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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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다녀온 이야기를 보건의료인터넷신문 메디칼타임즈에서 [양기화의 ‘이야기가 있는 세계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http://www.medicaltimes.com/Users4/News/NewsList.html?nSection=32). 자료를 찾다가 눈에 띄어 읽게 되었는데, 모두 읽고 나서 횡재를 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1755년 리스본을 강타한 지진에 관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진이 유럽사회에 미친 영향은 물론 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어떻게 재건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덤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에 관한 내용도 잘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리스본을 찾았을 때, 가이드는 당시 지진에서 살아남은 건물이라고는 벨렘탑과 성제로니모 수도원에 불과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진 후의 리스본에 서 있던 모든 건축물이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리스본을 덮친 지진은 요즈음으로 치면 진도 9에 해당하는 엄청난 강도였고, 테호강가에 위치한 리스본에 지진해일까지 덮쳐서 피해가 컸다는 것입니다. 지진 직후에는 당시 리스본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10만명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지나치게 부풀려진 것이라고 보아 2만 5천명정도가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보수적으로 보아도 1만2천에서 1만5천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희생이 컸던 것은 지진이 발생한 시각이 11월 1일 오전 9시 30분으로, 만성절 아침 미사가 막 시작된 뒤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포르투갈 사회는 종교적 관례를 지키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분위기였는데, 의무를 어기는 사람, 곧 미사에 참석하지 않거나 안식일과 축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종교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종교재판소의 공개재판과 처형식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대중적 신앙을 낳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지진이후에 교회는 리스본을 소돔과 고모라로 비유하면서 타락한 도시가 화를 불렀다고 회개하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폐허가 된 리스본을 재건하는 일을 맡은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총리였는데, 그는 앞서 말씀드린 교회의 부축임을 저지하면서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재산권을 지키려는 귀족들과의 충돌도 조정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한 일은 당시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건너온 황금을 보관하던 건물이 지진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데다가 약탈을 막아 온전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리스본은 전 세계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리스본과 연계된 사업을 하던 외국 사람들도 2차 피해를 입은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리스본이 아름다운 도시라고들 말합니다만, 당시에는 ‘리스본에 가보지 않고는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오래된 골목길과 궁전,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성당들이 어우러진 멋진 도시였다고 합니다. 이런 리스본의 모습은 당시에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리스본 재건의 책임을 맡은 카르발류총리는 포르투갈의 수석 도시공학자 마누엘 다 마이어가 맡게 되었는데, 다섯 가지의 계획을 제시하면서 피해가 경미한 벨렘 근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안에 무게를 두었지만, 총리는 피해를 입은 바이샤지구에서 잔해들을 싹 밀어버리고, 잔해를 이용하여 넓은 지반을 다진 후에 ‘새로운 거리를 마음껏 조성하자’는 제안을 채택합니다. 왕실의 운명과 포르투갈의 경제 등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수도 리스본이 간직한 권위와 활기를 되살리는 재건의 기치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지진피해로 좌절한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라 보았다고 합니다. 역시 정치가의 생각은 남다른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좁고 구불구불한 옛 리스본 거리와는 달리 새로운 도시는 지난 번 여행 때 가본 적이 있는 호시우광장과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을 남북축으로 한 격자 모양으로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교회와 귀족들의 발발을 잠재워가면서 리스본 재건공사를 이끈 카르발류 총리의 행정능력은 근대 재난관리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주제왕이 사망하면서 카르발류 역시 실각하여 권력을 남용한 죄목으로 기소되어 처벌을 받았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원한 절대권력은 없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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