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 인생의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삶, 그 축복과 고통의 시간들
질 프라이스, 바트 데이비스 지음, 배도희 옮김 / 북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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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대하여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점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듭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을 기억이라는 저장소에 어떻게 갈무리해 넣고, 또 필요할 때 끄집어내는지 알 듯 모를 듯합니다.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하는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현대의 남성이 과거의 남성보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는 점을 적고 있는 피터 매칼리스터의 <남성퇴화보고서; http://blog.joins.com/yang412/12812543>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그밖에도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 http://blog.joins.com/yang412/12878043>에 나오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놀라운 기억능력과 한계점을 읽으면서 그야말로 픽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심리학자 루리야가 보고한 기억술사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http://blog.joins.com/yang412/13176657>에서는 그토록 놀라운 기억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실존한다는 점과 함께 그 역시 입력된 기억들이 서로 충돌해서 엉키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리야의 연구대상이 되었던 남자 S는 기본적으로 뛰어난 공감각력을 바탕으로 하여 주어진 과제를 암기하여 기억에 저장되면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기억능력에도 한계가 있었는데, 이미지가 없는 추상적인 단어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시(詩)에 담긴 은유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 그래로의 이미지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예스24 검색을 통하여 알게 된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는 사람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입니다. 루리야가 쓴 책의 제목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S의 기록과 루리야가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루리야가 쓴 글입니다. 반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주인공 질 프라이스가 구성작가 바트 데이비스의 도움을 받아 기억에 관하여 자신이 겪은 일들을 구술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질은 14세 이후 벌어진 매일의 일상에 대해 완벽에 가까운 자서전적 기억을 가지고 있어, 세계 최초로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tic syndrome)이라는 진단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녀의 기억이 가지는 특징은 하루의 일상이 별도 노력 없이도 저절로 기억이 될 뿐 아니라, 저장된 기억이 샘솟듯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원하면 일부러 기억을 끄집어낼 수도 있었지만, 보통은 자동적으로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에 기억을 떠올리려 억지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억술사라고 부르는 인물들이 나름대로의 기억을 강화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억패턴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억술사들의 일반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늘어놓은 단어나 숫자들을 기억하는 능력이나 학과수업에서 흔히 요구되는 암기에 취약하다는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낙관주의적으로 생각하고 기억하는 긍정적 편향을 가지도록 진화되어 왔다고 합니다. 탈리 샤롯은 <설계된 망각; http://blog.yes24.com/document/7310686>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낙관편향은 미래에 틀림없이 닥쳐올 고통과 고난을 정확하게 지각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인생의 선택권을 제한된 것으로 보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이런 낙관편향을 유지하기 위해 뇌는 무의식적 망각을 설계해두었다. 그 결과, 스트레스와 불안이 줄면서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져 행동하고 생산하려는 동기가 강해진다.(탈리 샤롯 지음, 설계된 망각, 1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 프라이스는 망각이라는 축복을 받지 못한 까닭에 슬픈 기억의 회오리에 휘말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불행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위기에 빠지는 과정, 당뇨를 앓던 남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 등입니다. 그와 같은 고통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긍정적인 기억을 선별하는 능력은 내 마음의 작용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163쪽)”

 

