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3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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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소설에 관한 성찰을 에세이형식으로 발표해왔습니다. 1986년 <소설의 기술>이 그 첫 번째 에세이집이고, 1993년에는 <배신당한 유언들>을, 2005년에는 <커튼> 그리고 2009에는 <만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설의 기술>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출판사에서는 “밀란 쿤데라는 이 작품을 통해 소설이란 “아직도 인간이 삶과 부대낄 수 있게 해 주는 마지막 보루”라고 말하며, 이론가도 철학자도 아닌, 단지 한 소설가로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이라는 장르, 그리고 ‘소설 쓰기’라는 행위에 대한 쿤데라의 생각과 철학을 한 권에 담은 이 책은 그의 작품을 보다 새롭고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해 주는 초석이 될 것이다.“라고 요약하였습니다.

 

<배신당한 유언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08823>에서 쿤데라는 라블레를 시작으로 세르반테스, 발자크, 프루스트, 카프카 그리고 헤밍웨이 등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작가의 사유는 문학의 범위를 넘어 작곡, 음악, 번역, 지휘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서로 연관을 짓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쿤데라는 카프카와 그의 작품에 대한 내용을 적지 않게 담고 있는데 다음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카프카의 소설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것들을 소설 읽듯이 읽는 것뿐이다. K라는 등장인물에게서 저자의 초상을 찾는다거나 K의 말들에서 암호화된 신비한 메시지를 찾으려 들 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동거지, 그들의 말, 그들의 생각을 주의 깊게 좇으면서 눈앞에서 상상해 보는 것 말이다.(배신당한 유언들, 311쪽)”

 

저자는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에세이집 <커튼>에서 “객관적인 미적 가치의 가정만이 예술의 역사적 진화에 의미를 부여한다.(14쪽)”라는 구조주의 미학자 양 루카로프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의 역사는 그 연대기적 연속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거대한 작품 창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톰 존스>를 쓴 헨리 필딩을 소설의 시학을 생각해낸 최초의 소설가들 중 하나로 지목하여 소설의 미적 가치에 관한 역사적 흐름을 <커튼>의 1부 ‘연속성의 의식’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세계문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세계문학의 커다란 흐름은 문학적 성과가 축적되어 온 커다란 국가들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문학적 성과가 세계문학계에 활발하게 소개되지 못하는 관계로 소외되고 있는 작은 국가들이 세계문학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쿤데라는 보헤미아라고 부르는 중부유럽의 문화적 전통을 강조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어, 역시 세계문학의 외곽을 떠돌고 있는 우리문학계를 고려한다면 관심이 끌리는 것 같습니다.

 

3부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기’에서 저자는 소설은 모름지기 사물의 핵심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구절입니다.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다.(97쪽)” 흔히 소설가 역시 역사의 흐름을 기록하는 역할을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저의 생각을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소설가를 매혹하는 역사란, 인간 실존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뜻밖의 가능성들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다.(97쪽)”

 

4부의 제목은 ‘소설가란 무엇인가?’입니다만, 저자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정의를 한 줄로 요약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브로흐, 플로베르, 프루스트, 세르반테스 등을 빌어 소설가를 에둘러 설명하고 있습니다. 5부 ‘미학과 삶’에서는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서 불꽃 튀는 대결을 보여주는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손에 잡힐 듯해서 시간을 두고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주인공은 서로 대립한다. 각각은 부분적이고 상대적이지만 그 자체로만 보면 전적으로 옳은 진리에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진리의 승리를 위해서는 상대편을 완전히 파괴해야만 한다. 이처럼 두 주인공 모두 정의로우면서 동시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161쪽)”

 

정리를 하면, <배신당한 유언들>에 이어 플로베르, 발자크, 도스토엡스키, 프루스트로 성찰의 폭을 넓혀 유럽 소설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조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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