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3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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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소설에 관한 성찰을 에세이형식으로 발표해왔습니다. 1986년 <소설의 기술>이 그 첫 번째 에세이집이고, 1993년에는 <배신당한 유언들>을, 2005년에는 <커튼> 그리고 2009에는 <만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설의 기술>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출판사에서는 “밀란 쿤데라는 이 작품을 통해 소설이란 “아직도 인간이 삶과 부대낄 수 있게 해 주는 마지막 보루”라고 말하며, 이론가도 철학자도 아닌, 단지 한 소설가로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이라는 장르, 그리고 ‘소설 쓰기’라는 행위에 대한 쿤데라의 생각과 철학을 한 권에 담은 이 책은 그의 작품을 보다 새롭고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해 주는 초석이 될 것이다.“라고 요약하였습니다.

 

<배신당한 유언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08823>에서 쿤데라는 라블레를 시작으로 세르반테스, 발자크, 프루스트, 카프카 그리고 헤밍웨이 등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작가의 사유는 문학의 범위를 넘어 작곡, 음악, 번역, 지휘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서로 연관을 짓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쿤데라는 카프카와 그의 작품에 대한 내용을 적지 않게 담고 있는데 다음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카프카의 소설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것들을 소설 읽듯이 읽는 것뿐이다. K라는 등장인물에게서 저자의 초상을 찾는다거나 K의 말들에서 암호화된 신비한 메시지를 찾으려 들 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동거지, 그들의 말, 그들의 생각을 주의 깊게 좇으면서 눈앞에서 상상해 보는 것 말이다.(배신당한 유언들, 311쪽)”

 

저자는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에세이집 <커튼>에서 “객관적인 미적 가치의 가정만이 예술의 역사적 진화에 의미를 부여한다.(14쪽)”라는 구조주의 미학자 양 루카로프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의 역사는 그 연대기적 연속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거대한 작품 창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톰 존스>를 쓴 헨리 필딩을 소설의 시학을 생각해낸 최초의 소설가들 중 하나로 지목하여 소설의 미적 가치에 관한 역사적 흐름을 <커튼>의 1부 ‘연속성의 의식’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세계문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세계문학의 커다란 흐름은 문학적 성과가 축적되어 온 커다란 국가들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문학적 성과가 세계문학계에 활발하게 소개되지 못하는 관계로 소외되고 있는 작은 국가들이 세계문학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쿤데라는 보헤미아라고 부르는 중부유럽의 문화적 전통을 강조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어, 역시 세계문학의 외곽을 떠돌고 있는 우리문학계를 고려한다면 관심이 끌리는 것 같습니다.

 

3부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기’에서 저자는 소설은 모름지기 사물의 핵심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구절입니다.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다.(97쪽)” 흔히 소설가 역시 역사의 흐름을 기록하는 역할을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저의 생각을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소설가를 매혹하는 역사란, 인간 실존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뜻밖의 가능성들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다.(97쪽)”

 

4부의 제목은 ‘소설가란 무엇인가?’입니다만, 저자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정의를 한 줄로 요약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브로흐, 플로베르, 프루스트, 세르반테스 등을 빌어 소설가를 에둘러 설명하고 있습니다. 5부 ‘미학과 삶’에서는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서 불꽃 튀는 대결을 보여주는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손에 잡힐 듯해서 시간을 두고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주인공은 서로 대립한다. 각각은 부분적이고 상대적이지만 그 자체로만 보면 전적으로 옳은 진리에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진리의 승리를 위해서는 상대편을 완전히 파괴해야만 한다. 이처럼 두 주인공 모두 정의로우면서 동시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161쪽)”

 

