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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정호승 시집 ㅣ 창비시선 36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평점 :
정호승님의 시집 <여행>을 읽었습니다. 이즈음 여행에 관심이 많다보니 제목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여행에서 느끼는 감성을 담은 시들이 아닐까 싶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표제시 ‘여행’을 보면,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떠나서 돌아오지 마라/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바람에 흩날릴 때까지/돌아오지 마라/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라고 되어 있어, 살아온 혹은 살아가는 나날이 여행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의 여행은 아주 다양하고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입니다. ‘여행가방’에게는 “너는 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니 /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려고 그러니 / 이곳은 더 이상 머물 곳이 아니야”라고 따지듯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무슨 미련이 남아 밍그적 거리느냐고 힐책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진 ‘종착역’에서도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 종착역이 출발역이 되기를 평생 기다린다”라고 역시 빈정거립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는 종착역. “바다가 아름답듯이 / 기차도 종착역에 도착해야 아름답다 / 사람도 종착역에 내려야 아름답다”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미루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맞이할 것을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김영희님은 ‘적멸에서 빈손’이라는 제목으로 된 해설에서 마더 테레사가 하셨다는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는 구절을 인용한 시 ‘토요일’을 두고, 인생을 여행에 빗대는 것이 인생을 사유하는 익숙한 방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멀리 철학적으로 갈 것도 없이, ‘인생은 나그네길 /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중가요 역시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특히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시가 많아 보이는 것은 시인께서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선친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을 한 그릇 자시고 싶었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북촌까지 가서 봄눈으로 버무린 짜장면을 먹어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선친께 짜장면을 대접하지는 못했던 모양으로 마음에 맺혀있었기 때문에 시로 풀어낸 것 아닐까요?
마지막 시 ‘나의 관객들에게’를 읽으면서 혹시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세요 / 저의 일인극은 끝났습니다 / 극장 밖엔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 눈물도 웃음도 다 끝이 나 / 이별 외엔 더 이상 보여드릴 게 없습니다 (…) 이제 곧 사막의 별로 여행을 떠나면 /저는 당신의 관객입니다” 저의 지나친 오지랖일까요?
누군가는 시집 <여행>에 담긴 시를 읽고 마음이 따듯해진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삶의 끝자락에 서면 삶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아등바등거리는 사람이 많은데, 시인은 도포자락을 툭 쳐내듯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가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대부분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뜨거운 갈채에 감사합니다’라고 한 시인처럼 저의 삶에 힘을 보태주신 많은 분들에게 마음을 담은 감사의 말씀을 남길 기회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