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미술 Art & Ideas 11
조너선 블룸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한길아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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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왕국이 지배한 지역들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유적들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한 책읽기인 셈입니다. 조너설 블룸과 세일라 블레어 부부가 같이 쓴 <이슬람 미술>을 동네 도서실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매우 반가웠습니다. 서점가에서는 이미 절판된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세력이 왕성하였을 때는 아라비아 반도와 이집트 남쪽까지,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북쪽 해안을 따라 유럽의 이베리아반도까지, 동쪽으로는 인도의 중부 이남에서 중앙아시아 까지, 북쪽으로는 발칸반도를 넘어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육박하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622년 무함마드에 의하여 창건된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왕국은 불과 10년 사이에 아라비아 전역을 정복하고 빠르게 확산되어 갔습니다. 그와 같은 동력은 정복한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이슬람화하였던 것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슬람 미술에는 다양한 문화가 녹아들어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이슬람이 영향을 미친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미술작품들에서 지역의 차이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공통된 특징을 찾아보려 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먼저 이슬람의 역사를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시기는 이슬람교가 태동하여 이슬람 사회가 등장하기 시작한 900년대까지로, 이 시기에는 아라비아, 시리아, 이라크까지의 지역을 한 명의 칼리프가 지배하던 시기입니다. 두 번째 시기는 칼리프 시대가 무너진 10세기부터 뚜렷한 예술적 전통을 갖춘 지방호족들이 할거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강력한 힘을 지닌 황제가 등장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제국을 이루던 시기로, 지중해를 둘러싼 오스만제국, 이란의 사파위 왕조, 인도의 무굴제국 등입니다.

 

이슬람교는 신의 형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화부문에서는 괄목할만한 작품들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건축, 초기 문자, 직조술, 장식미술, 제책술 등을 중심으로 이슬람교가 영향을 미친 지역에서 발견되는 많은 작품들을 비교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책에서 읽어 알고 있는 내용과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모스크에 서 있는 미나렛이 신도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려주기 위하여 세웠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사실은 높이 세운 미나렛은 멀리서도 잘 볼 수 있기 때문에 모스크의 위치를 알리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또한 베일이 이슬람여성들에게 의무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 북아프리카의 투아레그족의 경우는 남성이 베일을 쓴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점입니다. 사실 메리노 양이 스페인에서 개발에 성공한 품종인 줄 알았던 것 역시 8세기경 이슬람 땅의 동부에서 알려진 것이 스페인으로 가서 품종을 개량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슬람 미술에서 건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왕궁은 물론 이슬람 땅 각지에 흩어져 있는 소소한 주택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는 이미 무너진 것들까지도 인용하여 구조와 장식등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건축물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라서 가볼 기회가 될 지는 미지수입니다. 직물과 서책의 비중이 큰 것은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오스만 제국에서 발달한 세밀화를 포함한 미술작품들은 별로 다루어지지 않아서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맺음말에서 17세기 말 이란의 카자르왕조에 전해진 유화기술이 페르시아 양식과 결합한 독특한 양식의 회화로 발전했다고 설명하면서 국왕의 초상화를 비롯한 몇 개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책도 읽어서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처럼 이 책에서도 처음 듣게 되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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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처럼 살라 - 행동하는 자유인, 소로우가 월든 숲에서 찾아낸 삶의 본질 다른 길, 자기만의 삶 2
박홍순 지음 / 한빛비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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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일도 일상이 되면 심드렁해지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지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빨리빨리’문화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는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 반작용으로 ‘느림의 미학’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박홍순 작가의 <소로우처럼 살라>를 받아들었을 때의 첫 느낌은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하려는가 보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인적이 드문 숲속 오두막에서 자급자족하며 산책을 하거나 사색에 잠긴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라고 서문의 첫머리는 무언가 더 할 이야기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특히 “더 중요한 것은 숲 속에서의 생활 자체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한 이유다.”라는 대목에 가면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소로우가 제시한 삶이 현대의 생태주의와 환경운동이 태동하는 모태가 되었다고 보았고, 그가 선보였던 시민 불복종이라는 형태의 저항을 민주주의 선거절차가 보장된 현대사회에서 부정의한 법이나 정책에 대한 저항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북소리]에서 책을 소개하면서 저자의 학문적 배경을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로우처럼 살라>의 저자 박홍순의 경우는 관련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출판사의 저자소개에서도 ‘앞만 보고 달리느라 반성의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인문학 보급에 힘쓰고 있다.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글을 써왔다.’라고 두루뭉술하기만 합니다.