신경심리학적으로 그녀는 시각적 영역과 언어적 영역의 기억력이 뛰어나고 주의집중능력도 좋으나, 인지능력이 보통사람들의 패턴과는 다르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기억력이 뛰어나지만 학업수행이나 학문적 영역에서는 문제가 많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 캠퍼스의 심리학연구팀과 함께 기억이 저장되고, 저장된 기억을 회상하는 기전의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특별한 능력이 우리의 삶과 밀접한 기억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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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출신 크리스티앙 문쥬 감독의 2007년작 <4개월, 3주...2일>을 DVD로 보게 되었다. 예스24의 블로그친구 파란토끼13호님의 이벤트를 통해서 받게 된 작품인데, 받은 다음 책상 한켠에 오랫동안 묵혀둔 이유는 지금도 분명치 않다. 2007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작품은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이 낙태를 금지하던 1987년 임신한 여대생이 룸메이트의 도움을 받아 불법으로 낙태시술을 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차우셰스쿠는 강한 나라가 되려면 인구가 많아야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1966년 낙태를 국가안전을 해치는 범죄로 규정하고 시술을 한 의사를 사형에 처하는 등의 강력한 통제정책을 펴 출산율은 두 배로 늘었지만,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예를 들면 불법으로 낙태를 받다 사망한 임신부가 50만명에 달하였다거나 버려지는 아이들이 늘게 되었다거나 하는 실질적인 문제뿐 아니라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교육 및 취업 등 각종 사회안전망이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토록 무리한 정책을 강제하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이렇게 태어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렇듯 삼엄한 상황에서도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도 현실이었을 것이다. 영화 <4개월, 3주...2일>은 바로 이런 상황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는 임신을 하게 된 여대생 가비타(로라 바실리우 扮)가 불법낙태를 받으려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룸메이트 오틸리아(아나마리아 마린차扮)의 도움을 받아 수술에 필요한 비용 3000레이를 조달하고 시내 호텔을 빌리고, 시술을 해주는 사람과 접촉을 하는데, 막상 확인하는 일은 오틸리아에게 미룬다. 매사가 똑떨어져 보이는 오틸리아와는 달리 가비타는 매사가 흐리멍텅하다. 그렇기에 피임을 제대로 할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영화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호텔을 빌리고 시술을 맡은 베베(블라드 이바노브扮)와 접선하여 호텔까지 데리고 왔는데, 2개월이라고 했던 임신기간이 사실은 영화제목이기도 한 4개월, 3주 하고도 2일이나 된 것이었다. 임신 2월이 지난 낙태시술은 특히 위험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베는 시술의 위험을 고려한 대가를 요구하게 된 것인데, 그 요구가 무엇이었는지 자막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본에도 없었던 것 아닌가 싶다. 결국은 스토리의 흐름으로 감을 잡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베베의 요구는 가비타나 오틸리아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인데도 그 점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공유산이라고도 하는 낙태는 모자보건법시행령 제15조에 따라 임신한 날부터 24주 이내에 한하여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태아가 생존능력을 갖추는 시기를 기준으로 정한 것이다. 역시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하는 인공유산은 부모에 유전적 장애가 있거나, 임신부가 전염성질환을 앓고 있어 태아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 그리고 준강간 등과 같은 사건과 관련하여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경우, 그리고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간의 관계에서 임신이 되었을 경우로 제한하고 있다.

 

낙태시술은 임신기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임신초기에는 소파술을 시행하게 되는데, 이때는 수술과정에서 자궁이 뚫리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임신기간이 오래되면 자궁경부를 인공적으로 열어 정상분만과 같은 출산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가비타가 임신 2개월됐다고 했는데도 베베가 호텔로 준비해온 낙태장비는 정상분만을 일으키는 장비였던 것이다. 시술을 하는 장면도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어설프기 그지없다. 자궁경부는 라미나리아라고 하는 재료를 시간경과에 따라서 여러 차례 추가해야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절차가 생략되고 자궁 안에 주사액을 주입하고 있다. 자궁에 소독되지 않은 이물질을 집어넣어 낙태를 유발시키게 되면 틀림없이 자궁내염증이 생기고 이런 경우 항생제 몇 알로 해결될 수 없어 결국은 생명을 잃게 되는 불상사가 생기게 되는 것인데 베베가 하는 짓은 꼭 낙태 후에 염증이 생길 수밖에 없는 위태롭기 짝이 없던 것이다. 일부러 불법낙태가 안고 있는 위생학적 문제점을 드러내려는 감독의 생각이었을까?

