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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사 장기려 -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성자, 개정판
손홍규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5월
평점 :
지난해 말 대학동아리 후배들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듣고는 감개무량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가톨릭의대 진료봉사 동아리 성우회가 제14회 MSD청년슈바이처상의 사회활동 의대생부문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료윤리학회와 청년의사신문이 주최하는 <MSD청년슈바이처상>은 ‘한국의 의대생 및 전공의들이 슈바이처 박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치료자 및 연구자로 성장토록 하고자’ 제정된 것입니다. 2년 전에는 작은 아들이 사회활동 의대생부문을 수상하여 같이 기뻐해준 적도 있습니다.
성우회는 필자가 의과대학에 다니던 1977년 창설하여 초대회장을 맡았던 진료봉사 동아리입니다. 가톨릭의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하지만 이화의대, 경희대 학생들이 참여한 바도 있습니다. 진료봉사활동을 하는 동아리는 많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졸업을 하면 동아리와 연계된 활동이 뜸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필자가 졸업을 하고 34년이 된 지금까지도 연회비를 거르지 않고 내고 있는 것처럼 이백 명에 가까운 성우회 졸업선배들은 회비는 물론 진료봉사에 참여하여 후배들의 봉사활동을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성우회가 출범할 당시만 해도 이렇도록 면면히 이어져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수상은 성우회의 맥을 이어온 후배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라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진료봉사활동은 주로 종교를 가진 의과대학생들이나 학생회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주된 활동에 더하여 부차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우회는 진료봉사를 주요 활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선후배 사이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계봉사활동은 졸업한 선배들이 대거 참여하는, 그러니까 선배와 후배가 한솥밥을 먹으면서 마음을 터놓는 기회가 되곤 했습니다. 출범할 당시에는 서대문구 구산동에 있는 시립갱생원에서 매주 일요일 진료를 하다가 구산동, 도화동, 명일동 등으로 옮겨가면서 진료봉사활동을 이어갔고, 지금은 개포동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보장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진료봉사활동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고 있지만, 의료의 사각지대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의료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런 분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마음을 가다듬는 것도 좋은 자세라는 생각을 합니다.
의학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치료하는 학문이기에 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학의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의료계에도 타인을 위한 선행을 베푸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자신이 한 행동을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그와 같은 미담을 발굴해서 사회에 전하는 역할을 하는 분들도 제 몫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리와 비행만을 발굴하여 전하고 있기에 의료계는 세인들의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아픈 사람들을 위한 삶을 실천하신 장기려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손홍규작가의 <청년의사 장기려>를 소개합니다. 평전이나 위인전이 아닌 소설이라서 딱딱한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젊은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기려선생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10년이 되고 있어 그분의 정신이 의료계에 면면히 살아있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기려선생은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에 백인제교수를 사사하여 외과를 공부하였으며,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백인제교수의 뒤를 이어 경성의전에서 교수직을 맡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평양에 있는 연합기독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장기려 선생의 청장년기는 일제 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우리사회가 격동하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남북이 서로 다른 이념으로 충돌을 빚기까지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환자를 우선 생각하는 그의 원칙은 변함이 없었고, 그런 모습은 때로 좌우의 오해를 받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작가 역시 쉽지 않았을 이야기를 잘 정리해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생은 학문적으로도 진료와 학문을 병행하여 1940년 나고야제국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43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간암환자에서 간의 일부를 절제하여 간암을 수술로 치료하는데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역시 간암 환자에서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했습니다. 1947년에는 평양의과대학에서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외과 교수를 맡았지만, 1950년 12월 한국동란의 혼란 중에 처자를 두고 차남 장가용(張家鏞)과 함께 월남하였고,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의료를 통하여 사람에게 봉사하는 삶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우면서 그의 봉사는 꽃을 피웠다고 하겠습니다.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풀면서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진료해주었습니다. 1968년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였으며, 1976년 청십자의료원을 설립하여 환자 진료를 계속하였습니다.
