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 인생의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삶, 그 축복과 고통의 시간들
질 프라이스, 바트 데이비스 지음, 배도희 옮김 / 북하우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기억에 대하여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점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듭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을 기억이라는 저장소에 어떻게 갈무리해 넣고, 또 필요할 때 끄집어내는지 알 듯 모를 듯합니다.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하는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현대의 남성이 과거의 남성보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는 점을 적고 있는 피터 매칼리스터의 <남성퇴화보고서; http://blog.joins.com/yang412/12812543>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그밖에도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 http://blog.joins.com/yang412/12878043>에 나오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놀라운 기억능력과 한계점을 읽으면서 그야말로 픽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심리학자 루리야가 보고한 기억술사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http://blog.joins.com/yang412/13176657>에서는 그토록 놀라운 기억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실존한다는 점과 함께 그 역시 입력된 기억들이 서로 충돌해서 엉키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리야의 연구대상이 되었던 남자 S는 기본적으로 뛰어난 공감각력을 바탕으로 하여 주어진 과제를 암기하여 기억에 저장되면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기억능력에도 한계가 있었는데, 이미지가 없는 추상적인 단어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시(詩)에 담긴 은유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 그래로의 이미지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예스24 검색을 통하여 알게 된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는 사람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입니다. 루리야가 쓴 책의 제목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S의 기록과 루리야가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루리야가 쓴 글입니다. 반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주인공 질 프라이스가 구성작가 바트 데이비스의 도움을 받아 기억에 관하여 자신이 겪은 일들을 구술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질은 14세 이후 벌어진 매일의 일상에 대해 완벽에 가까운 자서전적 기억을 가지고 있어, 세계 최초로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tic syndrome)이라는 진단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녀의 기억이 가지는 특징은 하루의 일상이 별도 노력 없이도 저절로 기억이 될 뿐 아니라, 저장된 기억이 샘솟듯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원하면 일부러 기억을 끄집어낼 수도 있었지만, 보통은 자동적으로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에 기억을 떠올리려 억지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억술사라고 부르는 인물들이 나름대로의 기억을 강화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억패턴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억술사들의 일반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늘어놓은 단어나 숫자들을 기억하는 능력이나 학과수업에서 흔히 요구되는 암기에 취약하다는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낙관주의적으로 생각하고 기억하는 긍정적 편향을 가지도록 진화되어 왔다고 합니다. 탈리 샤롯은 <설계된 망각; http://blog.yes24.com/document/7310686>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낙관편향은 미래에 틀림없이 닥쳐올 고통과 고난을 정확하게 지각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인생의 선택권을 제한된 것으로 보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이런 낙관편향을 유지하기 위해 뇌는 무의식적 망각을 설계해두었다. 그 결과, 스트레스와 불안이 줄면서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져 행동하고 생산하려는 동기가 강해진다.(탈리 샤롯 지음, 설계된 망각, 1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 프라이스는 망각이라는 축복을 받지 못한 까닭에 슬픈 기억의 회오리에 휘말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불행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위기에 빠지는 과정, 당뇨를 앓던 남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 등입니다. 그와 같은 고통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긍정적인 기억을 선별하는 능력은 내 마음의 작용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163쪽)”

 

신경심리학적으로 그녀는 시각적 영역과 언어적 영역의 기억력이 뛰어나고 주의집중능력도 좋으나, 인지능력이 보통사람들의 패턴과는 다르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기억력이 뛰어나지만 학업수행이나 학문적 영역에서는 문제가 많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 캠퍼스의 심리학연구팀과 함께 기억이 저장되고, 저장된 기억을 회상하는 기전의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특별한 능력이 우리의 삶과 밀접한 기억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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