 

지금까지 다수의 저작을 통하여 미술, 철학, 종교, 역사 등 다양한 분야와 인문학의 만남을 시도해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어려워하는 분야이다 보니 그의 책을 읽게 된 것은 <소로우처럼 살라>가 처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는 인문학작가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그의 학문적 배경은 역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독서와 집필이 곧 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책을 통하여 지식을 얻고, 그렇게 얻은 지식들을 엮어 인문학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각설하고 저자는 한국 사회가 소로우에 관심을 가지고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가 다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이른 바 근대화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왔다. 우리는 서구 문명이 제공한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의 틀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꿰어 맞추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즉, 압축성장이 가져온 부작용을 해소하는데 있어 소로우의 사상이 가장 적절할 수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연에 대한 태도, 자유로운 삶의 전망, 불복종을 통한 저항이라는 세 가지 방향에서 소로우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재조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적한 한국적 성장의 폐해가 낳은 문제처럼 저자 역시 소로우의 사상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고루 다루면서 결론으로 향하지 않는, 즉 나름대로 정한 목표에 부합되는 내용들을 모아 꿰어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보니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먼저 저자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읽고, 두 번째에는 비판적으로 읽으며, 다음에는 나름대로의 주관에 따라서 재해석하면서 읽는 방식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월든>, <시민의 불복종>, <강>, <야생사과> 등 주요 저작의 핵심을 통해 소로우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접근하고자 하였으며, 소로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근현대 사상가의 고민을 함께 비교했다고 했습니다. 특히 소로우의 삶을 따라간 스콧 니어링의 삶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 주제 ‘자연과 함께 하는 삶’부터 시작해볼까요? 이 주제 안에서 저자는 자연에서 인간다운 삶을 찾고, 문명 밖에서 문명을 성찰함으로써 생태적 사고와 삶의 지평을 열게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1845년 3월말 경, 자연에서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하여 소로우는 도끼 한 자루를 (빌어서) 들고 숲으로 향했고, 월든 호숫가 언덕배기에 집을 한 채 지었다고 했습니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서 입주를 한 것은 7월 4일입니다. 집을 짓는 사이에 주변에 텃밭을 갈아서 씨를 뿌렸습니다. 다만 경작을 했다기보다는 땅을 갈아 씨를 뿌린 것이 전부였고 김매기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모든 것은 자연이 키워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해 농사를 마무리할 즈음에 정산해보았더니 일용할 식량이 남았다고 적었습니다.

 

소로우에게 있어 자연에서의 자급자족하는 생활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삶의 여유에 맞추어져 있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삶, 실감을 느끼기 위하여 보통의 한국인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오로지 일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퇴직을 하면 손에 남는 것은 퇴직금 몇 푼과 집 한 채가 전부라는 것입니다. 사실저자께서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보신 적은 있는가 싶습니다만, 제가 어렸을 적 경험한 바로, 시골에서는 새벽같이 일어나 논밭으로 일을 나가서 해가 져서 어두운 다음에야 집에 돌아와 저녁을 지어 먹습니다. 종일 논과 밭에서 고되게 일을 해야 한 해를 버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로우처럼 유유자적하면서 책을 읽고 사유하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네 농촌 사정은 소로우가 살던 시절의 미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집니다. 씨만 뿌리고 내버려두면 과연 가을에 손에 들어오는 수확물이 얼마나 될까요? 모르긴 해도 한 끼 밥을 지을 식량도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남산골샌님들은 냉수만 마시고도 글을 읽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내려옵니다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습니다. 정신적 여유를 찾기 위해서는 적어도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월든>에서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뉴잉글랜드 지방에 처음 도착한 이민자들은 집을 짓는데 시간을 들이지 않고 다음 추수까지 식량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굴을 파서 임시로 거처할 움막을 짓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하나 짓고, 봄에는 널려 있는 공터를 갈아 씨를 뿌리고는 유유자적하는 삶을 2년여 보낸 끝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 숲으로 들어간 이유와 그 곳에서 지낸 2년여의 삶에만 주목할 뿐, 왜 그가 숲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였는 지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사실 월든 숲으로 들어간 것은 일종의 실험이었다고 소로우는 전제한 바 있습니다. 즉, 인류의 발명과 근면성이 가져온 편의는 분명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인류는 여전히 그 옛날처럼 소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 숲 생활의 첫 번째 해는 끝이 났다. 그다음 해도 첫해와 큰 차이는 없었다. 1847년 9월 6일 나는 드디어 월든을 떠났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54쪽, 이레, 2010).”라고 소로우는 월든에서의 생활을 정리합니다. 즉, 실험이 끝났기 때문에 떠났던 것입니다.

