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 장기려 -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성자, 개정판
손홍규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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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대학동아리 후배들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듣고는 감개무량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가톨릭의대 진료봉사 동아리 성우회가 제14회 MSD청년슈바이처상의 사회활동 의대생부문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료윤리학회와 청년의사신문이 주최하는 <MSD청년슈바이처상>은 ‘한국의 의대생 및 전공의들이 슈바이처 박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치료자 및 연구자로 성장토록 하고자’ 제정된 것입니다. 2년 전에는 작은 아들이 사회활동 의대생부문을 수상하여 같이 기뻐해준 적도 있습니다.

 

성우회는 필자가 의과대학에 다니던 1977년 창설하여 초대회장을 맡았던 진료봉사 동아리입니다. 가톨릭의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하지만 이화의대, 경희대 학생들이 참여한 바도 있습니다. 진료봉사활동을 하는 동아리는 많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졸업을 하면 동아리와 연계된 활동이 뜸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필자가 졸업을 하고 34년이 된 지금까지도 연회비를 거르지 않고 내고 있는 것처럼 이백 명에 가까운 성우회 졸업선배들은 회비는 물론 진료봉사에 참여하여 후배들의 봉사활동을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성우회가 출범할 당시만 해도 이렇도록 면면히 이어져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수상은 성우회의 맥을 이어온 후배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라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진료봉사활동은 주로 종교를 가진 의과대학생들이나 학생회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주된 활동에 더하여 부차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우회는 진료봉사를 주요 활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선후배 사이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계봉사활동은 졸업한 선배들이 대거 참여하는, 그러니까 선배와 후배가 한솥밥을 먹으면서 마음을 터놓는 기회가 되곤 했습니다. 출범할 당시에는 서대문구 구산동에 있는 시립갱생원에서 매주 일요일 진료를 하다가 구산동, 도화동, 명일동 등으로 옮겨가면서 진료봉사활동을 이어갔고, 지금은 개포동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보장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진료봉사활동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고 있지만, 의료의 사각지대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의료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런 분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마음을 가다듬는 것도 좋은 자세라는 생각을 합니다.

 

의학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치료하는 학문이기에 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학의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의료계에도 타인을 위한 선행을 베푸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자신이 한 행동을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그와 같은 미담을 발굴해서 사회에 전하는 역할을 하는 분들도 제 몫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리와 비행만을 발굴하여 전하고 있기에 의료계는 세인들의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아픈 사람들을 위한 삶을 실천하신 장기려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손홍규작가의 <청년의사 장기려>를 소개합니다. 평전이나 위인전이 아닌 소설이라서 딱딱한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젊은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기려선생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10년이 되고 있어 그분의 정신이 의료계에 면면히 살아있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기려선생은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에 백인제교수를 사사하여 외과를 공부하였으며,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백인제교수의 뒤를 이어 경성의전에서 교수직을 맡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평양에 있는 연합기독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장기려 선생의 청장년기는 일제 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우리사회가 격동하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남북이 서로 다른 이념으로 충돌을 빚기까지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환자를 우선 생각하는 그의 원칙은 변함이 없었고, 그런 모습은 때로 좌우의 오해를 받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작가 역시 쉽지 않았을 이야기를 잘 정리해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생은 학문적으로도 진료와 학문을 병행하여 1940년 나고야제국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43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간암환자에서 간의 일부를 절제하여 간암을 수술로 치료하는데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역시 간암 환자에서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했습니다. 1947년에는 평양의과대학에서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외과 교수를 맡았지만, 1950년 12월 한국동란의 혼란 중에 처자를 두고 차남 장가용(張家鏞)과 함께 월남하였고,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의료를 통하여 사람에게 봉사하는 삶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우면서 그의 봉사는 꽃을 피웠다고 하겠습니다.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풀면서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진료해주었습니다. 1968년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였으며, 1976년 청십자의료원을 설립하여 환자 진료를 계속하였습니다.