정리를 하면, <배신당한 유언들>에 이어 플로베르, 발자크, 도스토엡스키, 프루스트로 성찰의 폭을 넓혀 유럽 소설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조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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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고양이 - 과학의 아포리즘이 세계를 바꾸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박규호 옮김 / 들녘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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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후쿠오카 신이치교수가 쓴 <생물과 무생물 사이; http://blog.joins.com/yang412/10012343>에서 적지 않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인용한 에르빈 슈뢰딩거교수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com/yang412/12962410>를 읽고 긴 리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짧은 탓에 수박 겉핥기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생명현상에 대한 슈뢰딩거교수의 탁월한 설명에 감동했습니다. 신이치교수의 책을 즐겨 읽게 되는 것은 어렵기만 한 생명과학 이야기를 일상에서 만나는 현상과 잘 버무려서 쉽게 설명하는 특유의 글쓰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연이 닿아서였을까요? 또 다른 경로를 통해서 슈뢰딩거교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교수가 쓴 <슈뢰딩거의 고양이>입니다. 어떤 독자께서는 고양이에 관한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고 적기도 했습니다만, ‘과학의 아포리즘이 세계를 바꾼다’는 부제를 보면 내용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피셔교수는 ‘케플러의 난제’를 들고 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서 신이치교수님의 글쓰기를 예로 든 것처럼, 자신의 전문분야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은, 그 분야를 연구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들 이야기합니다. 태양계의 행성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많은 관측의 결과를 바탕으로 어렵게 계산해낸 결과로 “행성의 궤도는 타원형이다.”라는 케플러의 제1법칙을 정리해냈지만, 그 내용을 간결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는데서 ‘케플러의 난제’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케플러의 난제’란 대중에게 과학을 소개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의미의 경구입니다. 저 역시 2008년의 제2차 광우병파동을 겪으면서 절감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보이려고 고안한 실험이라고 합니다. 실험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고양이가 상자 속에 갇혀 있다. 이 상자에는 방사성 핵이 들어있는 기계와 독가스가 들어있는 통이 연결되어 있다. 실험을 시작할 때 한 시간 안에 핵이 붕괴할 확률을 50%가 되도록 조정한다. 만약 핵이 붕괴하면 독가스가 방출되어 고양이가 죽는다.(12쪽)” 슈뢰딩거는 이 상황에서 파동함수의 표현이 고양이가 살아 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의 결합으로 나타내는 것을 비판하며, ‘죽었으며 동시에 살아 있는 고양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며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물리학에서 관찰하는 현상을 생명과학과 연결하여 증명하려는 시도가 적절한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양자역학의 불확실성을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실험으로 설명을 듣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과학사를 전공하고 있는 피셔교수는 과학계에서 전해지는 다양한 아포리즘들을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리학 분야의 아포리즘은 생물학분야에 비하여 여전히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은 아무래도 물리학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탓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거나 과학계의 뒷이야기도 흥밋거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유전의 기본 원리에 대한 멘델의 실험이 오랫동안 묻혀있던 이유는 당시 과학계의 변방에 속했던 독일어로 논문을 썼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사실은 <식물의 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평범한 제목이 붙은 그의 논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멘델이 유전학의 시조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자연과학자 윌리엄 베이트슨이 멘델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멘델이 독일어로 애매하게 표현된 내용을 모두 명료한 언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역시 번역은 창작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깨닫게 되는 대목입니다.

 

막스 프랑크가 착안한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생각을 바꾸게 만든다고 해서 곧바로 관철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대자들이 서서히 모두 소멸하고 처음부터 그 진리에 익숙한 나중 세대가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서 가능하다.(304쪽”는 프랑크의 원리를 발견한 것도 이 책을 읽은 소득이라고 하겠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에는 수많은 과학의 아포리즘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답을 구하지 못한 문제가 있으시다면 이 책에서 답을 구하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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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남자를 살린다 - 가슴으로 울고 있는 중년을 위한 마음 처방전
이홍식 지음 / 다산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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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게 되는 동기도 다양해지는 것 같습니다. <눈물은 남자를 살린다>는 같이 근무하시는 분이 읽어보았느냐고 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특히 ‘눈물’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끌어당겼던 것 같습니다. 남자도 눈물을 흘려야 할 때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이야기는 합니다만,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은 우리 사회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합니다. 대체적인 상황이 그러한데, ‘남자가 눈물을 흘려도 좋다.’는 정도를 넘어서 ‘눈물이 남자를 살린다.’고 부추기는 느낌을 담고 있는 제목을 단 책이니 관심이 커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세브란스병원에서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오랫동안 치료하며 명성을 쌓으신 이홍식교수님께서 진료경험을 담아내신 것이라고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약물치료 중심의 정신과치료에 감성치료법을 도입하여 삶에서 오는 정신적 갈등을 근원적으로 치료해오셨다고 합니다. <눈물은 남자를 살린다>는 특히 고달프로 거친 삶의 현장에서 투쟁하듯 살아온 중년의 남성들에게 들려주는 치유의 메시지를 담아내셨다고 하겠습니다. 저자께서 이들에게 관심을 두게 된 이유의 한 대목입니다. “오늘날 중년들은 압축성장의 산업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무한 경쟁을 당연시해온 결과로 주위와 가족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세대이다. 아니 어쩌면 자회구조가 돌아보지 못하게 만든 첫 희생양인지도 모르겠다.(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 이들이 사회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을 위로하는, 아니 자신을 위로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고 토로하고, 이 책을 통해 이 시대 아버지들이 용기와 자신감을 얻는데 도움이 되기를 진정 바란다고 적었습니다.

