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가장 화려한 수많은 모습의 생명들이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니”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진화론의 매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다양한 지구상의 생명체가 공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진화론의 핵심은 다양한 영역의 생명과학이 발전해오면서 발견된 증거들에 의하여 그 이론적 뿌리가 굳건해져왔을 뿐 아니라, 생물학의 영역을 넘어서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심리학 법학 등의 인문 사회 과학 분야는 물론 음악, 미술 등의 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에른스 마이어교수가 “진화를 이해하지 않고는 이 신비로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진화는 이 세상을 설명하는 가장 포괄적인 원리다.”라고 말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화론이 발표된 이후의 발전과정을 쉽게 풀어 쓴 <다윈 지능>을 통해서 진화론의 얼개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오늘 소개하는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이 쓴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에서는 놀랍게도 우주의 탄생으로부터 현생 인류에 이르는 과정을 뒤쫓고 있습니다. 직계부모 이전 세대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은 서구사회의 전통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들은 한국에서는 수 천 년에 걸쳐 규범으로 작용해온 조상숭배라는 개념이 서양에는 없었다는 점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지구 상에 현존하는 생물체에 담긴 생명의 성스러운 메시지는 우리의 조상이 쓴 것이라는 사실이 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조상에 대한 존경에 새로운 차원을 열 수 있게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프롤로그에서 “모든 것을 압도하는 광대한 암흑이 깔려 있고, 여기저기 희미한 빛의 점들이 흩어져 있다. 그 빛의 점에 가까이 다가가면 각각의 점은 핵융합의 불길로 타오르면서 주위의 협소한 공간을 데우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항성임을 알 수 있다.”라는 설명으로 태초에 우주가 시작되던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는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왜 다른 과정을 거쳐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갖지 않았는가? 인간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등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선조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후손에 전하게 된 것은 지구가 생성된 이후의 시간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면 그야말로 눈깜박할 사이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주와 태양계 그리고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 위에 생명체가 나타서 현생인류에 이르기까지의 유구한 세월을 복원하는 일은 인간이 능력 밖의 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한한 힘을 가진 조물주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서 축적되는 지식을 토대로 지구에서 흐른 시간의 흐름을 뒤쫓아 추론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생명체의 유전체지도를 해석하게 됨에 따라서 유전자에 새겨진 진화의 역사를 뒤쫓을 수 있게 됨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생물종을 분류하는 작업을 통하여 세워졌던 진화론의 실체가 분명해지게 된 것입니다.


저자들은 천문학을 비롯하여 물리학, 분자 생물학, 진화 생물학, 진화 심리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오랜 세월 쌓아올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현생인류에 이르기까지 우주와 지구 상에서 일어난 일을 쫓고 있습니다. 원시지구의 스프 속에서 무기원소들이 우연히 서로 연결되어 유기분자가 되고 그 유기분자들이 결합하여 자기 복제가 가능한 물질로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연과 세월이 필요했을까 생각해보면 오늘날 내가 존재하고 있음에 감사해야 할 것인데, 이런 과정이 정말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필연이었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으니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난감하다 하겠습니다.


1장 “우주 공간 속 지구라는 행성에서”이라는 제목에서부터 21장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진화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하나하나 짚어 인류가 어떻게 현재까지 오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물의 존재이유는 자신의 복제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함인데, 미생물처럼 간단하게 복제해버리면 끝날 일을 양성(兩性)으로 구분되어, 섹스와 임신이라는 복잡한 과정이 진화의 틀에 들어온 이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본질은 무엇인지, 폭력과 강간 같은 인류의 공격성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집단 내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화론 이전에는 인류가 모든 지구 생명체들 가운데 최고의 지위에 위치하여 군림하는 ‘만물의 영장’이 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생명체와 지구라는 제한된 삶의 공간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나누어 쓰는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고생대 페름기가 끝날 무렵인 2억 4500만년 전, 지표상에서 벌어진 격변은 지구 상에 존재하던 생물종의 95%가 절멸하는 대재앙이었다고 합니다. 페름기 말에 자손을 남길 수 있는 동물은 불과 25종이었다는데 그 가운데 10종이 현존하는 척추동물의 98%에 해당하는 4만종의 동물의 선조라고 합니다. 그런 혹독한 시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와 같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물종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쏟아내는 유해물질로 인하여 지구가 병들어가고 있고 하루에도 적지 않은 생물종이 사라지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만, 페름기 이후에 새로 등장하는 생물종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들은 마지막 장에서 과거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극적인 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30억년 전 생명체들은 내해의 색을 변화시켰고, 20억년 전에는 대기의 조성을, 10억년 전에는 기후와 기상을, 3억년 전에는 토양의 지질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기술문명의 발전으로 인하여 수많은 생물종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고 어쩌면 미래에 인류 스스로를 파괴시키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닐 것입니다. 지구라는 무대에서 벼락부자가 된 생물종이 무대장치를 바꾸고 다른 종을 멸망시키다가 종국에는 스스로도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는 일이 반복되어왔고, 인간도 같은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인간을 대신할 우세종이 등장하게 되겠지요?