소설 <청년의사 장기려>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그의 삶을 조명하는데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외과의사로 활동한 선생님의 발자취를 뒤쫓는 작업이었기에 그가 처음으로 맡은 단독수술을 성공리에 마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담석에 의한 통증을 한약으로 다스리던 환자가 급성담낭염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응급상황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았던 것입니다. 당시 의료계는 “아무리 한의학이 수천 년의 역사를 지녔다 해도, 결국 이성이 결여된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8쪽)”라고 인식하는 분위기였지만, 장기려선생은 “한의학의 근본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만성적인 질병에는 효과적이지만 이런 급성환자에게는 맥을 못 춘다.(16쪽)”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근래 한의계에서도 의과의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정책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의료기기를 통하여 얻은 정보를 한의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 원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송도고보 시절 조만식선생이 주창한 산업입국론에 마음을 두었던 선생은 여순공과대학에 입학원서를 넣었지만, 낙방을 하고 말았답니다. 이 무렵 선생 집안의 주치의였던 종기의 박의원이 전해준 함경도 영흥의 에메틴 사건은 청년 장기려의 마음에 의학에 관심을 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함경남도 영흥에서 퍼진 폐디스토마 치료에 나선 일본인 공의가 환자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투여해야 할 에메틴을 마구잡이로 주사한 결과 6명이 사망하고 93명이 심한 약물중독 증세를 보였던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감기로 인한 폐렴이라고 발표해서 사건을 묻으려던 총독부 위생과의 의도와는 달리 한성의사회 소속 의사들이 파고드는 바람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선생을 결정적으로 의학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송도고보 동창 김주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의사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상황이었는데, 김주필 역시 같은 상황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주필은 어머니의 죽음을 지킨 장기려선생에게 의사가 되면 ‘가난한 사람들을 모른 척하지 않겠다(79쪽)’는 약조를 제안합니다. 김주필에게 약속한대로 장기려선생은 의사가 되려고 작정하게 되었고, “만약 제가 의사가 된다면 의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라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이 서원은 그로 하여금 경성의전의 외과학교실 교수직을 맡아달라는 백인제교수의 은근한 제안이나, 고등관에 해당하는 대전도립병원 외과과장직을 사양하고 평양의 기독연합병원 외과를 선택하게 만듭니다. 이런 장기려선생의 선택을 두고 백인제교수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열 명의 제자를 키웠으면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바치겠다는 녀석도 한 놈쯤은 있어야 정상이야. 그 녀석이 바로 자네라서 더욱 좋아. (…)좋은 자리를 내팽개치고 좋아하는 녀석도 아마 자네가 유일할 걸세.(161-2쪽)”
당시 평양은 배급제가 시행되고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뛰고 있었습니다. 일부 일본군과 관청에 줄을 대 호의호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도시 곳곳에 빈민굴이 넘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은 병원을 쉬는 날이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칠성문 밖 빈민촌과 용산면의 빈민촌을 찾아 무의촌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도성 안 사람들과는 달리 줏대와 자존심을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 내내 버린 자식 취급을 받던 평양사람들은 손으로 대동강물을 거슬러 떠먹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강물을 거슬러 떠먹는 사람들’이라고 일컬었던 것은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자부심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평양은 많은 것들이 부족해지면서 죽음이 일상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차원을 넘어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세상이 되어버렸던 것인데, “대동강과 보통강, 혹은 마을을 관통하는 개천에서마자 가난을 이유로 버리진 젖먹이들이 발견되었고, 늙은 부모의 봉양을 포기하고 자식들이 도망간 초라한 초가집은 곧바로 무덤이 되었다. 평양은 점점 묘지가 되어가고 있었다.(212쪽)”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간질환을 전문으로 하던 선생에게 황달이 찾아왔습니다. 신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평양을 떠나 묘향산에 머물던 중에 해방을 맞은 선생은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평양으로 돌아왔고, 소련군이 진주한 가운데 현준혁이 주도하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위생과장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평양은 이내 혼돈에 빠지고 말았는데, 추수한 곡식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해방 전에는 50퍼센트 많게는 90퍼센트까지 가져가던 지주에게 30퍼센트만 주도록 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지주들로 구성된 기독교인들과 대부분 소작농과 노동자로 구성된 공산당원들이 충돌을 빚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치와 담을 쌓고 살아온 장기려선생이지만 그의 명성이 필요했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선생에게 제1인민병원의 원장을 맡겼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도였던 선생이 병원장을 맡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당국의 속셈대로 병원장직을 물러났는데, 이번에는 김일성대학에서 외과학 강좌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생이 평양에서 진료를 시작할 때부터 교류하던 함석헌선생께서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월남하기 직전에 만난 것이 그 무렵입니다. 평양이 돌아가는 사정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은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떤 사상이나 주의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마세요. 인민들이 장 선생을 원하고 있는데, (…) 사람들의 가슴속이 바로 장선생의 고향이요 머물 곳입니다.(303쪽)”라고 한 함석헌선생의 조언이 의미하는 것처럼 자신을 찾는 환자들도 한 몫을 했을 것입니다.
선생의 대범함은 북한에서 이미 권력의 입지를 다진 김일성의 충수돌기염을 수술하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태연하게 수술을 마친 선생에게 수술하는 동안 손이 떨려 죽는 줄 알았다고 고백한 김일성의 주치의에게 “그건 아마도 선생님께서 환자를 환자로 보지 않고 권력자로 보셨기 때문일 겁니다.(318쪽)”라고 덤덤하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환자중심의 생각을 가진 선생이었기에 6.25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는 국군야전병원과 유엔 민사처병원에서 진료를 하게 되었고, 결국은 평양에서 철수하는 국군을 따라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화나 특무대의 감시를 받던 이야기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결국 손홍규작가는 장기려선생의 삶 가운데 어려운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제가 [북소리]에서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명의식이 사라져가고 있는 이 시대의 의료인들이 그의 삶과 정신을 제대로 읽을 필요가 있겠다싶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