 

맺음말에 있는 다음 구절을 보면 그의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나는 숲에 들어갈 때나 마찬가지로 어떤 중요한 이유 때문에 숲을 떠났다. 내게는 살아야 할 또 다른 몇 개의 인생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꼈으며, 그리하여 숲 생활에는 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쉽게 어떤 특정한 길을 밟게 되고 스스로를 위하여 다져진 길을 만들게 되는지 놀라운 일이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61-462쪽, 이레, 2010; http://blog.joins.com/yang412/12281440)” 소로우의 선택이 개인적으로는 생태주의 삶을 실험하는 장소가 아니라 과학기술에 기초한 생활방식이 인간에게 강제하는 노예적 삶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녔다고 하는 저자의 설명은 지나쳐 보입니다. 소로우의 삶을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소로우는 어디에서도 문명의 발전을 거부하고 야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바 없습니다만, 저자는 문명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의료기술이야말로 문명이 인간에게 제공한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아직까지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는 인플루엔자 치료를 예로 들어 의료기술의 발전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감기는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고 특정 바이러스를 죽이는 약이 개발돼야 치료효과가 있다. 세상에 모든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약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지만, 에이즈 바이러스를 비롯하여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치료제가 개발되어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있는 단계에 와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셨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두 번째 주제인 ‘자유로운 삶’ 역시 ‘나는 구속받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는 <월든>의 한 대목에서 이끌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로운 삶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점보다는 누군가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비정규직문제에서도 동일한 시간노동에도 임금이 싸고 각종 보험도 적용되지 않는다고 적었지만, 원칙적으로는 비정규직에게도 4대 보험을 보장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근무시간의 단순비교보다는 근무강도나 근무의 내용도 논의되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유시장이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주장에서는 세계가 자유무역, 자유시장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부사회의 구성원을 위하여 보호무역, 통제된 시장을 운용하는 것으로 과연 지속가능한 성장은커녕 현상유지조차 가능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인 ‘저항, 그리고 대안을 찾는 삶’은 소로우의 ‘불복종을 통한 저항’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사회의 규범에 불복종하는 행위는 소로우보다 먼저 행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치가 오노레) 미라보(1749~1791)는 ‘사회의 가장 신성한 규범에 공공연히 대적하는 일에 가담하려면 어느 정도의 결의가 필요한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노상에서 강도짓을 했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60쪽, 이레, 2010)”라고 소로우는 인용했습니다. 그 신성한 규범이 정의로운 것이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으나 소로우는 미국 정부가 텍사스의 병합을 놓고 멕시코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을 탄압하고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여 세금의 일부를 납부하지 않았고, 정부는 이러한 소로우를 감옥에 가둔 바 있습니다. 소로우는 이 사건을 계기로 불복종을 통한 저항을 내세우게 됩니다.

 

저자는 불복종이 정당화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면서 시민 불복종이 법을 경시하는 풍조를 가져올 것이라는 비판을 일축합니다. 문제가 있는 정책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언론을 통하여, 혹은 관련법의 개정을 통하여, 나아가서는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복종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비판론자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나치의 지도부는 그렇다고 쳐도 독일 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대규모 학살의 공범 혹은 방관자가 되었다고 설명한 프리모 레비를 인용합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고발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라고 했는데(191쪽), 이런 설명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라는 이유로 괴로워하던 레비가 자살로 생을 마칠 무렵에 나온 것으로, 독일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는 것입니다(토니 주트 지음, 재평가 89-110쪽, 열린책들,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741266)

 