 

소설 <청년의사 장기려>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그의 삶을 조명하는데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외과의사로 활동한 선생님의 발자취를 뒤쫓는 작업이었기에 그가 처음으로 맡은 단독수술을 성공리에 마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담석에 의한 통증을 한약으로 다스리던 환자가 급성담낭염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응급상황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았던 것입니다. 당시 의료계는 “아무리 한의학이 수천 년의 역사를 지녔다 해도, 결국 이성이 결여된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8쪽)”라고 인식하는 분위기였지만, 장기려선생은 “한의학의 근본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만성적인 질병에는 효과적이지만 이런 급성환자에게는 맥을 못 춘다.(16쪽)”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근래 한의계에서도 의과의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정책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의료기기를 통하여 얻은 정보를 한의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 원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송도고보 시절 조만식선생이 주창한 산업입국론에 마음을 두었던 선생은 여순공과대학에 입학원서를 넣었지만, 낙방을 하고 말았답니다. 이 무렵 선생 집안의 주치의였던 종기의 박의원이 전해준 함경도 영흥의 에메틴 사건은 청년 장기려의 마음에 의학에 관심을 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함경남도 영흥에서 퍼진 폐디스토마 치료에 나선 일본인 공의가 환자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투여해야 할 에메틴을 마구잡이로 주사한 결과 6명이 사망하고 93명이 심한 약물중독 증세를 보였던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감기로 인한 폐렴이라고 발표해서 사건을 묻으려던 총독부 위생과의 의도와는 달리 한성의사회 소속 의사들이 파고드는 바람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선생을 결정적으로 의학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송도고보 동창 김주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의사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상황이었는데, 김주필 역시 같은 상황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주필은 어머니의 죽음을 지킨 장기려선생에게 의사가 되면 ‘가난한 사람들을 모른 척하지 않겠다(79쪽)’는 약조를 제안합니다. 김주필에게 약속한대로 장기려선생은 의사가 되려고 작정하게 되었고, “만약 제가 의사가 된다면 의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라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이 서원은 그로 하여금 경성의전의 외과학교실 교수직을 맡아달라는 백인제교수의 은근한 제안이나, 고등관에 해당하는 대전도립병원 외과과장직을 사양하고 평양의 기독연합병원 외과를 선택하게 만듭니다. 이런 장기려선생의 선택을 두고 백인제교수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열 명의 제자를 키웠으면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바치겠다는 녀석도 한 놈쯤은 있어야 정상이야. 그 녀석이 바로 자네라서 더욱 좋아. (…)좋은 자리를 내팽개치고 좋아하는 녀석도 아마 자네가 유일할 걸세.(161-2쪽)”

 

당시 평양은 배급제가 시행되고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뛰고 있었습니다. 일부 일본군과 관청에 줄을 대 호의호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도시 곳곳에 빈민굴이 넘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은 병원을 쉬는 날이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칠성문 밖 빈민촌과 용산면의 빈민촌을 찾아 무의촌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도성 안 사람들과는 달리 줏대와 자존심을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 내내 버린 자식 취급을 받던 평양사람들은 손으로 대동강물을 거슬러 떠먹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강물을 거슬러 떠먹는 사람들’이라고 일컬었던 것은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자부심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평양은 많은 것들이 부족해지면서 죽음이 일상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차원을 넘어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세상이 되어버렸던 것인데, “대동강과 보통강, 혹은 마을을 관통하는 개천에서마자 가난을 이유로 버리진 젖먹이들이 발견되었고, 늙은 부모의 봉양을 포기하고 자식들이 도망간 초라한 초가집은 곧바로 무덤이 되었다. 평양은 점점 묘지가 되어가고 있었다.(212쪽)”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간질환을 전문으로 하던 선생에게 황달이 찾아왔습니다. 신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평양을 떠나 묘향산에 머물던 중에 해방을 맞은 선생은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평양으로 돌아왔고, 소련군이 진주한 가운데 현준혁이 주도하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위생과장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평양은 이내 혼돈에 빠지고 말았는데, 추수한 곡식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해방 전에는 50퍼센트 많게는 90퍼센트까지 가져가던 지주에게 30퍼센트만 주도록 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지주들로 구성된 기독교인들과 대부분 소작농과 노동자로 구성된 공산당원들이 충돌을 빚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치와 담을 쌓고 살아온 장기려선생이지만 그의 명성이 필요했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선생에게 제1인민병원의 원장을 맡겼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도였던 선생이 병원장을 맡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당국의 속셈대로 병원장직을 물러났는데, 이번에는 김일성대학에서 외과학 강좌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생이 평양에서 진료를 시작할 때부터 교류하던 함석헌선생께서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월남하기 직전에 만난 것이 그 무렵입니다. 평양이 돌아가는 사정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은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떤 사상이나 주의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마세요. 인민들이 장 선생을 원하고 있는데, (…) 사람들의 가슴속이 바로 장선생의 고향이요 머물 곳입니다.(303쪽)”라고 한 함석헌선생의 조언이 의미하는 것처럼 자신을 찾는 환자들도 한 몫을 했을 것입니다.