 

저자는 진료실에서 만난 환자들의 호소하는 정신건강상의 문제를 풀어낸 방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첫 번째 화두는 ‘울고 싶을 땐 울어라’입니다. 울고 싶을 정도로 응어리진 마음을 울어서 풀지 않으면 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적은 것처럼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일터에 집중하다보면 가족을 돌보는 일이 뒷전으로 밀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아내가 화를 내는 이유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질곡의 세월을 건너다보니 집안에서 설 자리가 없어져가고 있다는 냉혹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혼신을 다했던 직장에서도 퇴물취급을 받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상황을 만든 것도 자신일 터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 탓으로 돌리는 남성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특히 중년에 이르면 매사가 젊었을 때처럼 빠르게 처리되지 않는 것은 사실 신체의 노화로 인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여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던 갱년기가 남성들에게도 나타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남성들은 자신에게 갱년기가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젊었을 때와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흡연과 음주를 피하고, 주기적인 운동과 휴식을 취하는 규칙적인 생활습관만으로도 남성 갱년기를 가볍게 지나가게 할 수 있다.(48쪽)”고 저자는 권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몇 년전부터 바꾸고 있는 생활습관입니다만, 해보니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두 번째 화두는 ‘피로사회의 덫, 벗어나야 산다.’입니다. 첫 번째 글은 회사는 나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절대공감하는 바입니다. 내가 사라지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하던 일이라도 그 사람이 없어도 돌아간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언제든 놓을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열정과 힘이 남아 있을 때, 자신을 원하는 곳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원하는 곳이 없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마지막 화두는 ‘이 삶이 다하도록 사랑해야 산다.’입니다. 역시 사랑이 모든 갈등과 어려움의 해결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감싸는 가족이야말로 좋은 치유사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군요. 이야기들 사이에 넣은 사진들은 저자가 직접 찍은 풍경들인 듯한데,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가라앉는 느낌이 듭니다. 삶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고 있는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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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처럼 울고, 신화처럼 사랑하라 - 신화 속에서 건져올리는 삶의 지혜 50가지
송정림 지음 / 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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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제작에 참여했던 작품들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장 아누이가 다시 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입니다. 70년대라는 특별한 사회적 배경도 작용을 했겠습니다만, 당시 제작진의 분위기는 안티고네 편에 섰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과연 클레온의 결정이 틀린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 사회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신화는 어쩌면 그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사조(思潮)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안티고네>의 원전이라고 할 그리스 신화로 거슬러 가면, 오늘날 우리의 삶과는 괴리가 느껴지는 면도 있고,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그 인물들이 저지르는 행동들은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신화속의 인물이 하는 행동이 정답이 아닐 수 있는 것이라서, 오히려 그들이 밟은 길과는 다른 결정을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신화의 재해석이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를 재해석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225533).

 