다수가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고 본다면, 마찬가지로 시민불복종을 주도하는 사람 역시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로우 역시 “사회에 대해 무조건 저항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한 인간의 의무는 아니다. 자기 내부의 법칙을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취하게 되는 태도를, 그것이 어떠한 것이건 간에 견지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60쪽, 이레, 2010).”라고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민불복종 또한 개인들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로우의 자연 안에서의 여유로운 삶은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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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원주민의 전쟁과 평화 - 유까딴 1847-1902 중남미지역원 학술총서 14
정혜주 지음 / 이담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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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멕시코 칸쿤으로 가는 여행상품을 안내하는 광고가 많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칸쿤은 유카탄반도 북동쪽 끝에 있는 작은 섬인데 1970년까지는 100여 명의 마야인들이 낚시와 채집을 하며 지내는 조그만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광고를 볼 무렵 관광지로 개발이 되었을 때였던 모양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가보았더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마야원주민들의 모습이 지금보다는 원형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중남미지역원에서 연구하시는 정혜주교수님의 <마야 원주민의 전쟁과 평화>는 유카탄반도의 마야원주민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된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는 끄리오요들에 의한 착취와 탄압에 맞선 투쟁과정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서로 교류하던 아시아-유럽-아프리카에서 멀리 떨어져 독립적으로 살아온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들로서는 1492년 컬럼버스의 도착은 재앙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마야 사람들에게는 1502년 유카탄 해안에 도착한 스페인사람들을 발견한 것은 재앙의 전주곡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1511년부터 황금을 찾아 유카탄반도 탐사에 나섰던 스페인 사람들은 마야원주민의 호전적 대응에 속수무책으로 패하였지만 그들의 신전을 장식한 금붙이는 사지라도 뛰어들도록 만드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마야 원주민들이 제국을 이루고 살았다고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 공부한 바에 의하면 마야사람들은 일종의 도시국가처럼 지역에 웅거하여 생활하고 있었고, 부족들이 인정하는 신의 대리자가 세워져 있지만 중앙과의 연대가 긴밀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러한 마야 부족의 특성은 스페인 사람들이 쉽게 파고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즉 저항하는 마야원주민과의 전투를 통하여 학살하는 한편으로는 마야원주민의 지도층을 회유하여 다른 부족을 공격하는데 힘을 보태도록 하는, 즉 부족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지배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배경에는 초기에 마야사회에 정착한 스페인 사람들을 통하여 마야 사람들의 신앙을 이용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300년이 지난 뒤에 멕시코 중앙고원에 위치했던 누에바에스파냐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결실을 맺어 멕시코가 독립을 쟁취하면서 유카탄반도의 마야원주민들 역시 독립을 얻었지만, 원주민들을 지배하던 라디노라고 부르는 백인 끄리오요들의 착취는 변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1847년부터 1854년까지 7년에 걸쳐 끄리오요들과 마야원주민 그리고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조 사이에 치열한 유혈충돌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패퇴한 마야원주민들은 반도의 북동쪽 밀림지역으로 밀려나 숨어살면서 47년에 걸쳐 소규모의 전투를 치르면서 저항하는 삶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저자는 54년에 걸친 마야원주민들의 치열한 독립전쟁의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하고 있습니다.

 

제1장에서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마야 사회의 형편을 요약합니다. 독립적으로 생활하던 마야원주민들이 순식간에 노예신분으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2장에서는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얻은 직후의 사회상황과 결국은 충돌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유카탄반도에서의 사회적 분위기를 설명합니다. 제3장부터는 제5장까지는 원주민과 라디노가 충돌하여 진퇴를 거듭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마야원주민들의 일부는 라니노 편에 속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아마도 원주민을 노예처럼 부렸던 라니노측이 원주민에게 조건을 제시하고 동원하였것 같습니다.

 

저자가 설명을 하고는 있지만 이해되지 않은 점은 원주민들이 승리를 쟁취할 수도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던 1848년 우기에 마야원주민 전사들이 대부분 옥수수를 심어야 한다면서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마야 사람들에게 옥수수 재배는 일종의 하늘의 뜻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적과 싸우는 마당에 옥수수 파종을 이유로 전장을 떠날 수도 있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 점입니다. “그들은 복수보다는 자신들의 풍습과 전통적인 의례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205쪽)”라고 합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인지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순수한 쪽으로 이해되는 마야사람들의 속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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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정호승 시집 창비시선 36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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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님의 시집 <여행>을 읽었습니다. 이즈음 여행에 관심이 많다보니 제목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여행에서 느끼는 감성을 담은 시들이 아닐까 싶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표제시 ‘여행’을 보면,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떠나서 돌아오지 마라/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바람에 흩날릴 때까지/돌아오지 마라/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라고 되어 있어, 살아온 혹은 살아가는 나날이 여행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의 여행은 아주 다양하고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입니다. ‘여행가방’에게는 “너는 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니 /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려고 그러니 / 이곳은 더 이상 머물 곳이 아니야”라고 따지듯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무슨 미련이 남아 밍그적 거리느냐고 힐책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진 ‘종착역’에서도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 종착역이 출발역이 되기를 평생 기다린다”라고 역시 빈정거립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는 종착역. “바다가 아름답듯이 / 기차도 종착역에 도착해야 아름답다 / 사람도 종착역에 내려야 아름답다”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미루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맞이할 것을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김영희님은 ‘적멸에서 빈손’이라는 제목으로 된 해설에서 마더 테레사가 하셨다는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는 구절을 인용한 시 ‘토요일’을 두고, 인생을 여행에 빗대는 것이 인생을 사유하는 익숙한 방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멀리 철학적으로 갈 것도 없이, ‘인생은 나그네길 /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중가요 역시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특히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시가 많아 보이는 것은 시인께서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선친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을 한 그릇 자시고 싶었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북촌까지 가서 봄눈으로 버무린 짜장면을 먹어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선친께 짜장면을 대접하지는 못했던 모양으로 마음에 맺혀있었기 때문에 시로 풀어낸 것 아닐까요?