 

선생의 대범함은 북한에서 이미 권력의 입지를 다진 김일성의 충수돌기염을 수술하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태연하게 수술을 마친 선생에게 수술하는 동안 손이 떨려 죽는 줄 알았다고 고백한 김일성의 주치의에게 “그건 아마도 선생님께서 환자를 환자로 보지 않고 권력자로 보셨기 때문일 겁니다.(318쪽)”라고 덤덤하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환자중심의 생각을 가진 선생이었기에 6.25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는 국군야전병원과 유엔 민사처병원에서 진료를 하게 되었고, 결국은 평양에서 철수하는 국군을 따라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화나 특무대의 감시를 받던 이야기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결국 손홍규작가는 장기려선생의 삶 가운데 어려운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제가 [북소리]에서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명의식이 사라져가고 있는 이 시대의 의료인들이 그의 삶과 정신을 제대로 읽을 필요가 있겠다싶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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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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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다녀온 이야기를 보건의료인터넷신문 메디칼타임즈에서 [양기화의 ‘이야기가 있는 세계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http://www.medicaltimes.com/Users4/News/NewsList.html?nSection=32). 자료를 찾다가 눈에 띄어 읽게 되었는데, 모두 읽고 나서 횡재를 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1755년 리스본을 강타한 지진에 관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진이 유럽사회에 미친 영향은 물론 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어떻게 재건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덤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에 관한 내용도 잘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리스본을 찾았을 때, 가이드는 당시 지진에서 살아남은 건물이라고는 벨렘탑과 성제로니모 수도원에 불과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진 후의 리스본에 서 있던 모든 건축물이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리스본을 덮친 지진은 요즈음으로 치면 진도 9에 해당하는 엄청난 강도였고, 테호강가에 위치한 리스본에 지진해일까지 덮쳐서 피해가 컸다는 것입니다. 지진 직후에는 당시 리스본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10만명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지나치게 부풀려진 것이라고 보아 2만 5천명정도가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보수적으로 보아도 1만2천에서 1만5천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희생이 컸던 것은 지진이 발생한 시각이 11월 1일 오전 9시 30분으로, 만성절 아침 미사가 막 시작된 뒤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포르투갈 사회는 종교적 관례를 지키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분위기였는데, 의무를 어기는 사람, 곧 미사에 참석하지 않거나 안식일과 축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종교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종교재판소의 공개재판과 처형식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대중적 신앙을 낳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지진이후에 교회는 리스본을 소돔과 고모라로 비유하면서 타락한 도시가 화를 불렀다고 회개하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폐허가 된 리스본을 재건하는 일을 맡은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총리였는데, 그는 앞서 말씀드린 교회의 부축임을 저지하면서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재산권을 지키려는 귀족들과의 충돌도 조정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한 일은 당시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건너온 황금을 보관하던 건물이 지진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데다가 약탈을 막아 온전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리스본은 전 세계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리스본과 연계된 사업을 하던 외국 사람들도 2차 피해를 입은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리스본이 아름다운 도시라고들 말합니다만, 당시에는 ‘리스본에 가보지 않고는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오래된 골목길과 궁전,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성당들이 어우러진 멋진 도시였다고 합니다. 이런 리스본의 모습은 당시에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리스본 재건의 책임을 맡은 카르발류총리는 포르투갈의 수석 도시공학자 마누엘 다 마이어가 맡게 되었는데, 다섯 가지의 계획을 제시하면서 피해가 경미한 벨렘 근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안에 무게를 두었지만, 총리는 피해를 입은 바이샤지구에서 잔해들을 싹 밀어버리고, 잔해를 이용하여 넓은 지반을 다진 후에 ‘새로운 거리를 마음껏 조성하자’는 제안을 채택합니다. 왕실의 운명과 포르투갈의 경제 등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수도 리스본이 간직한 권위와 활기를 되살리는 재건의 기치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지진피해로 좌절한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라 보았다고 합니다. 역시 정치가의 생각은 남다른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좁고 구불구불한 옛 리스본 거리와는 달리 새로운 도시는 지난 번 여행 때 가본 적이 있는 호시우광장과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을 남북축으로 한 격자 모양으로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교회와 귀족들의 발발을 잠재워가면서 리스본 재건공사를 이끈 카르발류 총리의 행정능력은 근대 재난관리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주제왕이 사망하면서 카르발류 역시 실각하여 권력을 남용한 죄목으로 기소되어 처벌을 받았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원한 절대권력은 없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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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코리아 2015 -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2015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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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http://blog.joins.com/yang412/12279779>의 저자 김난도교수가 전공분야를 제대로 살린 책을 내놓았다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비성향의 변화를 매년 추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금년은 양의 해이므로 “소비자의 작고 평범한 일상을, 양을 센다는 뜻을 담아 ‘COUNT SHEEP'이라는 키워드에 담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책의 표지까지도 을미년의 오행에 따른 청양의 이미지를 살려 밝은 파랑인 cyan으로 정했다니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쓰신 것 같습니다.