저자들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지구 생명계의 일원에 불과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인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뿌리를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최재천교수님의 <다윈 지능>에서 2% 아쉬웠던 부분들까지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무성생식으로 종족을 늘려가던 생명체가 양성으로 나뉘는 과정과 그 이유를 예로 들면, <다윈 지능>에서는 다소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예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세이건과 드루얀은 여전히 과학자의 시각으로 설명하면서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저자들은 과학이 인류의 과거에 대한 수수께끼와 우주의 성질을 밝히려 노력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 후손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살필 수도 있을 것이란 희망을 담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조의 뿌리를 찾고 그들을 기리는 이유는 우리의 오늘이 있게 해준데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후손에게도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남기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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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3-26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4821
 
과학을 성찰하다 - 현대 과학의 새로운 지평
임경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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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를 둘러싸고 광우병의 위험성이 다시 문제가 되었습니다. 2000년 유럽에서 육골분이 수입되었다고 해서 일었던 1차 광우병파동과는 진행과정 그리고 사회적 파장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국민을 혼란스럽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이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는 같은 자료를 두고서도 다른 해석을 내놓기 일쑤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과학은 실험자료 등을 바탕으로 이론을 검증하기 때문에 실증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상반된 주장을 하는 전문가들을 보면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과학을 성찰’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 같습니다. <과학을 성찰하다>는 과학사를 연구하는 포항공대의 임경순교수님이 현대과학의 흐름을 큰 틀에서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쓴 책입니다.

 