 

호텔에 체크인을 할 때 분위기로 보아서는 호텔근무자들이 투숙객의 동태를 확인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별다른 상황이 발생하지 않고 낙태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4개월 된 태아는 12cm 정도의 크기되는데, 영화에서는 그보다는 작았던 것 같다. 어땠건 분만된 태아를 처리하는 것도 문제인데 이것도 오틸리아의 몫일 수밖에 없고, 베베가 추천한 방법대로 아파트의 쓰레기처리 공간을 이용하여 처리한다. 영화는 쫓기듯 주위를 살피며 태아를 처리한 오틸리아가 호텔로 돌아와 천연덕스럽게 식당에 앉아 식사를 주문한 가비타와 마주하는 장면에서 종영되는데...

 

시작에서 끝까지 물흐르듯 이어지는 스토리 가운데 낙태비용에 관하여 베베와 협상하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갈등구조도 전혀 없고 기대했던 반전도 없이 영화가 끝나고 말아 무언가를 기대했더라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다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차우셰스쿠 독재정권 당시의 루마니아 사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정도? 그리고 특히 오틸리아가 사산한 태아를 처리할 장소를 찾아 헤매는 장면을 들고찍는 기법으로 많이 흔들리는 장면을 연출하여 긴박감을 조성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인지 맥이 빠지고 말더라는 이야기도 해야 하겠습니다.

 

룸메이트라고는 하지만 오틸리아가 자신을 희생하여 도와주어야 하는 필연성에 대한 설명이나,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도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를 마무리한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스토리의 전개를 그려나가는 기법으로 리얼리즘을 추구했다는 점이 돋보였다는 설명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의문이라 하겠다.

 

숙련된 산부인과 의사라고 하더라도 임신 첫 2개월에 이루어진 낙태수술로 인한 모성사망률은 10만명도 0.7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임신기간이 2주 경과할 때마다 사망률은 2배씩 늘어난다고 한다. 그러니 무자격자에 의하여 행해지는 낙태시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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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 - 어느 경제학자의 미 대륙 탐방기
마이클 D. 예이츠 지음, 추선영 옮김 / 이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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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미국식 모텔은 우리나라에서 여관에 해당되는 숙박업소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여행자가 묵는 숙박시설이죠.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모텔하면 여행자들이 신세를 지는 곳이기 때문에 <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는 당연히 합리적인 가격으로 미국을 여행할 수 있는 안내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에서 읽게 되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저의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 여행을 생각하는 분이라면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방랑벽을 꾹꾹 눌러가며 정년이 될 때를 기다렸던 경제학 전공 교수가 55세에 정년을 하자마자 미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살아본 발자취를 정리한 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는 옐로우스톤과 같은 국립공원도 있고, 뉴욕과 같은 대도시도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진보적 성향을 반영하여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노동문제 그리고 자연환경의 파괴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미국 펜실베니아의 포드시티가 고향입니다. 피츠버그 대학의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던 중 시작된 베트남전의 징집을 회피하기 위하여 석사학위도 없이 대학의 존즈타운 캠퍼스에 강사에 지원하여 임용되어 55세 정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분위기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물론 미국에서도 요즘에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은퇴를 결정할 수 있고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는 55세가 되는 해에 부부가 같이 미국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해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장소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입니다. 단지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숙박시설에 근무하기로 한 것입니다. 옐로우스톤은 와이오밍주에 있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간헐천이 유명하고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구역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공원 안에 몇 곳의 숙박시설이 있는데, 겨울철에는 폐쇄되며 여름철 성수기에 사용하려면 겨울이 끝날 무렵 미리 예약을 해야만 한답니다. 사실 저도 사전에 충분하게 조사를 하지 못했던 탓에 전체 여행일정만을 고려하다보니 정작 빠트리지 말아야 할 곳을 지나친 곳도 있고, 꼭 보아야 할 간헐천도 그야말로 우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4개월 동안 보낸 옐로우스톤에서 주로 상주근무자들의 애로사항을 중심으로 한 경험담을 풀어놓고 있을 뿐, 정작 옐로우스톤 방문에 관심을 두고 있는 독자는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옐로우스톤에서 생활을 마치고서는 <먼슬리 리뷰>라는 잡지의 편집자로 일하기 위하여 뉴욕 맨하탄으로 옮기게 되는데, 맨하탄에서 살집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맨하탄에서의 일상을 적고 있지만, 역시 이곳과의 인연도 그리 깊지 못했던 모양으로 마이애미비치에서 짧은 체류를 거쳐서 오리건주의 포틀랜드로 두 아들과 함께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비교적 주변 환경과 볼거리들을 적고 있습니다만, 주요 관심사인 인종적 불평등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포틀랜드에서의 생활도 1년을 조금 넘기는 정도로 마무리하고 다시 미국의 서부지역을 돌아보는 여행에 나섰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여기에서 이 책의 제목과 연관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는 생활에서 얻은 모텔 찾기와 식사를 해결하는 방법 등입니다. 제 경우는 한국에서 가지고 갔던 가스버너와 전기밥솥을 주로 활용하여 밥을 해먹는 방식으로 여행을 했습니다만, 저자는 휴대용 전기전열기를 사용하여 조리를 했던 모양입니다. 가스버너를 사용할 때는 음식냄새보다 화재의 위험성 때문에 늘 마음을 졸였는데, 저자가 사용한 전열기는 모텔의 전기료에 부담을 준 셈이 될 것 같습니다.