 

사실 내일을 점치는 일은 주역을 꿰고 있는 분들도 어렵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틀렸을 때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우스개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7년부터 꾸준하게 우리나라의 소비경향을 예측하고 복기하기까지 해오신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서문에 이어 2015년에 예상되는 10대 소비경향의 표제어를 선정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이어서 2014년에 우리나라의 10대 경향 상품을 선정하였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 예상했던 소비경향을 회고하고, 2015년의 소비경향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경향의 표제어를 결정하는데 있어 경향을 수집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 작은 표제어들을 저자들이 정한 금년의 표제어 ‘COUNT SHEEP'에 맞추는 작업을 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햄릿증후군을 ‘Can't make up my mind’, 감각의 향연을 ‘Orchestra of all the senses’, 옴니채널 전쟁을 ‘Ultimate 'omni-channel' wars’ 등입니다. 저자들의 이런 노력의 결과를 보면서 최근 몇 년 동안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건배사 때문에 힘들어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표제어를 만들어내느라 얼마나 머리카락을 쥐어 뽑았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10대 경향상품을 선정하는 과정을 보면,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트렌드헌터 모임의 회원 104명이 각자 10개의 제품을 추천하여 확보한 주관적 자료와 국내 유통사와 언론사에서 발표하는 각종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64개의 후보군으로 압축한 다음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하여 모두 10,750명으로부터 얻은 응답을 토대로 연구원들의 심사를 거쳐 최종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연구원들이 결정하였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해질 수도 있는데, 이런 경향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면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면도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2014년 트렌드상품은 예능의 ‘꽃보다’ 시리즈, 영화 명량, 빙수 전문점, 스냅백, 에어쿠션 화장품, 의리, 컬래버레이션 가요, 타요버스, 탄산수, 해외직구 등입니다. 물론 이 항목들을 선정한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고는 있습니다만, 제가 동의할 수 있는 항목은 영화 명량 정도인 것 같습니다. 제가 우리 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것에 관심이 크지 않은 편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허니버터칩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젊은이들의 관심사가 많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어서 1부에 해당할 2014소비경향을 회고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남는 느낌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우리사회의 동향에 둔감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측했던 경향에 지난 1년의 변화를 맞추어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금을 빼딱한 시선으로 읽었구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2015년의 경향을 예측하는 부분에 대하여는 ‘어디 1년 뒤에 봅시다’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요? 사실을 이런 태도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변화하는 추이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만, 가끔은 날선 시각으로 책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많이 아쉬웠던 점은 우리말은 그저 조사 정도밖에 없나 싶을 정도로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중간중간에 용어를 해설하는 친절을 베풀기도 합니다만, 책장을 넘기면 읽는 내용을 잊기 일쑤인 제 입장에서는 한글과 한문을 같이 써주시면 금방 이해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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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세계사 2 - 피의 여왕에서 금발 미녀의 유래까지, 비정하고 매혹적인 유럽 역사 이야기 풍경이 있는 역사 2
이주은 지음 / 파피에(딱정벌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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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로 이어진 것을 보면 저자의 전작 <스캔들 세계사; http://blog.joins.com/yang412/13563080>가 반응을 얻었던 모양입니다. 역사는 정사보다는 야사가 더 재미있다는 속설이 맞는가 봅니다. <스캔들 세계사 2>에서는 중세와 근세의 유럽에서 있었던 스캔들이라 할 이야기들을 다루었던 전작에서 진일보하여 북미대륙으로 그리고 근현대로 범위를 넓혔다고 합니다.