앞서 언급한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에 대한 회의는 20세기 중반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바닥에는 과학의 내용이나 방향에 사회, 문화적 측면이 개입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리게 되면서 일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학문 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서로 융합하여 시너지를 꾀하게 된 것도 이런 경향을 부채질하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생명현상과 같은 복합적인 현상을 다루면서 국소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과학기술이 부상하게 되면서 특정분야가 주도하던 전통적 과학관이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하여 “과학적 지식이란 단순히 객관적 지식의 축적으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내용이나 방향에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측면과 같은 비합리적 요소도 개입할 수 있으며, 과학은 ‘패러다임 이동’을 통해 혁명적으로 변화한다.(21쪽)”고 주장한 것이 변화의 물꼬를 텄다고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과학은 그 뿌리를 철학에 두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주의 철학자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변화하지 않는 존재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불변의 진리가 바로 오늘날 과학이 추구하는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근대과학은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 점차 세분화되면서(예를 들면, 수학, 물리학, 천문학 등)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고, 특히 현대에 들어서는 세분화되는 경향이 심해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던 경향은 20세기말 과학의 영역 안에서부터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과학의 경계를 넘어서 통합적 사고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수학적으로 풀어보면 미분화되던 과학이 어느 순간 적분화를 통하여 전체로 아우르려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과학의 이러한 경향을 연구하기 위하여 태동한 학문이 과학기술학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과학기술학은 과학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성장한 분야이며, 과학사, 과학 철학, 과학사회학 분야의 연구가 밑거름이 되었다.(34쪽)”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학은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사안에 대중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방법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책표지를 열면, “미래를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라는 헌정사를 적어 놓은 것처럼, 저자는 근대과학의 흐름을 큰 틀에서 볼 수 있도록 도움이 되기를 희망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논의 대상을 크게 4개의 분야로 나누고 있습니다. ‘20세기 과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하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1부 「현대 과학의 여명」에서는 현대 과학의 흐름을 바꾼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 현대 우주론, 생명 과학 등의 분야에서 성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신, 전화, 텔레비전, 나일론, 컴퓨터와 같이 20세기 인간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발명품에 대한 이야기는 2부 「과학 기술과 산업」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3부 「과학 기술은 국가를 등에 업고」에서는 국가의 정책과 과학 기술이 결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과학계의 변방에 머물던 독일이나 미국이 오늘날 과학강국으로 올라서게 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부의 마지막에 둔 ‘노벨상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노벨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경쟁과 암투를 적고 있는데, 노벨상을 염원하는 우리나라 과학계의 염원을 고려한 듯합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거대화된 과학이 환경 사상, 예술과 만나면서 생겨나는 변화를 4부는 「과학 성찰의 새로운 진화」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앞서도 말씀드렸던 20세기 후반 이후 과학 기술 분야에서 등장한 융합 기술과 비연속적인 기술 혁신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1859년 다윈의 진화론 발표에서 1905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1926년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948년 가모브의 대폭발 이론, 1975년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20세기에 이룩한 과학의 업적들에 대하여 기업, 사회, 국가, 예술이라는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여 분석하고 심지어 물밑에서 있었던 요소들의 상호작용까지도 소개하고 있어 아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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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와 윤리교육 내일을 여는 지식 교육 28
배영기.진교훈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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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의료인과 의과대학생들이 관련된 성추행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의료인에 대한 윤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의과대학의 교과과정에 윤리교육을 포함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의사의 삶을 성찰하고 직업철학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주목을 받은 사건들은 의료윤리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삶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일반적인 윤리도덕에 관한 사항이라고 보입니다.


윤리교육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의 특성상 생명윤리에 관한 내용은 당연히 포함해야 할 것이나, 그밖에도 의료행위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지켜야 할 도덕 및 윤리에 관한 사항도 있을 수 있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 및 윤리에 관한 사항으로까지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의과대학의 교과과정에서 다루어 예비의사들의 인성을 바르게 할 윤리교육의 범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도덕, 윤리의 원칙을 설명한 도서 뿐 아니라 생명윤리를 다루는 도서 역시 영역에 따라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일반적인 윤리 도덕교육을 단기간에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고, 초, 중,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꾸준히 이루어져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물론 의료행위와 관련된 윤리교육은 예비의사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예과과정에서 다루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는 의료인이 갖추어야 할 윤리와 도덕관념에 대한 개략적 범위를 조망해볼 수 있는 책 <생명윤리와 윤리교육>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윤리학과 윤리교육에 관한 연구를 하시는 분들이 우리나라 윤리학계가 당면한 다양한 주제를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윤리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고 특히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 혹은 윤리교육의 문제가 무엇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 열여덟분이 “윤리학의 본질과 성격”, “한국 사회의 현대윤리학의 과제”, “윤리교육론과 도덕교육의 방향”이라는 큰 틀로 나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을 기획한 분들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가치관교육이 무시되고 있는 점, 특히 학교가 기능교육에 치중하다 보니 반사회적, 반도덕적 인간을 길러내는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는 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사회변화와 더불어 상대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이 만연하게 되면서 기존의 가치기준이 무너졌지만, 바뀐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지지 못함에 따라 사회적으로 아노미현상이 일어나고, 도덕적 무관심 내지는 불감증에 빠지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글머리에서 제기된 문제를 보면 윤리문제가 꼭 의료계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며, 기본적인 윤리교육의 부재에 따른 우리사회의 전반에 걸쳐 확산되어 있는 일반현상이라고 봄이 옳을 것 같습니다.