이하에서 다시 찾은 마이애미비치에서의 생활과 텍사스를 거쳐서 중서부지역을 방문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미국여행에 대한 정보를 기대한 독자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였을 뿐 아니라 노동문제나 불평등문제 혹은 자연보호에 관한 이슈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고 하더라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몇 장의 흑백사진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번역에서도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래도 책읽기를 마치면 무언가 남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 그 무언가를 정리할 기회를 마련해볼 생각이란 말씀도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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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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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만프레드 슈피처박사의 <디지털 치매; http://blog.joins.com/yang412/13166541>에서는 디지털 미디어의 급속한 발전은 젊은이 사이에서 중독 문제를 성인들에서는 인지장애를 나타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진화의 산물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 특정한 환경 조건에 적응해왔고, 단언컨대 이러한 환경조건에는 디지털 미디어가 속해 있지 않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문명화 질병이 과거의 생활방식과 현대의 생활발식 사이의 부조화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디지털 미디어가 진화와 신경생물학적 부분에서 우리의 정신적 프로세스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 또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19쪽)”

 

슈피쳐박사는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인지능력은 기억을 바탕으로 한 사고의 깊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데, 디지털미디어가 바로 사고의 깊이를 더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네트워크가 내 집중력과 사고력을 무너뜨리고 있다. 내 머릿속은 이제 정보가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는 방법 그대로 적용되기를 기대한다. 미세한 입자들이 아주 빠른 속도의 전류를 타고 전달되는 식으로 말이다. (…) 내 친구들도 나와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네트워크를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글을 좀 더 길게 쓰려고 집중할 때마다 거의 전투를 벌여야 한다.(18쪽)”라는 구절을 니컬러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니컬러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미디어혁명과 인간 사고의 확장,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이 인간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인터넷이 단순한 정보를 유통시키는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미디어는 생각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생각의 과정도 형성하게 되는데, 결국 이용자의 집중력과 사색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숨 가쁘게 발전하고 있어 처음에는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면서 여유있게 즐기다가 정보의 양이 폭주하면서는 저자의 말대로 제트스키를 타고 달리는 식으로 겉만 핥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의 경우도 인터넷 글을 읽을 때 빠르게 훑어보는 버릇이 생기다보니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자는 인터넷 사이트와 서비스에 익숙해지고 의존하게 되면서 습관과 일상생활이 많이 변하였을 뿐 아니라 뇌가 기능하는 방식도 바뀐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전의 뇌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인간의 뇌가 놀라울 정도로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고, 뇌는 우리가 사고하는 대로 바뀐다는 사실을 실험결과를 통하여 입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 페니키아시대에 문자가 처음 등장한 이래로 문자를 담은 문서로 기록하는 방식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리뷰하고 문자가 우리의 사고에 미친 영향을 살피고 있습니다. 