송정림 작가의 <신화처럼 울고, 신화처럼 사랑하라>는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하는 공부로 읽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신화는 어느 나라에나 다 있지만, 그리스신화만큼 상상력이 넘치는 신화도 드물다고 생각하고, 그리스 신화를 중심으로 작가가 느끼는 삶의 단상을 붙여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신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읽고 참고했다고 합니다. 읽어보니, 희망, 사랑, 욕망, 감성, 그리고 긍정을 키워드에 각각 10꼭지의 이야기를 배분하여 모두 50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신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참고했다고 하셨는데, 역시 제 생각과는 차이가 있는 이야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호기심 많은 판도라가 결국은 제우스가 준 상자를 열었을 때, 인간들의 삶을 피폐케 할 온갖 나쁜 것들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놀라서 상자를 닫는 바람에 희망이 상자 속에 남게 된 것까지는 모든 이야기에서 같은데, 작가가 선택한 결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판도라가 급히 상자를 닫는 바람에 빠져나가지 못한 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전에는 겪지 않아도 되었던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지만, 희망만은 간직하게 되었다.(22쪽)” 사실 희망이 상자 속에 갇혀있어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이죠. 따라서 누군가 상자를 다시 열어서 희망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구절은 꼭 눈에 띄는 지 모르겠습니다맘,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잘츠부르크에 관한 스탕달의 이야기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는 땅속에서 나는 소금으로 유명하다. 그 소금은 숲의 지각 변화에 의해 땅에 묻혔다가 오랜 세월 동안 썩어서 마침내 유익하고 아름다운 결정체인 소금으로 변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땅속에서 오래오래 묻히고 완전히 썩고 나서야 아름답게 승화되는 잘츠부르크의 암염, 그것이 사랑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스탕달은 강조했다.(106쪽)”

 

소금하면 우리는 보통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드는 천일염을 생각합니다만, 세계적으로는 암염의 형태인 소금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땅속에 엄청난 양이 소금이 묻히게 된 것은 지각활동 덕분입니다. 옛날 바다였던 곳이 융기하면서 만든 분지에 고인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남은 소금이 굳어진 것이 바로 암염입니다. 숲이 지각변화로 땅메 묻히고 썩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아마도 스탕달이 잘못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오만해진 인간이 신에 도전하는 경우는 잔인할 정도로 신의 복수를 당하게 됩니다. 페가수스를 타고 올림포스에 오르려했던 코린토스의 왕자 벨레로폰이나, 열 두 아이를 가진 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힘들게 두 아이를 얻은 레토여신을 비방한 니베아가 당한 끔찍한 일은 어렵지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도시가 불타는 꿈을 꾸면서 출산했다는 이유로 버려진 파리스가 결국은 트로이의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는 정도는 그래도 약과라 하겠습니다만, 특히 자식이 아버지를 살해할 운명이라는 신탁을 내리는 바람에 생긴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보면 신은 무슨 이유로 그런 신탁을 내린 것인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심심풀이로 연못에 던진 돌에 연못에 사는 개구리가 맞아죽어도 된다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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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의 역사 - 역사 속 억압된 책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
베르너 풀트 지음, 송소민 옮김 / 시공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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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스터리 소설 <나사의 회전; http://blog.joins.com/yang412/13259819>은 유령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돌려가며 하는 모임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을 빌고 있습니다.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 친했던 이야기꾼 친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방과 후 학교 뒷동산에서 놀다 지친 친구들을 모아 학교 우물에서 나온다는 귀신 이야기를 연속극처럼 이어가곤 했습니다. 이야기는 수학여행길의 어느 날 밤, 경주의 한 여관방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이날 새로 듣게 된 동무들을 위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지만, 효과음까지 넣어가며 띄운 음산한 분위기에 다시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한다면서 이불장에 숨었던 동무 하나가 결국은 공포에 질려 튀어나오는 바람에 동무들이 모두 깔깔거리고 웃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한번 들은 이야기를 잘 전하는 이야기꾼이 있기 마련입니다. 피터 매칼리스터는 <남성퇴화보고서; http://blog.joins.com/yang412/12812543>에서 서사시를 구전하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구슬라르(1현 현악기인 구슬라로 반주하며 이야기에 가락을 붙여 노래하는 세르비아의 가수 집단으로 서사시의 구비전승을 지켜온 사람들)에 대하여 적고 있습니다. 구슬라르 집단은 20세기까지도 이어졌다고 하는데, 최후의 구슬라르 가운데 도축업을 하는 아브도 메데도빅씨는 문맹인데도 불구하고 59개의 서사시를 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외우는 서사시를 글로 옮기면 35만 476행에 달하는 놀라운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메데도빅씨는 처음 듣는 노래도 빨리 배우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2294행의 시를 단지 한번 듣고서 자유자재로 불렀을 뿐 아니라 원곡의 서술에 충실하면서도 6313행으로 늘이기까지 했다는 점입니다.