저자들이 살펴보고 있는 윤리학의 본질과 성격에서는 윤리와 도덕에 관하여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의 흐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고, 어떻게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되는가?”하는 의문을 논하는 것이 윤리학이라고 한다면, 자연의 질서를 탐구해오던 자연철학에서 인간의 삶의 질서를 논한 소크라테스는 도덕철학의 시조(始祖)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논한 도덕철학으로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도덕철학이 논한 도덕적 삶을 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보인 도덕적 삶은 따로 조망해볼 기회를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커트 바이어는 우리의 삶을 행위가 이성에 일치하는 합리적인 삶, 도덕에 일치하는 도덕적인 삶 그리고 최상의 선함을 추구하는 선한 삶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들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갈등하는 경우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도덕성을 수단적 합리성으로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논의가 바이어로부터 시작되는데, 데이비드 고띠에에 이르러 공리(公利)라는 개념을 통하여 수단적 합리성이 도덕성을 얻을 수도 있다고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는 롤즈의 정의의 원칙으로 정리되었으며, 다시 최근 우리 사회에서 주목을 받은 마이클 샌들에 의하여 비판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표제가 되고 있는 생명윤리에 관한 내용은 배영기 교수가 맡고 있는 ‘생명윤리에 관한 생태문화적 연구’ 한 편에 불과하여 다소 의외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안락사 문제를 비롯하여, 장기이식, 배아복제, 대리모임신 등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생명윤리 이슈가 넘쳐나고 있지만, 의학, 법학, 철학 그리고 윤리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논의가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배영기 교수는 이와 같은 주제를 논의 범위에 포함하지 않고 생명에 관한 역사적, 철학적 그리고 종교적 이해를 논하였을 뿐, 미래에 다루어야 할 생명윤리의 이슈를 변화하고 있는 지구환경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논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오히려 박효종 교수가 롤즈의 정의의 원리를 고찰하는 가운데 제한적인 의료자원을 분배함에 있어 적용할 수 있는 기준으로 맥시민의 원리를 논하고 있어 의료현장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의료계에서도 관심을 둘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우리 사회가 처한 윤리의식의 위기상황과 도덕성 회복 방안을 요약해보려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시대는 불교에 기반한 인과응보와 자비의 윤리가, 조선시대에는 삼강오륜을 기초로 한 유교의 윤리가 사회적 행위의 중심윤리였습니다. 하지만 피동적으로 이루어진 근대화과정에서 서양문화가 빠르게 유입되면서 전통적인 윤리의식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면서 결국에는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전통윤리를 대체할만한 새로운 윤리규범이 만들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윤리의식의 혼란이 가중되고, 종국에는 도덕불감증이 만연하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진교훈 교수는 전통적 윤리규범을 단순하게 비합리적이고 수구적이며 보수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전통은 대체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지혜가 축적되고 많은 수정과 보완을 거쳐 이루어진 사회질서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통문화 속에 담겨 있는 기본적 가치를 바탕으로 변화하는 사회구조에 맞는 새로운 가치기준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한국의 근대화과정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서양문화의 유입에 따른 동서 문화의 충돌로 야기된 문제인 만큼 우리의 전통 윤리의식과 서양의 윤리의식을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인식을 토대로 비교하는 연구를 통하여 우리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윤리기준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라 하겠습니다.


서양의 역사에서도 “젊은이들의 행태를 보면 말세다”는 탄식은 끊이지 않았으며, 우리의 역사서에도 “강상의 도가 땅에 떨어졌다.”는 탄식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도덕과 윤리의 위기는 늘 논의되던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새삼스럽게 윤리 도덕의 위기를 논하게 된 것은 최근들어 사건 사고의 빈도가 많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잔혹성이 과거와 비교되지 않을 지경인 까닭입니다. 이러한 세태를 바로잡기 위해서 국민들의 도덕성을 함양하기 위한 다각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도덕성 형성은 개인적, 사회환경적, 제도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개별적 영역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안들을 종합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시너지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들은 “인생의 의의는 참된 가치를 실현하는데 있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곧 참된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근본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사는 길을 안내하고 참된 가치를 가르치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교육의 근본정신이다. 참된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려면 윤리교육이 바로 서야 한다.”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의료계의 일각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의료계에 만연한 전반적인 윤리의식의 위기로 규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것도 의문이고, 그 책임이 의학교육제도의 결함이라고만 할 것인가도 의문입니다.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현상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전통의 부재가 원인이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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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3-19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4707
 
사랑하다 죽다 - 정사情死의 정치학 혹은 지독한 순정이나 아련한 절망의 형식
박종성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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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사전에는 정사(情死)“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든가 또는 다른 사정으로 함께 자살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죽은 경우에는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한쪽이라도 살아남게 되는 경우 자살의 방조 혹은 교사 여부를 따져 자살관여죄(형법 제252조 2항)가 성립되며, 정사를 가장한 위계(僞計)·폭행·협박 등의 위력(威力)으로 자살을 결의하게 한 때에도 살인죄(제253조)나 미수범으로 처벌(제254조)된다고 합니다.