특히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개발하여 필경사에 의존하던 도서유통의 범위를 확대한 이래로 책읽기를 통하여 사고의 깊이를 더하게 된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어서 인터넷의 발전이 가지고 온 효과, 특히 멀티태스킹의 부정적 효과 뿐 아니라 쏟아지는 정보양을 수용하기 위하여 혹사당한 뇌가 보이는 이상적 반응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앞서 인터넷 문서를 대충 읽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를 스캐닝 방식으로 읽는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방식의 글읽기는 의미파악이 충분하지 않을 가능성과 특히 하이퍼텍스트로 연결되어 있는 정보를 같이 읽는 경우에는 전체문서의 개요를 정리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감소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키워드 몇 개를 가지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인터넷의 긍정적인 활용방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213쪽)”라는 새뮤엘 존슨의 말을 인용하여 기억을 아웃소싱할 수 있다는 생각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기억을 불러내 새로운 시냅스의 말단을 만드는 작업을 반복하는 것으로 기억을 강화하고, 기억의 유연성과 깊이를 더하는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기억은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이 우리를 망각에 익숙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자료검색도 좋지만 부단한 책읽기를 통하여 기억에 지식을 저장하고 사유를 통하여 지식이 서로 연계될 수 있도록 노력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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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실체다 - 신사상 운동과 프렌티스 멀포드의 종교사상
프렌티스 멀포드 지음, 정형철 옮김 / 이담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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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healing)이 대세라고 합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2000년 7건, 2011년 435건에 불과했던 ‘힐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의 수가 2012년에 지난해 9,385건으로, 그리고 올 들어서는 6월까지 만해도 1만 2,447건으로 급증했다는 것입니다.(서울신문 2013년 7월 13일자 기사, “몰아치는 ‘힐링 열풍’ 빛과 그림자”) 치유를 의미하는 영어가 언젠가부터 우리네 삶에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너도나도 사용하다보니 치유를 행하는 주체가 애매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힐링을 화두로 삼는 연예프로그램도 생겨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하는데, 신변잡담에 머물거나 심지어는 초대손님이 숨기고 싶은 이야기까지 까발려 상처를 덧나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힐링’은 쌓이는 스트레스나 마음에 생긴 커다란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다독여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힐링열풍이 불고 있는 현상은 우리들 삶이 그만큼 고단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공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스트레스란 마음을 다스리기에 따라서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보면, 사람들이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 즉 독서와 사유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힐링 프로그램을 통하여 위로와 다독임을 받았는데도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실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힐링을 받을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어떤 묘방을 써도 기대만큼 효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한다는 힐링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힐링이 마술 호리병에서 ‘퐁’하고 튀어나오는 지니처럼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개념은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하던 중에 우연히 읽게 된 프렌티스 멀포드의 <생각이 실체다>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힐링은 바로 19세기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태동한, 마음에 의한 치유를 구하는 ‘신사상 운동’에까지 그 뿌리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신사상 운동이 태동하게 된 배경에는 ① 4복음서, ② 초절주의 혹은 에머슨주의, ③ 버클리의 관념론, ④ 심령론, ⑤ 낙관주의적 대중과학 진화주의, 그리고 ⑥ 힌두이즘이 있었다고 합니다. 