 

음유시인이라고 할 구슬라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오늘 이야기할 베르너 풀트(Berner Fuld)의 <금서의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책을 불태워도 한번 읽고 기억해서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꾼이 있는 이상 금서의 효과가 있을까 싶습니다. 이 책을 쓴 베르너 풀트는 독일의 유서깊은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나서 문학사와 예술사를 전공하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전기와 사전, 일화 등을 저술해왔습니다. 다음 국어사전에는 ‘금서’란 “읽지 못하도록 출판이나 판매를 금지한 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대부분의 이념서적들을 금서로 묶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책이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부작용(?)을 가지고 오더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념서적은 아니었습니다만, 당국이 금하던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책을 익명으로 썼던 분이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에서 일하기도 했으니 이제는 문제가 될 것도 없을 것 같아서 공개합니다. 사실 금서로 인한 진짜 큰 부작용은 해당 책의 관점을 지지하는 매니아들만 공유하고 그런 생각을 키워나갈 뿐, 그 책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들이 커나갈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금서사건으로는 중국의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폭정에 대한 학자들의 비판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민생과 직결된 의약, 점복, 농업에 관한 것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심지어는 유생(儒生)들까지도 생매장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사건을 진시황만 저질렀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금서의 역사는 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지적까지도 수용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지도자가 다스리던 태평성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심지어는 그런 일을 원천봉쇄하려는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지도자도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책을 쓰지 못하게 하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겠는데, 실제로는 폭압적 조처에 반발하는 지식인들은 꼭 있기 마련입니다.

 

저자는 요한 아담 베르크가 1799년에 쓴 <책읽기의 기술>의 한 대목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책을 금지하는 일은 금지다. 그 일도 정당하다면 세상에 결실을 거둘 만한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 중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전달하고 그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발언권에 대한 침해는 그것이 무엇이든 금지다.(5쪽)” 주목할 점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선’이라는 단서 조항일 것 같습니다. 사실 금지된 책을 쓰는 일은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자가 “우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금서의 절멸을 막기 위해 빈번히 생명의 위험에 처했을 무명의 남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책뿐만 아니라 그들의 용기에 더 큰 신세를 졌다.(7쪽)”라고 감사를 표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금서 조치를 내리는 주체는 권력을 쥔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의외로 다양하다는 사실을 <금서의 역사>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또한 지금은 고전의 반열에 올라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 한때는 금서로 묶어 탄압을 받은 것도 적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심지어는 금서로 묶인 이유가 얼토당토하지 않다거나, 혹은 금서로 묶이는 바람에 오히려 유명세를 타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말로 치면 노이즈 마케팅에 해당된다고 할까요?

 