 

자살이라는 형태의 죽음이 때로는 동정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향인데, 정사의 경우는 적지 않은 경우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정상이라고 하기 어려운 형태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경향이 있어 죽은 이들의 사정이 타인에게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죽음의 형태에서 차지하는 정사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자료를 가지고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정사에 관한 분석적 글을 읽기 어려운 이유일 것 같습니다.

 

‘정사의 정치학 혹은 지독한 순정이나 아련한 절망의 형식’이라는 부제를 단 <사랑하다 죽다>는 서원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박종성교수님의 이러한 정사의 한계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호사가들의 관음증을 자극하기 위한 주제가 아니냐는 삐딱한 시선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정사사건을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해방이후로 구분하여 시대별 발생빈도나 사연들을 비교하였습니다. 앞서 논한 것처럼 정사 가운데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건들만 기록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사망신고에 따른 통계자료의 집계가 가능했던 일제강점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정사라는 죽음의 형태가 신고형식에서 구분해낼 수 없는 바, 조선시대에는 실록을 포함한 각종 기록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언론매체 등에 의존하여 자료의 수집이 가능하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신분제가 엄격했으며 삼강오륜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적 윤리가 사회적 규범으로 통하던 때였던지라 사랑이 완성될 수 없는 관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유교적 윤리의식이 많이 퇴조하던 시절이었습니다만,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서구문화와 전통문화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의 갈등이 일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江戶時代:1653~1868)의 관습과 규범의 속박으로 정사하는 사례가 많아 연극과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고 합니다. 일본의 이런 풍조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심지어는 정사를 예찬하는 분위기가 일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해방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 일기 시작한 의식구조의 대변화로 인하여 정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많이 줄기도 했지만, 정사를 시도할 만큼 절박한 사랑도 많이 줄어든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누군가와 사랑하다 함께 죽는 것보다 하루라도 더 죽도록 사랑하는 삶이 먼저”라는 정재복교수님의 말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된 때문일까요?

 

그런데 저자는 정사를 굳이 정치라는 시각에서 바라보았을까 궁금해집니다. 굳이 같이 가려는 추구의지를 담았기 때문일까요? 설명이 쉽지 않을 듯합니다만, “사랑이 ‘관계’ 개념에서 파생하는 극히 자연적인 현상이자 하필이면 둘만의 선별적 정념이 빚어내는 감정의 숙성과정이라면 그건 그 자체만으로도 곧 ‘정치’다.(37쪽)”라고 명쾌하게 정의하고 나선 저자이고 보면 정치학을 전공하는 저자의 독특한 시각이 빚어낸 반짝이는 결정체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저자는 실록 등의 자료를 통하여 도출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열녀’에 관한 기록을 시대상을 반영한 정사의 한 형태로 보았습니다. 유독 추종의 형태가 많은 열녀의 죽음은 나라에서 열녀문을 세워 그 아름다운 행적을 기리는 등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은근히 죽음을 강요받았거나 살해 후 자살로 위장한 사례는 없었는지 의문이 생긴다는 점을 굳이 감추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죽기로 마음을 먹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진대 아무리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사랑하다 죽기’로 작정한 이들이 끝내 그 관문을 넘어서는 과정도 시대적 차이가 있을 것라 짐작합니다. 다만 다양한 정사의 방식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준 ‘떨림’과 ‘울림’의 인문학에까지 생각이 미치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저자의 사념의 깊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정사의 시대적 변천과정을 비교검토하는 이유는 최근 들어 보기 어려운 정사를 예찬하고 권장하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색다른 주제를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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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그대에게
M. 스카펙 지음, 최은경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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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삶은 없다”라는 부제가 달린 <길을 묻는 그대에게>는 작가에서 사상가,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강연가, 영적 안내자로 발전해나간 스캇펙 박사가 쓴 책입니다. 스캇펙박사는 오래 전 안락사를 주제로 한 <영혼의 부정: http://blog.joinsmsn.com/yang412/6647855>을 통하여 친숙해진 터라서 <길을 묻는 그대에게>에서는 삶의 의미에 대한 그의 명쾌한 해답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목을 두고,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가진 독자에게 주는 정답을 담았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책장을 열었다가 “뭐야~~!”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제가 책을 열고 어리둥절했다는 말씀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제별로 한 페이지에 두 꼭지씩으로 된 짧은 글에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습니다. 그 글의 숫자가 365개 이니 하루에 한 꼭지의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생이란?’으로부터 시작해서 ‘평화란?’으로 끝나는 질문은 모두 91개이지만 ‘사랑이란?’ 질문이 제일 많아 9개나 되는 것처럼 중복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면 ‘사랑’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많은 것 같아 보입니다.