 

22개의 에피스드를 다루고 있는 <스캔들 세계사2>에서는 금발에 대한 서양의 전통적인 오해와 편견, 왕의 대관식을 연기하게 만든 원인불명의 무시무시한 전염병, 아내를 팔아치워 버리는 기상천외한 이혼법, 어여쁜 튤립 한 송이와 거품경제의 상관관계, 새하얀 웨딩드레스의 유래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거를 따져가면서 인용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비타민D를 흡수하기 힘든 북쪽 지방에서 햇빛을 잘 받으려고 금발이 생겼다는 유래에 관한 설입니다. 비타민D는 피부에 있는 스테롤이 자외선(태양 광선)을 받으면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금발이 비타민D와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맞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작은 유럽사에 나오는 루벤스의 한복입은 남자에 관해서도, 최근에 읽은 이상훈님의 <한복입은 남자; http://blog.joins.com/yang412/13561516>를 읽으면 다양한 이견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조선인 노예설을 단정적으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니 이번에는 질병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고 있어 관심이 가는 대목입니다. 다만 옛날의 질병은 기록만을 바탕으로 현대적으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병명을 정확하게 유추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헨리7세가 대관식을 미루도록 했던 미스터리한 발한병의 경우는 ‘강직(强直), 두통, 현기증, 심한 쇠약감 등의 증상으로 시작되며 1~3시간 뒤에 온 몸이 흠뻑 젖을 정도의 격심한 발한에 심한 두통, 섬망(譫妄), 빈맥(頻脈) 등이 동반된다. 첫 증상이 발생한 뒤 3~18시간 이내에 사망하게 되지만 24시간 이상 견디게 되면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라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서 설명하면서, 재귀열이 아닐까 싶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급성 전염병이라고 해도 잠복기를 지내고 첫 증상이 나타난 뒤 수 시간 이내에 사망하는 치명적 초급성 질환이라고 한다면, 쉽게 확산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세균성질환이라기 보다는 바이러스성질환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유럽의 왕실, 특히 합스부르크왕가의 경우 정략결혼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헷갈리곤 합니다. 따라서 이 책처럼 에피소드별로 이해하는 편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전문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저자 나름대로의 주관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크롬웰에 대한 설명은 시각에 따라서는 그에 대하여 우호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유럽사에서 가장 빠른 시민 혁명을 이루어낸 영웅이라고 칭송하기도 하고 무장봉기를 제압한다는 명목으로 갓난아이를 포함해 무려 2,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독재자가 폄하하기도 합니다.(103쪽)” 아마도 ‘폄하’라는 단어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데...’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구어체가 편하게 읽힌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성로마제곡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을 다시 가져가는 것도 마음 내키는 선택은 아니었거든요.(125쪽)’라던가, ‘...절약 정신을 갖춘 부자로 더더욱 유명했던 헤티 그린 여사 이야기를 시작할게요.(223쪽)’과 같은 문체는 전반적인 문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체가 이 책에 대한 신뢰도를 끌어내리는 요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많은 그림들에 관하여 화가와 소장자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일 뿐 아니라 곳곳에서 본문의 경어체와 다르게 적고 있는 것도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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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
조남진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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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년을 여는 [북소리]를 고르기 위하여 나름 고심했습니다. 여행, 미술, 인물 등 여러 분야의 책을 읽다가 후기 스토아철학을 대표하는 세네카를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지난 해 스페인의 코로도바를 갔을 때 그의 동상을 만났던 것도 인연이 되었고, 지금 우리사회가 도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년도 더 지난 지금과는 시대적 배경이 많이 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덕 가치, 의무, 정의, 굳센 정신 등과 같은 덕목에 중심을 두고 보편적인 우애와 신처럼 넓은 자비심을 강조한 스토아 도덕철학에서 우리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에 요약된 스토아철학의 핵심내용입니다(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3s0914b). “스토아 철학자들이 보기에 영원한 우주질서와 불변적인 가치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은 이성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곧 인간 존재가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성의 빛이란 세계 전체에 경이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여 질서 있게 살아가는 기준이다. 스토아 도덕철학도 세계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이 도시의 충성스런 시민으로서 덕과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앞부분은 쉽게 이해되지만 뒷부분은 다소 거부감이 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로마의 철학자·정치가·연설가·비극작가로 활동하였으며, 로마의 황제 네로의 스승으로 기억되는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기원전 4년에 지금의 스페인 코로도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세네카의 국적이 로마로 표기되는 것은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속주가 아니라 로마의 영토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릴 때 로마로 간 세네카는 연설가 훈련을 받았으며, 스토아주의와 금욕주의적 신피타고라스주의적 성향을 추구한 섹스티의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병에 걸린 세네카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이집트로 갔다가 기원 31년경 로마로 돌아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황제 칼리굴라(재위 기원 37~41년), 클라우디우스(재위 기원 41~54년)와는 불편한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41년에 조카딸 율리아 리빌라 공주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세네카를 코르시카로 추방하였습니다. 하지만 세네카는 거칠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49년에는 황제의 부인 아그리피나가 힘을 써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어서 50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돈많은 여자 폼페이아 파울리나와 결혼했으며, 근위대장이 된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 등과 막강한 교우관계를 맺었습니다. 훗날 황제가 되는 네로의 스승이 되었는데, 덕분에 네로 황제 재위 초기인 54~62년에 동료들과 함께 로마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반정부 음모사건에 연루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황제 네로의 명령을 받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다음 백과 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2s1105b).