 

마지막 시 ‘나의 관객들에게’를 읽으면서 혹시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세요 / 저의 일인극은 끝났습니다 / 극장 밖엔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 눈물도 웃음도 다 끝이 나 / 이별 외엔 더 이상 보여드릴 게 없습니다 (…) 이제 곧 사막의 별로 여행을 떠나면 /저는 당신의 관객입니다” 저의 지나친 오지랖일까요?

 

누군가는 시집 <여행>에 담긴 시를 읽고 마음이 따듯해진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삶의 끝자락에 서면 삶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아등바등거리는 사람이 많은데, 시인은 도포자락을 툭 쳐내듯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가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대부분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뜨거운 갈채에 감사합니다’라고 한 시인처럼 저의 삶에 힘을 보태주신 많은 분들에게 마음을 담은 감사의 말씀을 남길 기회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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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 타산지석 4
이희철 지음 / 리수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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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다녀온 터키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만, 터키라는 나라가 들여다볼수록 깊이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터키에 관한 책들을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도 터키에 관한 자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만, 그저 그만인 여행기로부터 터키의 역사를 아주 소상하게 정리한 책에 이르기까지 수준의 차이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딱 여행사 상품으로 터키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로 터키의 역사, 유물, 문화 등을 요약하고 있는 자료를 만나기는 쉽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블로그 벗으로부터 추천받은 책이 바로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이라는 부제가 붙은 <터키>입니다.

 

저자 이희철님은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있는 국립 가지(Gazi) 대학교 사회과학대학원 국제관계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공직에 들어와 외교부에서 근무하면서 터키에 관한 연구를 이어오고 있으며, 다양한 연구논문과 저술을 발표해오셨다고 합니다. 특히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을 맞아 웹 커뮤니티 ‘터키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개설하여 우호적인 한·터 관계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2002년 월드컵경기가 열리는 동안 터키팀에 대한 조직적인 응원이 이루어졌던 것이 이런 노력이 꽃을 피운 결과였던 모양입니다.

 

저자는 <터키>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하였습니다. 1부 아나톨리아 이야기에서는 아나톨리아반도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유적들 가운데 한국사람들이 흔히 방문하게 되는 유적지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 배경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를 사진을 곁들여 잘 요약하였습니다. 2부 터키 이야기에서는 터키의 본질에 대하여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터키인의 뿌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터키의 정체성, 그리고 터키가 이슬람을 국교에서 배제하게 된 배경, 그리고 터키사람들에 관한 다양한 주제들을 이야기합니다.

 

첫쪽을 넘기면 나타나는 터키반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을 표시해둔 것을 보면 ‘우와~~~! 참 대단하다’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터키에는 고대 히타이트 유적에서 시작해서 성서에 나오는 사건과 연관된 유적도 있고, 고대 그리스문명은 물론 초기 기독교 문명, 비잔틴 문명 그리고 근세의 이슬람 문명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유적들이 이 땅에 흩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 유적을 구경하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이 웬만하겠습니까? 이런 터키의 일부라도 볼 수 있었던 것은 참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아쉬운 점은 터키의 문화, 터키 사람들의 특성보다 터키의 유적에 할애한 비중이 작아서 빠진 유적지가 있는 점이라고 할까요? 물론 제가 이번에 찾아간 곳은 대부분 포함되고 있어 그곳들을 다시 새겨보는데는 큰 아쉬움은 없습니다만, 혹시 자유여행을 하시면서 다른 유적에 관한 정보를 모으시는 분이 있다는 아쉬워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사람들의 일상에 관한 풍부한 이야기들은 터키사람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만 터키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 예를 들면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비롯하여 쿠르드족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의 갈등에 관해서도 정리가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세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중요한 사실을 빠트리지 않았을 뿐더러, 글의 흐름이 참 자연스러워 쉽게 읽힌다는 점이 아주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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