 

머리글에서 저자는 이 글들은 일일 묵상의 형식으로 제시한 것으로, 정신과 의사로, 인간행동의 관찰자로 또는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경험한 것, 특히 영적 세계로 향한 저자의 여정을 담았다고 합니다. 또한 이 책의 글들을 읽고 명상하는 가운데 개개인의 생애와 경험 속에서 새로운 문맥과 의미를 찾았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며 희망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명상의 기도 형태 중 흔한 형태는 한 구절을 얼마 동안 명상하는 것이다. 유태교, 기독교적인 전통에서는 글이라면 흔히 송서의 구절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아마도 짧은 난해한 어휘, 즉 화두일 것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저자가 불교에 귀의해 불교도로 지내면서 행한 명상시간에 화두로 가졌던 사념들을 정리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자는 이 글들이 슬쩍 스쳐 읽히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글들은 고요와 정적 속에서 묵상을 통하여 반추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깊이 파고들라. ‘글과 함께 성장하도록 하라.’ 글의 지혜와 여러분의 지혜 속으로 깊이 파고들라, 모순 속으로도 파고들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인생, 자아, 도전, 정직, 영적인 삶, 결정, 두려움, 자기훈련 등 자기계발에 관한 주제로부터 자식, 결혼, 행복 등 다른 이와 얽히는 삶으로 주제를 확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혼, 종교, 신, 은총, 기적, 믿음 등 종교에 관련된 주제도 다루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과학, 진화와 같이 종교와 대척점에 있는 주제도 다루고 있어 저자의 생각이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고의 편중을 우려한 듯한 일면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빛이 입자성과 파동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는데서 나온 것처럼, “‘인간은 죽음과 영원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빛은 동시에 파동이며 분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과학과 종교는 모순이라는 같은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87쪽)”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가 물과 기름처럼 녹아들지 못하고 대립하기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보입니다. 예를 들면, “신에 대한 믿음에서 우리가 성숙되어 나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이제 여러분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은 신에 대한 믿음 속으로 성숙해 들어가는 것도 역시 가능하다는 것이다.(86쪽)”라는 글이 바로 그러합니다.

 

신의 섭리를 근본으로 하는 종교의 입장에서 오늘 날의 인류가 진화의 결과라는 과학의 입장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싶습니다만, 저자는 “인류는 진화적 도약을 하는 중이다. ‘도약에서 우리가 성공하는가, 안 하는가는 여러분의 개인적 책임이다.(128쪽)”라고 적고 있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진화의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관계’라는 화두를 두고, “싸우는 것이 분열되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151쪽)”고 적은 글에서 요즈음 우리 사회의 갈등이 꼭 우려할만한 것은 아닐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갈등이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않고 소통으로 이어져 잘 봉합되는 수순으로 가야겠다는 것이지요. 갈등의 요인이 된 점들에 대하여 사회구성원들이 진실을 깨달아 선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양측에서는 거짓으로 대중을 속이려하지 말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진실된 근거를 바탕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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