생각 같아서는 권력자로부터 탄압을 받은 작품을 화제로 삼을 만도 한데 저자는 작가 스스로 금서로 묶었던 책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법정스님께서 2010년 입적하시면서 ‘사후에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그분의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무소유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미 세상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생각들을 회수할 수 없다면 출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글쓰는 사람이 써둔 글을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이유도 다양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첫머리에서 인용하고 있는 영국의 화가 겸 시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사랑하던 여인이 죽자 슬픔에 휩싸여 자신이 써놓은 모든 시의 유일한 원고를 상자에 넣어 그녀의 무덤에 같이 묻었지만 세월이 흘러 슬픔이 엷어지게 되자, 그녀의 무덤을 도굴하여 원고를 꺼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생전에도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태워버리곤 하던 프란츠 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남긴 편지를 통하여 “내 모든 유고 … 일기, 원고, 편지”를 “읽지 말고 남김없이” 불태워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는데,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브로트 덕분에 우리들은 카프카의 명작 <성>, <소송>, <실종자> 등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작가의 사적 소유의 범주라고 할 원고를 스스로 없애는 경우, 작가의 팬 입장에서나 혹은 작가를 연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두 번째로 고른 금서의 영역은 종교계입니다. 로마문화의 전성기를 이룩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의 금서에 관한 내용입니다. 당시 주옥같은 고전이 쏟아져 나오게 된 배경에는 인기 없는 작가들을 단호하고 가차 없이 축출하고 작품까지 폐기하도록 한 조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특히 기원전 12년 말에는 정치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지만, 2,000권이 넘는 신탁서와 예언서를 압류해서 불태웠다고 합니다. 군사령관으로서 외부정치를 결정하는데 있어 민중들이 신탁서나 예언서를 바탕으로 이론(異論)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강남 번화가에 가면 타로점을 비롯하여 개인의 미래를 알려주는 점을 치는 카페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미래를 궁금해 하는 것은 그 뿌리가 깊다고 하겠습니다. 한편 교회 역시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과 예언을 반론 없이 신도들에게 전해야 하기 때문에 과학적 발전 혹은 학문을 빙자한 점성술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어 이런 내용을 담은 책들을 탄압하기에 이르렀는데, 세속의 정부가 교회에 동조하게 된 것은 앞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예처럼 점성술은 때로 정치적 예언을 다루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움베르코 에코는 <장미의 이름; http://blog.joins.com/yang412/12895088>에서 금서를 숨기는 이상적인 장소로 도서관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에코는 수도원에 있는 도서관이 심지어는 수도사들마저도 읽어서는 안되는 금서를 감추는, 일종의 정보를 왜곡시키는 곳이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 장서관은 원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다만 이제는 그 서책을 묻어버리고 있구나.(장미의 이름 2권, 712쪽)” 이처럼 금서를 숨겨 독자로부터 차단하는 방법도 있지만, 저자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금서를 몰수하여 태우는 분서(焚書)라는 적극적인 정책적 행위가 이어져 왔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1920년 저급한 에로스 문학을 파기하는 대신 독자로부터 ‘분리’보관하는 정책을 채택한 독일 바이에른주 국립도서관장리 “에로스 문학 서적은 문화의 단면에 대한 철저한 시대사적 평가를 위해 여전히 큰 가치가 있고, 어떤 서적은 예술적으로도 의미가 충분하므로,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분리’구역에 보관되어야 한다.(91쪽)”라고 한 견해와 함께 “각각의 서적들이 금지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검열연구가들의 견해까지 인용하면서 이러한 파괴적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금서의 이유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도 궁금한 사항입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주로 영혼의 구제와 권력 유지에 대한 근심이 교회와 정부에 의하여 자행되어 온 금서의 근거였는데,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진보를 위하여 봉건의 잔재를 지우려고 관련된 책들을 불태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흑인노예들이 성경을 읽게 되면 노예제도에 반대하게 될 것을 우려한 미국 대륙의 노예소유주들의 성경읽기 반대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히틀러의 제3제국은 단지 유태인에 반대하기 위하여 금서조처를 내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시민운동가 앤서니 컴스톡은 사회의 도덕성을 위협할 수 있는 책들을 금지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지금도 대부분의 국가에 그 흔적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한편 저자는 체계적으로 금서를 해온 대표적 집단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들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1559년 금서목록을 처음 발표하였는데, 일종의 블랙리스트라고 할 금서 목록은 1544년 소르본대학의 신학부가 여섯 가지의 위험한 도서목록을 발표한 것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파스칼, 데카르트, 칸트, 프리드리히 대제,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하이네, 발자크, 레오폴드 폰 랑케, 시몬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 등, 로마의 금서목록에 올라 있는 서적을 보자면 마치 세계문학 사전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154쪽)”고 적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찰스 다윈의 저서 <자연선택에 따른 종의 기원>은 로마 가톨릭의 금서목록에 올라있지 않다고 합니다. 교리로 하고 있는 창조론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진화이론을 지지하는 과학계와 갈등을 빚고 있는 기독교계와는 달리, 로마 가톨릭은 진화론과의 충돌을 피하는 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불거진 진화론과 창조론의 갈등은 미국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1925년 테네시 주 하원은 침례교도인 의원의 제안으로 생물수업시간에 창조설에서 벗어난 학설을 가르칠 경우 벌금을 물린다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진화론과 창조론은 법정에서 맞붙기도 했다고 합니다.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제소된 교사를 변호한 클라렌스 대로가 ‘학문 대 믿음’이라는 법정전략으로 승소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합니다.

 

어쩌면 최근까지 남아있는 금서대상은 외설시비에 걸린 책들일 것 같습니다.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는 이유로 금서판정을 교묘하게 피해갈 여지가 있습니다만, 외설과 예술의 경계를 나누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대한 자료를 인용하고 있어 읽는 흐름이 깨지기도 합니다만, 역시 비밀에 대한 호기심은 책읽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계실 것 같습니다. 금서의 비밀을 캐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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