론다 번의 <시크릿>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프렌티스 멀포드는 신사상주의가 태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1834년 뉴욕주 롱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멀포드는 20대 선원생활을 통한 다양한 모험을 배경으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883년 뉴저지주의 어느 강가에 터를 잡고 사유와 집필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선택에 대하여 멀포드는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고 합니다. “1884년 나는 보스턴으로 갔다. 이 지상에서의 어떤 새로운 사상 혹은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보스턴으로 갈 필요가 있었던 것은 어떤 신비로운 이유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화이트 크로스 라이브러리>를 시작했다.(17쪽)” 멀포드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호수가 생활을 연상케 하는 뉴저지 강가에서의 생활에서 얻는 사유의 결과를 담은 에세이를 발표하여 <화이트 크로스 라이브러리>에 수록하였고, <생각이 실체다>는 여기에서 발췌한 에세이를 엮어 1908년에 영국에서 발간된 것입니다. 한 세기 전에 발표된 글이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 가운데는 현대에 와서 개념이 바뀐 것들도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멀포드는 인간은 몸의 마음과 영의 마음이라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온갖 형태를 지닌 물질들의 배후에 있고, 어떤 점에서 보면 그 물질들을 창조하는 힘을 우리는 영이라 부른다.’고 전제한 멀포드는 ‘몸의 마음 혹은 물질적 마음은 전적으로 물질적 혹은 신체적 관점에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한다. 반면 그 물질들을 창조하는 힘에 대한 지식을 통해 생명과 사물을 보고, 추론하며, 판단함으로써 우리는 영적 마음을 형성하게 된다.’고 정의하였습니다. 물질적 마음은 몸의 죽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끝이라고 보지만 영적 마음은 몸의 죽음이란 단지 소모된 수단이 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봅니다. 쉽게 설명하면, 물질적 마음은 일을 추진하기 위해 사람들을 다룰 때 필요한 힘은 말이나 글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단지 설득하는 능력에만 있다고 보는 반면, 영적 마음은 당신의 이익을 위한 일이나 이익에 반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하도록 영향력을 주는 것이 다름 아닌 ‘당신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마음이 치유능력을 가지는 것은 “완전한 건강, 쇠퇴로부터의 자유, 몸의 약함과 죽음의 극복, 신체의 한계를 벗어난 통행과 여행, 관찰의 능력 등을, 혼자서 하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건, 고요한 마음이나 생각의 작용과 작동을 통해 얻는 방법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앞서 힐링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효과를 얻지 못해 실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만, 멀포드는 이미 한 세기 전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개선은 내부로부터 와야만 한다. 그것은 자율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존재나 영향에 의존해서는 개선이 될 수 없다. 만약 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개선이다. 그러한 개선은 그것을 추진한 사람의 영향력이 제거되면 실패할 것이다.(70쪽)” 따라서 힐링을 인도하는 분도 힐링이 필요한 분이 스스로를 변하게 할 수 있도록 마음의 토양을 바꾸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최근 우리사회는 자신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날선 공방이 오가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현상은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2008년 제2차 광우병파동 무렵부터 극심해진 것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뭉쳐 사상적, 논리적 대응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논리에 유리한 것들만 읽고, 반대편 논리에 유리한 것은 외면하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주장을 두루 섭렵하여 근거의 경중을 따져 논리를 세워야 상대를 설득할 기회도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공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멀포드는 마음공부를 할 때 지켜야 할 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잘 못을 보고 좋은 것은 하나도 볼 능력이 없는 편파적이고, 냉소적이며, 독설적인 마음들이 쓴 것들만 읽는다면, 우리는 그들의 불건강한 생각의 흐름을 우리 속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 언제나 적의와 독설을 바른 화살은 그것을 쏘는 자에게 치명적인 것이 된다.(87쪽)” 편파적인 마음가짐은 부지불식간에 마음의 부담으로 남아 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공평하고 가치중립적인 생각의 흐름을 살리는 것이 힐링의 기본요건이 되는 셈입니다.