 

<세네카>는 서양고대사를 전공하신 조남진교수님이 세네카의 삶과 철학을 정리한 책입니다. 저자는 그리스에서 스토아철학이 태동하게 된 배경으로, “그리스 세계가 정치적 혼돈에 빠졌을 때 개인이 가야 할 길은 본분을 다하는 것과 세계법칙과 우주의 섭리에 따르는 이른 바 금욕적 삶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의무와 내면을 강조하는 스토아철학이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네카와 같은 로마의 지배계층이 스토아철학의 윤리학에 매혹된 것은 당시 로마 지배계층의 타락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네카는 로마의 수도원에서 행하는 금욕주의보다 훨씬 능가할 정도로 개인적인 욕구를 억제했다는데,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철학적 사유와 훈련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7장으로 구성된 <세네카>는 먼저 ‘세네카의 삶과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루고, 이어서 세네카에 있어서 ‘미덕과 현자’의 의미, 세계국가사상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사유, ‘영혼과 양심’의 의미, ‘죽음과 자살’의 의미를 논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네카의 작품 <행복한 삶>과 <도덕의 편지>를 토대로 한 노예관과 재산과 부를 논하고, 마지막으로는 스토아 철학과 세네카의 자연학과 범신론을 정리하여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명망 있는 현자와 도덕론다라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라고 머리말을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세네카에 대한 평판은 그야말로 극에서 극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저 역시 책을 읽어가면서 가끔은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키프로스 키티온 출신인 제논(기원전 333~262)이 에피쿠로스학파가 정한 쾌락의 윤리적 표준이 자연계의 재난과 위험을 초래한다고 생각하고, 쾌락보다는 이성의 표준에 기초한 도덕체계를 확립하면서 스토아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제논은 또한 폴리스적 의식이 완고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체계에 반대하여 특정한 폴리스나 지방제도에서 벗어나 세계를 지향하는 인류의 보편적 윤리를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고유한 국법을 가진 개별국가의 규범에 따라 사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동포이며 같은 시민이기 때문이다.(51쪽)”라는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스토아철학의 이상세계인 세계국가는 로마의 지배계층에 의하여 성립되었지만, 과연 제논의 이상이 제대로 구현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스토아철학의 기본명제는 최고의 선인데, 이는 자제의 덕과 미혹으로부터 벗어나는 행복이라고 한다면 불교의 기본 사상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열정이나 격정 또는 충동으로 마음이 불안해지고 방해받지 않는 냉담과 무관심의 경지, 아파테이아(Aphatheia)에 이른 현자는 최고 선에 도달한 자이며 참 행복을 이룬 자로 신과 동등하다고 여겼다는 것을 보면, 깨달음을 얻는 모든 이가 부처가 된다고 한 불교의 사상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든 스토아철학은 지고한 하느님이 자신들을 신의 존재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초기와 중기 스토아철학은 그리스시대를 배경으로 발전하였는데, 초기 스토아철학이 위선과 형식주의였다면 중기 스토아철학은 관대한 인간적인 포용력과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보다 인간적인 의무를 강조한 규범과 법칙의 확립을 현실의 삶에서 중시했다고 합니다. 로마로 건너간 스토아철학은 영국 역사가 기번이 ‘인류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한 네르바(재위 96~98년),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 하드라야누스(재위 117~138년),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년)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년)로 이어지는 철인(哲人) 5현제 시대의 주요 통치이념이 되었습니다. 후기 스토아철학이라고 부르는 이 시기는 윤리학의 시대로 새로운 세계국가와 인류애 사상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도덕적 목적을 정치적 수단으로 쉽게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불행한 처지의 생활에서도’ 자신의 노력에 의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생의 목적은 곧 미덕의 삶이며 진정한 선은 도덕적 선이며 도덕적 선만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세네카는 욕망은 억제되어야 하고, 공포는 억눌러야 하며, 올바른 행위는 정렬되어야 하고, 부채는 청산되어야 한다는, 네 가지를 완전한 미덕으로 들었습니다. 행복한 인생은 이렇게 절제된 길을 따라감으로서 이루는 것이므로, 완전한 미덕을 갖춘 사람은 불운을 슬퍼하지도, 자신의 운명을 비탄하지도 않고, 오직 탁월함과 위대함을 보일 뿐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확고한 신념을 보이는 어둠 속의 빛과 같이 비치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필연적으로 미덕은 끊임없는 훈련과 교육, 그 실제적 적용을 기본으로 하며, 미덕은 인간만이 이룰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미덕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만이 신적기원을 가지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덕이 교육의 후천적인 결과물이요, 통찰의 문제라고 한다면 악의 원천은 잘못된 판단, 즉 판단의 과오에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네카는 “도대체 선은 무엇인가?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사실에 대한 인식의 결여이다.(92쪽)”라고 했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수용하지 못하고 왜곡하여 수용하고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악의 원천이 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악의 원천을 사회로부터 배제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교육인 것 같습니다.