 

신사상이 힌두철학 특히 요가체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만, 멀포드는 북미 원주민의 삶과 동양철학에서 얻은 일종의 선(禪)에 가까운 생각을 적기도 했습니다.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마음을 완전히 비우게 하여 두려움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만들 수도 있고, 또한 이러한 정신 상태로 인해 몸이 아무런 신체적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107쪽)” 이는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하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통하여 영적능력을 키움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고 하겠습니다. 평소 천천히 생각하고 침착하게 생각을 집중하는 명상훈련을 통하여 마음이 늘 평정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힐링이 갑작스럽게 대두되었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관심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은근과 끈기’를 특징이라고 하던 우리 국민이 어느새 ‘빨리빨리’로 특징이 변하게 된 것처럼 관심의 주기가 빨라졌기 때문입니다. ‘힐링’이 주목을 받기 전에는 ‘참살이(웰빙)’가 관심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힐링이 기울고 행복이 떠오르고 있다고 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정신과의사 고든 리빙스턴선생이 <서두르다 잃어버린 머뭇거리다 놓쳐버린; http://blog.joins.com/yang412/13182130>에서 내세우고 있는 주제가 바로 행복이란 점이 생각납니다. 리빙스턴선생은 모든 생물이 그렇듯 사람 역시 혼자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서 삶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는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가 1906년에 발표한 <파랑새>라는 이름의 아동극에 나오는 파랑새가 행복을 의미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아동극이 우리의 행복은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행복은 우리가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있는 것인데, 결국은 관계라는 것도 마음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보면 “행복의 과학은 우리의 생각을 조절하는 데에 있고 건강한 삶의 원천들로부터 생각을 이끌어 내는 데에 있다.(136쪽)”는 멀포드의 행복에 관한 생각이 정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랑이라고 하는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사랑은 비록 물리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공기 혹은 물과 같은 실질적인 엘리먼트이다. 그것은 행동하고 살아가고 움직이는 힘이며, 우리를 포함하는 보다 더 큰 생명의 세계 속에서, 물질적 감각에 의해서는 인식되지 않지만, 대양과 같은 물결과 흐름 속에서 움직인다.(143쪽)”라고 했습니다.

의학의 발전은 늙어감의 의미를 바꾸고 있습니다.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결국 불로초를 손에 넣지 못했던 진시황이 만약 시간여행이 가능해진다면 현대의학 아니 미래의학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황제의 자리를 포기하고 시간여행에 나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요즘 우리사회에 광풍처럼 불고 있는 불로(不老) 추구현상이 정작 필요한 젊은 정신은 외면하면서 젊은 몸만 생각하는 편향된 마음의 병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해봅니다.

 

멀포드는 늙어감 역시 마음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한 늙고 추한 모습의 이미지 혹은 형상에 대한 두려움이 몸의 영혼에 영향을 미쳐 늙어가는 표시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젊지 않다는 것은 상대적이며, 마음이 오래 될수록 이전의 많은 존재들로부터 얻어온 힘이 그만큼 더 많기 때문에, 몸의 젊음과 활기와 유연성은 더 잘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멀포드의 생각을 풀어보면 독서와 사유를 통하여 선각자들의 깨우침을 공부하고 마음을 다스려나가면 정신이 건강해지고 결국은 몸의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사상주의가 성경과 기독교에서 출발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사상운동은 신(God)의 의지를 배우고 그 의지의 활동에 협력하는 것을 통한 치유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신중심적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중심주의적이기 때문에 제도권 종교계에서는 이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영은 신, 즉 무한한 힘 혹은 위대한 신이 깃든 영의 일부이다.(183쪽)”라고 한 멀포드는 신을 정의하여 “최고의 능력과 최고의 지혜가 우주를 지배한다. 최고의 마음은 측량할 수 없고, 무한한 공간 안에 충만한다. 최고의 지혜, 최고의 능력, 최고의 지성이 원자로부터 행성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안에 있다.(28쪽)”면서 모든 것들이 신의 무한한 영혼의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모든 것들이 자신들 안에 선 혹은 신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신을 특정 종교에 국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는 멀포드의 메시지가 담긴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는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와 갈망은 수 세기 동안 확장되었고 증가되었다. (…) 인간의 삶과 그것이 관여하는 모든 것 속에서 새로운 빛, 새로운 지식, 새로운 결과가 이 땅에 도래하고 있다.(270쪽)” 물질적인 것에 매달려 정신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는 우리에게 한 세기 전을 살았던 선각자가 주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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