 

세네카는 성 바울과 같은 시대를 살았고, 서로 교감하고 있었다는 다양한 증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네카는 인간은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행복 또한 그러한 것으로 믿었고, 행복에 필요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은 행복을 신에게 요구하거나 호소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불행하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덕은 우리로 하여금 끈기 있게 고난을 이겨나가도록 하는 힘이기에, 고통을 단순히 참고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용감한 인내인 것입니다. 현자는 우연한 사건으로 생긴 성공과 실패를 자만하거나 좌절하지도 않는 용기의 미덕에 만족하는 존재입니다. 미덕의 가치가 이러했기 때문에 세네카는 죽음까지도 자유의사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한다면 자살은 장렬한 영웅적 행위이며 미덕의 삶의 일부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가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 회피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한다면 이는 결코 영웅적 행위가 될 수 없으며, 현자로서 택할 결정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자살을 예찬한 세네카 역시 “나는 고통 때문에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한다는 것은 패배이기 때문이다. … 고통 때문에 죽는 자는 나약하고 비겁하다. 그렇다고 아픔을 이기며 용감하게 산다고 뽐내는 자 또한 어리석은 자(211쪽)”라고 말했습니다. 세네카는 생명을 지킨 행위를 용기로 이해했고, 자살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책임감을 통찰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민족, 종교, 이념의 차이로 국가가 분열되는 경향이 확산되면서도 서로 섞여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요즈음 스토아철학이 추구하던 세계국가사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스토아철학이 내세우던 세계국가사상은 민족과 국가이성의 일반으로부터 보편적 인간의 문제, 혹은 인간상호문제를 천착했기 때문입니다. 세네카는 『분노에 관하여』에서 “우리가 호흡하고 사람들과 같이 사는 한 인간애를 소중히 생각하고 그 누구에게 두려움이나 위협을 주지말자(129쪽)”라고 역설했다고 합니다. 그는 진정 평화주의를 지향한 전쟁비판론자였던 것입니다.

 

세네카는 육체와 영혼은 동반자이지만 영혼이 육체에 예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이라고 보았지만,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만물이 주기적인 순환의 반복작용으로 영원히 사멸하지 않는 존재로 이어간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한 시대와 한 무리의 생명체가 가면 또 한 시대와 또 한 무리의 생명체의 시대가 순환하여 등장한다. 그래서 일체만상은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철학은 정신세계를 도야하고, 인간의 행위를 인도하며, 우이가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가르쳐 준다. 어떻게 철학을 수학하지 않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어떻게 그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249쪽)”라고 말하였듯이, 세네카는 인간의 삶에 신보다는 철학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철학은 대중을 사로잡기 위한 계략이나 보이기 위해 고안된 것도 아니라, 말이 아닌 사실에 대한 문제이며, 영혼을 맑게 하고 도야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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